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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가 되어 궁을 쫒겨난 非運의 王妃들 이야기

운중풍월 2023. 3. 14. 12:15

유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서, 운명적이었거나 아니면 정략적인 방법으로 궁궐에 들어가 왕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서 친정 집안을 일으키기도 하고,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도 했던 여인들이 자기의 잘못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갑자기 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친정 가문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왕비 자신도 하루아침에 궁을 쫓겨나 비운의 삶을 살았거나 혹은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던, 여섯 분들의 한 많은 삶의 기록들을 여기 세세히 옮길 수는 없었지만, 역사에 남겨진 그분들의 약사를 정리하였다. 이는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슬픈 역사를 다시 조명해 보면서 나를 추스르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운중풍월

 

1. 정순왕후 송 씨(단종의 정비)

정순왕후 송 씨(定順王后 宋氏, 1440년 - 1521년 음력 6월 4일)는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98년(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에 단종과 함께 복권되어 왕후로 추숭 되었다.

 

생애 - 본관은 여산, 성은 송.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간택,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다섯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 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 씨는 시녀들이 동냥해 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 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큰 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후일, 영조가 이곳을 동망봉(東望峰)이라 하여 비석을 내렸으나 일제 강점기에 근처가 채석장으로 사용되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바위 또한 모두 떨어져 나가 흉물스러운 절벽으로만 남아있다. 또한 그녀가 살았던 집을 정업원(淨業院)이라고 하는데,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 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죽음과 그 이후 -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中宗) 재위 당시인 1521년 음력 6월 4일, 송 씨가 마침내 그 한 많은 생을 마감하니 이때 나이 82살이었다. 장례는 대군부인의 예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사능리에  조성되었다. 1698년(숙종 24년), 단종의 복권과 함께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사릉(思陵)이다.

 

가족관계(家族關系) -  남편 단종(端宗) 

아버지 송현수(宋玹壽) 小生 : 없음.

 

정순왕후의 시() 한수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계신 그곳으로 갈 일밖에 없네요.

깊고 어두운 숲을 지나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는 머나먼 길이라지만

흔연한 마음에 한달음에(한번 달려서)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만 심사에 깃드는 걱정은 헤어진 지 꼬박 에순 다섯 해,

이제는 여든 두 살의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행여 당신이 알지못할까 하는 것뿐입니다.”

 

 

2. 폐비 윤 씨(성종의 계비) 

폐비 윤 씨(廢妃 尹氏,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조선 성종의 후궁이자, 두 번째 왕비이다. 폐출되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와 신 씨의 딸로, 권신 신숙주의 외종질녀였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성종과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그로 인해 폐서인 후 사사되었다. 연산군 때 잠시 '제헌왕후'로 왕후의 작호가 추숭 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삭제된다.

 

생애 - 성종보다 12가량 많았다고 하나  정확한 생년은   없다. 성종 4년(1473년) 음력 3 19일에 간택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졌다. 성종 5년(1474년) 성종의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승하하자 그로부터 2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 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4개월  원자(연산군)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일련의 사건 등으로 마침내 1479년 음력 6월 2일 폐위되었다.

 

사사 사건 -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 세자의 생모라는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윤 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 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에게 전달하고 아들이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사후 - 처음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신하들의 건의가 있자 성종은 1488년(성종 19년) 경 한성부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다. 뒤에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 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윤 씨의 묘가 회묘, 회릉으로 변경되면서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묘를 '윤 씨지묘(尹氏之墓)'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묘는 회묘에서 효사묘(孝思墓)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킨다.

 

연산군 사후 -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신동(현 고양시 덕양구)으로 이장하였으며, 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懷墓)이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 씨에게 올린 관작은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가족
아버지 윤기무는 두 번 결혼했는데, 그중 양성 이 씨에게서 배다른 오빠 3명이 있었고, 생모인 장흥군부인 고령 신 씨에게서는 손위 오빠 1명이 있었다.

