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다음 블로그 [운중풍월]에서 옮겨옴
조선 왕조는 주자학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으면서 유교의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으며, 가부장적 제도와 윤리규범을 토대로 사회적 신분 질서를 중시하였다. 여성에게는 유교적 부덕을 가르치고 이의 실천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여성상을 목표로 그들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여자는 오직 집안에서 길쌈하고 바느질하며 음식을 만드는 등 가족을 위한 여공(女工)에 힘쓰고, 부모와 남편을 잘 섬기는 것이 본분으로 인식되었다. 또 정절을 미덕으로 하는 유교적 부덕을 내세워 여성의 정절이 제도적으로 강요되었으며,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집의 깊숙한 안채에 기거하게 되었고 바깥출입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따라서 조선시대 여성이 공적, 사회적으로 문학 활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여성들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여성의 학문이나 문학 활동에 대해 당시 유학자들은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요, 부녀자는 질서에 따라 조석으로 의복·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 부녀자로서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고 예의를 논설하는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폐단만 많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풍속은 중국과 달라서 무릇 문자의 공부란 힘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으니, 부녀자는 처음부터 유의할 것이 아니다. 『소학(小學)』과 『내훈(內訓)』의 등속도 모두 남자가 익힐 일이니, 부녀자로서는 묵묵히 연구하여 그 논설만을 알고 일에 따라 훈계할 따름이다. 부녀자가 만약 누에치고 길쌈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詩 書에 힘쓴다면 어찌 옳겠는가?”
이익은 여자의 직분을 오직 가사활동에 한정하고 여자는 오로지 이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 문자 공부는 여자가 전혀 관여할 바가 아니며 심지어 여성 교훈서인 『소학』과 『내훈』도 익히는 일은 남자가 하고 여자는 오로지 이를 묵묵히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덕무(李德懋)는 『사소절(士小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인은 마땅히 『서(書)』·『사기(史記)』·『논어(論語)』·『모시(毛詩)』·『소학(小學)』·『여사서(女四書)』를 대강 읽어서 그 뜻을 통하고, 여러 집안의 성과 조상의 계보와 역대 나라 이름과 성현의 이름자를 알 뿐이다. 허랑하게 시나 가사를 지어 외부에 퍼뜨려서는 안 된다.”
이덕무 역시 여성의 학문을 금해야 한다는 기본 인식 아래 여성은 대표적인 유교 경전과 여성 교훈서를 읽되 오로지 대강 읽어 그 뜻만 통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성에게 그 이상의 학문 활동은 전혀 필요치 않으며 여성은 여러 집안의 성과 조상의 계보와 역대 나라 이름과 성현의 이름자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규중요람(閨中要覽)』에서도 “여자는 역대 국호와 선대 조상의 이름자를 알면 족하다. 문필이 공교하고 시사(詩詞)의 현람함은 오히려 창기(娼妓)의 본색이요, 사대부가 부녀가 행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여 여성의 우수한 문학적 재질과 수학 능력을 오히려 폄하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견해와 달리 서거정(徐居正)과 어숙권(魚叔權)은 여성의 학문이나 문학 활동에 대해 상당히 진보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서거정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사족(士族) 부인 정씨(鄭氏)의 〈영두견화(詠杜鵑花)〉란 한시를 창작 배경과 함께 싣고 “비록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난 사람도 어찌 이보다 더 잘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만일 정씨가 가르침을 받았다면 시문의 아름다움이 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옛날 규수 중에 채염(蔡琰), 반첩여(班婕妤), 설도(薛濤) 같은 여인들은 문장이 공교하고 아름다워서 문사(文士)들과 겨룰만하였다. ······ 우리나라는 여자들이 학문하는 일이 전혀 없어 비록 영특한 자질이 있더라도 다만 길쌈하고 옷을 짤 뿐이다. 이 때문에 부인의 시가 전해지는 것이 드물다. ······ 『시경(詩經)』에 “잘하는 것도 없고 잘못하는 것도 없어야 하니, 오직 술과 밥을 장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며, 『주역(周易)』에 “규중에 있으면서 음식을 장만하면 정(貞)하여 길(吉)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누에 치고 길쌈하는 일을 그만두고 번거롭게 시서(詩書)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하물며 사방의 나라는 모두 특성이 있어서 천 리 사이에도 풍속이 같지 않으니 우리나라 여자들이 학문을 하지 않는 풍속이 도리어 유익한 것을 어찌 알겠는가?”
