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 2016
2016년 8월 25일 ~ 8월 27일
출발
다산연구소가 주최한 [실학기행 2016]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올 해로 11번째 계속되는 [실학기행]에 수년전부터 참가하고자 신청했었지만, 번번이 신청이 늦어져 참가하지 못하다가 금년에는 발표하는 날 바로 신청하여 참가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을 비롯한 김태희 소장, 권행완 연구위원, 김대희 교육팀장, 김금초 간사, 전민해 오리서원 총무간사, 그리고 수원화성연구소 이달호 소장과,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을 포함한 주최 측 8명과 전 현직 대학 교수 11명, 일반 직장 퇴직자들 4명, 남편들과 함께 참가한 주부 4명, 언론인 2명, 박물관 학예사,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자, 번역가, 작가, 출판기획사, 예술인, 영화감독, 기업가, 전문 경영인 등, 14명을 포함한 총43명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함께 떠나게 되었다.
8월 25일 아침 7시 30분, 동서울 종합터미널 앞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실학기행 2016]의 가슴 설레는 길을 출발한다. 계속되는 8월의 늦더위가 오늘도 여전하리라는 예보를 듣고 집을 나섰지만, 아침부터 낮 더위를 예감할 수 있게 한다.
남양주 다산 유적지
8시 30분 실학박물관과 다산 생가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옛 마재(馬峴) 마을에 도착하여
2009년에 개관하였다는 실학박물관의 강당에 들어가 여행 일정표와 여행할 곳의 유적에 대한 해설이 실려있는 자료집과 박석무 이사장이 편역 하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한 권씩을 선물로 받았다. 이어서 박석무 이사장으로부터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 若冬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 若畏四隣)는 노자(老子)의 말을 빌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지었다는 설명과 함께 유배지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살았던 18년간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설명을 듣는다.
이곳은 다산의 5대조부터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며, 다산 선생께서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또 이 집 뒷산에 묻힌 이야기로부터 그 후 1925년 대홍수 때는 마을 전체가 물에 떠내려갔었고, 1975년에 다시 복원한 이야기까지 세세한 설명을 들었다. 홍수로 모든 것들이 급류에 떠내려 가고 있을 때, 다산의 저작을 보관하던 궤짝도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집 물건보다 먼저 다산의 유저 궤짝을 구하기 위하여 급류에 뛰어들어 새끼줄로 궤짝을 묶어 끌어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일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없었더라면, 그 이후에야 출판된 500권의 명저를 오늘날 우리가 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마재마을 사람들이야말로 무엇이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알고 행동했던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2층에 전시되어있는 다산의 유물들을 관람하고, 여유당 뒤 언덕에 부인 홍씨와 합장되어 있는 선생의 묘소에 참배 후 여유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수원 화성의 행궁을 향한 시간은 9시 30분이다.
수원 화성
10시 40분쯤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 소장으로부터 화성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듣고, 낙남헌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행궁을 돌아나와 근처의 식당에서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고, 가까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한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규장각 문신이었던 다산이 동 · 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 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 때 거중기, 녹로 등 새로운 기계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 데 이용하였다.
수원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 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후에 복원된 건물들이다.
파손되거나 손실된 시설물들은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축성 당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 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여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고, 시설의 기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의 구조를 보면, 자연 지세를 이용해 바깥쪽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차츰 작은 돌로 채우고 흙으로 덮어 다지는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다. 또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 석재를 혼용하여 조화를 이룬 축성 방법 등은 동양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 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 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 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안산 성호기념관 및 묘소
화성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버스에 올라 안산으로 향한다. 50분가량을 달려 오후 1시 40분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도로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안산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도시계획을 세울 때, 성호(星湖) 선생의 묘소가 도로계획에 포함되었던 것을 전국의 수많은 유림들이 도로계획의 변경을 요청하여 현재의 도로가 묘소에서 50여 미터 밖으로 지나도록 기본 설계를 변경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모두 묘소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고, 채제공이 쓴 묘갈명에 대한 설명을 박석무 이사장으로부터 듣고, 도로 건너에 있는 성호기념관을 돌아본다.
