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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들(두 번째)

운중풍월 2022. 11. 7. 10:03

2022-03-28 14:52:06

조선어학회 터와 윤보선 가옥

1. 조선어학회 터(朝鮮語學會址)

헌법재판소를 나와 북쪽 담장을 따라 좌측으로 난 골목길을 몇 발짝 걷다 보면 곧바로 '율곡'로 이어진다. 율곡로 3길 4(안국동 175-33)에 조선어학회 터의 표지석이 있고, 바로 건너편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선생이 살던 '윤보선 가옥'은 헌법재판소 뒤뜰 북쪽 담장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시경(周時經1876~1914)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1908년에 국어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한 국어 연구학회의 맥을 이은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뒤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한글 전용, 가로   쓰기, 통일된 표기법을 주장했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국어문법』(1906년) ⓒ 독립기념관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한글 전용, 가로 쓰기, 통일된 표기법을 주장했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상주, 자는 경재, 호는 학신 또는 한힌샘이며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국문을 연구했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1898 6월 역사지지특별과를 졸업하고 1900 6월 보통과를 졸업했다. 배재학당 시절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 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으며, 같은 해 7월 학부(지금의 교육부) 내의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 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夏期) 국어 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하여 1908년 국어 연구학회를 조직한 후 2년 동안 이끌었다. 국어 연구학회는 1911년 조선 언문회(배달말글몯음), 강습소는 조선어 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 강습원의 이름이 한글 배곧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 단체들의 회장이자 강사로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1909년에는 J. S. 게일, 다카하시[高橋亭] 등과 더불어 한어 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화학당· 흥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배재학당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상동교회 내의 상동 청년 학원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 강의를 전개했다. 1900년 상동 사립학숙에 국어 문법과를 부설하고 1907년 여름에 상동 청년학원의 국어 강습소, 같은 해 11월 같은 학원에 설치된 국어 야학과, 1908~09년 국어 강습소, 1910년 재령 나무리 강습소 등의 많은 강습소를 통해 음학(音學), 자분학(字分學), 격분학(格分學), 도해학(圖解學), 변체학(變體學), 실용연습 등을 가르쳤다. 그에게서 직접·간접으로 배운 사람들은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김윤경,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이필수, 김원우, 정열모, 이윤재, 이병기, 김두종, 백남규 등이다. 

문자론과 표기법, 음학과 문법론, 사전편찬 세 분야의 연구를 통해 어문생활을 바로잡고 민중을 교육하고자 했다. 통일된 표기법을 주장했으며,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를 편찬하기도 했다. 후대로 연구가 계승·발전되지 못하고 1970년대 와서야 연구업적을 재조명받았다. <국어문법>, <조선어문법>, <소리갈>, <말의소리> 등의 저서 외에 많은 논설과 논문을 남겼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선각자들의 우리글 연구가 꾸준히 계속되었고, 1914년 주시경 선생의 타계 후에도 조선어학회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2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는 학자들을 구속시키는 등 노골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조선어 연구와 발전을 위한 노력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광복 후 그의 후학들이 '한글학회'로 명칭을 바꿔 학회 장소를 광화문 쪽으로 옮겨갔다

 

2.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 尹潽善家)

해위 윤보선((海葦 尹潽善 1879~1990)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조선어 학회 터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곧바로 지척인 종로구 율곡로 3길 4(안국동 175-33)의 '안국동 윤보선가'의 소슬대문 앞에 서니 대문이 굳게 닫혀있다. 지금 윤 전 대통령의 장남이 살고 있는데,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해위(海葦) 윤보선 (尹潽善) 전 대통령이 거주했던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는 1870년대에 종로구 안국동 8-1, 외 여러 필지에 지어진 전통 가옥이다.

 

1978 8 18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되었고. 2000 4 10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2002 1 29일 고택의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38호로 격상되어 지정되었다

지금 이 집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이 거주하고 있어서 개인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아서 주택 내부의 촬영은 할 수 없다.  1978년 8월 18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안국동 공덕귀가(安國洞 孔德貴家)'로 지정되었고. 2000년 4월 10일 '안국동  윤보선가(安國洞尹潽善家)'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2002년 1월 29일 고택의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38호로 격상되어 지정되었다.

이 집은 고종(高宗) 때인 1870년경에 민영익의 아들 민규식이 지었으며안채, 안사랑채, 바깥 사랑채(산정채), 대문채, 별당, 광채, 부속채 등을 포함한 민가로써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대 저택으로 건축되었다. 

 

이후 고종이 민규식의 집을 매입하여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 1861-1939)에게 하사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후 한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10년대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 1871~1944) 선생이 매입하여, 이후 4대째 윤씨 일가가 살고 있으며 현재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이 일가를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임기 1 5개월 만에 하야했다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군부를 비판하는 재야 지도자로 나섰다. 그는 1963 3 16일에 박정희가 군정 연장 성명을 발표하자 나흘 뒤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허정 등과 서울시청과 을지로, 미국 대사관 앞을 걸으며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이른바 '산책 시위'를 벌였다. 3 20일부터 세 차례 걸친 조야 영수회담을 진행해 군정연장과 정치 정화법을 철회시키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군정 연장이 철회된 뒤 윤보선은 1963년 범야권 후보로 추대되어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10 15일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선 박정희에게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이후 윤보선은 박정희 비판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한일수교협상이 진행되자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박순천과 함께 위원장이 되어 전국을 돌며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도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라고 비난했다.

 

윤보선은 1966 3월 신한당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했다. 1967 2월에 민중당과 합당한 신민당의 후보로 6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5 2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116만여 표 사이로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1971년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되자, 탈당해 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야권 후보 단일화의 압박이 있자 박기출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박정희가 1972 10월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윤보선은 유신이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1973 3월에는 정구영, 지학순 등과 민주구국 헌장을 발표했고, 1974년에는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 연맹(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기소되었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윤보선은 <동아일보> 기자 해고 사태 등을 두고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과 반민주적 행태를 비판했고 1976년에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3.1 민주 구국선언에 동참했다. 이 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됐다. 구속된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1979 10월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이후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국무총리 최규하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려고 했다. 이에 윤보선, 함석헌, 임채정 등은 최규하에게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이들은 군부와 경찰을 피해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등을 촉구하는 YMCA 위장결혼식을 진행했다. 이와 관련해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을 안국동 자택으로 불러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실을 얻지 못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에는 다소 다른 행보를 보였다. 윤보선은 전두환 정권에 협조하여 제5공화국 국정 자문회의 일원이 됐고, 주변의 비난과 반발을 샀다. 1984년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특별사면 복권조치를 얻어내기도 했다윤보선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를 지지해 야당과 학생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