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España) 여행기
2015년 8월 3일 - 2015년 8월 9일
- 1. 에스파냐(España)의 역사 -
내게는 에스파냐가 스페인으로 더 많이 통해왔다. 스페인은 영어식 표현이고, 이 나라 헌법에 명시된 공식 국명은 에스파냐(España)다.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정식 국명은 에스파냐 왕국이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서는 아직도 영어식 표현인 스페인으로 많이 불려지고 있으나,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공공문서나 교과서에서는 에스파냐(España)로 표기하고 있지만,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에 내게는 그렇게 스페인이 더 익숙했던 것이다.
이 나라에 대하여 알고 있던 것이라고는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를 지원하여 신대륙을 발견하게 했다거나, 콜럼버스의 새로운 항로 개척으로 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많은 식민지를 만들어 해양 강국으로 군림하며, 해가 지지 않는 대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었다는 등, 극히 상식적인 것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돈 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 화가 고야, 미로, 피카소, 달리 등과, 천재 건축가로 추앙받는 가우디 등이 태어난 나라라는 것, 헤밍웨이가 이 나라의 내전 당시 종군기자로 참전한 후, 썼다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소설과 영화로 감명 깊게 읽고 보았던 기억 등이다.
또 한,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이 나라에서 살다 죽었으며, 세계 20여 개 국가가 에스파냐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고(식민지배를 받았던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이 언어가 유엔 공용어로 사용되는 6개 국어 중의 하나라는 등, 극히 일반적인 것들, 포르투갈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 한 나라라는 것 외 별다르게 관심을 갖지는 않던 나라였다.
최근에는 1992년 제25회 올림 때 우리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경기장에 1등으로 골인하면서 온 국민을 흥분과 감동으로 기쁘게 했던 기억과, 2002년 서울에서 개최했던 월드컵 경기 때의 우리나라와 이 나라의 경기를 관전하는 등, 이 나라와의 체육활동을 비롯한 경제교류가 전보다 활발해지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 나라를 직접 여행하겠다거나 여행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3개월 전에 유럽에 살고 있는 여식(女息)이 이 나라의 여행을 위하여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해놓고, 우리 부부를 초청하여 생각지 않던 에스파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관광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관광 여행을 하게 되었지만, 이왕 떠나게 되었으니, 짧은 기간이지만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기존의 부족한 관심과 상식으로는 여행할 사람의 기본이 아닐 것 같아 출발 전에, 평소 기억하고 있던 토막상식을 더듬어 지도와 백과사전 등 여러 자료를 통해 이 나라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이번 여행에서 방문하게 될 도시의 유적들에 대하여 확인해보고, 중요한 부분은 메모하기도 하였다. 세계지도를 보면, 에스파냐는 유럽의 남부 지중해와 대서양을 가르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쪽에 지중해, 반도의 서쪽 대서양 쪽에 포르투갈과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안도라공국과 접하고 있고, 남쪽은 영국령 지부롤터 해협을 사이로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접해있다. 국토는 유럽연합 중 프랑스 다음으로 넓으며, 세계에서 51번째로, 우리 한반도 전체의 2.2배 정도인 50만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약 4,600만이다. 수도는 마드리드이며, 지방은 17개의 자치 지방과, 2개의 자치시가 있고, 17개의 자치 지방은 50개 주로 다시 나뉜다. 그 50개 주 중에서 이번 여행 일정으로는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바르셀로나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그라나다와 세비아가 포함되어 있다.
역사를 간략하게 간추려 보자면,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이래 고대에는 이베리아족, 타르테시아족, 켈트족, 켈티 베리아족, 페니키아족, 고대 그리스인, 고대 로마인, 서고트족 등이 저마다 다른 문화를 이루고 살았었다.
711년 우마이야 왕조(筆者 註 : 우마이야 왕조=마호메트 사망 후 4명의 칼리프가 이슬람 제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인 661년 시리아 총독이던 우마이야가 세운 왕조. 칼리프=이슬람의 주권자)에 속한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인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각자 독립적인 타이파 국가(筆者 註: 타이파 국가=이슬람을 추종하는 소 군주국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버틴 그라나다 이외에도 여러 타이파 국가들이 있었다.)를 유지하였는데, 아랍세계에서는 무슬림이 지배하는 이베리아 반도를 알 안달루스로 불렀다.