채제공이 쓴 묘갈명에 가로되
도(道)를 안고서도 혜택을 끼치지 못했으니 한 세대의 불행이로다. (抱道而莫能致澤 一世不幸)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이 넉넉했으니 백세의 다행이로다. (著書而亦足嘉惠 百世之幸)
하늘의 뜻은 아마도 거기에 있었지 않을까 한 세대야 짧지만 백세는 길도다.(天之意無乃在是歟 一世短而百世永)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 (銘先生而勉吾黨 盍與讀先生書)
학통을 전해 가는 일 자기가 해야지 남이 해줄 것인가? (傳統由己而由人乎)
선생은 1681년에 나서 1763년까지 82세를 사셨다. 본관은 여주이고 좌찬성을 지낸 이상의(李尙毅)의 증손이고, 조부는 지평을 지낸 이지안(李志安)이며,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이하진이다. 磻溪의 外祖父 李志完은 星湖 의 從祖父이므로 磻溪는 星湖의 內6寸兄이 된다. 그러나 1673년에 반계가 타계했기 때문에 1681년에 태어난 성호는 생전에 반계를 본 적이 없다.
숙종 31년(1705년) 중광과에 합격하였으나 그의 형 이 잠(李潛)이 당쟁에 희생된 후 관직을 버리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미수 허목과 아버지 이하진, 반계 유형원 등을 사숙하였고 이후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근기남인 최대의 학파인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중환 등을 배출하였다. 그의 학통이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이현일 등으로 이어졌다.
아버지 이하진은 예송 논쟁 당시 윤휴, 허목, 윤선도, 홍우원의 견해를 지지했고, 성호가 태어날 무렵 경신대출척으로 유배생활 중이었다. 아버지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으며, 생후 1년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선대가 살던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로 귀향하게 된다.
그는 22세 연상의 아버지 같고 스승 같은 형 이 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계는 비록 당쟁으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수천 권에 달하는 책만은 보존되었다.(여기에는 부친 이하진이 1678년에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에 구해온 것도 있었다) 이익이 실학에 눈뜨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 세력을 잃고 농촌에 은거하면서 백성들의 실상을 목격하는 한편으로 이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장서를 섭렵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1706년 형이자 스승이었던 이 잠이 당쟁의 여파로 희생된 후 그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그의 호도 여기에 연유된 것이며, 그의 저택은 성호장(星湖莊)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조상들에게서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가지고,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직접 농사도 지었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100권의 서적을 집필하면서 제자들에게도 직접 농사지을 것을 권고한다.
역사학자들은 실학의 양대 산맥으로 남인 계열이었던 반계, 성호, 다산을 중농학파로 분류하고, 노론
계열이었던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들을 중상주의로 분류하였다.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국가 및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한 이들 중농학파(中農學派)들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원칙으로 주장하였다.
반계는 모든 농민에게 나라에 부세(賦稅)를 납부하고도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토지 면적인 1경(一頃 : 40 두락)을 나누어주자는 균전론(均田論)을, 성호는 좀 더 급진적인 방법으로 토지겸병(대토지 소유)을 제한하고자했다. 일체의 매매행위를 금지한 일정 면적의 토지 곧 영업전(永業田)을 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영업전 이외의 토지는 자유롭게 매매하도록 하자는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하였고, 다산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즉시 시행하자는 보다 더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반계와 성호는 비록 경자유전의 원칙을 이상으로 삼았지만, 농민 이외에 양반 사대부들도 신분과 관직에 따라 토지를 소유할 수 있거나 영업전 이외의 토지를 소유·매매할 수 있도록 했지만, 다산은 농사를 짓는 사람은 토지를 갖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해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은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성호는 사농 합일 (士農合一)'은 곧 '선비는 농사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그는 자신의 이론을 직접 실천하였다. 그는 농사를 지었기에 그의 학문은 주로 농사와 관련된 연구서도 있었다. 또한 그의 견해 중에는 간척사업을 활발히 하여 농토를 늘리자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제자 안정복이 출간한다.



