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北洞-志士, 文化 藝術人들의 흔적을 찾아서(김용준, 김환기)
2025년 5월 23일
1. 김용준(近園 金瑢俊· 1904∼1967) 의 '노시산방(老柹山房)'에서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의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혜곡 최순우의 옛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에서 오세창 선생과 윤이상 선생의 집터 표지석을 찾다가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의 버스 정류장 부근에 있어야 할 그 표지석이 언젠가 무슨 이유로인지 제거되고 없어진 자리에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노시산방(老柹山房)이 있던 곳을 찾았다. 역시 이곳에도 표지석은 찾을 길이 없다. 시간이 가면 세상도 바뀌고 우리가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모든 것들이 잊히고 말겠구나 하는 아쉬움만 남는다.
현재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암자가 있는 건물 바로 아래에 지번이 성북로 168(성북동 274-1)이라는 표지가 붙여져 있는 건물 입구가 있다. 1934년 이 집터에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이 집을 짓고 절친인 상허 이태준이 지어준 당호 노시산방(老柹山房)에서 1944년까지 10년 동안을 살다가 수화 김환기에게 이 집을 넘겨주었다.
그때만 해도 이곳은 집 뒤로 꿩은 물론 늑대도 가끔 내려올 만큼 산골이었다. 하지만 김용준은 '뜰 앞에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라 할 정도로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집으로 왔다고 했다.
수월암 암자 아래 노시산방이 있었다.
한 해전 먼저, 성북동 수연산방에 자리잡은 상허 이태준(1904-1978)이 그 감나무의 늙음을 기려 '노시사(老柹舍)'라 하였고, 근원이 이를 받아 자신의 집을 '노시산방(老柹山房)'이라 이름지었다. 이 때가 1936년, 동갑내기 상허와 근원이 서른 셋이었을 때이다.
어느 해 가뭄이 길어 샘과 개울물이 마르고 화초목들이 죽어 나가던 때에도, 근원은 '노시산방의 진짜 주인공'인 감나무 만큼은 살리기 위해 매일같이 십 전짜리 물을 서너 지게씩 사다가 주기도 했다. 근원이 그려서 수화에게 준 <수향산방 전경> 그림에도 감나무는 주인공 같이 등장한다.
옛 노시산방의 현재 출입구
그러던 그 집을 근원이 1944년에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에게 팔고 양주로 이사했고, 1946년 서울대 미술학부 동양화과 초대교수로 부임하면서 경운동에 세들어 살았다. 1948년경 서울대를 사직한 이후 다시 의정부로 이사해 '반야초당'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노시산방을 수화 김환기에게 판 뒤 그는 말한다. '좋은 친구 수화에게 노시산방을 맡긴 나는 그에게 화초들을 잘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의정부에 새로 마련한 삼간두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먹고 이렇다는 직업도 없이 훨훨 날 것처럼 자유스로운 마음으로 천석고황이 되어서 자고 먹고 하다 보니 기껏해야 고인의 글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나의 일과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 근원은 노시산방의 새 주인 수화를 만났다. 수화의 말이 '노시산방을 사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기고 보니 근원에게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근원의 집을 산 후에 집 값이 많이 올라서, 좋아라하는 마음보다 근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수화는 근원에게 가끔 돈도 주고 그가 사랑하는 골동품도 갖다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만치 수화는 인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근원도 인정을 갚기 위해서였던가? 아홉살이나 어린 수화에게 수하소노인이라며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근원이 그토록 사랑했던 노시산방(老柹山房)의 늙은 감나무들은 수화와 향안이 들어와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당호가 바뀐 후 안타깝게도 모두 베어지고 말았다. 추운 겨울에 땔나무를 살 수가 없을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변동림(김향안)이 수화가 외출 중일때 모두 베어 땔나무로 만들었다고 그의 수필에 [월하의 마음]에 쓰고 있다.