한편 반도의 북단에는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등 기독교 왕국들이 자리 잡았으며, 무슬림 타이파를 상대로 지속적 전쟁을 벌여 영토를 늘려나갔다. 1492년 마지막 이슬람 타이파 국가였던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기까지 약 750년간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 간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기독교 국가의 영토 확장 전쟁을 레콘키스타(筆者 註: 레콘키스타=재 정복 혹은 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반도 중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동북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하여 그들이 각각 왕위에 오른 후에는 연합하여 [그라나다]를 침공하여 함락시킴으로 에스파냐에서 이슬람 왕국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기독교 국가로 통일시켰다. 이때 이태리 출신의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을 찾아가 신대륙으로의 향해를 지원받게 된다. 레콘키스타가 마무리되자 로마 카톡릭으로 개종을 거부한 무스림과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종교 재판을 시작하였고, 아메리카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곳과 아시아에까지 광대한 식민지를 만들어 엄청난 부를 창출하여 150년간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세계 곳곳의 식민지로부터 창출해낸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기존의 발달된 이슬람 문화의 바탕 위에, 건축과 문화 예술을 기독교 방식으로 새롭게 발전시켜 문화 발전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잦은 전쟁으로 경제 사정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영향력은 시들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고, 미국의 독립전쟁 때는 미국을 지원하면서 영국을 견제하기도 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19세기 멕시코의 독립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패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였다. 국내에서도 왕당파와 공화파의 갈등이 심화되어 19세기 말 제1공화국이 세워져 왕정이 폐지되었으나 군부 쿠데타와 왕정복고가 연달아 일어나 심각한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인민 전선의 승리로 수립된 제2공화국은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패하였고 1939년 프랑코 정권이 수립되어 1975년까지 36년간 군부 독재가 지속되었다. 현 후안 카롤로스 1세는 1975년부터 집권하자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보통선거(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현재의 민주화를 이룩하여 고도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와는 1950년부터 수교가 있었다.
2. 바르셀로나(Barcelona)
(8월 3일)
- 람블라 거리, 까사 바트요, 구엘 공원, 성 가족 교회 -
오전 10시 30분에 제네바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1시간 10분 만에 바르셀로나의 엘 프랏 공항에 착륙하였다. 에스파냐에 첫 발을 내딛는 나를 맞이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공항 청사 로비에 세워놓은 커다란 조형물. 말 모양을 한 아주 튼튼하게 생긴 놈이다. 사람들을 멀리까지 편안하게 태워다 줄 수 있는 이놈의 건강한 모습이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게 하기 위한 것일까? 날씨는 서울을 떠날 때 생각했던 것만큼 덥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않았던 작은 사건이 나를 훨씬 더 덥게 하였다.
공항과 연계된 기차를 타고 시내로 나오다, 바르셀로나 대학 근처에 예약된 호텔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로 갈아탔는데, 앉을자리가 없어서 통로에 서 있었다. 다른 칸에서 두 명의 여자들이 내가 있는 칸으로 들어오기에 그냥 지나가려니 생각했는데, 차가 별로 흔들리지도 않는 상태에서 한 여자가 갑자기 내 가슴에 안기듯 넘어지는 것이었다. 무안하기도 하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바로 그 여자들을 뒤따라 들어온 건장한 남자가 그 여자의 손목을 붙잡으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나는 서반아어를 전혀 모른다.)로 그 여자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차가 멈추자마자 여자들은 황급히 도망치듯 내리고, 다른 승객이 내게 뭐라고 하여, 그때야 눈치로 알아차리고 어깨에 맨 가방을 살펴보니 벌써 가방의 지퍼가 열려 있었지만 없어진 것은 없어 다행이었다. 사복경찰 인듯한 그 남자 덕분에 피해가 없었지만, 날씨보다 더 나를 덥게 한 작은 사건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은 후 첫 관광코스로 구시가지에 있는 람블라 거리로 나갔다. 북쪽의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쪽의 포트벨 항구까지 이어지는 1.2 킬로미터의 거리는 바르셀로나를 찾는 관광객들이면 누구나 걸어보는 거리라고 한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바로 보케리아 시장 입구가 보여서 들러보았다. 전통시장으로 식료품을 주로 파는 곳이다. 서울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도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을 들르듯, 이 시장도 많은 관광객들이 붐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풍성한 과일가게와 하몬을 파는 가게이다. 하몬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오랫동안 숙성시킨 것인데 이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한다. 서쪽과 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남쪽으로 지중해와 면해있는 바르셀로나는 온화한 기후와 좋은 햇볕 덕택으로 모든 과일의 당도가 아주 높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식당에서 하몬을 먹어보기로 하고, 우선 먹음직스러운 복숭아와 자두 몇 개를 샀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서 먹어보니 듣던 대로 당도가 높았다. 특히 호떡처럼 납작하게 눌린 듯한 모양의 복숭아 맛이 좋았다. 가격도 우리나라 과일보다 저렴하였다. 보케리아 시장을 나와 거리를 걸으면서 이 넓은 거리가 보행자 중심으로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도보다 훨씬 넓은 거리 양쪽으로 있는 차도는 각 2차선 일방로로 되어 있고, 그 곁에 인도가 여늬 도로와 같이 조성되어 있지만, 한가운데 조성된 거리는 양쪽 2차선 차도를 합친 것보다 더 넓다. 차도와 거리 사이에 아름드리 가로수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 걷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한다. 중간중간에 간이 카페가 있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행위 예술가들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에스파냐의 동북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바르셀로나는 비옥한 해안 평야에 펼쳐 저 있으며, 천연의 양항과 더불어 이나라 제일의 산업도시로 가장 부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1992년 제25회 하계 올림픽 때 우리의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몬주익 경기장에 제일 먼저 골인하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이 도시는 옛날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한 도시로 BC 3세기에 이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카 가문의 도시라는 뜻으로 Barino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8세기에는 무어인들이 점령하였다가 801년 카를 대제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12세기에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되어 그 수도로서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며, 15세기에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기도 했으나, 고유의 카탈루냐 언어를 가지고 있는 이곳 사람들은 자기의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 자치의 전통,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한 번영으로 그들만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지금까지 종종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왔을 때, 이사벨 여왕이 그를 접견한 곳이 고딕지구의 궁궐 뒤에 있는 왕의 광장이다. 람블라 거리의 남쪽 끝 포트벨 항구에 맞닿는 곳에 세워진 높이 60 미터의 타워 위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은 1888년 무역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였다고 한다.
