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北洞-志士, 文化 藝術人들의 흔적을 찾아서(김광섭 시인, 조지훈 시인)
1. 김광섭 시인의 집터
2025년 5월 13일
지금은 집이 헐리고 도로가 된 성북동 168-34번지에는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5~1977)이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살았던 집이 있었다. 그집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여 지었다고 한다. 성북동 시절 그는 월간 문학잡지 <자유문학>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많은 문학신인들을 배출하였다.
시 <봄>, <생의 감각>, <성북동 비둘기> 등은 그가 성북동에서 쓰거나 구상한 작품들로 1969년에 출간한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렸다.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월간문학](1968. 11)-
2. 조지훈 시인의 집 <방우산장> 옛터
김광섭 시인의 집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조지훈 시인의 옛집 <방우산장> 역시 안타깝게도 지금은 헐리고 없다. 옛집터가 있던 성북동 142-1 성북동의 메인 도로변에 <조지훈기념 건축 조형물> 인 <시인의 방 방우산장>을 새워 그를 기념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지어 붙인 <방우산장>이라는 집 이름의 뜻은 "마음 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 즉 방우즉목우(放牛即牧牛)의 사상을 담고 있다.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우름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초ㅅ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3. 성북동과 문학
성북동은 문학과 관련이 깊은 마을이다. 조선 후기 마을이 생기며 김정희, 이덕무, 채제공 등이 성북동에 와서 시를 지어 자연을 노래했다. 근대에는 사대문안과 가까우면서도 시골의 정취가 남아 있는 성북동에 많은 문인들이 모였다.
1980년대 초반 이미 김기진, 김일엽 등 많은 문인들이 모여 살아 '문인촌'이라는 말을 들었다. 1933년 이태준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온 뒤, 문인단체인 구인회(九人會) 휘원들은 이곳에 드나들며 교류했으며, 박태원은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
1933년 성북동에 들어온 만해 한용운은 입적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교류는 계속되었다. 구인회 회원이었으며 돈암동에 살았던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한 세 명의 시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 밤새 '청록집'의 발간을 논의한 곳은 성북동 조지훈의 집이었다. '청록파'가 태동한 것이다.
국가가 주도한 예술원에 반발하여 만든 '자유문인협회'의 초대 회장은 '성북동 비둘기'의 김광섭 시인이었다. 그는 성북동에 살며 자신이 사는 마을의 변화를 시로 써내려갔다. 이밖에 염상섭, 김기진, 김일엽 등 수많은 문인들이 성북동에서 교류하며 살았다. 이 성북동 문인들은 김환기, 김용준, 윤이상, 채동선 등 다른 예술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화가들은 문인들의 책 표지를 꾸몄고, 음악가들은 시에 곡을 붙였다. 성북동, 이곳에는 아직 문인들의 삶과 교류의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