서거정은 중국에서는 비록 여성의 학문과 문학 활동을 금하고 이를 규제하였지만 각 나라마다 풍속과 특성이 같지 않음을 고려해 볼 때 우리 나라에서 여자의 학문 활동을 금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여성이라도 오히려 그 능력을 감추고 드러내지 못했던 당대 현실의 부당함을 탄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도 볼 수 있다.
“부인의 직분은 음식 만들고 길쌈하는 것뿐이다. 문장과 글씨의 재주는 그 마땅한 바가 아니다. 우리 동방의 논의가 예로부터 이와 같아 비록 재품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또한 꺼리고 숨겨 힘쓰지 않았으니 가히 한탄할 일이다.”
어숙권은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직분을 오로지 가사에만 한정하여 여성의 학문과 문학 활동을 금지하는 것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아무리 뛰어난 자질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당시 여성의 현실을 한탄한 것으로 여성의 학문 활동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제한된 여건 속에서 조선시대 몇몇 여성은 부친이나 남자 형제가 학문하는 곁에서 견외지학으로 글을 깨우쳤으며, 또 어떤 여성은 여성이 학문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의식을 지닌 학문적 가풍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많은 작품을 산출하였다.
조선시대는 그동안 삼국, 고려시대를 거쳐 온축된 여성의 문학이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 시기로 다양한 작가의 우수한 작품이 양산되었다. 이 시기 시가로는 한시와 시조, 사설시조가 있는데, 여성한시의 경우 왕실 여성과 궁인, 사대부가 여성, 소실과 기녀 외에 평민층 여성이 한시 창작에 가담하였다.
여성이 이렇게 활발하게 한시 창작을 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여성이 학문하는 것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여성 작가의 가정이나 주위 환경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자신의 내면에 분출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표출하려는 자의식의 발로라는 내부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여성 작가는 개인의 문집을 갖게 되었으며, 일부는 남편이나 가족 문집에 나란히 시를 싣기도 하였다.
시조는 조선 전기 일부 사대부가 여성이 창작에 가담하였을 뿐 주로 기녀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작가와 작품 수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사설시조는 많은 작품이 산출되었는데 현전하는 사설시조 500여 수 중 약 70여 수를 여성작가의 작품의 추정해 볼 수 있다. 여성 사설시조의 주제는 대부분 애정에 관한 것이며 그들은 여기서 파생되는 감정과 갈등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며 직설적으로 토로하여 사설시조 특유의 세속적 미의식을 확보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시대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빙호당[ 氷壺堂 ]
조선 시대 전기 한시 작품을 남긴 왕실 여성으로는 종실(宗室) 숙천령(肅川令)의 부인인 빙호당(氷壺堂)이 있다. 숙천령은 세종의 증손자인 이기(李琦, 1515~?)이며, 빙호당은 선조(재위 1567~1608) 때 사람으로 시문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호를 노래한 〈영빙호(詠氷壺)〉를 지었다.
詠氷壺(영빙호)
最合牀頭盛美酒(최합상두성미주) 좋은 술은 상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데
何如移置小溪邊(하여이치소계변) 어찌하여 작은 시냇가에 옮겨놓았나
花間白日能飛雨(화간백일능비우) 꽃 사이 밝은 해는 능히 비를 날리니
始信壺中別有天(시신호중별유천) 병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비로소 알겠네
그는 자신을 자기의 당호인 ‘빙호(氷壺)’에 비유해 집안의 상에 있어야할 빙호가 바깥 세상에 나온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집안과는 색다른 외부세계를 경이로운 별천지로 인식하는 부녀자의 순수한 시심과 ‘병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와 자아의 각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빙호당은 〈영빙호〉 외에 그가 어렸을 때 비를 읊은 시구와 선조대왕 초년 임금의 행차를 보고 지은 시구 둘을 남기고 있다. 전자에서는 어린 시절 아이다운 순수한 시상으로 내리는 비를 옥(玉) 줄에, 비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은방울에 비유하는 탁월한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후자에서는 선조대왕 초년인 1567년 임금의 장엄한 행차를 보고 임금의 위상을 하늘의 해와 달에 비유하여 군왕을 송축하는 뜻을 왕가의 여인답게 기품 있게 드러내고 있다.
