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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들(첫 번째)

2022-03-27 12:33:03

상촌(上村) 이야기

매천 황현이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기술했듯이 조선 후기 때부터 청계천과 종로 위쪽에 있는 마을을 ‘북촌’, ‘우대’[上垈] 혹은 ‘상촌’(上村), 그 남쪽을 ‘남촌’ 혹은 ‘하촌(下村)’이라고 했다.

 

상촌(上村)은 다시 동쪽의 경복궁과 서쪽의 인왕산 사이와 남쪽의 사직로와 북쪽의 창의문과 북악산 아래에 있는 통의동, 청운효자동, 통인동, 옥인동, 필운동 등의 마을을 ‘서촌(西村)’으로 불렸으나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으로 부르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세종마을(世宗―)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문인과 예술인들이 많이 자리 잡았다.

 

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종로구 안국동, 송현동, 계동, 가회동, 재동, 화동, 가회동, 삼청동 등 북쪽의 마을을 ‘북촌(北村)’이라 했다. 당시 ‘서촌’과 ‘북촌’을 아우르는 ‘상촌’에는 왕족이나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 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종로구 가회동 31-31에 있는 북촌 한옥마을을 지나간다. 종로구 북촌로 11길 11 고불 맹사성 집터에는 동양문화 박물관이라는 전통 찻집이 있고 여기에서는 황희 정승도 자기와는 격이 다른 청백리라고 칭찬했던 고불 맹정승의 흔적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 서촌(西村)에 새로 지어진 상촌재(上村齋)

나는 몇 년 전부터 조선 시대 이후 북촌에 살던 사람들 중에 우리 역사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면에서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만나보려고 했었다. 그러던 차에 COVID-19 팬더믹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2년이 넘도록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어 외출을 삼가며 집을 지키고만 있었다.  아직도 코로나 19와 싸우느라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는 의료진들과 행정당국에 대한 미안스런 마을을 약간은 느끼면서도 3. 1. 절 103주년을 지난 3월 첫 번째 일요일 아침 몇 가지 자료를 준비하여 마침내 북촌을 향해 집을 나섰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종로구 북촌로 15(재동 83) 옛 창덕여고 터에 세워져 있는 헌법재판소이다.  나는 그곳 뒤뜰에 있는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터 표지석에서 그들의 개혁의지와 혁명정신을 보았고, 그리고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재동 백송의 몸통을 만져보면서 긴 세월 동안 험난했던 우리 역사를 지켜보았던 백송의 안타까웠을 마음도 읽었다. 또 앞 담장 옆에서 비록 자기 집은 아니었지만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을 지라도 그의 흔적이 배어 있는 집터 표지석에서 월남 이상재의 청렴한 삶과 애국심을 만났고, 이 주변에서 살았다지만,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최린의 3. 1. 정신은 과연 무엇이었고, 곧바로 이어진 그의 반민족 행위는 어디에서 나왔으며, 변절 후의 그의 화려한 삶이 과연 그를  행복하게 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조국의 해방을 맞았을 때 변절자들의 자기반성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종로구 율곡로 3길 4, (안국동 175-33)에 있는 조선어학회 터에서 주시경 선생을 만나고 이어

서 바로 몇 발짝 이웃에 있는 종로구 율곡로 3길 4(안국동 175-33)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도 만난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이 종로구 북촌로 5길 48(화동 2), 옛 경기고등학교 터에 있는 정독도서관이다. 나는 이곳에서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집현전 학사 성삼문을 만나고, 3일 천하로 실패한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혁명가 김옥균도 만났다. 

 

네 번째로 나는 종로구 북촌로 11길 76에 있는 고불 맹사성의 집터를 찾아간다. 가는 길은 마침 북촌 한옥마을을 지난다. 다시 내려오면서 의암 손병희 선생의 집터와 김성수 선생의 집터를 다녀 내려왔다. 북촌을 둘러보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올려 가끔 그들을 다시 만나 내 마음을 다스리는 기회를 삼고자 한다. 