부안 반계유적지
오후 3시 반이 넘은 시각에 성호기념관을 나와 다시 버스에 오른다. 부안의 우반동에 있는 반계 유적지를 찾아간다. 우리는 부안으로 가는 버스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귀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실학기행 2016]에 함께 참여하게 된 다산의 7대 종부가 밤잠을 못 자면서 정성껏 마련한 선물은 쿠키와 젤리, 그리고 사탕 등 부안까지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간식이었지만,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그냥 뜯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오후 5시 30분,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반계서당 아래에 근래에 조성한 작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산 중턱에 있는 반계서당까지 올라가 박석무 이사장님의 반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강의를 듣고 유적지를 돌아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2006년과 2013년 두 차례 이곳에 왔었는데, 올 때마다 반계 유적지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2013년에 왔을 때는 이 좁다란 주차장도 없었다. 2006년에 없던 [實事求是] 네 글자를 커다란 묵석에 새겨서 입구에 세워놓았었고, 좁은 진입로가 넓혀져 바닥에 박석까지 깔아 놓았는가 하면, 서당 앞에 정자까지 새로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진입로의 절반 정도를 목판 길로 만들어 놓았는데, 별로 편하지도 않았고, 좋아 보이지도 않다. 다만 서당 안과 밖에 있는 우물은 아직도 변함없이 그대로 맑은 물은 솟고 있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이끼낀 수면에 개구리가 뛰어다닌다. 이 유적지에서 반계 당시의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이 우물 뿐인데, 탐방객들이 마실 수 있게 관리가 되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부안군에서는 반계가 살았던 옛 집터를 찾아 매입하여 유허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옛 집터에는 반계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농촌의 석양 들 가운데에 서니 벌써 가을을 느낄 수 있다. 성호의 묘소를 참배하던 낮에 그렇게 덥던 날씨에 비하면 산들바람이 성큼 가을을 데려온 느낌이다.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인접해 있는 우동리는 옛날부터 사람이 살만한 십승지로 꼽혔다고 한다.
가까운 주변의 산에 푸른 솔이 아름답다고 누군가 말하니, 부안에는 고려시대부터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할 재목으로 소나무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그 유명한 시인 정지상이 한 때 그 소나무를 지킬 관리로 파견된 일도 있었으며, 그때 그가 부안을 노래하면서 雲末天低老松多라는 시어를 남기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박석무 이사장께서 들려주신다.
우반동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반계의 8대조 유관(柳寬)의 사패지다. 반계의 조상들이 황무지였던 땅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어 상당 부분을 부안김씨에게 팔았다는 매매계약서가 부안김씨 문중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최근에 발굴하여 반계의 집안 내력을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반계의 집안은 뒤에 남인(南人)으로 돌아서지만 광해군 시기에는 북인계열이었다. 2세 때 아버지 유흠(1596~1623)은 당색으로는 북인 대북계열로 인조반정(1623년) 직후 유몽인의 옥사에 연좌되어 광해군 복위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하였다.(일설에는 서인에 의해 옥중 장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버지 유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외숙부 이원진(성호의 5촌 당숙)과 고모부 김세렴(김효원의 손자)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그들의 문하에서 평생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반계의 연보를 지은 안정복은 그의 연보에서 "당쟁이 횡행할 때에 태어나서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저술하기를 즐기셨다"고 하여, 반계가 실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데는 당쟁이 큰 원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반계는 1653년(효종 4) 큰 뜻을 품고 전라도 부안에 옮겨 경독(耕讀)하는 한편 저작에 힘쓰고 이상적 세상을 건설하려는 이념에 몰두하였다. 그는 부안으로 갈 때 각종 서적과 전적(典籍) 1만여권을 가지고 갔다.
부안에 도착하여 (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이후 부안군 우반동 변산의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성리학과 실학 사상 연구와 농업,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 등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35세에는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책을 저술했고, 36세에는 본격적으로 호남지방 일대를 두루 여행하면서 각 곳의 풍토와 물산을 모두 살폈다. 37~38세 무렵에는 정동직(鄭東稷)·배상유(裵尙瑜) 등 친구들과 성리학에 대한 심도 깊은 학문토론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38세에 또 다시 호남지방 여행길에 올라 한 달이 넘는 긴 여행을 했다. 39세에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서울에 왔고, 40세에는 또 다시 영남지방 답사에 나섰다.
