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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들(세 번째 - 정독도서관 4)

2022-04-02 20:28:58

갑신정변의 풍운아 송재 서재필(松齋 徐載弼)

젊은 시절의 서재필

교육박물관 뒤편에서 김옥균의 집터 표석을 발견하여 사진을 찍었지만,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다는 서재필의 집터 표석은 찾지 못했다. 다만 1899년(광무 3년) 4월 4일 고종황제의 칙령 제11호로 중학교 관제를 선포하여 1년 반에 걸친 준비 끝에 1900년 10월 3일 우리나라 최초로 4년 제인 관립중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관립중학교 시절 단층 짜리 학교 건물은 서양식으로 지은 서재필의 빈 집을 고쳐 쓴 것이라는 기록을 참고한다면 옛 경기고등학교의 운동장 어디쯤에 그가 살던 집이 있었겠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관립중등교육 100주년 기념 - 낱장 디자인 - 경기고 화동교사와 학부령 제12호 중학교 규칙 제1조 © 우정사업본부

1880년대 초 개화파가 쓰기 시작한 '개화(開化)'라는 말은 유교 경전인 <주역> 계사(繫辭)에 나오는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고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는 뜻이다. 

서재필 1864(고종 1)-1951. 개화기의 정치가, 독립운동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해서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위해 기여한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copy; 동아일보사
서재필의 묘, 국립현충원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의사이다. 또한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 시인, 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다. 김성근,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며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 부정자, 훈련원 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났다. 이후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64년 1월 7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동복면(현재의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528번지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진사 서광호(徐光孝)와 성주 이씨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외가인 성주 이씨는 외고조부 대에 동복군 문덕에 정착한 뒤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외종조부 이기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동복 문덕의 대지주로 성장한 가문이었다.

 

그 뒤 아버지 서광효의 고향인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화석리(현, 논산시 구자곡면 화석리)로 온 가족이 옮겨가 그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이어 근처 구자곡면 금곡리(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1리)에 있던 집으로 이주하여 유아 시절을 비롯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광효의 집이자 본적지는 충청남도 은진군 구자곡면 금곡리 256번지(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256)였다.

 

서재필은 조선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 8대손으로, 6대조 서덕수는 경종 때 세제인 연잉군(뒷날의 영조)을 추대하려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가세는 몰락했고, 할아버지 서상기(徐相夔)는 유복자로 가난한 삶을 보냈고, 아들 광교(光敎), 광언(또는 광효), 광업(光業) 형제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 서광효는 처갓집에서 10여 년간 생활하다가 집을 마련하여 다시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가 태어날 무렵 누나 1명과 친형 서재춘(徐載春), 서모에게서 태어난 이복형 서재형(徐載衡)이 있었고, 어머니 성주 이씨에게서 남동생 서재창(徐載昌), 서재우(徐載雨 또는 載愚)와 여동생 서기석 등이 태어났다.

 

양자 출양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근처 충청남도 은진군 진잠으로 갔다가, 관직에 오른 양부 서광하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갔다. 양어머니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하나였던 김온순의 딸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신을 지낸 김성근의 누나였다.

 

유년기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키가 남보다 크고 기운이 세어 동네 아이들을 잘 때리기도 하였으나, 남달리 패기와 기상이 흘러넘쳤다. 어느 여름날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에 내려갔다가 어느 원님이 부임하러 행차하던 중 어느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동리 어른들도 감히 원님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소년이던 서재필은 두려움 없이 다가가더니 호기심에 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비굴한 기색이 없고 당당해 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보렴'하니 서재필은 바로 받아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더듬은 사유를 원이 묻자 '원님이 갖고 계신 부채를 빌려 주시면 그것으로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수령은 부채를 빌려달라는 소년의 엉뚱함에 내심 기특해하면서 부채를 빌려주었더니, 소년은 그 부채를 가락에 맞추어 흔들면서 민요를 한 바탕 불렀다.