오늘 내가 그 집을 찾아 밖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보니 그 집 마당에는 싱싱한 감나무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머리를 들고 있었다. 나는 새 주인이 노시산방(老柹山房)을 기억하고, 근원이 감나무들을 사랑했던 것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 다시 감나무를 심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노시산방의 자리에는 지금도 감나무가 있다.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 )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재능을 나타내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1931년에 오지호(吳之湖)와 동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서양화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지속하지 않았고, 1938년 무렵부터는 전통적인 수묵화에 손대기 시작하였으나 뚜렷한 면모는 아니었다. 반면, 신문·잡지에 미술평과 미술관계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평론가로서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참여하여 한때 전통회화의 이론 강의를 맡다가, 동국대학교로 교직을 옮겼다. 6·25가 일어나자 공산체제에 영합하여 좌익색을 드러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접수하여 학장이 되는 등 몇 달간 맹활약하였고, 9·28서울수복 때에 월북하였다.
북한에서는 평양미술대학 교수,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고, 조선화가(전통화가)로서 체제적인 사실주의 형식의 정치적인 그림과 풍속적인 인물화를 그렸음이 단편적으로 확인되어 있다. 월북 전의 비경향적 저서로 『근원수필(近園隨筆)과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가 있다.
1948년 <근원수필>이 출판된 당대에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수필은 김용준”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문사철에 뛰어난 화가였다.
김환기와 김향안(변동림)의 수향산방(樹鄕山房)
김환기는 1943년 봄, 백석의 친구인 노리다케 가츠오의 소개로 변동림(卞東琳 1916~2004 - 구본웅의 이모이자, 시인 이상의 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수화는 변동림과 재혼하면서 근원에게서 인수한 '노시산방'을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고 당호를 고쳐서 1948년까지 4년여를 살았다.
변동림(김향안)은 시인 겸 소설가 이상과 결혼하기도 했었지만, 이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결혼 생활은 4개월 만에 끝났다. 이후 1944년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를 중퇴하고,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 및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주로 파리를 소재로, 김향안(金鄕岸)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 수필가였고 1964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하기도 하였다. 2004년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죽었다.
젊은 시절의 수화(樹話)와 향안(鄕岸)
집안의 결혼 반대를 뿌리치며 새로운 인생을 살 모양새로 성과 이름을 다 바꿔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신혼살림은 비참했다. 당시의 생활상을 김향안은 이렇게 썼다.
"마지막으로 앞마당 반이나마 차지하는 고목이 된 감나무를 베었다. 아주 죽진 않았으니까 조금이라도 감이 열릴텐데 하고 아이들이 섭섭해 하는 것을 나는 눈 딱 감고 서툰 톱질을 하고 도끼질을 해서 패놓으니, 한 이틀 땔나무로 풍족했다. 이것이 떨어질 때까지는 나무를 들여 줄테지 믿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이제는 아무리 앞뒤 마당을 둘러보아도 패어 땔 만한 나뭇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노모가 안 계시고 어린 것들이 없다면 이토록 생활에 무능한 남편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냉방을 체험시켜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아이들은 둘째치고도 노래(老來)에 (전라도 신안섬에서 서울로 올라온)타향살이 고생 막심한 노모를 위로할 길이 없다." - 김향안, 1947년12월 <월하의 마음>
1947년 무렵의 김향안
아무튼 수화도 그 집의 늙은 감나무를 근원만큼이나 끔찍히 사랑했는데, 가난에 찌던 향안이 그 감나무를 눈 딱 감고 패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형편이 있지만 '생활에 무능한 남편'에 대한 원망도 컸으리라.
김향안의 글을 좀더 읽어보자.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오늘도 나무는 안 들어온다. 옥동(玉洞)같이 추운 날씨다. 곧 학교 간 아이들이 손을 호호 불고 돌아올 테지. 골방 가득히 찬 그림틀들을 부수면 한 주일 나무는 넉넉하리라."
그러나 향안은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끝끝내 참아내며 수화의 그림들을 지켜 내었다. 성북동의 노시산방과 감나무는 사라졌지만, 오늘날의 김환기의 명성을 크게 이루어내었다. 1992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환기미술관 안에 '수향산방'도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