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杜甫, 712~770]
월야 [月夜]
今夜鄜 州月(금야부주월) 오늘 밤 부주의 달을
閨中只獨看(규중지독간) 규방에서 홀로 보겠구나.
遙憐小兒女(요련소아녀) 멀리서 어린애들을 가련히 여기나니
未解憶長安(미해억장안) 장안 그리는 마음 이해하지 못하겠지.
香霧雲阮濕(향무운환습) 향기로운 안개에 아름다운 머리 젖고
淸輝玉臂寒(청휘옥비한) 맑은 달빛에 고운 팔이 차가우리.
何時倚虛幌(하시의허황) 어느 때나 얇은 휘장에 기대어
雙照淚痕乾(쌍조루흔간) 둘이서 달빛 받아 눈물자국 말리리.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서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시언해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한시를 언해한 책. 원제는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이다. 25권 17책. 활자본. 을해자(乙亥字).
〔간행경위〕 초간본은 세종·성종대에 걸쳐 왕명으로 유윤겸(柳允謙) 등의 문신들과 승려 의침(義砧)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481년(성종 12)에 간행하였다. 권두에 있는 조위(曺偉)의 서문에 의하면 간행목적이 세교(世敎)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간본은 목판본으로서 초간본 발간 이후 150여년 뒤인 1632년(인조 10)에 간행되었다. 장유(張維)의 서문에 의하면, 초간본을 보기 힘들던 차에 경상감사 오숙(吳栗)이 한 질을 얻어 베끼고 교정하여 영남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시켰다고 한다. 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라 교정(校正)한 것이므로, 15세기 국어를 보여주는 초간본과는 달리 17세기 국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체재 및 특징〕 체재는 두보의 시 전편(全篇)인 1,64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을 기행·술회·회고·우설(雨雪)·산악·강하(江河)·문장·서화·음악·송별·경하(慶賀) 등 52부로 분류하였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초간본과 중간본의 비교연구는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의 언어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초간본에는 방점(傍點) 및 반치음 戇, 窮 등이 사용되었으며, 자음동화 현상이 표기에 뚜렷이 반영되지 않았고 또한 구개음화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중간본은 방점과 戇의 소실을 비롯하여 窮이 사용되지 않을 뿐더러 말음 ㄷ의 ㅅ으로의 변화현상, 자음동화 현상의 표기법상 노출, 구개음화현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초·중간본의 언어 차이에 의한 국어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최초의 국역 한시집(漢詩集)이라는 점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순수 고유어를 풍부하게 구사하고 있는 점, 그리고 문체에 있어 운문의 성격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는 점 등 국어국문학연구에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전 본〕≪두시언해≫의 중간본은 규장각도서와 서강대학교 도서관 등 각지에 그 완질(完帙)이 산재되어 있으나, 초간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완질 25권 중 권1·2·4·5·12의 5개권이 발견되지 않고 그 나머지만 현존하고 있다.
초간본의 권 3·7·8·9·10·16·17·19·20·21·22·23은 이겸로(李謙魯)가, 권10·11·25는 이병주(李丙疇)가, 권7은 이희승(李熙昇)·김형규(金亨奎), 권10은 이능우(李能雨), 권13은 전형필(全灐弼), 권14는 조참연(趙參衍), 권15·16은 정철(鄭喆), 권18은 최현배(崔鉉培), 권25는 이관구(李寬求) 등이 소장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에 권6·7·11·15·16·24, 보성고등학교의 석남장서(石南藏書)에 권3, 연세대학교에 권6, 동국대학교에 권20·21이 소장되어 있다. 초간본의 현존본 중 권3·9·18·19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1954∼1959년 통문관(通文館), 1976·197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4년 홍문각(弘文閣) 등에서 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