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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들(여섯 번째)

2022-04-06 14:32:16

백인제 가옥(白麟濟 家屋)의 주인들

종로구 북촌로 7길 16(가회동)에 있는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이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지 907평에 건평은 110평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이다.

 

그러나 100년 동안 한결같이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지닌 이 가옥의 주인들은 여러 차례 바뀌었으며, 그 주인들의 삶 또한 다양하다. 나는 그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을 만나보았다.

종로구 북촌로 7길 16(가회동)에 있는 백인제 가옥의 관람 안내판

1913년 ~ 1928년까지

첫 번째 소유자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처음 지은 사람은 매국노 이완용의 외 종질이자 그 자신도 동양척식 주식회사 고문,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등을 역임하고 한성은행 전무를 지낸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한상룡(韓相龍 1880~1947)이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 기념훈장을 받는 등 수차례 훈장과 포장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1906년 가회동으로 이주한 이후 몇 년에 걸쳐 주변의 작은 가옥 12채를 사들여 1913년에 이 집을 완공하였다.

 

그는 1941년 회갑을 기념해 발간한 ''한상룡을 말한다''에서 "대지 907평에 건평은 110평 남짓이었으며, 높은 지대에 위치해 경성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이 가옥을 준공한 이후 넉 달 뒤인 10월 17일 ''일본 천황''이 신에게 곡식을 바치는 날인 ''간나 메사이(神嘗祭)''를 맞아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 등 일제 관리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방문객들로부터 휘호를 받아 그것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17년 5월 27일에도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도 초대해 연회를 즐겼다. 그러나 한상룡이 1928년까지 15년간 거주했던 이 가옥은 그가 당시 전무취체(專務取締)로 있던 한성은행의 경영악화에 대한 총독부의 압력으로 한성은행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1928년 ~1935년까지

두 번째 소유자 한성은행(漢城銀行)

1897년 김종한(金宗漢) 등 거물급 재계 인사들이 자본금 20만 원으로 서울에 설립되었던 민족계의 근대적 은행으로 민간인에 대한 환전 및 금융업무를 주요 목표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영업실적의 부진으로 영업목표를 황실 및 정부재산의 관리와 금융으로 전환하고, 1903년 2월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은행장에는 황실 측근인 이재완(李載完), 부은행장에 김종한, 실무책임자인 우 총무(右總務)에는 한상룡(韓相龍)이 취임하였다. 그 뒤 한상룡이 주동이 되어 은행실무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1905년 금융공황이 닥쳐와 큰 타격을 받게 되자, 이해 9월 자본금 15만 원의 주식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변경한 다음, 일본 다이이치 은행(第一銀行)의 융자를 받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래서 발행 주식 3,000주 중에서 다이이치 은행이 800주를 인수함으로써, 운영자금은 거의 전적으로 다이이치 은행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뒤 저리자금으로 융자받아 고리로 대출함으로써 크게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계기로 일제의 자본과 경영인들이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나,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였다.

 

1906년 3월「은행 조례」에 따라 주식회사 한성은행이 되었으며, 이해 10월 수원지점이 개설되었다. 1907년에는 자본금이 30만 원으로 증가하였으며, 1908년 2월 동막(東幕 : 현재의 서울 마포) 출장소를 개설하였다.

더욱이 1910년 국권 상실과 거의 동시에 한상룡이 전무 취체역(專務 取締役)에 취임하였으며, 1911년 1월 친일파의 은사 공채(恩賜 公債)를 인수하여 일거에 자본금이 300만 원으로 증자되었다.

 

그리고 각지에 1911년 평양지점, 1912년 대전지점, 1915년 8월 개성지점, 1917년 남대문지점, 1918년 부산지점·동경지점, 1919년 동대문지점·평양 대화정(大和町) 출장소, 서대문 출장소 등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자, 한국인들의 맹렬한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은행장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 이윤용(李允用)이었으며, 전무는 이완용의 조카인 한상룡이었을 뿐만 아니라, 은행의 대주주들이 거의 친일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금을 일시에 모두 인출해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불어닥친 1920년대의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이이치 은행으로부터 200만 원의 구제자금을 융자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1922년부터는 일본인들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었고, 그 뒤로는 그들이 전무, 은행장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1928년 3월에는 발행주식 6만 주 중에서 2만 8,000 주를 조선 식산은행이 인수함으로써 조선 식산은행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 일인들이 은행 부실 경영의 책임을 한상룡에게 물어 한상룡 가옥이 은행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일제의 민족계 은행 통합정책에 의해, 1941년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을 흡수, 합병하였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東一銀行)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을 설립하였다.

조흥은행은 1999년 4월 충북은행과 강원은행을 합병하였으며, 2006년 4월 1일 옛 신한은행과 통합하여 (주)신한은행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1935년 ~1944년

세 번째 소유자 최선익(崔善益 1905 ~ ?)

1935년 한성은행은 이 저택을 개성의 청년 갑부였던 최선익에게 소유권을 넘기게 된다. 최선익은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운동가인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으며,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벽초 홍명희 (碧初 洪命憙)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 좌우합작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친일파가 지어 조선 총독들과 연회를 즐긴 집에 민족주의자가 거주한 셈이다.

 

1944년 ~ 1968년

네 번째 소유자 백인제(白麟濟 1899 ~ ?)

1915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6개월간 투옥으로 퇴학을 당하였다. 1921년 복교하여 졸업하였다. 1921년 총독부 의원 부수(副手)로 근무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아 등록하였다.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외과 근무를 하였다. 1928년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시에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다시 1년 6개월간 프랑스·독일·미국에 유학하였으며,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백 외과(白外科: 현재 인제대학교 부속 백병원)를 서울 저동에서 개업하였다. 1945년 9월에 서울 의과대학(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소격동 소재)에 임명되고 1945년 12월 서울의사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10월 국립 서울대학교 창설과 함께 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로 임명, 1947년 1월에 사임하였다. 1947년 대한 외과학회 초대회장, 대한의학협회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6·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1946년 11월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쳤으나 특히 구루병(佝僂病)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이외에도 혈액에 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가 그의 조카이다.

 

1968년 ~2011년

다섯 번째 최경진(崔炅珍, 創氏名:江東慶進 1908 ~ 2011)

함경남도 함흥 출생이다. 함흥상업하교, 부산상업학교(3년편입)에서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유학 중이던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같은 해에 합격하였다. 또한 법학사(法學士)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함경남도 경부(警部), 평안남도 강동 군수, 평안남도 경시(警視)/경찰부 보안과장, 조선총독부 사무관(학무국 동성과, 學務局 錬成課) 등 경찰 공무원을 역임하였다. 광복 당시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라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그대로 경찰로 등용되어 경찰국장 대리, 경무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하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다.

 

2009년 서울특별시로 소유권 이전, 2015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백인제 가옥의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