 

소년의 비범함을 알아본 수령은 그의 이름을 물었고, 소년은 "서재필입니다. 호는 쌍경이라 합니다."라며 당당히 밝혔다. "제 아버지께서 진사에 급제한 해에 제가 태어나 경사가 두 가지 겹쳤다 하여 제 이름을 쌍경이라 하였습니다." 원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고는 임지로 떠났다. 한편,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던 그는 동리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한성부로 상경한 뒤에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잡다한 지식에 해박했으며 평소 자존심이 강하였다.

 

수학과 소년기

스승의 한 사람인 환재 박규수

양부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72년(고종 10년)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을 찾아가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양아버지의 권고로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로부터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성근의 학숙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 《사기》(史記), 《사서 육경》을 배웠는데 대부분 암송하였다 한다. 그중에는 뜻을 아는 것도 있었으나 일부는 암기를 해 두었다. "또한 김성근의 집에 머물던 중 그의 집안에 출입하던 서광범과 김성근의 일족인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서재필은 김옥균을 통해 3년 연상의 박영효와도 만나, 그와도 사귀게 되었다. 김옥균은 그를 각별히 대했다 한다. 이어 김옥균과 서광범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생가와 양가는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는 노론 북학파 계열의 영향을 받고 개화파의 형성에 참여한다.

 

관료 생활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

1878년(고종 15년) 봄 서재필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1879년(고종 16년) 초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그해 봄 고종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전강(殿講)에서 1등 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아,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강에서 시관이 사서삼경 중 아무 데나 지적하자 이를 막힘 없이 일곱 번을 반복해서 줄줄 외웠다 한다. 1879년 4년 연상인 경주 이씨(慶州李氏)와 결혼하였으나 곧 사별하였다. 1881년(고종 18년) 봄 다시 김영석(金永奭)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두번째 부인 광산 김씨는 한성부의 명문 거족으로 사계 김장생과 허주 김반, 신독재 김집, 광남 김익훈의 후손이었다.

 

18세 되던 1882년 3월 증광 문과에 병과(3등)로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급제 직후, 서재필은 이렇다 할 보직에 제수되지 못하다가, 4월 6일 승문원 가주서로 임시 보직되었다가 김중식(金中植)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4월 18일 다시 승문원 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급제 직후 정식 보직을 받지 못하자 4월 19일 박영교의 상소로 군직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의 병조의 병비에 의해 부사정이 되고, 경연 가주서를 겸하였다. 4월 25일 병으로 승문원가주서에서 체차 되어 송세현(宋世鉉)과 교체되었다. 그해 6월 서재필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김옥균 등이 만든 충의계(忠義契)에 가입했고 이는 그대로 개화당으로 발전하였다.

 

개화 사상 접촉

박영효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동인을 처음 만난 지 2개월 뒤, 이동인은 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돈 주고 사 왔다. 역사책도 있고 지리, 물리, 화학 관련 서적도 있었다. 이것이 신기하다 여긴 그는 친구들과 이를 보려고 서너 달 동안 봉은사에 다니다가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로 자리를 옮겨 남몰래 탐독하였다.

 

"모두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충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국민의 권리를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란 중이 우리를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이 개화파의 온상이라 할 것이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관료 생활

1883년(고종 20년) 1월 14일 승정원 가주서가 되었다가, 병으로 당일 이민영(李敏英)으로 갈리게 되었다. 1883년 2월 초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2월 27일 이조(吏曹)의 건의로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서재필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히 활동하였다. 그해 3월 6품으로 특별 승진하고, 훈련원 부봉사가 되었다. 이때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 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몰락한 양반이었던 탓에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이 적었고 이는 평민 출신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는 배경이 된다. 1883년(고종 20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유학생 대표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 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1884년(고종 21년) 1월에 게이오 의숙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또한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일본의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柔術) 전반에 대해 배웠다.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폭탄 투척 등의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에도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하였고, 지지 신보 1884년 2월 28일 자 기사에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6월 수료하였다. 그해 6월 일본에 체류 중 다시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서재필과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병조 예하에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조련국을 창설하였으나 서재필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사망으로 서재필은 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6월 30일 고종의 특명으로 기복의 명을 받고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操鍊局 士官長)이 되었다. 그러나 신설된 조련국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폐지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 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 수비대로 편입되었다.