그는 병자호란에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비를 세운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늘 괴로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41세 되던 해 한성부에 올라와 외가인 정동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끝내 완성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뜻은 매우 컸다고 한다. 이후 그는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 조정에 건의하였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고,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현종에게 존주대의의 실현을 위해 북벌을 추진해야 함을 상소했으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상촌이 될 토지를 마련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중국현지에 사람을 보내 중국의 정세를 알아보기도 하였다. 무예에도 능했던 그는 직접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1665년(현종 7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66년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68년(현종 9) 스승인 허목이 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 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 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70년(현종 12년)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완성한다. 그가 저작한 《반계수록(磻溪隧錄)》 스물여섯 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 건설의 구성이 실려 있으며, 1779년(영조 46)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경제(經濟)의 실학(實學)에 연구가 깊어 당시 이름이 뛰어났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중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1673년(현종 15년) 음력 3월 19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스승 중 한 사람이자 외조부 이지안의 동문이던 허목과 논객 백호 윤휴는 그의 이른 죽음을 애석해하였다.
경기도 용인군 백암면 석천리(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에 있는 아버지 유흠 내외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사후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674년 그의 문인 제자들이 그의 서적 반계수록을 조정에 바쳤으나 주목 받지 못했다. 1678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참봉(參奉) 배상유가 그의 반계수록의 내용을 언급하며 이를 숙종에게 바쳤지만 역시 외면당하였다.
생전 그의 얼굴을 본 적 없는 6촌 동생 이익과 그의 수제자인 안정복이 후일 그의 저서를 탐독하였고,
서인 내에서도 이이명, 홍계희 등은 그의 학문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임금에게 경세제민의 비법이라며 소개하기도 했다. 후에 1753년 유일로써 증직으로 증(贈) 통훈대부 사헌부집의(通訓大夫司憲府執義)
겸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에 추증(追贈)되었다. 1793년(정조 17년) 12월 16일 정조의 특명으로 다시 증(贈) 이조참판(吏曺參判)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에 가증(加贈)되었다.





巽庵 丁若銓과 勉庵 崔益鉉 流配地
이틀째 되는 26일 아침 6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조반을 마치고 목포 여객터미널로 이동하여 흑산도로 가는 쾌속선에 승선한다. 8시 10분에 출항한 쾌속선은 흑산도까지 1시간 50분이면 도착한단다. 215년 전 1801년 손암이 유배 갈 당시는 보름이 걸리던 뱃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흑산도는 쌀과 소금이 생산되지 않는 곳으로 오지 중에서도 오지여서 제주와 이곳은 중죄인들만이 귀양 가는 유배지였다고 한다.
우리가 탄 이 쾌속선도 흑산도에 도착하기 전 일렁이는 파도에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일행 중에서도 배 멀미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215년 전 작은 배를 타고 유배 가던 당시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유배생활 13년쯤 되었을 때, 다산의 유배가 풀릴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이 당신을 만나러 오면서 겪어야 할 고생과 위험을 생각하여 정들었던 흑산도의 사리(沙里) 사람들의 만류를 달래고 강진에서 좀 더 가까운 소 흑산도라고 하는 우이도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형재애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산의 해배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손암은 2년 후에 그렇게도 그리던 아우를 보지 못하고 우이도에서 타계하고 만다. 함께 귀양길을 떠나 나주(羅州)에서 강진과 흑산도로 가는 갈림길까지는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왔으나, 이제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나주 땅 밤남정(栗亭) 삼거리에서 다산은 율정별(栗亭別)이라는 이별시를 썼다. 살아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후에 다산은 귀양이 풀려 홀로 돌아가던 귀향길에 그 주막에 들려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여기 형 손암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한 다산의 이별시 밤남정 이별을 옮긴다.
