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 (西村)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에 새겨져 있는 弼雲臺각자

2021-08-28 23:41:55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캠벨(강모인 1853~1920)가 한국 여성교육을 위해 처음 케롤라이나 학당을 창설하였고, 1910년 4월 2일 학교 명칭을 배화학당이라고 바꾸고 여성교육과 선교활동에 헌신하였다. 이 건물은 1926년에 캠벨 기념관으로 건립되었으며, 이 건물 바로 뒷편 언덕 바위에 필운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白沙 李恒福의 弼雲臺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종로구 필운대로 1길 34에 있는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다. 2000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백사 이항복은 고려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호는 백사(白沙)와 필운(弼雲)이다. 우참찬(정2품)까지 오른 이몽량(李夢亮)과 현감 최윤(崔崙, 본관은 전주)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의기롭고 호방한 기질을 드러내고 있다. 한때 한량패와 어울리며 방황한 때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 열중하여 모범소년이 될 만큼 결심도 굳세었다. 나이 열다섯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어머니의 3년상을 모시고는 곧장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을 떨치게 된다. 1574년(선조 7년) 18세의 나이로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게 된다.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고, 이듬해에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병조판서, 이조판서로서 홍문관·예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는 등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明軍)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폈던 인물이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백사 이항복이야 두말할 것없는 훌륭한 명신이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1873년 [필운대]에 찾아와 조상을 추모했던 그의 9대 손인 영의정 이유원을 떠올릴수도 있지만, 보다 더 훌륭한 우당 이회영의 6형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그리고 이호영으로 이유원의 형님인 이유승의 아들들이니 백사로부터는 10대손이 된다. 그들이야 말로 국권이 일본에 강탈 당하자, 6형제가 마음을 합해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전 제산(지금의 가치로 약 600억원)을 정리하여 50명의 가족을 데리고 혹한에 만주로 망명한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실제로 독립전쟁을 전개하면서 자신들과 많은 자손들까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다.

만일 매천이 살아 있었다면 이들을 보고 "훌륭한 조상에 훌륭한 후손들이다". 고 기록했을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순절한 매천 황현은 이렇게 말한다.

"仙源 金尙容, 淸陰 金尙憲, 文谷 金壽恒, 夢窩 金昌集 같은 분들은 모두 德行 德望 功勳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높았다. 金祖淳도 글을 잘 짓고 일을 잘 처리하여 厚德하다고 칭찬을 들었지만, 그 자손들이 탐욕스럽고 完固하며 驕慢하고 奢侈하여 참으로 外戚이 나라를 망치는 의 시작이 되었다". "壯金이 나라 權勢를 잡은 지 오래되자 世人들은 壯金만 알 뿐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壯金 이야말로 나라의 기둥이요 주춧돌이다.” 하지만 어찌 그랬겠는가?

또 "先儒로는 우암 송시열을 추앙하고 忠勳으로는 충무공을 추앙하는데, 조정에서는 그 후손을 융숭히 대접하여 다른 명신의 집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두 집안의 후손들은 벼슬하면서 탐욕스런 일을 많이 저질러 청렴, 결백하다고 알려진 자가 없다".

 

 我祖舊居後裔尋(아조구거후예심) 우리 조상 옛집에 후손이 찾으니
 蒼松石壁白雲深(창송석벽백운심) 푸른 솔과 돌 벽에 흰 구름 깊네
 遺風不盡百年久(유풍부진백년구) 남기신 풍모 백년 넘게 오래이니
 父老衣冠古亦今(부노의관고역금) 조상님의 의관은 예나 지금이나

 癸酉 月城 李裕元題 白沙先生 弼雲臺(계유 월성 이유원제 백사선생 필운대 - 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선생의 필운대에 제하다).

이글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9 대손인 귤산 ( 橘山 ) 이유원 ( 李裕元 ,1814 ∼ 1888) 이 고종 10 년 (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