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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帝峰(형제봉1115m) & 평사리의 최참판댁

운중풍월 2023. 12. 17. 13:48

2012년 4월 20일 ~ 2012년 4월 22일

聖帝峰  計劃 

별로 스트레스를 모르고 지내던 필자가 요즘은 바쁠 일도 없는데도, 무엇엔가 쫓기듯, 가끔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고, 예전과 다르게 생활에서 여유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이것저것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잡다한 이유로 미루어 온 일이 너무 많아서인가 보다. 이런 때일수록 더 느긋하게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박홍근 동문이 내 마음을 읽고 있었던 듯, 4월 중에 날을 잡아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 남쪽 줄기에 있는 聖帝峰(일명 兄弟峰) 등반을 같이 하자고  했다. 김대근, 김태병 두 동문이 동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발 1,115 미터의 만만찮은 산의 높이도 매력적이려니와, 말 그대로 내게 슬로라이프(Slow life)가 필요한 때에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원지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온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우리가 2 3일을 묵을 수 있는 박홍근 동문의 연고가 있는 악양면 봉대리는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평사리와 인접한 곳이란다. 산행 후,  느긋하게 최근에 조성했다는 소설 속의 "평사리 마을"도 둘러보고, 요즘이 제철인 하동의 벚굴과 재첩국도 맛볼 수 있으며, 특히 향이 좋은 산드룹도 손수 채취할 수 있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4월 20일로 잡힌 출발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에게는 초행인 성제봉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과 화계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우애 깊은 兄弟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성제는 형제의 경상도 사투리이기는 하지만, 漢字로 표기한 聖帝는 兄弟와는 전혀 뜻이 다르니, 산 이름이 두 개가 된 유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추측건데, 兄弟의 이 지역 사투리인 성제를  漢字로 표기할 때도 兄弟로 표기했어야 할 것을, 발음되는 성제를 좋은 글자를 찾아 聖帝로 표기하다 보니,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4월 20일 하동을 향해 출발

오후 3시, 전철 1호선 구로역 광장에서 출발하기로 한 시간에 4명의 동문이 모였다. 내일부터 전국적으로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모두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젯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쳤다는 김대근 동문의 이야기에 우리는 그 옛날 즐거운 소풍을 떠나던 마음으로 박홍근 동문의 승용차에 올랐다.

 

박 동문도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떠나는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잰걸음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천안에서 논산으로 빠지는 민자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정안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전주에서 순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남원과 임실을 지나, 오수휴게소에서 한 차례 더 쉬고, 4시간쯤 걸려 구례에 도착하니 오후 7시 반쯤, 흐린 날씨 탓인지 벌써 어두워졌다. 농협 마트에 들러 2박 3일 동안 우리가 마실 소주와 안줏거리를 사 차에 싣고, 화개장터를 지나 밤길을 더듬거리며 평사리까지 찾아가니, 마중 나와 기다리던 우리가 찾아가야 할 집주인이 우리를 안내했다.

 

평사리 무딤이 들판

우리가 묵을 집은 평사리의 무딤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성제봉에서 섬진강까지 두 팔로 감싸듯 양쪽으로 뻗어내린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들판 건너편 산자락에는 악양 면 소재지이다.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벌써 가는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오늘 밤과 내일은 남부지방에 100 밀리미터 정도의 비가 내릴 것이라지만, 내일 비가 오는 것은 내일의 일이다. 우리에게 오늘은 우선 허기진 배를 저 푸짐하게 준비된 식탁의 신선한 산채로 채워야 한다. 집주인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서 고맙다며 첫인사를 하는데, 주인도 이런 사정을 아는 듯, 우리를 곧바로 식탁으로 인도한다.

 

드룹이며, 엄나무 순, 취나물 등 향기로운 산채 정식으로 배를 가득 채웠는데, 또 후식으로 작년 가을에 만들었다가 냉동 보관시켰던 악양 대봉 홍시와 곶감이 나오는데, 모두 배부르다고 사양할 줄을 모른다. 김태병 동문과 반주로 소주도 몇 잔 나누는데 산채의 향기 때문인가 곧 술기운이 거나해졌다.