밤남정 이별(栗亭別)
초가 주점 새벽 등불 깜박깜박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네
두 눈만 말똥말똥 둘 다 말이 없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되고 마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사나요
고래 이빨 산과도 같아
배를 삼켰다 다시 뿜어낸다네
지내 크기가 쥐엄나무 같고
독사는 다래덩굴처럼 엉켜 있다네
내가 장기현에 있을 때에는
낮이나 밤이나 강진현 바라보며
날개 활짝 펴고 푸른 바다 가로질러
바다 가운데서 우리 형님 보렸더니
지금 나는 높이높이 교목에 올랐으나
마치 고운 진주 사라진 빈 상자만 산 것 같네
또 마치 바보스런 애가
망령스럽게 무지개를 붙잠으려는 것 같네
서쪽 언덕 바로 앞에
아침 무지개를 분명히 보지만
애가 쫓아가면 무지개는 더욱 멀어져
또 저 서쪽 언덕 쫓아가도 다시 서쪽이라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흑산도에 닿았다. 쾌속선에서 내려 버스에 올라 흑산도 일주의 관광에 나선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산 정상에 오르니 산 정상 아래에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걸어서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흑산도 일주 도로는 착공 후 27년만에 완공된 도로라고 한다. 찔끔찔끔 예산을 지원한 탓이라고 한다. 서남쪽으로 내려가는 굽이마다 작은 어촌들이 있다. 양식어업을 하는 마을도 있고, 양식어업이 적합하지 않은 어촌에서는 험한 파도와 싸우며 고깃배를 이용한 어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흑산도 유배인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 이곳 흑산도에 유배되어 온 사람은 1693년부터 1898년 사이에 총 37명이나 된다. 그러나 [실학기행 2016]의 순례 계획에는 손암 정약전과 면암 최익현의 유적지만 포함되어 있다.


사리(沙里)는 흑산도에서도 서남쪽 끝 부분에 있는 외진 곳이다. 손암(巽庵)은 아우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자신을 만나러 올 때, 고생을 덜어주기 위하여 우이도로 옮겨가기까지 이곳에서 13년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곳에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 불리는 복성재(復性齋)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바로 그 유명한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산실이 복성재라고 한다. [자산어보]는 [현산어보]로 읽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손암(巽庵)은 우이도로 옮긴 후 2년 후 세상을 뜬다.
다산은 [黑山]의 어감이 무섭고 좋지 않다 하여 (玆山)이라 바꾸어 썼는데, 그 발음을 [자산]이라 불렀는지 아니면 [현산]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촌서당]의 현판은 다산이 썼는데, '茶山
丁鏞書'로 되어 있는 것은 형제간에 행렬 자인 ‘若' 자는 쓰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리(沙里)의 복성재(復性齋)를 나와 버스를 타고 일주도로를 따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천촌리에 닿았다. 선생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유적비를 세워놓았고, 선생이 지장암이라는 바위에 직접 썼다는 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선생은 1876년(고종 13)에 이곳으로 유배를 오셨다.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고 있을 때 선생은 도끼를 둘러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왜적을 멀리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자신의 목을 베라며 조약 체결의 불가를 역설하였다. 이른바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이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은 3년 동안의 흑산도 유배생활을 하신 것이며 처음에는 '진리'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현재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그 위치만 전한다. ‘일신당’ 터 앞에는 샘이 하나 남아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서당 샘’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면암 유적지를 순방한 후 흑산 비치호텔에서 방 배정을 받는다. 방은 목포의 신안비치호텔에서와 마찬가지로 2인 1실인데 김해영 선생과 같은 방을 배정받아 짐을 내려놓고 내려와 중식을 마친 후, 자산어보에 관한 특강이 있었다. 임원경제연구소의 정명현 소장의 특강이다. 그는 특강에서 “자산어보는 자산(흑산도의 별칭) 근해에 서식하는 어류를 비롯하여 해양생물을 모두 포괄한 역사상 최초의 수산학, 해양생물학 백과사전이다”라고 말했다. 기존의 어보는 모두 어류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데, [자산어보]는 바다에 서식하는 모든 생물체를 망라했는데, 총 226종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손암의 유저와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자산 문화관을 관람하고,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흑산도 선상 일주를 위하여 유람선에 승선한다.
