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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서((西村) 2021-11-08 23:39:12 노천명(盧天命 1911~1957) 사슴(1938년 발표작)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시는 시인 백석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은 절친한 사이였는데 백석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들은 백석을 ‘사슴’, ‘사슴 군’이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때 나왔던 백석의 첫 시집도 ‘사슴’이었다. 절친했던 이 세 여인들은 모두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이름을 남겼으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하겠다. 푸른 오월(1945..
역사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서(西村) 2021-11-10 15:32:47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千鏡子) 종로구 누하동 176번지(도로명 주소: 필운대로 31-3)는 천경자 화백이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살던 한옥 집터이다. 바로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종로구 누하동 178번지-필운대로 31-7)으로 들어가는 같은 골목에 이웃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천경자 화백이 살던 집터에는 아무런 표지판 하나 없이 집이 헐리고 근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다만 2015년 4월 15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71호로 지정된 청전(靑田)의 집 마당에 있는 장독대 벽에 천경자 화백이 그렸다는 벽화가 남아 있어 이웃에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천경자(千鏡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고, 2015년 8월 6일 미국 뉴욕에..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 (西村) 2021-08-28 23:41:55 白沙 李恒福의 弼雲臺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종로구 필운대로 1길 34에 있는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다. 2000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백사 이항복은 고려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호는 백사(白沙)와 필운(弼雲)이다. 우참찬(정2품)까지 오른 이몽량(李夢亮)과 현감 최윤(崔崙, 본관은 전주)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역사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서(西村) 2021-09-19 21:47:10 보안여관에서 글을 썼던 문인들 경복궁 영추문 길 건너 맞은편 창의궁터와 인접해 있는 곳에 [통의동 보안여관]이 있다. 여관 이름이 ‘보안’이라서 군사독제 시절의 유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1930년대에 지어진 적산가옥이고 ‘보안’이라는 이름도 그때부터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 여관에 장기 투숙하며 글을 썼다고 하며, 특히 1936년 서정주(1915~2000), 김동리(1913~1995), 김달진(1907~1989) 등, '생명파'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창간한 [詩人部落]의 주역들이 대표적으로 이 여관에 투숙하면서 글을 썼다. 그 후 수많은 젊은 문학 지망생들이 다투어 이 여관에 장기 투숙하면서 글을 썼기 때문에 역사와 문화예술의 삶이 녹아든..
名詩 鑑賞 2022-01-25 16:03:12 年得家書(년득가서) 새해 집안 편지 받고서 歲去春來漫不知(세거춘래만부지) 해가 가고 봄이 와도 봄인 줄 모르다가 鳥聲日變此堪疑(조성일변차감의) 새소리 날로 달라 봄인가 싶네. 鄕愁値雨如藤蔓(향수치우여등만) 비 오면 고향생각 등 넝쿨 얽히고 瘦骨經寒似竹枝(수골경만사죽지) 겨울 지낸 병 진 이 몸 대나무처럼 여위었네. 厭與世看開戶晩(염여세간개호만) 세상일 보기 싫어 늦게야 방문 열고 知無客到捲衾遲(지무객도권금지) 오는 손 없는 줄 알아 이불 더디 갠다오. 兒曹也識鎖閒法(아조야식쇄한법) 무료함 없애는 법 아이들이 알았는지 鈔取醫書付一鴟(초취의서부일치) 의서에 따라 술 담가 한 단지 부쳐왔네. 千里傳書一小奴(천리전서일소노) 천리 길에 하인 아이 가져온 편지 받고 短檠茅店獨長吁..
智異山을 사랑한 南冥 曺植의 詩 鑑賞 2022-01-28 12:30:19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2-1572)의 시는 남명의 인품만큼이나 독특하다. 한문학(漢文學)의 시대에 문인 학자라면 반드시 전대의 시인에게서 먼저 시의 전범을 배우는 것이 상식이었고, 또 제대로 배운 전범의 틀 위에 세워진 작품이 아니면 오히려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명의 시에는 실로 남명의 것이 아닌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느 문인은 고사하고 도학자의 문집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고인(古人)의 시에 차운(次韻)한 작품조차 주자(朱子)의 시에 차운한 ‘동지용주자운(冬至用朱子韻)’ 하나 밖에는 없다. ‘추상열일(秋霜烈日)’, ‘태산벽립(泰山壁立)’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기상만큼 그의 시도 일체의 모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오늘..
북촌에서 만난 사람들(첫 번째) 2022-03-27 12:33:03 상촌(上村) 이야기 매천 황현이 그의 저서 에서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기술했듯이 조선 후기 때부터 청계천과 종로 위쪽에 있는 마을을 ‘북촌’, ‘우대’[上垈] 혹은 ‘상촌’(上村), 그 남쪽을 ‘남촌’ 혹은 ‘하촌(下村)’이라고 했다. 상촌(上村)은 다시 동쪽의 경복궁과 서쪽의 인왕산 사이와 남쪽의 사직로와 북쪽의 창의문과 북악산 아래에 있는 통의동, 청운효자동, 통인동, 옥인동, 필운동 등의 마을을 ‘서촌(西村)’으로 불렸으나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으로 부르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세종마을(世宗―)로 불리고 있다. 일제..
북촌에서 만난 사람들(두 번째) 2022-03-28 14:52:06 조선어학회 터와 윤보선 가옥 1. 조선어학회 터(朝鮮語學會址) 헌법재판소를 나와 북쪽 담장을 따라 좌측으로 난 골목길을 몇 발짝 걷다 보면 곧바로 '율곡로'로 이어진다. 율곡로 3길 4(안국동 175-33)에 조선어학회 터의 표지석이 있고, 바로 건너편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선생이 살던 '윤보선 가옥'은 헌법재판소 뒤뜰 북쪽 담장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한글 전용, 가로 쓰기, 통일된 표기법을 주장했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상주, 자는 경재, 호는 학신 또는 한힌샘이며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국문을 연구했다. 1894년 배재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