• 玉索連簷直(옥색련첨직) 처마에 연이어 내리는 옥 줄
銀鈴落地圓(은령락지원) 은방울 되어 땅에 동그라미 그리네
• 天中新日月(천중신일월) 하늘엔 해와 달이 새로운데
輦下舊臣民(련하구신민) 임금이 탄 수레 아래에는 옛 신민이 따르는구나
[네이버 지식백과] 빙호당 [氷壺堂]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안평대군의 궁희[ -宮姬 ]
고려시대 궁녀인 권귀비가 〈궁사〉를 지어 궁녀문학의 장을 마련한 이래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의 궁희(宮姬) 10인이 한시를 창작해 그 맥을 잇고 있다. 이들의 시는 『동양역대여사시선(東洋歷代女史詩選)』에는 〈부연(賦烟)〉,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에는 〈연시(煙詩)〉라는 제목으로 전하며, 시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었다. 안평대군이 당시 양가(良家)의 재모(才貌) 있는 여자 열 사람을 가려 시문을 5, 6년 가르쳤는데, 모두 일가를 이루고 필법을 알아 글을 잘 지었다고 한다. 10편의 시 모두 여성다운 섬세한 필치와 수법으로 안개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안개를 운치 있게 그려내고 있다. 다음은 『동양역대여사시선』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蔽月輕紈細(폐월경환세) 가벼운 비단으로 달을 덮은 듯
橫山翠帶長(횡산취대장) 푸른 띠로 길게 산을 두른 듯
微風吹漸散(미풍취점산) 미풍에 점점 흩어지더니
猶濕小池塘(유습소지당) 오히려 작은 연못을 적시네
옥녀(玉女)
山下寒烟積(산하한연적) 산 아래 차가운 안개 쌓여
橫飛宮樹邊(횡비궁수변) 궁궐 나무 가로 비껴 날아가네
風吹自不定(풍취자부정) 바람 부니 저절로 움직여
斜月滿蒼天(사월만창천) 기우는 달 푸른 하늘에 가득하네
금련(金蓮)
短壑靑陰裡(단학청음리) 작은 골짜기 맑은 그늘 속
長堤流水中(장제유수중) 긴 둑 흐르는 물속에 일어
能令人世上(능령인세상) 사람 사는 세상을
急作翠珠宮(급작취주궁) 갑자기 푸른 구슬 궁궐로 만드네
[네이버 지식백과] 안평대군의 궁희 [-宮姬]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이각의 부인[ 李恪- ]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여성한시 작품은 이각의 부인이 지은 〈송부출새(送夫出塞)〉이다. 이각(李恪, 1374~1446)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태종 2년(1402)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수군첨절제사, 경상우도 병마도절제사, 병조참판, 전라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1429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32년 강계절제사에 제수되어 최윤덕을 따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을 정벌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 공로로 1434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전임되었으나 1436년 야인 침입을 막지 못해서 결성(結城)에 유배되었다가 1438년 다시 등용되어 경상좌도 처치사·전라도 처치사를 역임하고 1443년 동지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送夫出塞(송부출새)
何處沙場駐翠旗(하처사장주취기) 어느 모래사장에 푸른 깃발을 세웠는가
戍歌羌笛夢中悲(수가강적몽중비) 수자리 노래와 오랑캐 피리소리 꿈속에 슬픈데
陌頭楊柳吾何悔(맥두양유오하회) 길가 버드나무를 내 어찌 원망하리오
只待歸鞍繫月支(지대귀안계월지) 다만 달 아래 나뭇가지에 말을 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리
이각의 행적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는 이각이 최윤덕을 따라 파저강의 야인을 정벌하러 갔을 때 지은 시로 짐작된다. 파저강은 압록강의 지류로서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던 곳이다. 세종 때 최윤덕을 총사령관으로 이순몽, 최해산, 이각 등이 진군하여 크게 이김으로써 4군 설치의 기초를 다지고 여진족의 잦은 발호를 억누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전쟁터에 남편을 보낸 아내의 회한과 근심이 물씬 묻어나는 시다. 전장에 나간 남편이 어느 곳에 진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답답한 상황에서 그는 길가 버드나무 아래 남편을 전장에 떠나보내던 그 때를 생각해 본다. 그때 붙잡지 못한 것이, 아니 붙잡을 수 없었던 현실이 못내 한스러우나 현재로서는 결국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나뭇가지에 말을 매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전장에 나간 남편의 안위를 염려하는 아내의 마음이 안타깝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각의 부인 [李恪-]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안귀손의 부인 최씨[ 崔氏 ]
