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1 23:38:21
조선의 운명과 함께한 총리대신 김홍집
김홍집의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굉집(宏集),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다.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김영작(金永爵), 어머니는 성혼(成渾)의 자손이다. 한마디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애국지사 이시영(愛國志士 李始榮)의 장인이다.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에 급제.
1868년(고종 5) 승정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체결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침략 의도 노골화-조약 내용 개정을 위한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
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
당시 예조 참의였던 김홍집은 58명의 수행원과 함께 조약 재협상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제 외교 무대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김홍집을 비롯한 수신사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김홍집은 그런 환대에 현혹되지 않고 강화도조약, 즉 ‘한일통상수호조약’의 불평등한 내용을 재 개정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은 재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조선 외교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개화 이후 빠르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서적을
가지고 왔다. 이 서적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조정에 이 내용이 전해지자
특히 반가워한 사람은 명성왕후를 비롯한 민씨 일파였다. 그들은 강화도조약 이후 궁지에 몰려 있던 자신들의 외교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의조선책략》을 인쇄해 널리 보급 했다. 또한 김홍집을 예조 참판의 자리에 앉히고 외교 실무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이 일은 민씨 세력의 기대와는 달리 곧바로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급진개화파들은 《사의조선책략》의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반면 위정척사파들은 더욱 극렬하게 개화운동을 반대한 것이다. 결국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만 더욱 가중시킨 결과가 되었다.
위정척사파들은 김홍집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서는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일로
김홍집은 사직소를 수차례 올렸다.
이 상소에는 《사의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온 경위를 밝힌 내용도 들어 있다.
"다만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을 때 중국 공사(公使)와 자주 만나 천하의 대세를 논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능멸하고 핍박하는 것을 개탄했는데, 손발은 서로 구원하기에 급급했고 말은 기탄없이 털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는 방도에 마음을 쓰며 지키고 요사스러운 것을 배척하는 의리를 한결같이 주장했습니다. 토론하는 것으로 부족해 대책을 강구하기까지 했는데, 무릇 그 수천 마디나 되는 글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떠나기 전날에야 만나서 신에게 직접 전해줬습니다. 그 마음 쓰는 것이 몹시 절실했고 계책한 것이 상세하고 주밀했으니, 어찌 과장되고 허황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일은 영토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말은 조정에서 취할 만하기에 신이 감히 사적으로 물리치지 않고 받아왔던 것입니다". 《고종실록》 권17, 고종 17년 10월 3일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 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 하라고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외교 실무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불러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개화를 이끌었던 김홍집이 흥선대원군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지만 김홍집 외에는 일을 맡아서 처리할 인물이 없었다.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역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뒷수습을 맡으면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를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홍집은 같은 개화파였지만 정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정 을 대표해 열강과의 대외 교섭에 앞장섰지만 혁명적 실천에는 미온적인 온건개화파였다. 이때 김홍집은 뒷수습을 맡으면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계기가 된 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우를 범했다. 이에 책임을 느낀 김홍집은 한동안 조정의 핵심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1885년(고종 22) 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의 책임으로 관직에서 사직.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일본에 정변 책임을 묻고 김옥균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조선의 책임을 물어 교섭할 것을 요구했다. 1885년 전권대신 이노우와 김홍집 사이에 전문 5조의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내용은
① 조선국은 국서로 일본국에 사의를 표명할 것,
② 피해 일본인에게 보상금을 지불할 것
③ 일본 대위를 죽인 범인을 엄중처벌할 것,
④ 일본공사관 터를 제공하고 공사비에 충당할 것,
⑤ 일본 호위병의 병영은 공사관의 부지로 선정하고, 제물포조약 제5조에 따라 시행할 것 등이었다. 일본은 김옥균의 소환 요구는 거부했다. 한성조약으로 갑신정변에 대한 모든 책임은 조선에게 돌아왔고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에 대한 침략을 한층 더 강화시켜갔다. 일본의 조선 침략
계기가 되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 혁명 후 고종의 강력한 요구로 정계 복귀.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며 명성왕후 민씨가 실각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을 때 중앙 정계로 돌아왔다. 그는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관이 되어 갑오개
혁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영의정 대신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을 이끌었다.
1896년(고종 34) 아관파천(俄館播遷)과 함께 최후를 맞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되었다. 이는 김홍집 몰래 친러 세력의 주도하에 행해진 일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김홍집은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친러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간 고종에 의해 체포 명령이 내려진 후였다. 거리로 나선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민씨의 시해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된 단발령으로 사나워진 민심에 친일 내각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사태는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홍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天命)이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