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8 12:30:19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2-1572)의 시는 남명의 인품만큼이나 독특하다. 한문학(漢文學)의 시대에 문인 학자라면 반드시 전대의 시인에게서 먼저 시의 전범을 배우는 것이 상식이었고, 또 제대로 배운 전범의 틀 위에 세워진 작품이 아니면 오히려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명의 시에는 실로 남명의 것이 아닌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느 문인은 고사하고 도학자의 문집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고인(古人)의 시에 차운(次韻)한 작품조차 주자(朱子)의 시에 차운한 ‘동지용주자운(冬至用朱子韻)’ 하나 밖에는 없다. ‘추상열일(秋霜烈日)’, ‘태산벽립(泰山壁立)’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기상만큼 그의 시도 일체의 모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오늘날의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古人의 언구(言口)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직절(直截)하게 자기 육성을 내는 작품이 많다는 점에서 어느 문인 학자의 것보다 작자의 정신을 분명히 보여준다.
德山溪亭柱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非大叩無聲(비대고무성) 큰 공이가 아니면 쳐도 울지 않는다.
萬古天王峯(만고천왕봉) 만고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려도 도리어 울지 않거니.
자로(子路)는 당시 열국(列國)의 제후들이 공자(孔子)를 등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 “천하의 큰 종을 걸어놓고 작은 막대기로 치면 어찌 소리를 울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나오는 이정당종(以莛撞鐘)의 고사로, 웬만큼 큰 막대기로 쳐서는 소리가 울리지 않는 큰 종을 공자에 비유한 것이다. 남명도 이 고사를 모를 리 없을 터인데, 그는 천석들이 큰 종도 거부하고 하늘이 울었으면 울었지 절대로 울지 않는 부동(不動)의 천왕봉으로 자처하였다. 이 시는 남명이 거처하던 산천재(山天齋)에 주련으로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정신의 지향을 나타낸 것임이 틀림없다.
偶吟
高山如天柱(고산여천주) 높은 산 마치 천주와 같이
撑却一邊天(장각일변천) 한쪽 하늘을 떠받치고 있구나.
傾刻未嘗下(경각미상하) 잠깐도 하늘이 내려앉지 않으며
亦非不自然(역비부자연) 또한 그 모습 너무도 자연스러워라.
이 역시 지리산 천왕봉을 읊은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에서 하늘을 떠받치는 의연한 두류산은 남명의 자황(自況)으로서 어떠한 외부의 유혹과 침범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거대하고 확고한 주체(主體), 즉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내면적으로는 외경(外境)에 대응하여 심(心)이 되는 이 자아는 능히 일체의 사물을 압도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내면과 외면, 心과 사물의 구도는 도학자(道學者)로서는 퍽 이례적인 것이다. 통상 도학자의 시에서 자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물의 이(理)를 찾고 그 理 속에서 함영(涵泳)한다. 자아가 거대해지면 사물의 섬세한 곡절들은 그 그림자에 가려져 버리고, 사물은 사물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아를 드러내는 매개(媒介)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게 되는데, 이러한 자아와 사물을 우리는 선가(禪家)의 게송과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이 사물을 자기 심성(心性)의 그림자로 생각하여 그 자체로서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진아(眞我)만을 찾는 선(禪)과 사물의 理를 찾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공부의 근간으로 삼는 도학(道學)의 서로 상반된 추향(趨向)이다. 물론 도학에서도 존 양(存養) 공부인(存養)공부인 경(敬)이 있지만 그 역시 격물치지와 표리(表裏)를 이루어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이 항상 자각(自覺)을 잃지 않고 격물치지의 주체로서 객체인 사물을 접응하기 위한 것으로, 사물에서 눈을 돌려 자아의 실존(實存)을 확인하고 心의 근원을 비추어 보는 禪의 내관(內觀)과는 아주 다르다. 남명의 시에서는 고요히 자연을 관조하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합일이 되어 개체로서의 남명 자신도,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도 무너져 버린, 아주 통쾌하고 광활한 느낌을 주는 정신경계를 발견할 수 있다.