이각의 부인이 지은 〈송부출새(送夫出塞)〉와 마찬가지로 남편을 소재로 한 시가 또 있는데 바로 최치운의 딸이며 안귀손(安貴孫)의 부인인 최씨(崔氏)의 〈도망부사(悼亡夫詞)〉이다. 이 작품은 남편인 안귀손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悼亡夫詞(도망부사)
鳳凰于飛(봉황우비) 봉새 황새 함께 날며
和鳳樂只(화봉낙지) 봉새와 화답하며 즐겼는데
鳳非不下(봉비불하) 봉새 가고 아니 오니
凰獨哭只(황독곡지) 황새 홀로 울고 있네
搖首問天(요수문천) 머리 들어 하늘에 물어도
天黙黙只(천묵묵지) 하늘은 묵묵히 말이 없네
天長海濶(천장해활) 하늘은 길고 바다는 넓고
恨無極只(한무극지) 내 한은 끝이 없네
최치운(崔致雲, 1390~144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08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조참의, 좌승지, 예문관 제학(提學)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최씨는 최치운의 딸로 안귀손에게 출가하여 지금의 문경 가은읍에 살았다. 안귀손의 본관은 순흥이며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으로 직강(直講)을 지냈다. 완천군(完川君) 이숙은(李叔隱)을 따라 가은읍 전곡리에 살며 많은 후진을 가르치면서 경전(經傳)을 갈고 닦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 사림이 한천사(寒泉祠, 문경군 농암면 농암리 소재)에 입향하였다. 가은읍 전곡리에는 그의 비(碑)가 보존되어 있으나 후사가 없어 외손인 평산 신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문종 즉위년(1451)에 “서산 군사 안귀손과 인동 현감 이우양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귀손이 당시 서산 군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양(瀟陽)은 연산무오사화(燕山戊午士禍, 1498) 때에 문성공 안유선생의 현손인 사직 안귀손과 거창현감 신숙빈이 옹서(翁壻)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상강정(上江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교육시킨 것이 마을 형성의 시초”라는 기록으로 보아 안귀손이 1498년 이후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귀손의 죽음을 애도하는 최씨의 〈도망부사〉는 적어도 1498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죽은 남편을 가고 오지 않는 봉새에, 홀로 남은 자신을 황새에 비유하여 남편 잃은 슬픔을 곡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남편과 화락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픔에 침묵하는 하늘에 대한 원망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절제된 언어 속에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현재 가은읍 전곡리 소양동에 열녀 최씨의 정려각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귀손의 부인 최씨 [崔氏]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성씨[ 成氏 ]
전장에 나간 남편의 안위를 염려하는 내용이나 먼저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내용의 시가 조선조 여성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보편적 요소인데 반해 다음 성씨(成氏)의 〈증인(贈人)〉은 조선 전기 사대부가 여성의 작품으로서는 보기 드문 호방함을 보여주고 있다.
贈人(증인)
步出隣家三四呼(보출인가삼사호) 이웃집을 찾아가 서너 번 부르니
小童來報主人無(소동래보주인무) 어린 동자가 나와 주인이 없다고 하네
若不杖策尋花去(약부장책심화거) 만일 지팡이 짚고 꽃 찾아간 것 아니라면
定是携琴訪酒徒(정시휴금방주도) 분명 거문고 들고 술친구 찾아갔겠지
성씨는 인재(仁齋) 성희(成熺)의 딸이며 진사 최당(崔瑭)의 부인이다. 이 작품은 일반 부녀자의 시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 전반에 남성적인 멋과 풍류가 흐르고 있다. 이웃집 문 앞에서 주인을 부르는 거침없는 행동과 외출한 주인의 행보를 짐작한 내용이 그러하다. 지팡이 짚고 꽃을 찾아가거나 거문고 들고 술친구를 찾아가 음악과 술 속에 정담을 나누는 것은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가 남성의 일반적인 행동으로, 집 안 깊숙한 곳에 거주하는 당시 여성의 시상으로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화자는 내심 욕심 없이 한적하게 인생을 즐기는 이웃집 주인의 삶을 동경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씨의 또 다른 작품으로 〈서회차숙손형제(書懷次叔孫兄弟)〉가 전한다.