1.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15 (재동 83)

지금은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고 있다. 1949년부터 1989년까지는 창덕여고가 이곳에 있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도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환재 박규수(桓齋 朴珪壽1807~1877),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 그리고 충민 홍영식(忠愍 洪英植  1855~1884)과 고우 최린(古友 崔麟 1878~1958) 등 우리 근대 역사에 크고 작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서울특별시 북촌로 15(제동 83)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자리잡고 있다.
헌법재판소 뒷 뜰에 세워진 공정과 균형을 맞추는 저울을 들고 있는 재판관의 동상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창덕여자고등학교 터의 표지석이 옛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박규수 생가 터 표석이 백송이 있는 언덕 아래 있다.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이 이곳에 초옥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2.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환재 박규수(桓齋 朴珪壽1807~1877)

박규수 고종 치세 시절에 돈령부 지사, 경기도 수원부 유수 등을 지낸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규학(朴珪鶴), 자는 환경(桓卿, 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 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박종채의 아들이며,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추사 김정희, 오경석, 유대치와 교류가 깊었고, 제너럴 셔먼 호를 격퇴시키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사상을 계승하는 이로서 척화론(斥和論) 반대하고, 청나라 사신으로 갔다 온  양무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823년(순조 23년) 5월 단오 다음날이었다. 당시 박규수는 선발된 동몽(艟艨) 중에 한 사람으로 입궐하여 창덕궁 희정당에서 순조를 배알한 다음 단옷날 비가 내린 것을 기뻐하는 내용의 한시를 지었다. 

1825년(순조 25년) 5월 6일 효명세자는 창덕궁 후원의 요금문(曜金門)을 통해 박규수가 살고 있던 연암 박지원의 옛집 계산초당을 방문했다. 《환재집》의 ‘절록환재선생행장초’에 따르면 그때 효명세자는 박규수에게 글을 읽고 글씨를 써보게 한 다음 크게 칭찬하고 격려하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삼경이 되어서야 돌아갔다고 한다. 

 

1828 약관의 박규수는 효명세자(孝明世子) 친분을 나누며 개화를 논했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학문과 미래를 토론했다. 세자는 박규수를 궁궐로 부르기도 했지만, 때로는 직접 박규수의 집을 찾아 밤늦도록 토론하다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주 《주역》과 나랏일이었다후일 익종으로 추존되는 효명세자 대리청정 2년째에 아직 벼슬도 없던 20세의 박규수를 불러들여 '박규학(박규수의 초명)의 학문은 누구도 따를  없으리만큼 출중하다' 그를 곁에 뒀다. 주역 신하들 앞에서 진강 하게 하는 한편, 조부 박지원 저작을 모두 모으라 명하고, 박규수 자신의 저술도 있으면 같이 올리라 했다. 이때 직접 상고도설(尙古圖說) 80권을 지어 효명세자에게 바쳤다. 효명세자는 이런 그를 몹시 아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안동 김 씨 세도문별들을 배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 씨 노론  비주류  남인 중용하는 한편,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까지 과감히 등용하는  개혁군주로서의 싹을 보였다. 박규수는 이런 효명세자의 개혁 가능성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효명세자 1832 갑자기 훙거하면서 그의 꿈은 꺾였다. 슬픔과 실망이 너무 컸던 나머지 원래 자신의 자와 호의 ''(굳셀 )이라는 글자를 ''(옥홀 , 재갈 )으로 바꿀 정도였다.

 

안동 김 씨 세도 정치 계속됐던 데다가 효명세자, 어머니 유 씨, 아버지 박종채 연이은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20 칩거에 들어간다그는 할아버지 박지원 저작들 거듭 읽어 북학 사상을 정교화하고, 할아버지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다. 윤종의(尹宗儀), 남병철(南秉哲), 김영작(金永爵)  당대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과도 깊은 교분을 나눠, 후일 홍문관 대제학 오를 정도의 주자학적 깊이까지 더하게 된다.