아침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오는 뱃길은 꾀나 먼 바다를 건너느라 약간의 파도가 일어서 배 멀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흑산도를 가까이 일주하는 유람선이야 잔잔한 바다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듯 느리게 항해한다. 푸른 바다와 기암괴석을 보는 눈이 도심의 빌딩 숲만 보던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주고, 유람선 해설사의 구성진 목소리가 귀를 편하게 해주고, 작은 섬들, 잔잔한 바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또 한 서울의 찜통 더위 속에서 견디어낸 열대야의 고통이 언제였느냐 싶게 한다.
흑산도에 왔으니 석식은 ‘흑산 홍어’를 먹지 않을 수 없다. 홍어와 돼지고기 수육, 그리고 묵은 김치를 함께 얹어 먹는 ‘홍어 삼합’에 막걸리 한잔이 제격인데, 우리가 먹은 홍어의 맛이 기대했던 것에는 못 미쳤다.
강진 사의재(四宜齋)와 다산초당(茶山艸堂)
밤부터 아침까지 이슬비가 내리더니 대지를 식혀놓은 듯 기온이 내려서 더위는 잊게 한다. 호텔에서 조반으로 제공한 전복죽이 일품이었다. 목포로 돌아가는 쾌속선이 9시에 출항한다. 오전 11시에 목포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강진을 향해 달려 12시쯤 도착하였다.
다산의 최초 유배지인 사의재(四宜齋)를 탐방하기 전에 시내의 ‘은행나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모두들 음식 맛에 감탄하고, 깔끔하면서도 넉넉한 식단을 준비한 주최 측에 고마움을 표한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걸어서 다산이 강진에 최초로 유배 와서 살던 곳을 찾아간다. 다산의 처음 8개월간의 유배지는 포항의 장기였다가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을 때, 처음엔 이곳 사람들의 박해가 심했지만, 동문 밖 주막집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그 주막집에 방 한 칸을 얻어 다산초당으로 옮기기까지 4년 동안 기거하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곳이 지금의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기(四宜齋記)
정약용
사의재라는 것은 내가 강진에 귀양가 실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고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四宜齋)'라고 한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강진읍에 있는 사의재(四宜齋)를 떠나, 도암면 만덕리의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艸堂)을 찾는다. 귤동마을 초입에서 차를 내려 숲 속의 만덕산 기슭 가파른 길을 올라간다. 여기에서 우연히 이곳에서 칩거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고 있다는 한 정치인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다산의 정신을 오늘의 현실정치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은 원래 초가 였는데 1957년에 복원하면서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현판이 걸려 있고, 다산의 초상이 방 벽의 정면에 걸려있다. ‘다산초당’ 건물 외에도 다산이 기거했던 ‘동암’, 제자들의 숙소였던 ‘서암’이 있고, 다산 당시에는 없었던 '천일각' 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天涯一閣’의 줄인 이름이다. 이 정자는 다산이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귀양가 있는 형님이 그리울 때, 이곳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고 하여, 이 자리에 1975년에 정자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건물 외에도 선생이 글씨를 바위에 직접 썼다는 ‘丁石바위’, 선생이 직접 파서 만든 초당 뒤에 있는 샘, ‘약천(藥泉)’, 선생이 탐진강에서 직접 돌을 주워와 만들었다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옆 동암으로 가는 중간에 있다. 연못과 연못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을 만들어 멋을 부렸는데, 여기에는 대나무로 홈통을 이어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잉어도 키우고, 산비탈을 일구어 밭을 만들어 직접 농사를 지을 때 그 물을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마당에 있는 널따란 반석에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시던 '다조(茶竈)' 등도 선생의 손길이 남아 있는 것들이다.
다산과 혜장선사와의 우정이 만들어낸 야생 차와 동백나무 숲이 아름다운 20분 거리의 오솔길. 우리 일행은 그 길을 걸으면서 다산과 혜장선사의 우정을 생각한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과, 그런 친구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생각한다. 비가 오는 늦은 밤에도 혜장선사는 불시에 다산을 찾아와서 시(詩)와 학문을 논하며 차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제자를 가르치는 보람, 친구와 학문을 논할 수 있는 기쁨,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우국의 마음이 외롭고 불안한 유배생활을 그나마 지탱하면서 그 많은 저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하면서....