 

갑신정변

갑신정변 계획

김옥균

당시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상중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기복(起復, 부모의 3년상인데도 사직이 윤허되지 않고 특별 채용되는 것)의 특혜를 받았다. 서재필은 거듭 사양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1884년(고종 21년) 8월 20일 조련국 사관생도 교관으로 배치되어 신식 병사 양성을 맡게 된다. 그러나 고종은 사관들을 데리고 바로 대령하라고 했음에도 당일 입궐하지 않아 동부승지 김문현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이 특별히 무마시켰다. 고종의 여러 번 출사 요청이 있자 그는 조련국 사관장으로서 병력의 훈련을 담당한다.

 

1884년 초부터 서재필은 기회를 잡다가 그해 6월 귀국 이후, 10월에 있을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서재필은 조련국 병사들과 신식 군대로 구성된 행동대를 총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 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

 

정변 계획 중에 그는 일본 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 조선 주둔 일본 육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일본의 토야미 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 진행 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과 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갑신정변 직전 

1884년 11월 승지(承旨)로 특별 승진하였다.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11월 9일 서재필은 조선 주둔 일본군 중대장 무라카미 등을 찾아가 거사 협조를 부탁하였다. 11월 16일 묘동에 있는 이인종(李仁鍾)의 집에서 김옥균과 만나 거사 계획을 숙론하였다.  11월 26일 탑골 승방에서 김옥균 등 동지들과 회합하고 빠른 시일 내로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환경 변화에 대비한 다양한 거사 세부 계획을 짰다. 11월 27일 3시에 무라카미와, 밤에 다시 동지들과 계획을 세밀히 세워 나갔다. 11월 30일에 다시 동지들과 모여 거사 준비를 하였다.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에 가서 서광범, 홍영식, 김옥균 등과 만나 12월 4일로 거사 날자를 정하였다. 12월 4일에 거사를 개시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결정하였다.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서재필이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이인종,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의 동지들과 함께 모이기로 한 여러 장사들, 이규정(李圭貞),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김봉균, 이은종(李殷種),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 만일 그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12월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서재필의 자택에서 여러 동지들과 거사 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어두워지자 우정국으로 갔다. 장사 패를 이끌고 교동 일대의 경비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이인종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가다. 밤에 김옥균 일행이 고종을 만나 정변이 일어났음을 알리었다. 고종을 경호하여 경우궁까지 무사히 인도하였다.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파천시킨 뒤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조연이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국왕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 들고 "내가 이 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안에 들어가기를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고, 서재필의 부하 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이조연과 한규직은 경우궁 뒷문으로 나아갔다. 막 문 밖에 나아가자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 등에 의해 타살당했다. 12월 5일 개화파는 개화 신내각을 발표하였으며,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갑신 일록》에서 그를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기록하였으나 실록을 비롯한 공식문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그는 정변 과정에서 대신들을 참살하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의 내습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홍영식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한성부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 총판 홍영식(洪英植)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 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臺鎬), 민영목 등을 대한제국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민씨 대신들은 그를 증오하였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 군대의 조선 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는 외세의 개입을 규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가로 은신하였다. 12월 9일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해주었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邊樹)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에 숨었다가 12월 12일 인천주재 주 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 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츠지 가트 사부로(辻勝三郞)의 일본 선박 치토세마루(千歲丸) 호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 있던 일본 상선 치토세 마루(千歲丸)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하고 다케조에에게 국적(國敵, 갑신정변 주동자들을 가리킴) 서재필과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품속에 비상약을 쥐고 자살을 각오했다. 한참을 묄렌도르프들과 우물쭈물 대던 다케죠에는 배로 올라와 어쩔 수 없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배 안의 일본인들이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장 츠지 가트 사부로 역시 그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며 말하길, '당신을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 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힐난했다. 다음은 그의 발언이다.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선장 츠지 가츠 사부로(辻勝三郞)는 직접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 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그들을 따돌렸다. 츠지 선장의 배려로 서재필과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변의 실패와 가족들의 최후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광산 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린 딸 한 명은 딸이라 하여 연좌되지 않고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딸은 후에 안동 김씨 김태균(金泰均)의 아들 김두진(金斗鎭)과 결혼하였는데, 그는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으로 청음 김상헌의 자손 고죽 김옥균과는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김두진과 결혼한 딸과는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서재필의 배우자 광산 김씨는 자신의 본가를 찾아갔는데,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승지였던 장인 김영석은 딸에게 서씨 집 귀신이 되라며 되돌려 보냈는데 가서 자결하도록 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가로 쫓아 보냈다.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장인 김영석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이복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 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 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 김씨는 못다 죽어, 어느 날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생모 성주 이씨나 배우자 광산 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아내의 묘소는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서재필 묘소에 합장되었다. 한성부 종로 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한성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서울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  담양 가사문학면 지실 정해은과 결혼한 큰누나 서씨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연좌제와 친인척 처벌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은 1884년 19세에 종로 사직동에 살던 보국숭록대부를 지낸 서상우(徐相雨)의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그런데 생가의 둘째 형 서재형(徐載衡)은 서재필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하여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 서재우는 훗날 사면됐다. 1884년 초에 죽은 그의 양어머니 안동 김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그의 가족 중 형인 서재춘의 아들들이 살아남아 손자인 서명원 등을 두었고, 서재창의 처 조씨에게서 나온 유복자의 손자가 서희원이었다. 또, 기생으로 끌려간 동생 서재우의 처가 아들 서호석을 두었다. 서재우의 일가 역시 겨우 후사를 잇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그의 서씨 집안에서는 광(光) 자 대신 병(丙)을, 재(載) 자 대신 정(廷) 자를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광(光)  자 항렬과 재(載) 항렬을 쓰기도 하였다.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압수,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 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 등은 살아남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언제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변의 실패와 그의 가족, 친지들이 몰살당하자 민중에 대한 증오와 함께 조선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내 문제에는 관심을 서서히 줄여나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피신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 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서재필 자신은 1년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겼고,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였다. 그는 자객을 피해 걸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기독교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1차 미국 망명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 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미국 망명 초기 장로교 선교사이자 안면이 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지로 보낸 소개장 덕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다. 미국 생활 중 감리교회에 나가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887년 3월부터 1894년 3월 10일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가며 홍국영을 부관참시하고 도륙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시에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도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거나 사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매일 올렸다. 이는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상소가 수시로 계속되자 고종은 나중에 이를 모두 물리쳤다.