 

1863(고종 즉위년) 12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고종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즉위한 고종은 익종(

翼宗) 양자로 입승대통  보위에 오를  있었는데, 효명세자(익종) 정비이자 고종의 양어머니가  조대비(趙大妃) 남편의 생전 절친했던 박규수를 흥선대원군에게 천거했다. '박규수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익종께서 크게 쓰려던 인물이다. 그가 벼슬한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써보는 것이 좋겠다'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박규수는 1876년 강화도 회담에서 최익현 등의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개항을 주장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이 침략 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침입해 올 것이라는 점, 일본이 침입하면 서양이 그에 합세할 것이라는 점, 이에 조선은 대적할 수 없다는 점, 어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국교를 단절할 수 없다는 점, 일본이 서양에서 발달한 문물을 수용해 부강을 꾀하므로 조선도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일본과 수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3. 개혁의 채찍을 들었던 조선의 마지막 희망 효명세자(孝明世子)

孝明世子(1809~1830)

孝明世子(1809~1830) 조선 23대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이이다. 세자시절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권에 맞서 개혁을 추진했다. 1827(순조 27) 2월부터 1830(순조 30) 5월까지약 3 3개월 동안 대리청정에 임하면서 조선을 경영했던 실질적인 국왕이었다. 그는 세도정권의 일방독재로 유명무실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탐관오리의 징치, 과거제도의 정비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평범한 방식으로는 고착된 현실을 타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악(禮樂)이라는 기발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급서하고 말았다. 조선 최후의 희망이 무너지고 말았다. 1830년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하였고,  1899년(광무 3), 고종 의해 익황제(翼皇帝) 추존되면서 익종에서 문조(文祖) 묘호가 개칭되었다. 

 

환재 박규수와의 만남

세도정권의 서슬 때문에 정사에 흥미를 잃고 있던 순조는 궁중의 주요행사에 수시로 효명세자를 데려갔다. 그런 부왕의 뜻을 잘 알고 있던 세자는 내심 자신이 이끌어갈 조선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었다. 훗날 조선의 개화를 선도한 박규수와의 만남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1823년(순조 23년) 5월 단오 다음날이었다. 당시 박규수는 선발된 동몽(艟艨) 중에 한 사람으로 입궐하여 창덕궁 희정당에서 순조를 배알한 다음 단옷날 비가 내린 것을 기뻐하는 내용의 한시를 지었다. 이때 효명세자는 17세의 영특한 박규수를 눈여겨 봤을 것이다. 

 

1825(순조 25) 5 6일 효명세자는 창덕궁 후원의 요금문(曜金門)을 통해 박규수가 살고 있던 연암 박지원의 옛집 계산초당을 방문했다. 《환재집》의 ‘절록환재선생행장초’에 따르면 그때 효명세자는 박규수에게 글을 읽고 글씨를 써보게 한 다음 크게 칭찬하고 격려하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삼경이 되어서야 돌아갔다고 한다.

 

북학파의 태두였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그 무렵 정체된 조선의 현실과 온갖 부조리로 얼룩진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효명세자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패악은 물론이고 유교 근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던 선비들의 아집, 문화선진국인 청나라를 외면하는 국수주의적 태도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그는 박규수와 함께 차근차근 집권 이후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던 것이다.

 

박규수는 그 후 성균관에 입학했고, 1827(순조 27) 효명세자가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차전강에서 다시 만난다. 당시 박규수가 주역을 강하고 물러나자 세자는 근신에게 그의 문재(文才)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물었다. 때문에 세자가 박규수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널리 퍼졌다.

 

대리청정 만 3년째에 접어들면서 효명세자가 펼친 예악정치의 영향으로 군신간의 질서가 어느 정도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1828(순조 28)부터 전국을 휩쓴 수재와 한재가 달리던 세자의 발목을 잡았다위기를 느낀 세자는 백성들의 구호에 전념하면서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수령의 비리를 색출했다. 그러자 암중모색하며 세자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던 세도정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829(순조 29) 4, 대사헌 김이재가 세자에게 근면함을 권하는 상서를 올렸다.

