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顥(최호 704-754)
중국 당(唐)나라 때의 시인, 성당(盛唐) 시기에 해당한다. 재주는 뛰어났으나 행동은 경박했다고 한다. 젊어서는 들뜨고 화려하기만 한 가벼운 시를 주로 지었으나, 만년에 풍골(風骨)이 훌륭한 시를 지었다. 시 [황학루]는 이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7언율시의 백미(白眉)로 평가된다.
黃鶴樓(황학루) - 崔顥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을 유유히 떠 있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맑은 냇가에는 한양의 나무그늘 무성하고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앵무주 모래톱에는 봄풀들만 우거졌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는 저무는데 고향이 어디던가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하사인수) 강 위의 물안개에 시름만 깊어지네.
한수 이강(漢水 二江)이 합류하는 양쯔강[揚子江] 남쪽 기슭의 빼어난 경관 속에 세워져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시대에 오(吳)나라가 징저우[荊州]를 빼앗아 촉(蜀)과 싸우기 위하여 서산 서쪽 기슭의 황구산[黃鵠山]에 세운 높은 건물이 황허러우의 모체이다. 황허러우라는 명칭에는 도가(道家)의 선인(仙人)이 노란 귤껍질로 만든 학이 진짜 학이 되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당나라의 시인 최호(崔顥)가 지은 시 〈황학루(黃鶴樓)〉는 대시인 이백(李白)이 그보다 나은 시를 지을 수 없다고 탄복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누각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청나라 때만 4차례 재건되고, 4차례 수선되었다고 전한다. 복구될 때마다 높낮이와 규모, 형태가 조금씩 달라져서 당나라 이전에는 2층이었고, 송나라 때 3층으로 개축되었으며, 청나라 말기에는 3층의 십자찬첨식(十字攒尖式) 목조 건축물이었다.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인 1884년 인근의 민가에서 발생한 화재가 번져 누각도 일부 훼손되었다. 현존하는 황학루는 문헌에 근거하여 1984년 재건된 것이며, 위치도 양쯔강 기슭에서 가오관산 위로 옮겨졌다.
규모도 3층에서 5층으로 확장되었는데, 각 층이 중2층으로 되어 있어 실제로는 10층인 셈이다. 전체 높이도 원래보다 2배 가량 높아져 51m에 이르고, 구조도 목조에서 철근콘크리트조로 바뀌었으며, 연건축명적은 4000㎡이다. 지붕과 각 층의 처마 위에는 노란색 유리기와를 얹었고, 72개의 커다란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외벽의 교각이 60여 개에 이른다. 지붕 한가운데는 4m 높이에 102개의 유리벽돌을 상감하여 만든 호리병 모양의 호로보정(葫芦寶頂)을 장식하여 대범함과 수려함이 돋보인다.
1층 대청에는 황학을 타고 옥피리를 부는 신선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높이 9m, 너비 6m의 채색 도자기그림 〈백운황학(白雲黃鶴)〉이 있고, 2층 벽에는 당나라 때 염백리(閻伯理)가 지은 〈황학루기(黃鶴樓記)〉가 새겨져 있다. 3층에는 이백과 최호, 악비(岳飛) 등 황허러우를 노래한 역대 명인들을 그들의 작품과 함께 그림으로 묘사한 〈문인회췌(文人荟萃)〉가 눈길을 끈다. 5층에는 10폭의 화폭에 파도가 넘실대는 양쯔강과 중국의 문화적 요소와 황허러우의 변화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강천호한(江天浩瀚)〉이 있는데, 전체 길이가 100m에 이른다. 누각 주변에는 동조(銅雕)와 정자, 패방(牌坊), 라마탑(喇嘛塔) 등이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