콜럼버스의 동상과 포트벨 항구를 지나 고딕지구로 향한다.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찾아 아라곤의 왕궁을 찾았지만, 딸내미가 반바지를 입어서 입장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전에 파리나 로마에서는 반바지나 짧은 소매의 윗옷을 입은 입장객들에게는 긴 바지나 짧은 윗옷 위에 걸치고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된 옷을 주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준비가 없는 모양으로 그냥 표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 왕궁과 왕의 광장이 있는 구시가지의 고딕지구를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오후 8시가 가까워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식당을 찾았다. 왕의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담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15분쯤 후에 오라는 것이다. 다시 왕의 광장 쪽으로 나와 돌 의자에 앉아 쉬다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와인 한 병과 하몬, 파에야, 그리고 구운 빵과 토마토를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에스파냐의 전통 음식이지만, 입맛에 거슬리지 않았다. 하몬은 우리가 늘 먹는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숙성시켜서 좀 짭짤한 차이뿐이지만, 빵에 얹어 먹으니 괜찮았고, 파에야 역시 우리가 늘 먹던 새우, 홍합 등 각종 해산물을 원료로 했으니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음식이 우리 입맛에 좀 짜다는 느낌이었다.
(8월4일)
오늘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공원 그리고 성 가족 교회(사그라다 파밀리아) 등을 찾기 위해 조반을 일찍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1852년 에스파냐의 남서부 레우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온 주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을 가기 위하여 16세에 바르셀로나로 옮겨와 1926년 74세에 전차에 치어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애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독신으로 살았다.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대학에 다닐 때도 잘 걷지를 못해서 주로 앉아서 관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한 후, 시립 건축 전문학교에 다녔다. 시립 건축 전문학교 제학중 그의 혁신적이고 독특한 과제물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교장은 "우리가 건축사 자격증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고 했을 정도로 당시 일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에우세비오 구엘이라는 평생의 후원자가 있어서 그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만들었다.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사업가였던 구엘 남작은 1878년 가우디를 처음 만난 뒤 1918년 그가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적극적인 가우디의 후원자이자 친구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적 건축의 출발점이라고 일컫는 카사 밀라는 1906년에 시작하여 1910년에 완공한 공동주택으로 지금은 황금 광장의 명물이지만, 당시에는 그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돌을 깎아 만든 건물이지만, 마치 회반죽이나 시멘트로 만든 것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바탕으로 강한 역동성과 리듬을 표현한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카사 바트요는 타일 공장을 운영하는 바트요의 요구로 설계한 주택인데, 바트요의 공장에서 만든 타일을 많이 사용하여 외부의 장식을 했다. 이 역시 곡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건물이다. 실내의 계단을 수차례 직접 오르고 내리면서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편한가를 실험하며 설계를 마무리하였고, 여기저기 배치한 가구까지도 그의 섬세한 관심을 집중시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전 10시 이전인데도 카사 바트요 내부를 관람하기 위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어서 몇 분을 기다려 보았지만, 입장하는 인원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체될지 알 수 없다. 볼 것은 많고 시간은 짧으니 조바심이 우리를 기다리지 못하게 한다. 건물 외부만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구엘 공원을 찾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역시 카사 밀라의 외부만 보고 지나갔다.
1984년 유네스코는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과 성 가족 교회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했으나, 2005년에는 그가 남긴 건축물 전체를 포함시켰다. 한 사람의 위대한 건축가가 오늘날 바르셀로나의 위상을 세계에 한층 높여준 결과를 낳게 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밀려들게 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구엘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언덕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놓았다.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만들어진 공원은 원래 구엘이 15만 평의 넓은 공간에 고급 주택 60채를 건설하여 부유층에 분양할 목적이었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된 공사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분양이 순조롭지 못하여 오직 1채의 주택만 분양되었고, 공사의 어려움에 자금난까지 겹쳤다. 결국 공사가 중단되었다. 1918년 구엘이 사망한 뒤에 그의 아들이 이 땅을 바르셀로나 시에 기부하게 되고, 시가 공원으로 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공원의 설계는 역시 가우디가 한 것으로 그의 명성을 한층 높이게 되었으며, 지금은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된 것이다.