 

집주인 이병기(72세)씨는 박 동문 형님의 손위 처남되시는 분으로 누대를 이곳에서 살아오신 지역 토박이라고 한다. 특히 이분의 증조부 때, 이 마을에 많은 토지를 확보하시고, 대궐 같은 한옥을 짓고 사셨는데, 그 집을 40여 년 전, 용인의 민속촌에서 전통가옥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옮겨 갔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이 지역의 생소한 이름 (무딤이 들판)이나 소설 "토지"의 무대였던 평사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병기 씨를 통해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무딤이 들판이란 경상도 방언으로 '물이 들어오는 들판'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섬진강이 자주 범람하여 물이 들어오는 들판이어서 들 전체가 경작지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경작할 수 있는 곳에 모를 심어놓아도 그 논이 물에 잠기기 일쑤여서 물이 빠진 후 다시 모내기하기를 두세 차례씩 하였으니, 그 수확이 아주 미미하여 평사리 사람들은 늘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마을 집들은 거의 움막이었으며, 물가의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만들어 팔아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봉대리는 지대가 높아서 제대로 농사를 지어 평사리 사람들보다 윤택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동군청 문화관광과 김성채 학예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러던 평사리가 1918년 무렵(1918년 제작된 하동군 지도에 최초로 제방이 표시되어 있음) 지금의 19번 국도가 된 제방을 쌓아 섬진강의 범람을 막은 후부터 농지도 넓어졌고,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방이 자주 붕괴하여 지역 주민이 지게를 짊어지고 부역을 나가 보수공사를 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의 19번 국도는 1980년대에 기존 제방을 튼튼히 보수하여 그 위에 도로를 만들어 개통하였다고 한다.

 

4월 21일 등반계획 변경

이병기 씨로부터 이 지방의 옛적 이야기를 듣고, 2층 우리의 잠자리로 올라와 비로소 내일 산에 오를 일을 생각하며 밖을 내다보니,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창문을 열고 난간에 나가니 깜깜한 어둠 속에 빗소리와 옆 계곡의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한데, 들판 건너 산자락 마을의 반짝이는 불빛이 마치 하늘의 별처럼 아름답다. 내일 비가 많이 내리면 등반은 다음 날로 연기하고, 대신 평사리 최 참판 댁과 하동의 벚굴, 재첩국 맛을 보기로 하고 자리에 들었다.

 

4월 21일 새벽 5시, 잠에서 깨어 날씨부터 점검하려고 다시 난간에 나가보니 빗소리는 계속되고,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어젯밤보다 더 요란해진 것으로 보아 밤새도록 비가 내렸던 모양이다. 산행계획은 내일로 결정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형수께서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부침개를 부쳐 먹는 것이 제격이라며, 가까운 뒷산에서 취나물을 한 움큼만 따오면, 맛있는 부침개 술안주를 준비해 주겠다고 하시어, 필자가 우산을 받쳐 들고나갔다. 취나물을 뜯으며 주변에 드룹나무가 많은 것을 보니 욕심이 동했다. 취나물을 한 움큼 뜯어다 드리고, 김태병 동문과 함께 다시 산으로 가서 옷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욕심껏 조금은 철 지난 드룹순을 꺾어 내려오니, 때맞추어 취나물 부침개가 소주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쯤, 점심으로 벚굴과 재첩국을 먹기로 하고, 먼저 비내리는 평사리의 최 참판 댁을 찾았다. 이런 날씨에도 주차장에는 관광객을 실은 대형 버스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大河小說 "土地"의 무대 평사리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드라마 '토지'의 촬영 세트장이었던 이곳은 2009년부터 2010년 사이에 소설 속의 평사리를 그대로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는 동안 년간 6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하니, 이는 최 참판 댁 사람들(우리 민족)이 겪어온 일제 강점기의 한과 고난을 이겨낸 끈질긴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대하소설 '토지'가 현대인들에게도 그만큼 큰 감동을 주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소설 속의 최 참판 댁이 실제 평사리에는 없던 가공의 무대였지만, 지금 이 평사리에 새로이 조성된 최 참판 댁은 그 시대에 어디에선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역사의 무대로, 후세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육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방 후 작가 박경리 선생이 무딤이 들판을 지나면서 본 평사리는 과거 섬진강의 범람으로 삶이 힘들었던 평사리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넓은 농지가 된 풍요로운 들판을 보면서 작가가 구상했던 소설 '토지'의 무대로 적합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산을 받쳐 들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사진 몇 장을 찍고, 원조 나루터 재첩국집을 찾아 20 킬로미터나 되는 하동읍쪽을 향해 빗속을 달린다.