“공자께서는 ‘만일 나를 쓰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겠지만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란 말을 하셨습니다. 한데 저하께서는 3년 동안 나라를 경영했는데도 야박한 풍속이 고쳐지지 않고, 기강이 바로잡히지 않았으며, 민생이 회복되거나 재용의 축적, 언로의 해방 등 전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새삼 정치하는 뜻을 바로 세울 때입니다.”

 

순조가 친정을 하던 20여 년 동안 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 도탄지경에서도 태평성대를 노래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불과 3년여의 대리청정을 두고 세상을 제대로 바꾸지 못했다고 힐난하면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작은 즐거움에 미혹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효명세자가 김노, 김노경, 홍기섭 등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흉내 내는 형국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 동안 효명세자는 예악정치를 빌미로 왕권회복을 위한 행보를 걸었지만 그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한데 그가 소외되었던 노론 청명당 후예들을 필두로 소론과 남인 계열 인사들을 등용하면서 자파의 주구인 삼사의 관원들을 압박하고, 급기야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실세인 김교순 부자에게까지 창끝을 디밀며 자파인 지방수령들을 숙청하는 형국에 이르자 거세게 반발했던 것이다.

 

그들은 효명세자의 국정수행능력이 부족하다면서 과거 정조가 남긴 오회연교를 빌미로 사림 청론의 조정 진출을 봉쇄하고자 했다. 바야흐로 세자와 세도정권 사이에 일대결전이 불가피하게 보였다. 그런데 양측에 긴장감이 짙어지던 1830(순조 30) 4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약원에서는 급히 탕재를 대령했지만 증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갖은 처방을 다해도 효험이 없자 전 승지 정약용까지 불러들였다.

 

그 무렵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정약용이 급히 입궐해 세자의 증세를 살폈는데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백약이 무효하다는 사실을 알고 약재가 없다는 빌미로 시간을 끌었다. 결국 5 6일 새벽 희정당 서협실에서 세자는 숨을 거두었다. 22세의 창창한 나이였다. 그가 정치적으로 미묘한 상황에서 요절했으므로 일부 학자들은 과거 소현세자나 경종 임금의 선례에 비추어 독살설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전해지고 있는 기록으로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세자는 사후 ‘효명(孝明)’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치장되어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아울러 조선의 중병을 치유하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원대한 포부는 깨끗이 사라지고 파탄지경의 정재를 발전시켰다는 예술적 허명만 남았다. 그것은 한 나라의 경영자에게 바치는 칭송치고는 기실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호에서 굳셀 환() 자를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 환() 자로 바꾸고 20여 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처럼 효명세자의 죽음은 당대 조선의 개혁과 변화를 꿈꾸던 인재들에게는 절망적인 뉴스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도 이곳에서 살았다는 표석이 헌재 앞 담장옆에 있는데 남의 집에 세들어 사셨다고 한다.

4.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 在(1851~1927)

월남 이상재(月南&nbsp;李 商&nbsp;&nbsp;在&nbsp;&nbsp;( 1 8 5 1~1 9 2 7 )