공원에 올라가니 듣던 대로 바르셀로나 시내와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전망 좋은 곳을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했지만, 지금은 시민들보다 외국 관광객들이 훨씬 많이 찾는 것 같다. 가우디 특유의 형형색색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건물들과 자연 동굴처럼 만들어진 인공 석굴 등, 휴식 공간과 언덕을 오르는 길까지 모두가 자연과 어우러진 산책하기 좋은 공간이다. 구엘이 살던 구엘 궁궐, 지금은 가우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가우디의 집, 교회 등이 많은 사람들의 관람으로 붐비고 있다. 구엘 공원을 내려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오후 6시 입장권을 예매한 성가족교회를 찾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바로 눈앞에 사진으로 많이 보아왔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교회)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난다.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외부를 한 바퀴 돌면서 성서의 내용을 조각하여 빈틈없이 장식한 외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 외벽과 내벽에는 성서의 전체가 표현된 조각과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1883년에 착공한 공사가 1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공을 하지 못하고 진행되고 있는 부분은 첨탑 부분인 듯 높은 타워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지만, 공사는 쉬고 있는지 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6시에 입장하여 내부를 둘러보니 과연 초기 로마 교회의 화려함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 건축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한 가우디는 자기의 전 재산을 이 교회 건축에 헌납하고, 스스로는 독신으로 아주 검소하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가 교통사고로 죽을 때도 그의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사람들이 거장 가우디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니 과연 그의 명성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지하에는 가우디의 무덤과 가우디 기념관이 있다. 로마 교황청은 성인이 아니면 교회에 무덤을 허용하지 않는 관습을 깨고, 이례적으로 그의 무덤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특별히 배려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인 거장 가우디는 허름한 침대 하나만 남기고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과 명성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3. 그라나다(Granada)
(8월5일)
- 대성당, 왕실 예배당, 알함브라 궁전-
오후에 그라나다행 항공권이 예약되어 있어서,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왔다.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전에 어제 다 돌아보지 못했던 카탈루냐 광장 부근을 더 돌아볼 생각이었다. 상업지구인 이곳은 은행, 보험회사, 백화점 등이 있고 고급 브랜드를 팔고 있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서울의 삼성동이나 청담동에 해당되는 곳이다. 거리를 걸으면서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눈을 팔다가 아내와 딸이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백화점에 들어가잔다. 한낮의 더위 중에 걷기만 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따라 들어가 아이쇼핑을 하면서 몸을 식힌 후 다시 카탈루냐 광장으로 나왔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공항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오후 3시 30분에 바르셀로나 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1시간 남짓 날아서 4시 40분쯤 그라나다 공항에 착륙한다. 바르셀로나보다 더 남쪽 이어서일까? 비행기에서 내리니,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 이곳의 기온이 바르셀로나의 기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저공비행을 할 때 창밖을 내려다보니 보이는 것은 온통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밭이다. 유럽 올리브 생산량의 2/3를 이 나라에서 수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실감하게 했다.
공항버스로 호텔까지 와서 체크인 한 후, 내일로 예약된 알함브라 궁전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전화를 하던 여식은 뭔가 착오가 있어 모래로 예약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시청 관광안내소에 가서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면 되는 것이니 오늘은 시간을 아껴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그라나다 대성당(Catedral)과 왕실예배당(Capilla Real)을 가기로 한다.
두 곳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다. 대성당은 촬영이 허용되지만,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국왕, 그리고 그 가족들의 무덤이 있는 왕실 예배당은 촬영이 금지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경비 근무자들이 있어서 카메라를 손에 들고 들어가는 관람객들에게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는 것을 주지 시키고 있었다. 무덤은 예배당 입구에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국왕의 죽은 모습을 조각하여 1.5미터 정도의 높은 단 위에 눕혀 놓고 실제 그들의 관은 지하에 가족들과 함께 보관하고 있었다.