혜장은 해남 대둔사 출신의 학승으로,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으며, 다산의 심오한 학문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했다고 한다.
백련사에 도착하여 우리는 주지스님으로부터 좋은 차를 대접받고, 백련사의 유래와 다산과 혜장선사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신라시대(839년)에 창건된 백련사는 창건 당시에는 만덕사였다. 고려 후기(1211년)에 중창하면서 백련사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8명의 큰 스님을 배출하였는데, 여덟 번째 혜장선사가 다산과 교우하면서 다산에게서 경학을 배우는 한편, 차를 권유하여 다산으로 하여금 다도에 일가견을 갖게 하였다고 한다.
다시 해남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택 녹우당(綠雨堂)을 찾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
海南의 綠雨堂 (孤山 尹善道 遺蹟地)
녹우당(綠雨堂)은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으로 선생의 4대조 윤효정(尹孝貞) 이 해남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고택이다. 효종이 사부였던 고산을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하여 수원에 지어주었던 집인데, 해남으로 귀향하면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이서가 쓴 것이다. 이서는 성호 이익의 이복형으로 동국진체의 원조로 불린다. 녹우당 뒷산에 비자나무숲이 있는데, 비자나무 푸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녹우당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집터 위로는 고산의 4대조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의 사당과 고산의 사당이 있고, 집 앞에는 고산을 비롯한 선조들의 문적 고서 및 고화 등을 고루 갖추어 놓은 고산 유물관이 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위대한 학문적 위업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외가인 해남 윤씨 감문의 도움이 컸다. 해남 윤씨 가전의 많은 서책을 열람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녹우당에는 고산의 14대 종손인 윤형식 씨가 살고 있다. 미리 연락받은 윤형식 씨가 자기 집안의 내력과 녹우당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500년이 넘도록 명예와 부를 유지하면서 조상들의 명예를 선양할 수 있는 집안이 얼마나 될까?
三開獄門積善之家’ 고산의 4대 조부인 윤효정은 흉년에 세금을 내지 못하여 옥에 갇힌 백성의 세금을 대신 내주고 석방시키는 일을 세 번이나 했다 하여 붙여진 명예이다. 5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조상들의 가훈을 지키며, 늘 겸손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철학을 요즘의 부자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가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산 유물관을 나왔다.
‘실학기행 2016’을 마치며
2박 3일간의 ‘실학기행 2016’을 주최한 다산 연구소(茶山 硏究所)에서는 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40 여명의 참가자들에게 각각 이번 기행에서 느낀 소감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번 참가자들 중에는 대학교수, 학자, 언론인, 문화 예술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현실 정치나 제도에서 변화해야 할 문제점들을 조심스럽게 발표하는 분들도 있었다. 특히 교수님들은 오늘의 교육제도를 실학자들의 교육관에 비추어 문제점들을 말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살아온 길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는가 하면, 한 주부는 다산의 하피첩(霞帔帖)을 떠올린 듯 자식을 다시 키우고 싶어 졌다는 말로 느낌을 함축시켰다.
부친들을 당쟁때문에 잃고 불운한 소년 시절을 보낸 반계(磻溪)나 성호(星湖)는 현실 참여를 거부하고, 하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국가 개혁을 목표로 훌륭한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학사상의 실천자로서의 삶을 살다 갔고, 다산(茶山)과 손암(巽庵), 그리고 면암(勉庵)은 현실정치에 참여하였으나, 불운하여 당쟁에 밀려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선배 실학자들에 못지않은 공적과
실학정신을 우리에게 남겼다.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권력은 양심적인 개혁세력을 배척한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가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경우를 역사가 말해준다. 그러나 나라가 영원히 소멸되지는 않은 까닭이 있음을 찾게 된다.
민족의 분열과 갈등, 공직자들의 부패를 보면서 위태로운 국가 장래를 걱정 하면서도 희망의 불씨를 본다. “의인이 한 사람만 있어도 결코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성경 구절을 생각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그 끝은 장대하게 될 수많은 ‘의인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실학기행 2016’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해산 인사와 함께 "무더운 여름에 떠났다가 시원한 가을에 돌아왔습니다"는 김태희 소장의 재미있는 멘트가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