월남 이상재는 1851 10 26 충남 서천군(舒川郡한산면(韓山面종지리(種芝里)에서 아버지 이희택(李羲宅) 어머니 밀양 박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 한산(韓山)으로 목은 이색(李穡) 후손이다1867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친족 이장직(李長稷) 소개로 박정양(朴定陽) 문객이 되었다. 1881 박정양, 홍영식(洪英植), 유길준, 윤치호(尹致昊등이 3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으로 파견되자단장 박정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시찰을 떠났다일본에서 내무성, 농상무성 등을 시찰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자료 등을 수집, 정리하여 시찰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884 우정총국(郵政總局 우체국) 개설과 함께 인천에 우정분국(郵政分局) 설립되자홍영식의 추천으로 인천분국장에 임명되었다그러나 그해 10 갑신정변(甲申政變) 참여한 홍영식이 살해되자관직에서 물러났다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자 1887 8 7 주미외교서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1896 아관파천(俄館播遷) 3 후인 2 14 내각 개편에서 2 내각 총서에 임명되었다이후 중추원 1 의관(議官)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어 탐관오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동시에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연설가로서 활약하였다그후 1902 6 이원긍, 유성준, 김정식 등과 함께 일종의 비밀경찰조직인 경위원(警衛院) 구속되었다이유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했던 독립협회의 지향으로 인해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이상재를 내부대신(內部大臣)으로 하는 공화정부를 수립하려는 계략을 짜고 있다고 고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달여 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고 15년형을 받아 한성감옥소에 수감되었다 기간 동안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이승만 등과 함께 감옥학교를 운영하다가 2 1개월 만인 1904 5 석방되었다. 1904 6 일본은 어공원(御供院소관의 산림 하천, 연못 등의 황무지 개간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이에 유생들과 선각자 등이 보안회(輔安會) 조직하여 황무지 개간권 반대운동을 벌이자 반대운동에 동참하여 상소문을 작성하고 반대 여론을 주도하였다.

경술국치 후인 1911 9 일제는 이른바 105 사건’을 꾸며 기독교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과정에서 황성기독청년회의 간부들이 구속되는  기독교 세력은  타격을 입었다 시기 황성기독청년회 총무를 맡아 기독교 사회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모든 책임을 본인이 떠맡으려 하였다 해외에 있는 이승만에게 3 . 1운동 관련 자료를 비밀리에 보내 해외독립운동세력들이 연대하고국제외교에 활용하도록 하였다그의 전국적이고 본격적인 교육운동은 3・1운동 이후 조선교육협회를 결성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24 9 75세의 나이에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직했던 1924 말부터 1927 초까지의 2 6개월간은 『조선일보』가 거듭나는 기간으로 엄청난 진통을 겪었다.

조선의 민중적 거인으로 신망 받던 그는 건강 악화로 병석에 누워있음에도 신간회 회장직을 수락하였다. 1927 1 20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민족단일당 건설을 내걸고 좌우 합작하여 신간회(新幹會) 창립 발기를 선언하였다그러나 그해 3 29 78세의 일기로 재동 셋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4 7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처음에는 한산 선영에 모셨으나 1957 6 묘소를 경기 양주군(楊州郡장흥면(長興面삼하리(三下里) 이장하여 부인 강릉유씨와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일 천하로 실패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집을 몰수하여 조선 최초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열었던 곳이다.

 5. 실패한 개혁가 충민 홍영식(忠愍 洪英植 1855~1884)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번의 주역 홍영식(1855~1884) 다른 동지들은 국외로 탈출했지만 그는 끝까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 피살되었고, 영의정을 지낸 그의 부친마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서울 출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洪淳穆)이다.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개항 직후 박규수가 죽자 중인 의관인 유홍기(劉鴻基, 호는 大致)의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3(고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의 정자(正字)·대교(待敎)·직각(直閣) 등을 역임하였다. 민영익(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1881년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주로 일본 육군을 시찰,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와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하였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으며, 민영익과 함께 총무국을 담당하였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과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부호군이 되어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하였다. 이어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역임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당(開化黨)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해 3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을 세우는 데 전력하였다.

10 17, 그는 김옥균·박영효 등과 우정국의 개국 축하잔치가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과 일본 세력의 모의로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본 세력에 의지해 친청온건개화파(親淸穩健開化派), 즉 사대당(事大黨)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큰 사건이었다.

 

정변 후 홍영식은 신정부의 좌우영사 겸 우포장(左右營使兼右捕將)에 제수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지도층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한 것과는 달리,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아버지 홍순목도 이 사건으로 인해 자살하였다.

 

그는 문벌도 좋았고 성품도 온후하여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었으며, 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증직되었다.

 

6. 최초로 조선 정부가 세운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

1885년 4월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홍영식(洪英植)의 집에서 최초로 조선 정부가 세운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廣惠院)을 개원하게 된다 . 후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조선 최초의 서양의학으로 치료하는 병원이 되었다.