* 할아버지 : 윤응(尹應, 통훈대부(通訓大夫) 교하현감(交河縣監)

* 할머니 : 숙인 안동 권 씨(安東權氏,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권소(權紹)의 딸) - 4남 2녀

* 고모 : 윤 씨

* 고모부 : 최첨로(崔添老, 내시령(內侍令)을 역임)

* 고종사촌 오빠 : 최문손(崔文孫, 태종때 문과에 급제)

* 고종사촌 오빠 : 최효손(崔孝孫, 태종때 문과에 급제)

* 친정아버지 : 윤기견 (윤기무) 

* 친정어머니 : 양성 이 씨

* 친정 오빠 : 윤우(尹遇)

* 친정 오빠 : 윤해(尹邂)

* 친정 오빠 : 윤후(尹逅)

* 친정어머니 : 장흥부부인 고령 신 씨

* 친정 오빠 : 윤구(尹遘)-병조참판

* 남편 : 성종(成宗)

* 아들 : 연산군

* 며느리 : 연산군부인 신 씨, 신승선의 딸

* 외할아버지 : 신평(申枰)- 사간원 정언 

* 외할머니 : 장흥 마 씨

* 외증조부 : 신포시(申包翅)

* 외종조부 : 신장

* 외당숙 :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 친정어머니 고령 신 씨의 사촌 오빠

 

3. 거창군부인 신 씨(연산군부인)

폐비 신 씨(廢妃 愼氏,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조선 연산군(燕山君)의 왕비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 전주 이 씨(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무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묘(燕山君墓)이며, 남편 연산군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생애 -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로, 남편 연산군은 그녀의 칠촌 조카뻘이 되기도 한다. 또 이복 시동생인 중종에게는 형수이자 처고모가 된다.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입궁한 후,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에 봉해졌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폐비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빈(嬪)의 예를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 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 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4남 3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

 

가족 관계 : 외조부 : 임영대군, 아버지 : 거창부원군 신승선(임영대군의 사위)

어머니 :중조모 전주 이 씨(세종의손녀, 임영대군의 딸)

외숙부 : 구성군,오빠 :익창부원군 신수근, 오빠 :신수영,오빠 :신수겸

남편 : 제10대 연산군, 시동생 & 조카사위 :제11대 중종, 조카 : 단경왕후

 

4. 단경왕후 신 씨(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 1487년 - 1557년 음력 12월 7일)는 조선 중종(中宗)의정비이다.시호는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이다. 익창부원군 신도공 신수근(益昌府院君 信度公 愼守勤)과 영가부부인 권 씨(永嘉府夫人 權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조선의 역대 왕비 중 제일 짧은 7일의 재위 기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된 후 영조 때에 부모와 함께 복위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위치한 온릉(溫陵)이다.

 

생애 - 1499년 연산군 5년) 12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여 부 부인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으나 그녀의 아버지인  거창 부원군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 씨의 오빠)인 데다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1506년(중종원년) 음력 9월  9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앉힌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황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고,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야사에 전해져 오고,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 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하는 야사가 전한다. 그러나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지만, 중종실록은 중종 사 후에 반정세력에 의한 기록이기도 하다.

 

폐위된 이후 중종기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종이 즉위하여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하기 시작했다. 1557년(명종 12년) 음력 12월 7일에 71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왕후 시부모의 예(例)에 따라 이등례(二等禮)로 초상을 치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 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영조 때인 1739년(영조 15년) 음력 3월 28일에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되었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 어머니 권 씨(權氏)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어머니 한 씨(韓氏)는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으로 격상되었다. 그때 단경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가족 관계 : 조부 : 신승선(임영대군의 사위, 정소공주와 문종, 세조의 조카사위)

조모 : 전주 이 씨(세종의손녀,  임영대군의 딸, 정소공주 & 세조의조카)

부 : 익창부원군신수근, 고모 : 폐비 신 씨, 고모부 : 제 10대 연산군

남편 :제11대 중종

 

5. 폐비 유 씨(광해군의 비) 

폐비 유 씨(廢妃柳氏, 1576년 - 1623년)는 조선15대왕 광해군왕비이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고도한다. 유자신의딸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생애 - 판윤 유자신의 딸로 태어나 선조때에 광해군의 부인에 간택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 뒤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올랐으며 그 후 광해군이 34세에 즉위할 때 왕비로 진봉되었다.