지하 묘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계단이 지하 묘지의 입구까지 설치되어 있다. 검은 색칠이 되어 있는 두 개 큰 관이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국왕이고 그 좌우에 있는 작은 4개의 관은 가족들이라고 한다. 그라나다의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은 이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알람브라 궁전을 비롯한 이슬람 건축의 수준을 능가하기 위하여 기독교 문화의 상징으로 이 두 건물을 더욱 웅장하고 호화롭게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라나다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알함브라 궁전을 관광 목표로 하고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은 부차적으로 찾게 된다. 그라나다 시청의 관광과에서 발간한 홍보물(Brochure)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안내 홍보문이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세계에서 유일한 곳인 알함브라(Alhambra)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감동은 그 누구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술탄들이 그들의 환상들로 천국을 만들려고 애썼던 그라나다. 아라 이네스 정원(Patio de los Arrayanes) 혹은 사자의 안뜰(Patio de los Leones)에서 눈을 지그시 감아 보십시오. 그러면 대리석과 석고 그리고 타일들과 함께 빛과 물 그리고 향기로 지어진 알함브라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흥미진진한 산책은 헤네랄리페 정원(Generalife)에서 아름다운 식물들에 둘러싸여 상쾌한 기분으로 마무리됩니다."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을 돌아보고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피곤하여 샤워를 하고 쉬려고 하는데, 딸과 아내는 플라멩코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한다. 나는 샤워하고 쉬고 싶은 마음 뿐이어서 아내와 딸만 보내고 나는 편히 쉬었다. 거리에서 행하는 플라멩코 공연은 일정한 요금을 받지 않고, 한 차례 공연이 끝나면 공연단원이 바구니를 들고 관광객들앞을 한바퀴 돌면, 관람한 관광객들이 적당한 돈을 내는 사람도 있고, 돈을 내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수익사업이 아닌, 관광 유치를 위하고, 자기들 고유의 전통 민속 예술의 홍보를 위한 사명감을 갖은 사람들의 공연인 듯하다. 플라멩코는 중세 때부터 추기 시작한 춤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부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중심이 되어 추는 춤으로 여성 무용수를 [바일라 오라], 남성 무용수를 [바일라 오르]라고 한다.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나 리듬은 없으며, 칸테(노래)의 경쾌한 리듬과 감정에 맞춰 즉흥적으로 변화시켜가면서 추는 춤이다. 기타를 연주하는 악사와 칸테를 부르는 음악가가 팀을 이루어 연주하게 된다.
- 카르투하 수도원, 수녀원 및 시내 관광 -
(8월 6일)
원래 그라나다는 아랍인들에 의해 세워진 고대 도시 일리 베리스 근처에 세워진 도시인데 무하마드 이분 나스르가 나스르 왕조를 열면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에 아랍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7세기, 한 손에 코란과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코란 아니면 칼을 받으라며 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었던 사라센인들이 그 시초이다. 그러나 13세기의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국가들 보다 기독교 국가들의 힘이 강력했었다. 1232년 그라나다에 나스로 왕조를 연 무하마드 1세는 이슬람 왕조이면서도 모록코에 있던 이슬람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1246년 기독교 왕국인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에게 해마다 조공을 바친다거나, 카스티야가 주변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이 있을 때는 카스티야를 돕겠다는 등, 굴종적인 외교 협상을 통해 승인을 받았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르곤의 페르디난도 국왕의 부부 연합군에 함락됨으로 이베리아 반도에 750년 동안 이어오던 이슬람 왕국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기독교도들의 레콘키스타(국토 회복 운동)를 다른 이슬람 왕국들 보다 200년을 더 버틴 것은 군사력으로 가 아닌 굴종적이기는 하지만, 외교의 수완으로 였다.
조반을 일찍 마치고 시청으로 갔다. 여식(女息)은 관광안내소의 직원을 만나 예약 잘못의 책임 소재를 떠나서 내일 오후로 되어 있는 예약을 오늘 오후로 바꿀 수 없는지 이야기했지만 바꾸어 줄 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날자와 시간별로 입장객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그라나다의 관광 일정을 바꾸어 오늘은 수녀원과 수도원 등을 찾아 시내 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입장이 내일 오후로 되어 있으니 세비야 행 고속버스는 내일 밤늦게 타야 한다.
시청을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시 외곽에 있는 1516년에 세워진 카르투하 수도원으로 갔다. 아침 일찍이어서인지 다른 관람객이 전혀 없다. 방문객이 없어서인지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다른 성당이나 예배당에서와는 다르다.
당시에 세워진 수도원이나 수녀원이나 성당들의 건축 양식은 대동소이하게 설계되었던 모양이다. 대성당이나 왕실 예배당과 화려함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구조는 비숫하고, 건물 내부의 기둥, 벽면, 천정,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엇비슷하였다. 수도원과, 수녀원 그리고 어제 들렸던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을 다시 들러보는 등 시내의 볼만 했던 곳들을 재확인하는 시간으르 보냈다. 이 나라의 수도원, 수녀원의 구조상 공통점은 사방으로 건물이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는 반드시 정 사각형의 정원에 오랜지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누런 오렌지가 풍요롭게 느껴졌다.
