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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王維 699년 ~ 759년)

운중풍월 2023. 2. 16. 19:07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안서로 가는 원이를 보내다

                                                                                                                                        -왕유(王維)-

渭城朝雨浥輕塵 (위서조우읍경진) 위성 아침 비 장안의 먼지 씻어내니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청청유색신) 여관 앞 푸릇푸릇 버들빛 새로워라

勸君更盡一杯酒 (근군경진일배주) 그대여, 이 술 한잔 다시 받으시게나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 서쪽 양관 밖에는 나 같은 친구도 없으리니.

 

죽리관(竹里館)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나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彈琴復長嘯(탄금복장소) 거문고를 타다가 다시 길게 휘파람을 불어본다.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숲이 깊어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明月來相照(명월내상조)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를 비춘다 .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열렬한 불교신자로서, 왕유도 이 영향으로 입신(入信)하여, 유마힐(維摩詰)을 닮고자 자를 마힐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서 칭찬이 높았고 음악에도 뛰어나서, 현종의 형제 제왕이나 귀족의 모임에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관리채용시험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그 수재인 체하는 것이 화근이 되어 한때 관직을 사임했다. 그 후 다시 중앙관서에 기용되어 안녹산의 난 때는 급사중(給事中)이란 직에 있었으나, 난군의 포로가 되어 낙양으로 끌려가서 그들이 세운 정부에 본의 아니게 관리가 되었다. 안녹산이 망하고 장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만년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인생에서 몇 번의 좌절을 경험한 왕유는 차츰 인간이 싫어지고, 산수·자연을 노래하는 가운데 자기를 몰입시켰다. 그의 시는 친교가 있던 맹호연을 닮은 데가 많으나 맹호연의 시보다 날카롭다. 또한 불교신자로서 관념적인 ‘공(空)’의 세계에의 동경을 노래한 것이 있다. 한때 관직을 물러났을 때 망천(輞川=지금의 허난성)에 별장을 짓고, 그 별장의 경물을 소재로 하여 노래한 〈죽리관(竹里館)〉이나 〈녹시(鹿柴)〉(모두 5언절구)는 특히 유명하다. 왕유는 또한 화가로서도 뛰어나서, 남송화(南宋畵)의 시조(始祖)로서 추앙된다. “왕유의 시를 보면, 시 중에 그림이 있다”고 송(宋)의 소식(蘇軾)은 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