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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巖書院 探訪記

운중풍월 2023. 3. 16. 11:30

2010년 12월 9일

우리가 필암서원에 도착한 시각은 12월 짧은 겨울 해가 서서히 석양을 향해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3시가 지날 무렵, 영광을 거쳐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에서 참의공 15대 종손(參議公 15代 宗孫)이신 정식(廷植) 박사님의 장례를 마치고 귀경하던 길이었다. 동행하셨던 형님께서 우리에게 이곳을 다녀가자고 제안하신 것은, 아마도 동행하신 일가분들 모두가 박사님과 영결의 슬픔을 지닌 채 무거운 마음으로 귀경하는 것보다, 하서(河西) 선생이 제위에 오른 지 7개월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인종(仁宗)을 애도(哀悼)하던 마음을 어떻게 삭이며 살았던가를 느끼며, 다소 마음의 위안을 받고 돌아갔으면 하는 배려에서였으리라 생각된다.

 

가을의 산 냄새를 물씬 풍겨줄 것 같은 억새 꽃이 찾아간 손님을 먼저 맞아주었다.

필암서원입구에 도착하니, 주말이 아니어서인지 방문객이 전혀 없고, 앞 도로까지 텅 비어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냥 넓은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니, 가을의 산 냄새를 물씬 풍겨줄 것 같은 억새 꽃이 먼저 우리를 맞아주었다.

길 양쪽에 가꾸어진 억새 밭을 지나니, 조성된 지 오래지 않은 듯한 넓은 공원에 새로 심은 나무들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듬성듬성 세워져 있어서, 300년도 훨씬 넘었을 오래된 서원이니 주변환경부터 고색창연(古色蒼然)할 것으로 상상했던 필자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선비들의 학문과 정신을 수양하던 도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산만하고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국가지정 사적 242호 문화재인 이곳 필암서원(筆巖書院)은,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을 때,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았던 문정공 하서 김인후(文正公 河西 金麟厚)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의 모습

사람들이 사화(史禍)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못하던 때,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중종(中宗) 임금 앞에서 기묘사화 때 죽은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의 억울함을 개진하여 신하의 본분을 다하고 스스로 지방관을 자청하여 옥과 현감으로 조정을 물러났다고 한다.

  

선생은 중종(中宗)이 죽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인종(仁宗)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또다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신병을 구실 삼아 고향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상 영화에 초연했던 지조 높은 선비였으며, 호남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또한 대한민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건국 초기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이나,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경성방직을 세우고,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이 다 하서(河西) 선생의 후손들이다.

 

이러한 훌륭한 선비의 숭고한 정신이 여기저기에 배어있을 법한 곳에, 넓은 주차장까지 갖추어 놓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발상이 마음에 꼭 들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들어설 때 맞아주던 억새풀이 주는 인상은 어쩌면 욕심 없이 고고하게 살다 간 하서(河西) 선생의 순수하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녘 지방의 12월은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여 아직도 늦가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와 엄정함을 전해준다고 하는 확연루(廓然樓) 이 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인적 없는 조용한 절간 같은 분위기가 서원 밖과는 다르게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필암서원 현판이 붙여져 있는 건물은 넓은 대청마루 안쪽에 청절당(淸節堂)이라는 현판이 따로 붙여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유생들이 공부하던 서당 이었던 모양이다.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사람이 없을 듯하던 방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오며,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양(梁) 아무개라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한다. 

 

1590년(선조 23)에 변성온(卞成溫) 등 선생의 문인들이 주도하여 서원을 처음 세운 곳은 이곳이 아닌, 선생의 고향 마을인 기산리였지만,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24년(인조 4) 복원되었고,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1786년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겨진 전국의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며,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이 필암서원만 남겨졌다고 한다.

 

인종(仁宗) 임금이 하서에게 직접 그려서 하사하면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묵죽도(墨竹圖)를 보관하고 있다는 경장각(敬藏閣)

대표적인 건물로는 서원 입구의 문루로,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썼으며,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진리추구와 엄정함을 전해준다고 하는 확연루(廓然樓), 하서(河西)와 그의 제자이며 사위가 된 고암 양자징 선생의 위패를 모신 우동사(祐東詞), 하서 선생의 문집을 출판할 때 쓰던 목판을 수장하고 있다는 장판각(藏板閣), 그리고 인종(仁宗) 임금이 그의 스승이었던 하서에게 직접 그려서 하사하면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묵죽도(墨竹圖)를 보관하고 있다는 경장각(敬藏閣) 등이 있다. 이 건물은 특이하게 지붕 아래 네 귀퉁이 중 세 곳은 용, 한 곳은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현판은 정조(正祖)가 직접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청절당(淸節堂), 유생들이 기거하던 진덕재(進德齋)와 숭의재(崇義齋) 등 많은 건물들이 복원되어 유지되고 있다. 

 

根枝節葉盡精微 (근지절엽진정미) 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다 정미롭고

石友精神在範圍(석우정신재범위) 굳은 돌은 벗 인양 주위에 들어있네

始覺聖神侔造化 (시각성신모조화)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시니

一團天地不能圍 (일단천지불능위)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청절당 앞에서 죽헌대부님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형님의 모습
청절당 앞에서 원재, 충재, 두분 형님과 竹軒 대부님

경장각(敬藏閣)에 보관되어 있는 인종(仁宗) 임금의 묵죽도에 쓰여 있는 선생의 이 시는 유물전시관에도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인종이 제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시자 모든 것을 뿌리치고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매년 칠월 초하루 인종의 제삿날마다 고향 맥동마을의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 통곡을 하는 모습을 선생의 제자였던 송강 정철은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고 한다.  

 

東方無出處 (동방무출처) 동방에 출처 잘 한이 없더니

獨有湛齋翁 (독유담재옹) 홀로 담재옹만 그러하였네

年年七月日 (년년칠월일)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면

痛哭萬山中 (통곡만산중)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그 후에도 선생의 인종(仁宗)에 대한 애절한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1843년(현종 9)에 선생의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김인후 난산비(金麟厚 卵山碑)]를 세웠다고 한다. 이 비에는 선생의 행적과 정신, 당시의 국상(國喪)에 따른 제도가 함께 기록되어 있어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하는데 찾아가 보지는 못했다. 

  

해박한 양(梁)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건물들을 돌아보고, 유물전시관까지 돌아 나오니 해는 서산에 걸려있고, 귀경 길을 서두르는 나그네 마음이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