-알함브라 궁전[Alhambra宮殿]-
(8월 7일)
호텔을 체크 아웃한 후 가방은 로비에 맡겨놓고 호텔을 나왔다. 알함브라 궁전의 입장 시간이 오후 3시이니, 오전에는 궁전의 외관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알바이신 지역으로 가기 위하여 아침 일찍 그쪽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이 지역은 알함브라 궁전을 건축했던 수많은 장인과 그 후손들이 살던 곳이며, 나스르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집시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한다. 절벽 위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뒷모습을 잘 보기 위해 계곡에서 궁전의 반대편 경사진 언덕 위까지 이어진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위까지 올라갔다. 꽤나 높은 언덕까지 올라갔지만, 해발 689미터의 높은 산 위에 지어졌다는 건너편의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은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처럼 올려다보일 뿐 상상했던 화려한 궁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높은 언덕길을 올라가 궁전의 외관을 촬영했는데, 거기서도 궁전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이니 실제 궁전이 있는 곳은 주위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의 산 정상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은 1333년 왕위에 오른 유수프 1세가 기존의 이슬람 성보 안에 세우기 시작하여 그 뒤에 왕이 된 아들 무하마드 5세 때 완성하였다. 궁전의 이름이 붉은색을 의미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성을 쌓을 때 사용한 점토의 색깔이 붉은색이었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국왕에게 패망한 후 이 궁전은 버려져 있어서 폐허가 되어 부랑자들의 소굴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한 이 알함브라 궁전이 오늘날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게 된 동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워싱던 어빙의 공이 크다. 워싱턴 어빙은 폐허가 된 이 궁궐에 머물면서 궁전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1832년 [알함브라 이야기]가 발간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국가인 에스파냐가 아랍 유적지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궁전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1984년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다시 시내로 나와 알함브라 궁전으로 가는 관광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일반 시내버스와 다르게 옆이 모두 트여서 시내를 달리면서도 시내의 양쪽을 두루 볼 수 있고, 기차처럼 두 칸이 연결되어 있다. 관광버스는 시내를 돌아 숲 속의 언덕길을 올라 알함브라 궁전 앞에 도착하였지만, 아직 입장시간인 오후 3시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정의의 문이 보이는 곳의 그늘에서 호텔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는다.
식후에 정의의 문을 통하여 궁전 뜰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광장이 있고, 다시 궁전 내부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광장에는 궁전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관람객들의 줄이 늘어서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차례인가 하고 가서 줄을 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우리보다 30분 먼저 들어갈 사람들이다. 그 대기자들이 입장하기를 기다려 줄을 섰다가 오후 3시 정각에 입장을 한다. 입장할 때 가방을 등에 메고 들어가니 안내원이 가방을 앞으로 메라고 당부를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시내로 들어오던 지하철에서의 일이 생각나 순순히 그의 말대로 등에 메었던 배낭을 가슴에 안듯이 바꿔 메었다.
궁전 최초의 문인 정의의 문(Puerta de Justicia) 또는 재판의 문이라고도 한다. 말굽 모양의 위쪽 아치에는 코란 5 계명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조각되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사람들이 '낙원의 초상화'라고 하는 알함브라 궁전이 나타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더위도 참아가면서 들어선다.
정의의 문을 지나면 알히 베스 광장이 나오며 우측에 르네상스 양식의 카롤 5세 궁전 정면에 왕궁의 입구가 있다. 이 아름다운 이슬람 궁전이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2/3 정도가 파괴되었는데, 이곳을 방문한 신성로마제국의 카롤 5세가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파괴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자기의 궁전과 기독교 예배당과 수도원까지 짓게 하였지만, 여기에 머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국왕의 손자이다.
'오직 한 분, 신만이 승리자이다'라고 새겨져 있는 포도주의 문을 지나면 알카사바 요새의 입구가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알함브라 궁전은 옛날 무슬림 종족인 베르베르인들이 축성한 알카 시바(Alca zaba)라는 요새가 서 있던 언덕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폐허가 된 요새를 코란에서 묘사한 지상 천국으로 바꾸어 놓겠다고 결심했다. 토목 전문가로 하여금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의 6킬로미터가 넘는 물줄기를 바꾸어 운하와 수조, 분수, 정원에 물을 댈 수 있도록 관개수로를 개발하게 했다. 특징은 연못을 비롯한 어느 곳에도 물이 고여있지 않도록 새로운 물이 들어오고 나가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7세기 때부터 에스파냐 지역에서부터 아프리카 북부와 인도의 서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여러 이슬람 왕조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4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기독교 국가에 망하게 되었지만, 에스파냐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이슬람 국가가 이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을 지키던 나스르 왕국이었다. 이 궁전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정원이 있는데 그 주변에 많은 방이 배치되어 있다. 궁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정원이 아라야네스 정원이다.
이 정원에 면한 방이 대사의 방이다. 이곳이 1492년 페르디난도가 그라나다에 침입했을 때 왕국을 양도하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회의를 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사벨 여왕의 손자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롤 5세에 의해 지어진 건물들은 현재 알함브라 박물관과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건축물들을 알함브라 궁전과 비교하면 사라져 없어진 건물들에 대한 아쉬움이 더하다. 이슬람식 건축과 기독교식 건축물이 공존하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유적은 어찌 되었든 이 나라 에스파냐의 사람들의 조상들이 남긴 유산으로 그들의 자긍심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리아네스 정원에서 왼쪽으로 가면 유명한 사자궁전이 나온다. 대리석 기둥 124개로 받친 아케이드로 사방이 둘러져 있는 이 궁전의 분수에는 수반이 있는데 여기 모인 물이 열 두마리 사자의 입을 통해 나온다. 이곳은 원래 하렘으로 왕 이외의 남성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후궁들이 살았다.
