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8 23:39:12
노천명(盧天命 1911~1957)
사슴(1938년 발표작)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시는 시인 백석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은 절친한 사이였는데 백석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들은 백석을 ‘사슴’, ‘사슴 군’이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때 나왔던 백석의 첫 시집도 ‘사슴’이었다. 절친했던 이 세 여인들은 모두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이름을 남겼으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하겠다.
푸른 오월(1945년 발표작)
청자(靑磁) 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鄕愁)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데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노천명의 시 ‘사슴’과 ‘푸른 오월’ 이 두 시에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鄕愁)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와 같이 같은 시어를 중복되어 사용하였다. 이는 그녀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자란 후, 진명학교를 졸업하던 1930년에는 어머니마저 잃는 슬픔속에서 거친 세상에 홀로 부딪쳐야 했으니 슬픔과 짙은 향수를 가슴에 안고 살아왔기 때문인가 한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1943년 발표작)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 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 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시인 노천명의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다.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고,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京城)으로 이사, 진명(進明)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 여학교를 졸업했다. 그 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신동아(新東亞)』 1932년 6월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고, 잡지 『신세기(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고, 그 해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決戰文化大講演會)에 참가하여 시를 낭독했다. 그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았고, 후방인 '총후(銃後'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시작 -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매일신보』 1941.12.12)를 기고했다.
1942년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기원(祈願)」(『조관(朝光)』 1942.2),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한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2.19)·「노래하자 이 날을」(『춘추(春秋)』 1942.3) 등의 시를 썼고,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라는 주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와 「출정하는 동생에게」(『매일신보』 1943.11.10), 진혼가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에 발표한 「병정」(『조광(朝光)』 1944.5) 및 「천인침(千人針)」(『춘추(春秋)』(1944.10)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944년 12월에는 '가미카제[神風]특공대'로 나가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모·미화하는 「신익(神翼) - 마쓰이오장[松井伍長] 영전(靈前)에」(『매일신보』 1944.12.6)와 「군신송(軍神頌)」(『매일신보』(사진판) 1942.12 ) 등의 시들을 썼다.
이외에도 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강조한 「싸움하는 여성」(『조광(朝光)』 1944.10)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했다.
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서 1946년까지, 이후 부녀신문사의 편집차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수필집 『산딸기』를 출간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및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참가와 같은 부역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9·28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거, 20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고 가톨릭에 입교, 영세를 받았다.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었다」를 발표했고, 1953년 「영어(囹圄)에서」와 같이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옥중시들을 담은 세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발간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했고, 수필집 『여성서간문독분(女性書簡文讀本)』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에는 미발표 유작시를 포함한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가, 1960년에는 170여 편의 시를 모은 『노천명 전집 : 시편』이 간행되었고,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노천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29∼26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그녀는 독신으로 살다가 4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돌보는 사람 없이 외롭게 죽었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주었다고 한다. 그녀 사후, 그녀에게는 시인으로의 아름다운 명성보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 ‘공산치하에서의 협력자’ ‘유부남이거나 애인이 있는 남자를 가리지 않고 접근했지만, 그녀의 불 같고 민감한 성격 때문에 오래 머무는 남자가 없는 독신녀’라는 부정적인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되고 있다.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천주교 묘원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