 

미국 망명생활 초기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 때 10마일을 뛰어다니면서 일했다. 낯선 땅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고,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은 데다가 노동법령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임금도 못 받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한다.

 

처음에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이라는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에 좌절하여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아 여러 번 일자리를 바꾸기도 하며 차가운 시골과 변두리의 판잣집을 전전해야 했는데, 위생상태의 불결함 등으로 감기와 피부염증, 동상에 자주 걸려 육체적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막노동과 잡역,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가리지 않고 이역만리를 헤매며 오렌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 가구점 점원, 잡화 상회 점원 등을 전전하며 미국 생활을 견뎌냈다 한다.

 

고단한 미국 생활에서 연락을 주고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 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 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 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그를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그와 친분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감시, 탄압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배신감과 증오로 변하게 된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운 좋게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 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과 정원 조경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또한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콘크란 단과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 C.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 C. 의 컬럼비안 대학 (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

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 학사가되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1893년 8월 워싱턴 D.C. 에서 만난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의과대학 졸업 후에도 박물관에 계속 근무하였다.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 만에 그만두고 만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 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

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 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망명 중 미국에 들른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들여 1895년 12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개화파 정부는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 시민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이에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는 한편, 1896년 1월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국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까지 발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영문판 〈The Independent〉로도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이상재, 남궁억, 이완용, 김가진, 안경수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초기에 고급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립협회는 이후 토론회, 구국 상소,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에 노력했다. 또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면서 1896년 11월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 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낀 러시아는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 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친러 정권과의 대립으로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자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독립신문(獨立新聞) 1896년 4월 7일에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이자 한글, 영문판 신문
안창호(1878~1938)와 서재필(1864~1951)이&nbsp;로스앤젤레스에서 찍은 사진. 19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