 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던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부상을 입은 민영익 치료하게 되는데 다른 서양 문물들과 함께 서양 의료 필요성에 대해 탐색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이는 외과술을 통한 서양의학의 장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의 필요성에 대해 건의하고 고종의 승인을 거쳐, 1885 4월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홍영식(洪英植) 집에서 조선 최초로 조선 정부가 세운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개원하게 된다. 조선 정부와 알렌은  곳에 진찰실, 수술실, 대기실 등을 갖추었다. 

 

제중원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오늘날의 외교부 소속되어 있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오늘날의 장관) 또는 협판(오늘날의 차관) 제중원 당상(濟衆院堂上) 되어 정부 파견 관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고, 알렌  선교부 의사들이 병원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았다. 이후 1886 10~11월경 제중원은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자리에서 명동성당 방향 일대) 자리를 옮겼다.

 

제중원(濟衆院)은 조선 정부가 1885년 2월 29일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벙원이며,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교육병원이기도 하다. 본래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나, 12일 지난, 같은 해 3월 12일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취소되고 제중원(濟衆院)이라 명명되었다. 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의 이관된 이후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조선(서울, 대구, 광주, 평안남도 선천 등)에 설립한 병원은 어느 곳에서나 제중원이라고 불렸다.

 

조선 정부의 혼란 속의 우여곡절 끝에 1899년 미국 사업가인 세브란스(L. H. Severance)로부터 거액의 기금을 기증받아 숭례문  복숭아골(지금의 서울역  연세재단 빌딩 자리)에 세브란스병원 신축, 1904 완공했고, 이에  1 후인 1905 4 미국북장로회 선교부는 대한제국 정부와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 체결해 사용하던 기존의 건물  대지를 완전히 반환했다. 의료진과 의료기구  의료기록은 모두 남문(남대문) 밖에 새로 짓는 제중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별다른 공백없이 진료를 지속하였으며, 조선 정부가 돌려받은 기존의 제중원 터와 건물은 이후 개조되어 친일파 인사와 일본인 간의 사교모임인 대동구락부가 사용하게 되었다. 세브란스병원 완공  제중원의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여전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 칭하였으며, 1920년대 신문 등에서도 여전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으로 칭하였다.

 

 

7. 3. 1. 독립운동 민족대표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고우 최린(古友 崔麟)

최린(1878~1958) 3. 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으며, 변절하여 반민족 행위자로 개명한 이름이 가야마 린(佳山麟)이다. 1878 1 25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이고, 아명은 바우[金岩]였다. 아버지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최덕언(崔德彦)이다. 보성학교 교장, 천도교 도령,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8 12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려서 한학자 도필두(都必斗)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895년 처음 상경해 어지러운 시국으로 인해 각지를 유람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했다가 일심회 관련자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자 1902 3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이때 일본에 망명 중이던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를 이진호(李軫鎬)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일심회 관계자의 석방 소식을 듣고, 7월 귀국해서 8월 외부주사(外部主事), 길주감리서 주사로 임명되었다. 1903년 9월 서울에 가서 입신양명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왔다. 1904 10월 대한제국 황실에서 보내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남선(崔南善)  44명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11월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1905 11월 유학생을 규합하여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1906 9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면서부터 1907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1907년 광무학회 총대와 태극학회 총무원·평의원, 1908년 대한학회 회장, 1909년 대한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 7월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그해 9월 귀국했다.