 

4월 22일 성제봉을 1.4km 남겨두고

내일은 비가 그칠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 새벽 5시 이전에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 후 9시 이전에 일찍 잠자리에 들기도 했었지만, 초행인 성제봉 등반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새벽 2시쯤 모두 잠에서 깨었다. 예보대로 비는 그치고 있었다. 가끔 가랑비가 뿌리기는 하지만 하늘을 쳐다보니 바람에 쫓겨가는 구름 사이로 별이 보이기도 한다. 새벽 4시 45분 헤드 랜턴 하나만 장착하고 어둠 속에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귀경하는 길이 막힐 것을 대비하여 12시 이전에 하산까지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20분쯤 올라가다가 첫 번째 둘레길 표지판을 발견했다. 여기서부터는 경사가 가파른 길이지만, 흙길이어서 걷는 촉감은 좋다. 다시 50분쯤 올라가서 두 번째 표지석을 발견한다. 대축마을에서 원부춘마을로 가는 둘레길과 신선대를 거쳐 형제봉으로 가는 암벽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의 갈림길이다. 5시 56분,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여 랜턴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는 안개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기온이 내려간다.

 

아침 7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땀을 흘리며 신선대에 도달한다. 바람 때문에 모자를 쓰고 걸을 수가 없다. 철계단을 오르고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수십 길 낭떠러지 위의 좁은 길을 지나면서도 짙은 안개와 거센 바람 때문에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록을 위해 사진은 찍는다.

 

7시 27분, 해발 890m에서 형제봉이 1.4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발견한다. 형제봉으로 가는 길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허기진 상태로 체온 유지를 위해 휴식도 없이 강행군하면서 거친 바람과 짙은 안개를 뚫고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얼마나 혼쭐이 났던지 모두 형제봉은 다음으로 미루고 하산하자는 것이다.

 

강선암 쪽 하산길의 아늑한 묘지 앞에서 비로소 휴식을 취하면서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운다. 20여분 동안 휴식을 취하고 하산길에 오른다. 30분쯤 내려오니 언제였더냐는 듯 햇빛이 밝다. 바람도 없다. 화사한 산복숭화꽃이 아름답다.

 

9시 30분, 입석리에 내려오니 여기가 무릉도원인 듯 한가롭다. 여기저기 녹차 밭, 감나무, 매실나무 과수원 사이에 아름다운 한옥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바쁠 것도 없이 한가로이 녹차를 따는 모습이 평화롭다. 한 주민에게 언제부터 여기에서 살게 되었느냐고 말을 걸어본다.

 

문향산방이라는 당호를 갖은 김윤수 씨는 부산에서 사업하였고, 부인은 교직에 있었는데, 지상낙원 같은 이곳에 반해 도시생활을 접고, 6년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연고가 있거나, 누구의 소개로 온 것이 아니라 등산을 하고 하산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니 아마도 평소에 꿈꾸어 왔던 삶이 아니었나 싶다. 행복은 꿈꾸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니까. 우리는 바쁘게 서둘러 귀경해야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몇 잔의 차를 대접받으면서, 그들의 행복이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흐뭇한 마음으로 봉대리로 돌아와 준비해 주신 점심을 마치고 12시 30분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