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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운중풍월 2023. 2. 27. 11:29

현재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에 큰 건물인 중희당이 있었고,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동궁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육각 누각인 삼삼와(三三窩), 그 옆의 칠분서(七分序) 그리고 승화루(承華樓)는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성정각(誠正閣)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였으며, 단충의 몸채에 중층의 날개채가 직각으로 붙은 독특한 모습이다.

성정각 일원 위치도

翠屛

취병은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주합루의 취병은 1920년대 그려진 동궐도의 그림을 토대로 하여 [임원십육지 관병 법]에 기록되어 있는 제작 기법대로 대나무 틀을 짜고 신우대를 심어 재현한 것이다.

 

부용정은 주합루 앞의 부용지에 세둬진 아름다운 정자이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 누각 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이 어수문이고 주변의 울타리가 취병이다.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玉流川)이라 한다. 1636,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국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이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猗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인조의 친필 글씨 옥류천 이곳에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청의정(淸猗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왕이 직접 농사 체험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