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가 되어 궁을 쫒겨난 非運의 王妃들 이야기
유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서, 운명적이었거나 아니면 정략적인 방법으로 궁궐에 들어가 왕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서 친정 집안을 일으키기도 하고,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도 했던 여인들이 자기의 잘못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갑자기 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친정 가문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왕비 자신도 하루아침에 궁을 쫓겨나 비운의 삶을 살았거나 혹은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던, 여섯 분들의 한 많은 삶의 기록들을 여기 세세히 옮길 수는 없었지만, 역사에 남겨진 그분들의 약사를 정리하였다. 이는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슬픈 역사를 다시 조명해 보면서 나를 추스르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운중풍월
1. 정순왕후 송 씨(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송 씨(定順王后 宋氏, 1440년 - 1521년 음력 6월 4일)는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98년(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에 단종과 함께 복권되어 왕후로 추숭 되었다.
생애 - 본관은 여산, 성은 송.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간택,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다섯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 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 씨는 시녀들이 동냥해 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 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큰 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후일, 영조가 이곳을 동망봉(東望峰)이라 하여 비석을 내렸으나 일제 강점기에 근처가 채석장으로 사용되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바위 또한 모두 떨어져 나가 흉물스러운 절벽으로만 남아있다. 또한 그녀가 살았던 집을 정업원(淨業院)이라고 하는데,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 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죽음과 그 이후 -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中宗) 재위 당시인 1521년 음력 6월 4일, 송 씨가 마침내 그 한 많은 생을 마감하니 이때 나이 82살이었다. 장례는 대군부인의 예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사능리에 조성되었다. 1698년(숙종 24년), 단종의 복권과 함께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사릉(思陵)이다.
가족관계(家族關系) - 남편 단종(端宗)
아버지 송현수(宋玹壽) 小生 : 없음.
정순왕후의 시(詩) 한수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계신 그곳으로 갈 일밖에 없네요.
깊고 어두운 숲을 지나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는 머나먼 길이라지만
흔연한 마음에 한달음에(한번 달려서)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만 심사에 깃드는 걱정은 헤어진 지 꼬박 에순 다섯 해,
이제는 여든 두 살의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행여 당신이 알지못할까 하는 것뿐입니다.”
2. 폐비 윤 씨(성종의 계비)
폐비 윤 씨(廢妃 尹氏,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조선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다. 폐출되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신 씨의 딸로, 권신 신숙주의 외종질녀였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성종과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그로 인해 폐서인 후 사사되었다. 연산군 때 잠시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 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제된다.
생애 - 성종보다 12살가량 많았다고 하나 그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다. 성종 4년(1473년) 음력 3월 19일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졌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그로부터 2년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 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4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일련의 사건 등으로 마침내 1479년 음력 6월 2일에 폐위되었다.
사사 사건 -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 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 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에게 전달하고 아들이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사후 - 처음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년(성종 19년) 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 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윤 씨의 묘가 회묘, 회릉으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 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킨다.
연산군 사후 -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으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 씨에게 올린 관작은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가족
* 할아버지 : 윤응(尹應,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
* 할머니 : 숙인 안동 권 씨(安東權氏,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권소(權紹)의 딸) - 4남 2녀
* 고모 : 윤 씨
* 고모부 : 최첨로(崔添老, 내시령(內侍令)을 역임)
* 고종사촌 오빠 : 최문손(崔文孫, 태종때 문과에 급제)
* 고종사촌 오빠 : 최효손(崔孝孫, 태종때 문과에 급제)
* 친정아버지 : 윤기견 (윤기무)
* 친정어머니 : 양성 이 씨
* 친정 오빠 : 윤우(尹遇)
* 친정 오빠 : 윤해(尹邂)
* 친정 오빠 : 윤후(尹逅)
* 친정어머니 : 장흥부부인 고령 신 씨
* 친정 오빠 : 윤구(尹遘)-병조참판
* 남편 : 성종(成宗)
* 아들 : 연산군
* 며느리 : 연산군부인 신 씨, 신승선의 딸
* 외할아버지 : 신평(申枰)- 사간원 정언
* 외할머니 : 장흥 마 씨
* 외증조부 : 신포시(申包翅)
* 외종조부 : 신장
* 외당숙 :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 친정어머니 고령 신 씨의 사촌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