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夭折한 우리의 天才들(2)

운중풍월 2025. 3. 19. 21:19

羅蕙錫(1896~1948) 사망 당시 52세 

(兒名 羅兒只, 羅明順)

  

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 언론인

사망 원인: 파킨슨병과 관절염, 중풍 등(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

 

나혜석은 비운의 선구자였다. 사회사상가로, 시와 소설과 평론을 쓴 문인으로, 그리고 여권운동가로서도 폭넓은 삶을 살았다. 특히 「조선독립」에서부터 「선전, 비평」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과 필력으로 그의 문장은 일세를 풍미했다. '자화상', '스페인 풍경', '누드' 등의 회화, '경희', '정순' 등의 소설을 남긴 작가, 또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5개월의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불륜이란 한 단어에 막혀 작가로서, 화가로서, 여권운동가로서, 이응노, 구본웅 등 유명한 화가들을 길러낸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까지 그녀가 당시 사회에 끼쳤던 모든 긍정적인 결과들이 완전히 평가절하되었다.  

 

불륜, 그녀는 동경 유학시절 첫사랑을 잃은 슬픔을 달리기 위해 잠시 춘원 이광수와도 사귀게 되었지만, 오빠의 만류와 권유로 춘원과의 사귐을 접고 김우영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은 바람끼 많은 남자였다. 장기간의 유럽 여행 중 남편은 공부를 위해 독일에, 그녀는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최린을 만나 불륜을 저지른 것이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게 되고, 그 후 자녀들도 남편의 방해로 만날 수 없게 된다. 

 

후일 소설가 염상섭, 박종화 등은 그녀의 불행을 첫사랑 최승구의 요절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였지만, 탕녀, 또는 은둔자라는 악평에 시달리다가  52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회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신경쇠약증세를 보였고, 파킨슨병과 관절염, 중풍 등이 겹쳐 결국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나혜석이 생전에 만든 미술 작품은 800여점 이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전쟁으로 유실되었고, 그를 부정적으로 보던 시각과 언급이 기피, 금기시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보존되지 못하였다. 그의 작품 중 10분의 1 정도가 보존되어 있다. 조카 나영균에 의하면 '신교동 집에는 나혜석의 원고가 50 cm 넘게 쌓여 있었고, 그림도 여러 점 있었다. <나부>라는 제목의 누드는 어머니가 벽에 걸면 창피하다고 다락에 숨겨뒀다. 그러나 6·25 때 피난에서 돌아오니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한다.

그녀에 대한 평가와 복권 여론이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1974년 회고전이 열리면서 사회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시대에 앞선 선각자 또는 희생자라는 시각이 나타났으며 1988년 이후 본격적으로 평가, 조명되어 복권되었다. 나혜석은 1980년대 후반 문필가로 먼저 재탄생했다. 도덕적 가치관을 저버린 불륜의 여인이 아니라 남성 지배에 당차게 도전한 선각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페미니스트 화가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또한 2000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자와 인권 운동가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혜석 자화상

 

 시 인형의 노래 중에서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나 이제 깨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많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