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3. 1절이다. 절기상 우수(雨水)도 지난 2월 중순을 넘어서니 밀려오는 봄기운에 겨울 추위는 그 기세가 어느 정도 꺾인 듯하다. 그러나 미세먼지 때문에 극심해진 환경오염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에서도 외출을 하거나 야외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미세먼지 마스크를 쓰도록 권하고 있다.오늘은 평소 산행을 같이하던 친구와 함께 3. 1절 100주년을 앞두고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에 묻혀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찾아보기로 했다.
전에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아차산, 용마산을 경유하여 지금은 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진 망우산의 옛 공동묘지 쪽으로 내려온 일이 있었다. 그때 '사색의 길'이라 명명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진 독립운동가들의 연보비와 나무 기둥에 표시된 묘역 표지를 보면서, 아! 이분들이 여기 모셔져 있었구나! 하면서도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그냥 지나며, 속마음은 그분들에게 많이 죄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올해가 3. 1절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보니 그날의 죄스러웠던 마음이 뒤늦은 회개 지심(悔改之心)이 발동하여 친구에게 전화를 했었던 것이다.
아침 10시 30분 전철 7호선 사가정역에서 만난 우리는 가까운 계곡길을 택해 올라간다. 날씨는 포근하지만 계곡의 얼음은 아직도 녹지 않았고, 응달진 곳에는 여기저기 잔설도 남아있다. 그렇지만 졸졸졸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머지않아 검게 메말랐던 나뭇가지들은 부지런히 수액을 빨아올려 가지마다에 푸른빛을 띄우게 할 것이고, 둥지에 웅크리고 있던 멧새들도 날개를 펴고 목청을 다듬어 짝을 찾는 노래를 부르게 되면 산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능선에 올라 땀을 식히며 걷다 보니 망우리 묘역 입구에 독립운동가들과 문인들의 묘역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쉼터가 나온다.
독립운동가들의 묘지를 찾기 위해 휴대폰 카메라로 묘역이 표시된 안내판 사진을 찍었다. 처음 구리시에서 세운 안내판 "망우 묘역의 독립운동가"에는 이곳에 모셔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17분들이었으나, 3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서동일, 오재영, 이중섭, 박인환, 지석영, 오긍선, 유상규, 방정환, 문일평,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장덕규, 서광조 등 14분이 이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안내판에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무는 길-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사잇길'을 보니 더 자세히 40여분 독립운동가와 문학 예술인들의 묘지의 위치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원래 이곳은 1933 년에 일제가 공동묘지를 조성한 이후 1973년 매장이 금지될 때까지 28,500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현재는 7,500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에 매장이 금지되기 전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는 '망우리에 간다'는 말은 곧 죽는다는 속어로 통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죽더라도 이곳에 묻힐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암울했던 역사 속에서도 빛을 남긴 애국지사들의 생애를 생각하고, 그 시절에 우리문화의 꽃을 피웠던 문화예술인들을 생각하며 산책할 수 있는 서울 시민의 휴식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 3. 1절은 1910년 8월 9일 대한제국이 국권을 강탈당하고, 2천만 국민이 일제의 억압과 핍박 속에서 10년을 지나다가 마침내 1919년 기미년 3월 1일을 기해 우리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전국 각지에서 2개월간 끊임없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날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날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침으로 한일 합방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전 세계에 알린 날이기도 하다. 이런 뜻깊은 날에 그날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그 후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혹은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여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신 그분들의 삶을 되짚어 보며 숭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광복된 나라에서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100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했으며, 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역사교육을 통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 지혈사]에 의하면 기미년 3월 1일을 기해 3월과 4월, 두 달 동안 계속된 시위에 전국의 232개 부 군 중에서 229개 부 군에서 1,542건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연 참가 인원이 2,023,098 명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군경에 피살된 숫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961명, 피검자가 46,948명에 이르렀다고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하고 있다. 5월에 들어 일본의 강력한 군. 경의 삼엄한 경계에 국내에서의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해외 동포들이 용정과 훈춘에서, 연해주 지역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미국의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침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만주와 중국 시베리아와 미국 등 이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그 해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에 '사색의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았던 연보비를 찾아 맨 먼저 만나게 된 묘역이 문일평, 조봉암, 한용운, 오세창, 방정환, 박희도 등 독립운동가와 일본인 사이토 오토사쿠의 묘역이다. 큰 돌에 새겨진 이분들의 연보비와 묘역 비문을 카메라에 담고, 묘역에 앉아 그분들의 생애를 이야기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넘었다. 간단히 마련해간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오전에 찾지 못한 부근에 있어야 할 서병호 선생의 묘를 찾기 위해 카메라에 찍힌 안내 표지를 다시 확인하고 언덕을 몇 차례 오르내리다 보니 있어야 할 곳에 묘가 없다. 이상히 생각하고 다시 길가에 내려와 연보비를 자세히 살펴보니 뒷면에 2008년 11월 18일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처음에 연보비의 뒷면까지 자세히 보았으면 언덕길을 몇 차례 오르내리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을!