1623년 3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인조반정) 그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아들 질과 며느리 박 씨가 탈출기도 실패 후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결국 같은 해 10월 8일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 적성에 장사지냈으며, 폐비인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2002년 11월 15일,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인터넷 논객들은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폐비 유씨를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으나,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

소생 : 폐세자 질,  폐세자빈 박씨

 

 

6. 희빈 장 씨(숙종의 비) 

희빈 장 씨(禧嬪 張氏, 1659년 음력 8월 - 1701년 음력 10월 10일)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전하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후실인 윤 씨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서,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린다. 

 

생애 - 입궐과 출궁

희빈 장 씨의 입궐 시기는 불분명하다. 생부 장형(張炯)의 신도비문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 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희빈 장 씨가 생부 장형의 사후 몸을 의탁하고 있던 종백부인 장현(張炫)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경신환국 당시 희빈 장 씨의 나이가 이미 22세 이상이었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의 장남 동평군과 자의대비(장렬왕후, 인조의 계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의 주선으로 입궁한 희빈 장 씨는 자의대비 조 씨를 웃전으로 모셨다. 1680년 겨울, 인경황후 김씨와 사별한 20세의 청년 숙종과 연을 맺고 정인이 되었다. 희빈 장 씨가 숙종을 모시게 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숙종실록에 11월 이후 혜성이 나타났는데 장 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렵이 이때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같은 해,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 씨((明聖王后 金氏)의 미움을 받고 궁에서 쫓겨났다. 사서에는 숙종을 모시기에 희빈 장 씨의 출신이 천한 이유로 쫓아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경신환국 당시 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 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장 씨의 보복을 견제한 이유때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씨가 출궁 되자 자의대비가 숭선군저에 친필 서찰을 넣어 장 씨는 자의대비의 친정 질녀이자 숭선군의 부인인 신 씨의 보호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기사환국

1683년 현렬대비(명성왕후)가 와병 중이던 숙종의 쾌유를 위해 무당의 권고대로 치성을 드리다 병을 얻고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3년상이 마치자 자의대비(장렬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설득하여 1686년 초에 장 씨를 재입궐시킨다. 장 씨를 위해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창경궁에 처소를 지어주는 등 장 씨를 향한 숙종의 총애가 지극하자 서인과 인현왕후 민 씨의 반발 또한 격렬했다. 장 씨를 견제하기 위해 1686년 3월, 서인 영수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 씨를 간택 후궁으로 입궐시켰지만 실패하고, 같은 해 12월에 숙종이 직접 장 씨를 내명부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만듬으로서 더이상 서인은 장 씨의 출궁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숙원 장 씨는 인현왕후 민 씨(仁顯王后 閔氏)와 대립하였다. 인현왕후 민 씨는 장 씨의 교만함을 훈계하겠다며 매질을 명한 적이 있고,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 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 씨가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또한, 장 씨 팔자에 아들이 없다는 주장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 씨가 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

 

