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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 비음기(고종어제)

운중풍월 2023. 3. 13. 12:03

2011면 6월 11일

 

將軍公 濬慶墓 碑陰記

삼척읍(三陟邑)에서 서쪽으로 40리쯤 되는 곳에 [노동(蘆洞)]이라는 산이 있어 산맥(山脈)이 두타산(頭陀山)에서 내려왔다. 국한 형세가 뛰어나게 크며 엎드린 호랑이 형상이다. 신좌을향(辛坐乙向) 판인데 우리 목조 황고(穆祖 皇考)를 장사한 곳이다. 고 상신(故 相臣) 허목(許穆)이 이 고을 부사(府使)였을 때에 지은 주지서문(州誌序文) 및 노동 동산(東山) 두 곳 묘소 기록에 옛 자취를 갖춰 기술(記述)하면서 선묘(宣廟) 때 관동감사(關東監司) 정철(정철)이 묘지 도면(圖面)을 그려서 올리고 수축(修築)하기를 청했다는 사실을 매우 자상하게 말했다. 허목과 정철은 모두 유명한 신하이고 말한 바가 확실하다. 

상고하니 건국초기(建國初期)에 군(郡)을 승격(昇格)해서 부(府)로 만들었고 서대(犀帶)를 하사(下賜)해서 부 관청(官廳)에 갈무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열성조께서 도신(道臣)을 시켜 묘소를 봉심하고 송목(松木)을 금약(禁養)해서 수호하는 것이 연례(年例)였다. 아울러 문헌(文獻)이 있어 상고할 수가 있다. 짐(朕) 소자(小子)가 사복(嗣服)한지 36년 되는 기해(己亥)에 재신(宰臣)이 중하(李重夏)를 보내서 봉심토록 했더니 전부터 전해오는 도본(圖本)과 기록이 모두 꼭 맞았다. 인해 경계를 정해서 표석(標石)을 세웠다. 동쪽은 텃골(基谷)까지 이고 서쪽은 주봉(主峯)뒤까지 이며 남쪽은 논실(沓谷)까지 이고 북쪽은 피실(稷谷)까지 인데 양지척으로 측량(測量)하니 3천 3백 척 이었다. 제각(祭閣)을 건립(建立)하고 관원(官員)을 두어서 수직(守直)토록 하였다.

제향(祭享)하는 의식(儀式)은 한결같이 각 묘소의 예(禮)대로 하여 해마다 한 번씩 제사하는 예(禮)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아아! 열성조께서 오랜 세대(世代)를 추모(追慕)하고 선조(先祖)를 숭봉(崇奉)하는 절차에 극력(極力)으로 하지 않음이 없었건만 이제까지 미처 못하신 것은 신중(愼重)함이 지극한 때문이었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열성조께서 여러 차례나 신중하게 여기신 바를 지금도 금석(金石)처럼 준봉(遵奉) 해야겠기에 이로 하여 이번 거조(擧措)가 있었다. 대개 선조께서 하시던 일을 후손이 잇달아 한 것으로 또한 오랜 세대를 추모하는 느낌을 견디지 못했음이다.

 

동해시에 있는 두타산 정기를 받아 조선 왕조 500년 왕업의 기운을 내려 주었다는 명당 濬慶墓
2011년 4월 20일 濬慶墓 제향을 준비하는 모습
濬慶墓로 가는 길에는 재질이 우수한 황장목이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