번창했던 시기의 이 궁전에는 왕실 가족을 비롯하여 궁을 지키기 위한 병사들과 이들의 식사를 담당한 사람들과 하인들을 합하면 5천명 정도의 인구가 상주하였다고 한다. 궁전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맑은 물이 흐르게 하였으니 그들이 생각했던 '지상의 낙원'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고,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 또한 영원하지는 않지만, 조상들의 유산을 잘 보존하는 것이 후손들이 할 도리다.
사자궁 양 옆으로 아름다운 두 개의 방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의 방은 바닥에 깐 두 개의 대리석 판에서 이름이 유래한 살라 데 라스 도스에 마리나스(두 자매의 방) 와 다른 하나는 살라 데 로스 아벤세라헤스 이다.
두 방 모두 뛰어난 솜씨로 채색하고 유약을 바른 채색 타일로 벽을 마감했다. 특히 살라 데 로스 아벤세라헤스의 천장은 종유석이 5천개의 벽감을 형성해 마치 벌집처럼 보인다. 종려나무를 연상케 하는 가는 기둥, 정원을 감싸고 있는 아늑한 회랑, 종유석 모양의 수많은 아치 등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알함브라궁전의 자재로는 목재 · 벽돌 · 석고 · 갈색타일을 사용했다. 석각은 매우 드물게 사용했고 대리석은 포장 · 기둥 · 대접받침에만 사용했다.
벽 · 천장 · 바닥의 장식은 주로 나무 · 타일 · 석고로 되어있다. 특히 아름다운 살라 데 로스 엠바야도레스의 천장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여러 가지 색체의 타일이 실내와 외관의 넓은 공간을 채워 빛의 반사에 의해 강렬한 색조감을 느끼게 한다. 팔각형의 돔을 벌집 모양의 수많은 장식이 꾸미고 있다. 천장의 장식은 코란에 나오는 이슬람의 천국을 표현한 것인데 해가 뜰 무렵 여덟 개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지는 천장의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특별한 조각이 없이 이들 재료만으로 화려함과 우아함을 표현한 기술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느끼게 할 정도인데 당대의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라나다의 무슬림 왕국은 ‘무혈인계’로 마감했다. 그라나다왕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아브 압달라(Abu Abdallah)는 1492년 에스파냐의 기독교 왕국을 합병한 공동 통치 군주인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군대가 몰려오자 수십 만 명이 넘는 무슬림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항복했다. 그는 그라나다왕국의 종교와 재산권 그리고 상권을 유지시켜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왕으로서는 많은 무슬림들의 보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브 압달라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라나다왕국을 점령한 에스파냐 통치자는 아브 압달라의 기대와는 달리 무혈인계의 약속들을 겨우 7년 정도밖에 지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전쟁 없이 무혈인계한 것에 대해 크게 노해 아들에게 “네가 남자답게 이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는 말을 남기고 궁전을 떠났다고 한다.
그 뒤 많은 무슬림들은 안달루시아 지역을 떠나 북아프리카로 대량 이민을 하거나 강제적으로 개종해야만 했다. 당시 고급 실크 생산지로 유명했던 그라나다는 대량이민 때문에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몰락했고 회복하는 데 거의 200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했다.
알함브라궁전은 공식 관저였고 북쪽의 구릉 위에 왕족들이 쉬는 여름 별장용으로 지은 것이 헤네랄리페궁전이다. 시골 별장을 닮은 이 궁전은 무하마드 2세(Muhammad II)가 지었는데 이슬람식 정원의 전형적 특징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이곳은 모두 파괴되어 두 개의 소궁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넓은 정원이 잘 정돈돼 있다. 이 안나트 알 아리프(우아한 천국의 정원)은 헤네랄리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 올린 대부분의 아름다운 정원 사진은 헤네랄리페 궁전의 정원 사진이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그라나다를 점령하자마자 이슬람의 잔재를 철저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라나다를 방문한 카롤5세는 알함브라궁전의 아름다움에 놀라 파괴를 중지시켰다. 이미 3분의 2가 파괴된 후였지만 이후에는 가능한 한 원형을 보존시키도록 노력했다. 그라나다를 정복한 여왕 이사벨라의 손자인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Karl V, 1500~1558)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페드로 데 마추카에게 알함브라궁전 경내에 알함브라궁전에 견줄 만한 르네상스식 궁전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는 산타마리아성당을 지었고 왕자의 궁전 위에는 산프란시스코수도원을 건설해 알람브라궁전의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게 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이 궁전에 머문 적도 없으며 그가 사망한 뒤에는 어떤 건물도 추가되지 않았다.
카를 5세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은 현재 알함브라박물관과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건축물들을 알함브라궁전과 비교하면 사라진 3분의 2의 알함브라궁전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고 한다. 며칠을 더 보아도 그 아름다운 정원과 궁전의 곳곳을 다 보고 느끼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해진 일정을 위해 알함브라 궁전을 뒤로하고 그라나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오후 8시 30분에 출발하는 세비야행 고속버스를 탔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아서 고속도로 주변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농장을 보면서 과연 유럽 전체에서 생산하는 올리브의 3/2를 이 나라에서 수확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3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밤 11시 20분쯤 세비야의 고속버스 터비널에 도착하여 호텔을 찾아 들어가니 자정이다.