涵碧樓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무아지경에 앉았으니 남곽자가 아닐까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아득히 흐르는 저 강물은 무심하여라.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뜬 구름의 일을 배워보려 했더니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고풍이 그마저 흩어버리는구나.
경남 陜川에 있는 涵碧樓에 題한 시이다. 이 시 속에서 남명은 《莊子》 齊物論에 나오는 南郭子綦처럼 物我俱忘의 침묵에 잠긴 채 누각에 앉아 있고, 눈앞에 펼쳐진 강물도 무심히 흘러간다. 이 絶對의 고요 속에서 문득 남명을 깨워 자신을 보게 한 것은 뜬 구름이다. 무심히 떠 있는 구름을 보고, 남명은 조금 생각을 일으켜 보았다. 생각을 일으켰다기보다 그저 무심히 구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설령 ‘浮雲’이 일반적으로 상징하는 부귀를 생각했다 하더라도, 남명에게 부귀를 탐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가소로운 세상사의 작은 편린을 보고 있을 뿐이었을 것이다. 구름을 보고 찰나에 생각을 일으켜 보았는데 그 구름마저 높은 바람이 흩어버리고, 이 시 속에서 남명은 다시 절대의 고요 속에 잠적한다. 이 시에서 대상 경계인 강물과 구름은 그 자체의 理를 드러내어, 관조의 대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 경계를 잊음으로써 대상 경계를 뛰어넘은 남명의 거대한 자아 속에 포함되어 개체로서의 自性을 상실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객체인 사물을 잊고 無我의 경지에 들어가면 오히려 주체로서 自我의 실존은 더욱 크고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남명의 시에서 자아는 때로는 매우 호방한 기상으로 外境을 압도한다.
明鏡臺
斧下雲根山北立(부하운근산북립) 도끼로 깎은 듯한 벼랑 산 북쪽에 서 있는데
袖飜天窟鳳南移(수번천굴봉남이) 천굴에서 소매 떨치며 봉은 남쪽으로 왔도다
泠然我欲經旬返(냉연아욕경구반) 표연히 날아 나는 열흘쯤 지나 돌아올 터이니
爲報同行自岸歸(위보동행자안귀) 이르노라 동행들이여 이 언덕에서 돌아가시구려
이 시에는 “闍窟山에 있다.” “鳳은 朋의 古字로, 선생 자신을 말한다.”라는 原註가 붙어 있다. 사람들과 함께 探勝에 나선 남명이 明鏡臺란 바위 벼랑 위에 이르러 읊은 것이다. 자신을 天窟에서 훌쩍 소매를 떨치고 온 봉에 비유한 것부터 매우 호기롭다. 명경대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이어서 이곳에 이르면 오던 길로 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남명은 이 대상경계의 한계상황을 훌쩍 벗어버림으로써 당당히 活路를 열어젖힌다. 즉 《莊子》 逍遙遊에서 列子가 바람을 타고 표연히 15일 동안 허공을 날다가 돌아온 것처럼 자신도 이 벼랑에서 날아 한 열흘쯤 광활한 우주에서 노닐다가 돌아오겠으니, 동행들은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라는 것이다. ‘物各付物’의 자세로 자연의 경치를 고요히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명은 아예 대상 경계를 삼켜 버리고 광활한 우주를 遊泳하는 것이다.이렇듯 남명의 시에서 대상 경계는 자아에 비해 퍽 왜소해 보인다. 거대한 지리산으로써 自況하고, 호방한 기상으로 일체의 사물을 압도한다. 이 밖의 고고한 山林處士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곳에서도 그는 늘 세상을 굽어보는 자리에 높이 서 있다. 시에 보이는 남명의 자아는, 사물에서 理를 찾고 그 理를 완상하고 理의 세계에 涵泳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일반적인 도학자의 시에서의 자아와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상에서 . 본 남명의 시에서의 자아는 대상 경계에 대응하는 주체로서의 心이다. 다음은 남명이 비상하게 중시한 存養工夫의 바탕인 ‘心地’에 관한 것이다.
