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1일
나의 文學紀行
-金裕貞 文學의 産室 실레 마을-
두 친구와 함께 김유정 문학의 산실 실레마을을 찾기 위해 주 중(週 中)에 경춘선 전철을 탔다. 산행 인구가 많은 요즘의 주말이면 경춘선 주변에 등산인들이 좋아하는 산들이 많아서 경춘선 전철은 늘 만원이다. 1시간 30분을 좌석을 잡지 못하고 서서 가야하는 것은 우리 나이엔 퍽 힘든 일이다. 주 중이면 언제나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주변의 풍광을 즐기면서 여행할 수 있어 우리는 가끔 주말을 피해서 경춘선 전철을 탄다. 춘천시 신남면 증리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 역에서 내려 역사(驛舍)를 나오니, 공기부터가 깨끗해서 상쾌한 느낌이다.
김유정 역은 1939년에 경춘선 철도가 개통되었을 당시에는 역의 소재지 이름을 따서 [신남 역]으로 불리어 왔었고, 역사의 위치도 지금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2004년 12월 1일에 한국철도 역사상 최초로 특정 인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역이 되었으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게 사람 이름을 사용하는 역이 되었다.
또, 2010년 경춘선 철도가 복선 전철화하면서 역사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는 김유정을 사랑하고, 그를 춘천의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시민들과 그를 좋아하는 전국의 문인들이 그의 고향에 김유정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실레 마을은 도로 명(김유정로), 우체국(김유정 우체국)과 농협 지점(김유정 지점)의 이름은 물론 음식점의 간판까지도 '점순네 닭갈비', '중화요리 만무방', '봄봄 닭갈비', '카페 산골나그네' 등과 같이 그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에서 따다 붙였으니 서른 살도 채우지 못하고 아깝게 요절한 그는 분명 고향에서 다시 부활했다.
1936년 김유정은 [조광]에 발표한 그의 수필[오월의 산골짜기]에서 다음과 같이 실레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 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 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방언이라고 한다. 아직도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가을 날씨이건만, 서울에서 느끼지 못하던 시원함에 발걸음이 가볍다. 역에서 나와 길을 건너 5분쯤 걸으면 넓은 주차장 뒤에 김유정 문학촌이 조성되어 있고, 길 건너에 김유정의 생가가 옛 집 그대로 복원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조카 김영수 씨의 증언과 그가 그린 정확한 도면을 참고로 하였다고 한다. 생가 옆에 김유정 기념관도 한옥 스타일로 새로 지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생가와 기념관 사이에 두루마기차림으로 책을 읽고 서있는 그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또, 생가 뒤꼍에는 그의 대표작 봄봄의 주인공들이 해학적인 이야기의 내용을 말해주고 있다.
마침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김유정문학제가 10월 13일부터 21일까지 열릴 예정인데, <봄봄>, <동백꽃>의 주인공 점순이를 찾고, '전국이야기대회', '김유정 소설 입체 낭송대회', '김유정 소설 캐릭터 및 장면 그리기 대회', '어린이 이야기 겨루기 대회' 등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을 준비하느라 바쁠 터인데도, 우리가 찾아간 그날은 마침 김유정을 추모하는 시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많은 시인들이 김유정을 추모하는 시를 썼고, 화가들은 그 시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관람객들에게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가난과 병마 때문에 그 천재성을 다 쏟아내지 못하고 너무나도 일찍 쓰러져버린 김유정을 더욱 안타까이 회상하게 하였다. 시화 전시실을 나와 다른 전시실에 들어가니 김유정의 일대기, 그리고 함께 활동한 9인회 등 문학 동인들의 활동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유정 문학관을 나오면서 나는 그의 1930년부터 1932년까지의 2년간의 이 실레마을에서의 체험과, 여기에서 듣고, 또 보아 왔던 농촌의 실상이 30여 편이나 되는 작품을 잉태하고 출산하게 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김유정 문학의 산실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가 연희전문에 들어간 직후부터 소리꾼 박녹주에게 보낸 일방적인 짝사랑, 실연으로 인한 슬픔, 그로 인한 연희전문학교의 제적 등의 상처를 안고 고향에 내려왔지만, 그는 슬픔에 잠겨있지만은 않았다. 학교가 없던 고향에서 움막을 짓고 야학으로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금병의숙을 열어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1933년 25세의 김유정은 그 2년 동안 금병산 자락의 '실레이야기길'을 걸으며 구상했던 그 많은 소재들을 작품화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고향에서의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이 소설이 된다.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실제 있었던 가난하고 수탈당하는 고향사람들의 비참한 이야기이지만, 그 특유의 천재적 재능으로 비참함을 묻어둔 해학적인 작품으로 쏟아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지금의 실레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금병산에 '원창고개', '봄봄 길', '산골 나그네 길', '덕만이 마을', '만무방 길', '동백꽃 길', '물레방앗간 터', '득돌이네 주막 터' 등의 실제 있었던 이야기 속의 지명을 만들었다.
그는 1933년 서울로 올라오자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 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하여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이상 등과 함께 활동한다.
1935년 화려하게 등단한 그에게는 호사다마(好事多魔)이련가, 폐결핵과 치질의 깊은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병마가 그를 괴롭히고 있을 때, 그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병산련(同病相憐)의 이상(김해경)이 차라리 같이 죽자고 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병을 이기겠다는 의지를 밝혔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1937년 3월 29일 29세를 일기로, 같이 폐결핵을 앓던 이상(김해경)은 20일 후인 4월 17일 27세를 일기로 영원의 세계로 떠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천재를 한꺼번에 잃은 동료 문인들은 5월 15일 서울 부민관에서 두 사람의 합동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조선 중기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애쓴 명상 잠곡 김육(潛谷 金堉1580~165)이 그의 10대 조이며,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친정아버지로 현종 대왕의 국구(國舅)이며, 숙종 대왕의 외할아버지인 김우명(1580~1658)이 9대 조이다. 청풍 김 씨(淸風 金氏)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후예로 조상들이 학자로, 직접 의병활동을 하기도 하고, 의병활동의 후원자로 살아왔다고 한다. 현종 대왕이 전국에 명당을 찾아 그의 장인의 묏자리를 이곳 실레마을에 잡은 인연으로 그의 4대 조인 고조부 김기순이 이곳 실레마을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의 부친 김춘식은 당대 만석꾼으로 불리며 서울에서도 10대 부자(富者)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의 2남 6녀 중에서 7번째로 태어났으나 7세 때 어머니를,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유년시절 모성 결핍증으로 말을 더듬기도 했으나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형인 김유근이 살림을 맡으면서 가산이 기울어 그가 병마에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닭 30마리를 고와먹으려 해도 돈이 없어 그 돈을 만들기 위하여 휘문고보 시절의 단짝 친구 안회남(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아들)에게 1937년 3월 11일 구원의 편지를 보냈으나, 그 후 열 하루 만에 그렇게 다시 일어나고 싶어 하던 그였지만, 이제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謙虛"라는 글씨를 머리맡에 두고 막내 누이에게 잔잔한 미소를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열 하루 전에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를 옮겨본다.
必承 前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병을 위하야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 삼십 마리를 고와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드렸다.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김유정 문학촌 전시실과 기념관, 그리고 그의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우리는 그가 거닐었던 '실레이야기 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가 길가에 세워진 작은 정자에 앉아 쉬면서 준비해 간 막걸리를 나눠마시면서 너무 젊은 나이에 병마에 고통받다가 일찍 간 그의 생애가 애잔하기도 했지만, 그는 지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있으니 우리 인간의 이승에서의 삶의 길고 짧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