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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당(庇雨堂)과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야기

운중풍월 2023. 1. 13. 21:59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했던 비우당(庇雨堂)은 원래 숭인동 5번지 청룡사 남쪽에 터만 남아 있었는데 1990년대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한양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정상에 최초 민선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조순(1995~1997) 시장 시절  낙산 공원을 조성하였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숭인동 5번지 청룡사 남쪽에 터만 남아있던 비우당(庇雨堂)을 옮겨 현 위치에 함께 복원한 것이다. 비우당(庇雨堂)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조선 초기 3청(세 사람의 청백리;  유관, 맹사성, 황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관(柳寬)이 살던 3간 초가집이었다. 

 

당시 유관 대감은 정승답지 않게 동대문 밖 지봉(芝峰)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았다. 초가는 비가 오면 방에 비가 새는 집이었다. 비가 올 때마다 대감이 아내에게 한 말인즉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꼬”였다고 한다. 이 집을 유관은 증손녀 사위인 이수광의 아버지 병조판서 이희검에게 물려주었으며, 역시 청백리에 선정되었던 이희검이 이수광에게 남겨주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은 뒤 폐허가 된 이 터에 이수광이 다시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역시 초가 3간으로 짓고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이란 의미로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를 달았다고 한다. 그 역시 태종대왕의 후궁이었던 효빈 김씨의 아들인 경녕군의 후손으로 왕손으로서의 긍지와 아버지와 외 5대조의 청백리정신을 이어 이 집에서 청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호가 지봉인 것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을 알 수 있다.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1563~1628)이 그 비우당(庇雨堂)에서 광해군 6년(1614)에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했던 것이다. 그는 1590년(선조 23), 1597년(선조 30) 그리고 1611년(광해군 4) 등 세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경험과 그때마다 중국에서 만난 각국의 사신들과의 교제로 수집한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저술을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유구,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과 영국, 포르투갈 등 서양 세계 각국의 역사와 지리,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언어, 복식과 동식물 등과 천문에 이르기까지를 방대하게 수록하였다.

 

이 저술은 총 3,435 항목에 전 20권, 여기 등장하는 이름만 2,265명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와도 스스럼없이 교제하였는가 하면 천주교의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우리나라에 들여오기도 했던, 실학정신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당시 백성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진정한 실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