 

1910년 봄 경성에 있는 각국 공관에 방화하려던 계획이 발각된 후 10월 손병희를 찾아가 정식으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천도교단에서 보성학교를 인수한 후인 1911 2월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19 3월 조선민족대표의 한명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일약 사회적 지도인사로 부상했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 12월 출소해 1922 1월부터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교육과 주임으로 선출되어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6 1회 조선미술전람회 제1부 동양화부에 「난()」을 출품해 입선했다. 9월 천도교 종리사(宗理師)로 위촉되었고, 12월 천도교 만화회(萬化會)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 발기인 및 상무위원,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1925년 천도교 종리사에서 종법사(宗法師)로 선임되었고, 그해 조선체육회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 6월부터 1928 4월까지 미국과 유럽 21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9년 천도교 교단 최고직인 도령(道領)에 올랐다. 그해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1930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全朝鮮水災救濟會)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 교단 고문으로 재임했다. 1931년 단군신전봉찬회 이사, 1932년 나예방협회(癩豫防協會) 발기인, 1934 1월 조선소작령제정촉진회 발기인, 4월 여자의학전문학교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4 4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38 4월까지 매년 1,8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4 8월 시중회(時中會) 결성에 참여해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민심의 융화가 통치 대근간(大根幹) 장래에의 기대가 더욱 크다」(『매일신보』 1935.10.1.)라는 축사를 썼다.

 

1936 11월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1937 4월 천도교 중앙종리원 상임현법사(常任玄法師)로 선출되어 시국강연과 집필활동을 통해 천도교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했고, 7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시국강연회 강사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8월 조선총독부에서 ‘시국인식의 주지철저’를 위한 시국강연회에서 이돈화(李敦化)와 함께 편성되어 7일부터 18일까지 평안북도 일대에서 강연했고, 같은 달 조선신궁에서 거행하려는 국위선양기원제(國威禪讓祈願祭) 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위원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동양평화의 대정신,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 발휘」(『매일신보』 1937.8.15.)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자」(『신인간』 1937.9.)라는 글을 기고했다.

 

1938 2월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시국강연을 했고, 조선인징병제가 공포되자 이를 경축하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식회사 매일신보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해서 1941년까지 재임했다. 1938 6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이사·상무이사,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의식주 부문)으로 선임되었다. 11월에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민정신 작흥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12월 인일기념강담회(人日紀念講談會)에서 ‘신앙 보국주의와 신동아건설’을 강조했다. 같은 해 저축장려위원회 위원,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9 10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상임이사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경성과학지식보급회 고문·경성부 육군병지원자 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40년 중앙협화회(中央協和會) 평위원, 재만조선교육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2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참석해서 그 소감을 「봉축 황기(皇紀) 이천육백년」(『매일신보』 1940.2.11; 2.13.)이라는 글로 밝혔다. 7월 「지원병 10만 돌파 지원명 모매(母妹)에 보내는 글」(『삼천리』 1940.7.) 9월 「대동아공영권 수립과 고도국방」(『삼천리』 1940.9.)을 기고해 지원병을 장려했으며, 10월 국토계획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천도교단에서는 1940년 천도교총부 장로에 올라 1945년까지 재임했다.

 

1941년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2,400원의 수당을 받았다. 6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부여신궁공사(扶餘神宮工事) 근로봉사에 참여했고, 8월 흥아보국단 상임준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임전대책협력회에서 ‘애국채권’을 가두에서 판매했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창립준비위원·발기인과 10월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조선인 지원병수련생 1,232명의 수료식에 참석했고, 「읍소」(『삼천리』 1941.11.)라는 글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하는 각종 징병제 관련 행사에 참석했고 「있는 힘을 다 바치자」(『매일신보』 1942.5.10.)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해 정학회 고문으로 선임되어 황도사상 보급에 앞장섰다. 1943년 「양양하다 반도의 앞날, 충효일본(忠孝日本)의 대도(大道)로 나가자, 열혈 청년들」(『매일신보』 1943.12.8.)이라는 글을 써서 학병지원을 촉구했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 고문, 1945 6월 조선언론보국회 회장에 임명되어 각종 대회를 주도하여 해방 때까지 친일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해방된 후 1949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그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최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4183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8. 천연기념물 8호 재동 백송

헌재 뒤뜰에 있는 천연기념물 8호 재동 백송은 수령이 6백년, 높이 17미터, 밑둥 둘레가 3. 82미터이다.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재동 백송의 몸통을 만져보면서 긴 세월 동안 험난했던 우리 역사를 지켜보았던 백송의 안타까웠을 마음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