4. 세비야(Sevilla)
(8월 8일)
- 마리아 루이사 공원, 스페인 광장, 세비야 대성당, 스페인 광장 야경 -
어제 그라나다를 출발하여 오늘 첫 새벽에야 도착한 세비야의 호텔에서 샤워 후 곧바로 잠들었는데도 아침 8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조반후 근처의 마리아 루이사 공원을 향해 호텔을 나선 것은 9시 반쯤이었다. 가는 길에 세비야 대학교 앞을 지나 마리아 루이사 공원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평화의 새 비들기떼가 우리를 맞이했다. 세비야 고고학 박물관 앞 뜰에서 관광객들 가까이 날아와 모이를 찾으며 날개짓을 하고, 우리를 환영한다는 듯 곁으로 걸어가도 놀라지를 않는다.
처음 온 세비야가 내게 낮설지 않게 느껴진 것은 2009년 6월 27일, 조선 왕릉 40기가 이 도시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당당히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할 것을 확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탁월한 전통 문화유적이 그 우수성을 세계인들에게 당당하게 인정받은 곳이었기에 세비야라는 이 름만 들어도 고맙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었다.
세비야는 에스파냐의 남서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에 있는 주의 주도이다. 로마 시대에는 카이자르에게 정복당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711년에 이슬람의 베르벨인에게 정복되어 그들의 수도로 오랫동안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다. 과달키비르 강이 시내를 흐르고 있는데 강 이름이 아랍어(Wadi al Kebir)로 큰강이라는 의미라니, 서울의 한강과 같은 의미를 가진 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또한 반가움의 대상이다. 풀라멩코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마에스트란사 공연장에서 2년마다 플라맹고 예술 비엔날레가 열린다.
세비야 대학교 건물 앞 벽에 멕시코 또는 브라질의 국가 이름이 크게 부착되어있어서 딸내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1929년 당시 박람회 때 그들 나라의 무역 전시관으로 사용했던 건물들을 그 후, 대학교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29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대공황 때문에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때 건설한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이 건물들과 공원을 찾고 있으니, 그 때에 투자했던 것들을 지금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을 쌓을 때 조상들이 바친 희생의 댓가를 지금의 후손들이 다시 없는 보물이 되어 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관광객들에게 낭만을 주기 위하여 공원 길, 스페인 광장과 시내를 운행하고 있는 말이 끄는 택시는 멋스럽기는 하지만, 옥에 티 처럼 한 가지 흠을 남기고 있었다. 즉 말의 배설물이 깨끗한 도로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광장 입구에 이 광장을 만든 건축가 아니발 곤잘레스의 동상이 세원져 있다. 중앙의 메인 건물은 현재 주청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은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부터라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장면이 이곳이었기 때문에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바르카차 분수는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가 설계하였는데, 물에 반쯤 잠겨있는 물이 새는 배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으로 바르카치아는 '쓸모없는 오래된 배'라는 의미라고 한다.
스페인 광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마리아 루이자 공원을 가로질러 세비아 대성당을 찾아 걷는다. 도중에 과달키비르 강 선착장에서 황금의 탑을 찾았다. 1220년 이슬람교도가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을 때, 과달키비르 강을 통과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강 건너에는 은의탑이 있었는데, 두 탑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세비야에 들어오는 배를 막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떠난 것과 관련하여 현재는 해양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내 대성당의 첨탑이 가까이 보여서 좁은 길을 이리저리 돌아 드디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는 에스파냐 최대의 성당이자 유럽의 3대 성당의 하나인 세비야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15세기에 이슬람을 정복한 기독교도들이 8세기에 건설된 모스크 위에 지은 성당이다. 고딕 양식의 건물이지만 모스크였던 시절의 자취를 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히랄타 탑이다.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미니레트에 28개의 종을 달고 고딕식 지붕을 얹었다. 성당 내부의 크고 화려함은 말로 다할수 없다. 바르셀로나에서나 그라나다에서 보았던 성당들의 모습과 그 규모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화려한 내부의 꾸밈은 비슷비슷하다. 세비야 대성당의 내부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성당이나 수도원 특유의 오렌지 과수원의 쉼터에 앉아 이슬람의 모스크 흔적이 남아있는 성당 외부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대성당을 뒤로 하고 시내구경을 나섰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오후 8시를 훨씬 넘기고 있었다. 도자기 가게와, 유리그릇 가게를 들러 구경하면서 골목 상점들을 돌아보다가 불을 밝히기 시작할 즈음 낮에 보아두었던 식당을 찾아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다.
시가지의 야경과 특히 물 위에 반사된 그림자가 아름답다는 스페인 광장의 야경을 보기 위하여 다시 걸었다. 스페인 광장에 오니 낮에 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며 거닐고 있으니, 꿈속인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신혼 부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다. 필자처럼 나이든 사람들에게 보다는 젊은이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파냐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