다시 오긍선, 유상규, 도산공원으로 이장한 안창호 선생의 묘지 터, 지석영, 그리고 소설가 김이석과 또 한 사람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마의 묘지를 찾다 보니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내려오면서 장덕수 선생의 묘를 찾아보고 다른 분들의 묘소는 다음 기회에 찾기로 하고 오늘의 독립운동가들 묘역 참배를 마치면서 아쉽고 안타까웠던 것은 3. 1 운동 당시에 민족대표에 이름이 올릴 만큼 훌륭한 분들이나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분들이 일제 말기에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반민족 행위자의 명단에 이름이 올려졌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묘지
1. 만해 한용운(1879. 8. 29 ~ 1944. 6. 29)
일제강점기 불교계에 혁신적인 사상을 전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이며 유년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한 뒤 수년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계몽적 성격의 글을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1925년에는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 <님의 침묵>을 펴내어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2. 위창 오세창(1864, 8. 6. ~ 1953. 4. 16.)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 최초 신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고, 농상공의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6년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으로 망명해 손병희를 만나게 되면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1919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운동의 3대 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이후 서화에 전념,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6·25전쟁 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죽었다.
3. 소파 방정환(1899. 11. 9. ~ 1931. 7. 23.)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의 복지 향상을 위해 활동한 작가로 호는 소파. 어려서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1917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과 결혼하면서 손병희의 영향을 받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으며, 이듬해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어린이'라는 명칭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동화창작과 번역, 구연, 강연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과로와 고혈압으로 인해 3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4. 호암문일평(1888 ~1939)
193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로 정치·외교·문화·사적·자연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민족혼을 고취시켰으며, 역사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에 기여했다.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오야마 학원, 세이소쿠 학교, 메이지 학원 등에서 공부했다. 1908년 평양 대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1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역사학·문학을 공부했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공화보라는 신문사에 입사했고, 병으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박은식·신규식·신채호와 박달학원을 세워 교육사업에 힘썼다. 귀국 후 <조선일보>, <중외일보>에서 활동했고, 1933년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이 되면서 신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5. 죽산 조봉암(1898. 9.25. ~1959. 7. 31.)
조봉암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복역했고, 1921년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비밀결사 조직인 흑도회에 가입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조선청년동맹, 조선공산당 등을 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7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이 되어 석방되었다.1952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으나 높은 득표를 기록했다.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2011년 대한민국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6. 태허 유상규(1897. 11.10. ~1936. 7. 18)
1897년 평북 강계군 강계읍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태허이다. 경신중학교에 입학, 1916년 3월 제11회로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새로 설립된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제1회로 입학하였다. 1919년 3. 1운동에 경성의학전문하교 학생들을 모으고 동원하는 등 3. 1 독립운동의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을 다 끝마친 때였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학교는 퇴교를 당하였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하이로 건너간 유상규는 임시정부 교통국에 근무하였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 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 자료조사 및 수집 등 활동을 하였다. 1919년 5월에는 상해에서 임정의 내무총장을 지낸 요인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으며 그 시기에 흥사단에 입단하여 흥사단 원동지부에 속하였다.
