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
2017-11-09 21:26:41
굴평(屈平), 屈原(BC343~BC278)
전국 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
초나라에서 형성, 발전한 시가총집인 《초사》의 대표적인 작가로, 초나라 특유의 색채를 담은 낭만적인 시풍을 확립시켰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소〉, 〈어부사〉, 〈애영〉 등이 있다.
초나라의 비극 시인
주나라 왕조가 와해되어 진, 초, 연, 제, 한, 위, 조나라를 중심으로 팽팽하게 대립하는 세력 구도가 형성되면서 문화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주변국으로 취급되던 초나라는 전국 시대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초나라는 선진 북방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나라와 북방 문화의 효시인 《시경》[詩經, 고대 중국의 시가(詩歌)를 모아 엮은 책으로, 본래는 3천여 편이었다고 전하나 공자에 의해 305편으로 간추려졌다]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초사(楚辭)》라는 시가집을 탄생시키며 새로운 문화적 결실을 맺었다.
《초사》는 초나라에서 이루어진 운문 양식으로 굴원을 비롯해 그 이후의 시가를 모은 책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고전적이고 사실적인 성격을 띠는 《시경》과 달리 초나라 특유의 색채와 함께 낭만적인 시풍이 느껴진다. 이런 독특한 문학을 탄생시킨 인물은 바로 중국 최초의 시인인 굴원(屈原)이다. 그는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신화적이고 샤머니즘적인 환상을 통해 표현했는데, 이는 남방 지역의 특색이 반영된 것으로 《초사》만이 갖는 특징이며 《초사》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굴원의 이름은 평(平)이고 원(原)은 별명으로, 초나라 무왕의 방계에 속하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무렵 초나라 회왕이 그의 높은 학식과 문학적 재능에 반해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응대하는 좌도에 임명했다. 굴원은 법령의 초안 작성 및 선포, 국가의 기밀회의 참석, 사신 접대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빠른 출세와 회왕의 두터운 신임은 다른 대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상관대부 근상(靳尙)이 굴원을 매우 시기했다. 어느 날 근상은 굴원이 작성한 법령 초안을 몰래 훔쳐다가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행동했다. 굴원이 그 법령의 초안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주장하자, 근상은 회왕을 찾아가 굴원이 법안을 발표할 때마다 공적을 과시하고 초나라에는 법령을 만들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자랑한다고 모함했다. 회왕은 근상의 말만 믿고 굴원을 한수(漢水) 북쪽으로 쫓아냈다.
굴원은 〈이소(離騷)〉(근심을 만나다)라는 장편시를 통해 분노와 실망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자전적 성격을 띤 〈이소〉는 굴원의 출생과 집안 내력을 밝히는 데서 시작된다. 그다음으로 굴원은 자신의 의지와 품행에는 한 치의 거짓됨이 없고 세상은 이미 소인배들의 것이라 그 혼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면서, 이러한 세상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책임이 막중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라에 대한 절절한 충심을 알아주지 않는 왕에게 실망한 굴원은 낙향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누이 여수(女嬃)가 오히려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그의 괴팍함을 나무라자 그는 자신의 이상을 털어놓는다.
굴원은 자신의 진심을 호소하기 위해 신을 찾아 하늘의 문으로 향하지만, 하늘의 문은 열리지 않고 땅의 신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회의에 빠진 그는 주술사 무성(巫成)과 영분(靈氛)을 찾아 점을 치고, 영분은 그에게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여 인간의 진리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이에 그는 인간의 진리를 찾기 위해 방랑길에 오른다. 방랑길에서 그는 우연히 자신의 고향을 지나치게 된다. 그런데 말을 끄는 마부도, 말도, 초나라를 떠나려 하지 않자 그는 그제야 자신이 초나라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이소〉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은 굴원이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굴원의 〈이소〉를 “《시경》의 국풍(國風, 민요 부분)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나 그 품위가 낮지 않으며, 소아(小雅, 정사 부분)는 세상의 불공평을 원망하면서도 그 도가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소〉는 이 둘을 모두 가졌다.”라고 극찬했다.
전국 시대 말기 전국 7웅 중 세력이 가장 컸던 진나라, 제나라, 초나라는 모두 천하 통일의 꿈을 꾸었다. 진나라는 초나라 조정에 충신은 없고 간신들이 득세함을 알고 제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깨 초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진의 혜문왕은 참모 장의를 초나라에 파견하여 회왕의 애첩 정수(鄭袖)와 상관대부 근상을 매수했다. 더불어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친분을 깨면 상나라 지역의 토지 600리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회왕은 친진 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러나 회왕이 실제로 받은 땅은 6리에 그쳤고, 그제야 회왕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회왕은 진나라에 대패해 한중(漢中) 일대의 땅마저 잃게 되었고, 더욱 화가 난 그는 진나라를 한 번 더 공격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회왕은 과거 제나라와 초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굴원이 아쉬워졌다. 그리하여 회왕은 굴원을 다시 불러들였고, 굴원은 제나라와 초나라 간의 국교를 회복하고자 사신으로 제나라에 들어갔다. 초나라와 제나라가 다시 동맹을 맺을 것을 우려한 진나라는 한중 일대의 땅을 미끼로 초나라에 화해를 청했다.