靑鶴洞
獨鶴穿雲歸上界(독학천운귀상계) 외로운 학은 구름을 뚫고 천상으로 돌아가고
一溪流玉走人間(일계류옥주인간) 한 줄기 시내만 옥을 흘리며 인간 세계로 달린다.
從知無累飜爲累(종지무누번위누) 이제야 알겠구나 누 없음이 곧 누가 되는 줄을
心地山河語不看(심지산하어불간) 심지의 산하는 보지 않았다고 말하리라.
남명이 지리산을 유람하다가 靑鶴洞의 경치를 보고 읊은 것이다. 청학동의 맑은 물이 인간세상으로 흘러간 탓에 그만 기밀이 누설되어 사람이 그 물줄기를 따라 청학동을 찾아오게 되었고, 속인의 발길이 들어서자 靑鶴은 떠나고 말았다. 누가 없는 맑음이 도리어 누가 되어 청학동은 속인에 발길에 의해 오염되고 말았듯이 心地 본연의 티 없는 맑음도 자칫 외물에 의해 오염되기 쉽다. 따라서 심지의 산하는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단단히 지켜야겠다는 것이다. 다음은 맑은 물로 心地를 비유한 것이다.
黃溪瀑布
投璧還爲壑所羞(투벽환위학소차) 구슬 던져 주었더니 외려 골짜기가 수치로 여겨
石傳糜玉不曾留(석전미옥불증유) 바위로 옥 부수어 내어 보내기를 쉬지 않는구나
溪神謾事龍王欲(계신만사용왕욕) 시내의 신이 부질없이 용왕의 욕심을 섬기어
朝作明珠許盡輸(조작명주허진수) 아침마다 명주를 만들어 죄다 바다로 보내누나
폭포수가 골짜기에 떨어져 바위에 부딪쳐 물방울로 튕겨져 나오는 광경을 堯 임금이 천자의 옥새를 넘겨주자 당시의 高士였던 許由가 단호히 거절한 것에 비겼다. 이 밖에 청학동의 폭포를 읊은 시에서도 “요임금이 옥을 주는 것을 싫어하여 삼키고 내뱉기를 쉬지 않는구나. [却嫌堯抵璧.[ 茹吐不曾休]” 하였다. 이렇게 꼭 같은 표현이 남명의 많지 않은 시에서 여러 차례 나온 것을 보면 淸澄한 심지를 지키려는 그의 내면의 의지가 매우 강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遊頭流錄
水吐伊祈璧(수토이기벽) 물은 堯 임금의 구슬을 토하고
山濃靑帝顔(산농청제안) 靑帝의 안색이 농염하여라.
謙誇無已甚(경오무이심) 겸손과 자랑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聊與對君看(연여대군간) 애오라지 그대와 함께 보노라.
하여 위의 시와 거의 같은 意思를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저녁에 서쪽 僧堂에 유숙하였다. 밤에 누워서 이 시를 마음속으로 외워 보고 또 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명산에 들어온 사람이면 누군들 그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겠는가. 누가 자신을 소인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필경 군자는 군자가 되고 소인은 소인이 되니, 一曝十寒이 無益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라 하여 이 시가 마음을 맑히는 공부를 지속해야 함을 강조한 것임을 알게 하였다. 남명은. 시에서 거대한 지리산으로써 自況하고, 맑은 물을 淸澄한 心地에 비겼다. 여기서 그는 사물에 대응하는 확고한 주체로써 자아를 상정하였고, 자연 경물을 보면서도 사물의 이치를 완상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침해되지 않은 맑은 心地를 생각하였다. 남명의 시 속에서는 사물을 완상하고 그 속에서 理를 발견하고 理 속에서 涵泳하는 도학자 일반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사물을 보면서도 心眼을 내면으로 돌려 心性의 근원을 비추어 보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느 곳엔들 방초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역자 : 이상하
*南冥 曺植은 만년에 산청군 덕산면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지리산을 12회나 등정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