1688년 소의(昭儀 ; 내명부 정 2품)로 승격한 장옥정은 같은 해 10월, 드디어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숙종의 장남 원자‘윤’(昀)을 낳았고 이 왕자가 후에 조선 왕조 제20대 왕 경종(景宗)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인의 반응은 싸늘하여 숙종의 득남에 하례조차 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 씨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숙종의 허가를 받고 입궁하는 장 씨의 생모 윤씨의 가마를 빼앗아 불에 태우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숙종이 분개하여 해당 관원에게 벌을 주려 하자 서인이 모두 반발하였고 서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던 숙종의 진노를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경신환국에 쫓겨났던 남인이 일부 다시 조정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의 장래가 걱정된 숙종이 서둘러 왕자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의 노론과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 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년) 정월에 원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봉했다. 또한 장 씨의 생부 장형을 영의정, 조부 장응인을 우의정, 증조부 장수를 좌의정, 외조부 윤성립을 정경으로 추증하였고 장 씨의 외숙부 윤정석에겐 별제직을 제수, 그리고 김석주에 의해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당했던 희빈 장 씨의 종백부 장현을 복직하여 희빈 장 씨와 어린 원자의 불안한 처지와 입지를 세워주었다.

 

하지만 서인의 반발이 심해지고 급기야 송시열이 인현왕후의 연치가 어린것을 주장하며 원자 정호를 취소할 것을 상소하기에 이르니 숙종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되어 종묘에 정식으로 고한 것을 번복하라는 것은 왕실을 능멸하는 행위라며 노여움을 터트렸고 이에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에 논박하자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이후 6월, 송시열은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井邑)으로 이배 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 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치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로써 경신대출척 이후 밀려난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이 정권 교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1689년 음력 4월 23일,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이니 생일 하례를 생략하라는 숙종의 명이 무시되고 인현왕후 민 씨에게 대신들의 하례와 선물이 전달되자 숙종이 분개하여 인현왕후 민 씨를 서궁에 유폐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인현왕후 민 씨의 품성과 행실이 폐비 윤 씨보다 더하고 희대의 악후로 손꼽히는 여태후에 견줄 만 하다며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고 폐출할 의사를 선고했다. 이에 서인 오두인 . 박태보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 대신들 또한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음력 5월 2일에 인현왕후 민 씨를 폐하여 사가로 폐출하였다.

 

희빈 장 씨는 5월 13일 왕비가 되었지만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이었던 탓에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된 것은 1690년 10월 22일이다. 앞서 6월 16일, 장 씨의 아들인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중전 장 씨의 부모인 장형(張炯)과 장형의 첫 아내 고 씨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 되었고, 장 씨의 생모인 윤 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책봉되었다. 무과 출신 무관이었던 장비(張妃)의 오빠 장희재는 훈련원부정 겸 내승을 거쳐 이후 포도대장, 총융사, 한성부 좌윤 등 고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갑술환국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김만중이 자신이 폐비 사건의 옳지 못함을 깨우치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읽고 결국 폐비 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 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는데, 이를 불러 감술환국이라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은 다시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 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결국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장옥정의 부모인 장형과 윤 씨·고 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호를 박탈당했다. 희빈의 처소 또한 창덕궁 대조전이 아닌, 과거에 사용하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겨졌다.

 

무고의 옥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 씨가 희빈이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신당을 왕에게 고하였고, 마침내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 씨가 죽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이 일로 장희재는 처형되었고, 취선당의 궁인(宮人)·무녀(巫女)등도 참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巫蠱-獄, 여기서 무고란 무술 (巫術)이나 방술 따위로 남을 저주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이라 하는데, 이때에 희빈의 처우에 대해 관대하게 처우하자는 당시 영의정인 최석정은 부처되고, 같은 이유로 남구만·유상헌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장희빈이 사사된 때는 1701년 음력 10월 10일의 일로, 향년 43세였다. 그러나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과의 장희빈의 죽음 묘사가 달라서 (연려실기술이나 인현왕후전에는 사사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자진했다고 씌여져 있다) 장희빈이 사사되었는지, 자진했는지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하다.

 

死後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숙종이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어명을 내렸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없었으며, 경종이 즉위 후 장 씨를 추존하려는 당시 노론의 반대가 지극해 분란이 있었다.무덤은 서오릉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60년대 도시화개발로 옮겨졌다. 그녀의 사당은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이며, 궁정동 칠궁 경내에 존재하고 있다. 대빈궁은 왕후만이 사용하는 원형 기둥 등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위(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