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항사(陋巷詞) 현대어로 옮김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둡기로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길흉화복을 하늘에 맡겨 두고 누추한 깊은 곳에 초가를 지어 놓고
고르지 못한 날씨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세 홉 밥 다섯 홉 죽을 만드는데 연기가 많기도 많구나.
덜 데운 숭늉으로 고픈 배를 속일 뿐이로다.
생활이 이렇게 구차하다고 한들 대장부의 뜻을 바꿀 것인가?
안빈낙도하겠다는 한 가지 생각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서,
옳은 일을 좇아 살려하니 날이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가을에도 부족한데 봄이라고 여유가 있겠으며
주머니가 비었는데 술병에 담겨 있으랴.
가난한 인생이 천지간에 나뿐이로다.
배고픔과 추위가 몸을 괴롭힌다고 한들 일편단심을 잊을 것인가?
의에 분발하여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죽어서 그만두겠노라고 마음먹어
전대와 망태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전란 5년 동안에 용감하게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 몇 백 전쟁을 치렀던가.
내 몸이 겨를이 있어서 집안을 돌보겠는가?
늙은 종은 종과 주인의 분수를 잊어버렸는데,
봄이 왔다고 나에게 일러 줄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밭 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물어야 한다지만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몸소 농사를 짓는 것이 내 분수에 맞는 줄을 알겠도다.
잡초 많은 들에서 밭 갈던 늙은이와 밭두둑 위에서
밭 갈던 늙은이를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지마는,
아무리 갈려고 한들 어느 소로 갈겠는가?
가뭄이 몹시 심하여 농사철이 다 늦은 때에
서쪽 두둑 높은 논에 잠깐 갠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근원 없이 흐르는 물을 반쯤 대어놓고는,
'소 한 번 빌려 주마'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 없는 저녁에
허둥지둥 달려가서 굳게 닫는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어, 거기 누구신가?' 묻기에 '염치없는 저올시다'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무슨 일로 와 계신고?‘
'해마다 이러기가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궁핍한 집에서 걱정 많아 왔소이다.'
'공짜로나 값을 치거나 간에 빌려줌 직도 하다마는,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에 사는 사람이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에 구워내고,
갓 익은 좋은 술을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지 않겠는가?
내일 주마하고 굳게 약속을 하였기에,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 말하기가 어렵구료.'
사실이 그렇다면 설마 어쩌겠는가?
헌 모자를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보잘것없는 내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로다.
누추한 집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워 있겠는가?
북쪽 창에 기대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무정한 오디새는 나의 한을 북돋우는구나.
아침이 끝날 때까지 서글퍼하며 먼 들을 바라보니,
즐거워 부르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 없이 들리는구나.
세상 물정 모르는 한숨은 그칠 줄을 모른다.
아까운 저 쟁기는 쟁기의 날도 좋구나.
가시 엉킨 묵은 밭도 쉽게 갈 수 있으련만,
빈 집 벽 가운데에 쓸데없이 걸려 있구나!
봄갈이도 거의 다 지났다. 팽개쳐 던져 버리자.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꿈을 꾼 지도 오래 더니,
먹고사는 것이 누가 되어, 아아 잊었도다.
저 물가를 보니 푸른 대나무가 많기도 많구나.
교양 있는 선비들 다, 낚싯대 하나 빌리자꾸나.
갈대꽃 깊은 곳에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의 벗이 되어
임자가 없는 자연 속에서 근심 없이 늙으리라.
욕심 없는 갈매기야, 오라고 하며 말라고 하랴?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뿐인가 생각하노라.
보잘것없는 이 몸이 무슨 뜻과 취향이 있으랴마는,
두어 이랑의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두고,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겠노라.
내 가난과 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내젓는다고 물러가겠으며,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짓을 한다고 오겠는가?
인간의 어느 일이 운명과 상관없이 생겼으랴?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는 것을 어렵다고 하지마는
내 삶이 이렇다 해서 서러운 뜻은 없노라.
가난한 생활이지만, 이것도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노라.
평생의 한 뜻이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노라.
태평천하에 충효를 일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친구가 신의 있게 사귀는 것을 그르다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밖의 나머지 일이야 타고난 대로 살겠노라.
박인로(朴仁老)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경상북도 영천 출생. 아버지는 승의부위박석(朴碩)이며, 어머니는 참봉주순신(朱舜臣)의 딸이다. 1561년(명종 16)에 나서 1642년(인조 20)에 죽었다.
그의 82세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前半生)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면, 후반생(後半生)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한 선비요, 문인 가객(歌客)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1573년(선조 6) 13세의 나이로 「대승음(戴勝吟)」이라는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2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울산·경주지방을 비롯해 영양군까지 잇따라 함락되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인 1598년(선조 31)에는 강좌절도사(江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무인의 몸으로서도 언제나 낭중(囊中)에는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다.
그의 후반생은 독서수행의 선비이며 가객으로서의 삶이었다. 곧,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은거생활에 든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 주석 연구에 몰두하였다.
밤중에도 분향축천(焚香祝天)하여 성현의 기상(氣像)을 묵상하기 일쑤였다. 또한, 꿈 속에서 성·경·충·효(誠敬忠孝)의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성(自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덕형(李德馨)과는 의기가 상합하여 수시로 종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이덕형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영천에 이르렀을 때, 처음 대면하여 지은 시조가 「조홍시가(早紅柿歌)」이며, 1605년(선조 38)에는 「선상탄(船上歎)」을 지었다.
1611년(광해군 3)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고 있을 때 그의 빈객이 되어 가사 「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를 지었다.
1612년(광해군 4) 도산서원에 참례하여 이황(李滉)의 유풍을 흠모하였고, 그 밖에도 조지산(曺芝山)·장여헌(張旅軒)·정한강(鄭寒岡)·정임하(鄭林下)·정연길(鄭延吉)·최기남(崔起南) 등과 교유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라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1635년(인조 13)에 가사 「영남가(嶺南歌)」를 지었고, 이듬 해「노계가」를 지었다. 그 밖에 가사 「입암별곡(立巖別曲)」과 「소유정가(小有亭歌)」가 전하는데, 가사가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인조 20)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