7. 박희도(1889. 8. 11. ~1951. 9. 25.)
박희도(1889. 8. 11. ~ 1952. 9. 25.)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기독교 목회자, 사상가였다. 일제 강점기의 개신교 계역 인물로 언론인과 목회자로 활동했다. 1919년 3. 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이갑성과 함께 33인 중 최연소자였다. 3. 1운동으로 투옥됐다가 풀려난 이후 자치론 경향으로 흘러가 민족개량주의 노선으로 기울다 1934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 월간 잡지 '동광(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 사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1952년 병사했다. 그의 처숙모 주룰루는 초기 기독교 전도사의 한 사람이었고, 처사촌 김명신도 독립운동가였다.
8. 송암 서병호(1885. 7. 7. ~ 1972. 6. 7.)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은 초기 장로교의 신자이기도 하다. 호는 松巖, 또는 松嵒이다. 황해도 장연군 출신. 독립운동가 김규식과는 동서간이며 김필례, 김점동과 인척간이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후 임정 산하 대한적십자회를 창설하였으며 1927년에는 김규식 등과 함께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남화학원을 세웠으나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광복 후, 1947년에 귀국하여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로서 YMCA 중앙기독청년회 이사, YMCA 전시비상대책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장애인 단체를 이끌었으며, 경신학교 재단이사장, 경신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정년 퇴직 하였다. 묘지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9. 송촌 지석영(1855. 5. 15. ~ 1935. 2. 1.)
조선 후기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을 전파한 조선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 자는 공윤, 호는 송촌 또는 태원이며 한의사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자라서는 개화사상가 강위에게서 서양의술과 신지식을 배웠고 특히 천연두의 예방법인 우두종두법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전파했다. 후에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한글과 한국어에도 관심을 가져 초기 국문연구의 초석을 닦았고 우리말 문법 체계를 수립하는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저술로 <우두신설>, <자전석요> 등을 남겼다.
10. 설산 장덕수(1894. 12. 4. ~ 1947. 12. 2.)
장덕수는 한국의 친일파,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후 체포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 유배당하였다. 그 뒤 임정 외무부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 도와주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헙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사회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 1운동 후 잡혀가서 경찰서에서 주모자를 대라고 가죽으로 귀바퀴를 무수히 얻어맞고서도 발설하지 않았고, 손가락 사이에 꼬챙이를 넣어 주리를 틀어도 불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재판하던 일본인 법관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유창한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그런 의사를 청원서에 담아서 신한청년당 대표 한 사람을 파리로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상해는 일본법률 권외에 있는 국제도시요 외국 땅이다. 이곳에서 조선 사람들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함께 토론하고, 어떤 문서를 만들어서 또 다른 제국으로 보냈다 한들 일본의 법률조문 어디에 저촉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동경과 서울에 들어온 것은 이곳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신문사 통신원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이것 역시 일본 법률 어느 조문에 위배된단 말인가?"
11. 해관 오긍선(1879 ~ 1963)
오긍선은 의사로서 피부의학 분야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의료봉사 사업을 벌이고 보육원과 양로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약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했다. 1902년 미국으로 유학가 루이빌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자격증을 받았고, 6개월간 피부학을 전공했다. 이해 10월 파견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해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했다. 1916년 일본에서 피부비뇨기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해 과장 겸 주임교수가 되었다. 1942년 일제의 압력으로 세브란스 의전 교장직을 사임한 뒤에는 보육사업에 전념했다. 해방 후 많은 공직과 명예직을 역임하며 사회사업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2.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13. 아사카와 다쿠미(1891 ~ 1931)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개발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조선 산림녹화에 힘썼다. 이 덕분에 일본의 목재 수탈로 헐벗은 우리나라 산들은 푸름을 되찾았다. 경기도 광릉의 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의 유명한 1892년생 반송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에 매료된 친형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와 함께 조선 문화예술 보존에 기여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 '조서도자명고'와 같은 조선 조자와 민예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등 조선 문화재 연구 성과를 담은 여러 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