그러나 회왕은 땅 대신 자신을 속인 장의의 목숨을 요구했다. 초나라에 온 장의는 먼저 정수와 근상을 만나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하게 했다. 다시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회왕은 장의를 풀어 주었다. 제나라에서 돌아온 굴원이 땅도 돌려받지 못하고, 장의도 죽이지 못한 것을 회왕에게 일깨워 주었을 때 장의는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기원전 307년 진나라 왕이 된 소양왕은 회왕을 금은보화로 회유하여 다시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기원전 308년 소양왕이 회왕에게 상용(上庸)의 땅을 줌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초나라의 일관성 없는 외교 정책은 제나라의 화를 돋우었고, 제나라는 한·위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진나라는 초의 태자를 인질로 삼고 나서야 원군을 보내 주었다.얼마 후 진나라에 인질로 갔던 초나라 태자가 진나라 대신을 죽이고 초나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빌미로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략하자 회왕은 태자를 인질로 보내며 굴원을 사신으로 동행시켜 제나라와의 친교를 회복하고자 했다. 소양왕은 화친을 내세워 회왕에게 회담을 청했다.
진나라의 초청에 굴원은 격렬히 반대했으나 결국 회왕은 친진파인 막내아들 자란(子蘭)에게 설득되어 회담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진나라에 들어간 회왕은 곧바로 억류되었다. 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초나라에서는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태자가 귀국하여 경양왕으로 즉위했다. 더 이상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회왕은 위기를 느끼고 진나라를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혀 결국 진나라에서 숨을 거두었다.경양왕이 즉위하자 자란은 승상이 되었다. 승상이 된 자란은 굴원이 진나라에 회왕을 보냈다는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자 굴원이 〈이소〉를 통해 회왕의 실정을 비난한다고 모함했다.
여기에 굴원이 경양왕과 진나라의 혼담을 극구 반대한 것이 불을 지폈다. 결국 굴원은 강남 지역으로 추방되었다.기원전 292년 강남으로 유배된 굴원은 강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 동정호(洞庭湖)에 도착했다. 굴원의 대표적인 작품 〈어부사(漁父詞)〉는 이때 남겨진 것이다. 강가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굴원에게 어부가 초나라의 삼려대부를 지낸 사람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더러운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술에 취했는데 나 홀로 취하지 않아 이렇게 되었소.”라며 탄식했다.다시 어부가 성인이란 자기주장만 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변해 가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세상이 더럽다면 왜 함께 더러워지지 않고 온 세상 사람이 취했다면 왜 함께 취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굴원은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털고 입는다 했소. 그러니 어느 누가 청결한 몸에 더러운 먼지를 그대로 받들고 있겠소. 차라리 장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더러운 세상에 몸을 더럽히지는 않겠소.”라며 방랑을 계속했다.기원전 278년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침략했다. 초나라의 수도 영(郢)이 함락되고, 경양왕은 진(陳)으로 천도했지만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 낼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굴원은 크게 상심하여 〈애영(哀郢)〉이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비분과 백성들에 대한 동정을 담아냈다.
그 후 초나라는 끝없는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고, 굴원은 피폐해진 조국의 산천에 절망하여 돌을 품고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졌다.초나라 문학을 대표하는 시가집 《초사》의 대표 작가는 굴원이다. 그는 북방 문학의 효시인 《시경》의 4자구를 3자구로 바꾸었으며, 혜(兮), 사(些) 같은 조사를 이용하여 2개의 3자구를 연결시켜 7언구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시가의 내용이 더 풍부해졌고, 후대의 동방삭(東方朔),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 많은 시인들이 영향을 받았다. 굴원은 〈이소〉, 〈천문(天問)〉, 〈구가(九歌)〉, 〈구장(九章)〉, 〈어부사〉, 〈귤송(橘頌)〉, 〈회사(懷沙)〉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이소〉는 중국 ‘사부(辭賦, 산문에 가까운 운문)’의 원조로 그에게 중국 최초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게 하였다. 또한 문학성이 뛰어나고 나라에 대한 절절한 충심이 잘 표현되어 있어 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후세 사람들은 굴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에 몸을 던진 음력 5월 5일을 제일(祭日)로 정해 용머리로 장식한 용선(龍船)을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개최한다. 이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갈댓잎으로 싼 송편을 빚어 강에 던지는데 이는 교룡(蛟龍)이 이것을 먹고 굴원의 시체를 해치지 말라는 기원을 담은 것이다.
글: 홍문숙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공부하였다. 중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삼성전기, LG전자 등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 및 중국어 회화, 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