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0 15:32:47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千鏡子)
종로구 누하동 176번지(도로명 주소: 필운대로 31-3)는 천경자 화백이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살던 한옥 집터이다. 바로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종로구 누하동 178번지-필운대로 31-7)으로 들어가는 같은 골목에 이웃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천경자 화백이 살던 집터에는 아무런 표지판 하나 없이 집이 헐리고 근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다만 2015년 4월 15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171호로 지정된 청전(靑田)의 집 마당에 있는 장독대 벽에 천경자 화백이 그렸다는 벽화가 남아 있어 이웃에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천경자(千鏡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고, 2015년 8월 6일 미국 뉴욕에서 사망한 대한민국의 동양화가이자 수필가이며, 대학교수이다. 개명 전 이름이 천옥자이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도쿄여자미술학교(현 여자미술대학)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수석 입상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어머니가 외조부모의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1952 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 동경 이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1955 년에는 대한미술협회전 대동령상, 1979 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 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 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 년의 ‘여인 소묘’ 등 단행본 15권과 수필집 10권, 신문 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도 호흡했다. 2006년에 새로 편집돼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놨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나온 것이다.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을 때 법원이 진품 판정을 내리자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절대 없다". 며 절필 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천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 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일시 귀국하여 93점의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으나 2003년 뇌출혈로 병상에 누운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지내다 2015년 8월 6일 사망하였다.
그녀와 가까웠던 소설가 박경리는 천경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명동 시절이나
이십 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 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 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 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