書懷次叔孫兄弟(서회차숙손형제)
事隨流水遠(사수유수원) 모든 일은 유수처럼 멀어져 가고
愁逐曉春生(수축효춘생) 시름은 새봄 따라 솟아나네
野色開烟綠(야색개연록) 들 빛은 피어나는 안개 속에 푸르고
出光過雨明(출광과우명) 산 빛은 내리는 비속에 더욱 밝네
簾前雙燕語(렴전쌍연어) 주렴 앞 암수 제비 재잘거리고
林外數鶯聲(임외수앵성) 숲 밖에선 몇몇 꾀꼬리 소리
獨坐無多興(독좌무다흥) 홀로 앉아 흥겨운 일 없으니
傷心粧不成(상심장불성) 마음 상해 단장이 되질 않네
성희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아 한성부참군과 승문원교리를 지냈다. 1452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편찬하고, 1454년 『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년) 당질(堂姪)인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할 당시 연루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유배되었다가 3년 뒤 풀려났으나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성씨 역시 심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 작품은 당시 가족들이 정치적 풍파에 흔들린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 있을 때 쓴 글인 듯하다. 어려웠던 지난날이 물 흐르듯 다 지나갔건만 시름은 끊임없이 밝은 봄빛을 좇듯 생겨난다. 산 빛 들 빛 푸르게 빛나고 제비와 꾀꼬리 소리 정답게 들리건만, 자신의 마음은 이미 많은 상처를 입어 봄을 즐길 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창한 봄날의 풍경과 화자의 어두운 심경이 대조를 이루어 화자의 상심을 부각시키는 기법이 뛰어난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씨 [成氏]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정씨[ 鄭氏 ]
조선시대에는 사화와 당쟁 등 정치 문제가 계속 대두되어 관직에 나간 사대부가 있는 집안에서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뜻하지 않은 곤욕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전날의 충신이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문에 들이닥친 이런 정치적 환난은 곧 양반가 여성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은 비록 여성이었지만 정쟁(政爭)의 상처를 남성과 같이 그대로 겪어야만 했다.
다음의 〈태공조어도(太公釣魚圖)〉는 힘겹게 정계 생활을 하는 아들에 대한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鄭氏)는 정자순(鄭自順)의 딸로 정찬우(鄭纘禹)의 부인이며, 정인인(鄭麟仁, ?~1504)의 어머니로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평소에 시를 잘 짓지 않았으나 한번 지으면 아주 뛰어나고 절묘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일찍이 그 조카가 시를 지어주기를 청하자 “비록 부녀자가 할 바가 아니나 공을 위하여 한편을 짓겠다.”고 하고 벽에 걸린 태공조어도(太公釣魚圖)를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太公釣魚圖(태공조어도)
鶴髮投竿客(학발투간객) 낚시 던지는 백발 나그네
超然不世翁(초연불세옹) 초연함이 이 세상의 노인이 아니로구나
若非西伯獵(약비서백렵) 만일 주 문왕이 찾지 않았다면
長伴往來鴻(장반왕래홍) 오고 가는 기러기와 길이 벗하며 지냈겠지
서백은 은의 주왕(紂王)을 쳐서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이다. 서백은 사냥을 나갔다가 강태공을 만났는데 첫눈에 강태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강태공을 높이 등용하였다. 그때 강태공의 나이 팔십 세였다. 강태공은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워 무왕은 중국의 천자가 되고, 강태공은 주나라 창건 후 산동 반도 지방을 봉지로 받아 제(齊)나라의 왕이 되었다.
정인인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1498년 종부시주부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홍문관 전한을 거쳐 1503년 당상관이 되면서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앞서 홍문관·사헌부 재직 시 왕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한 것과 제주목사의 부임을 기피한 것이 원인이 되어 참수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태공조어도〉는 정씨가 아들의 순탄치 못한 벼슬살이를 염두에 두고 지은 작품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강태공이 만약 서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연에 묻혀 살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자신의 아들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힘든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회한을 담고 있는 듯하다. 벼슬길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애환이 한스럽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한편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사족(士族)부인 정씨(鄭氏)는 형제들이 학문할 때 옆에서 본래 글을 배웠는데 자못 시를 잘 지었다. 하루는 두견화가 활짝 핀 것을 보고 남편이 시를 지으라고 청하였다. 정씨가 그 자리에서 즉시 시를 지었다.”는 창작 배경과 함께 정씨의 〈영두견화(詠杜鵑花)〉 한 편이 실려 있다.
詠杜鵑花(영두견화)
昨夜春風入洞房(작야춘풍입동방) 어젯밤 봄바람이 방에 들어오더니
一張雲錦爛紅芳(일장운금난홍방) 한 폭 구름 비단 붉은 꽃에 향내 서렸네
此花開處聞啼鳥(차화개처문제조) 이 꽃 피는 곳에 새 울음소리 들리니
一詠幽姿一斷腸(일영유자일단장) 그윽한 자태로 울 때마다 남의 애를 끊네
이 작품에 대해 서거정은 “비록 시를 잘 짓는다고 이름난 사람도 어찌 이보다 더 잘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만일 정씨가 가르침을 받았다면 시문의 아름다움이 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씨 [鄭氏]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김창암[ 金蒼巖 ]
김창암(金蒼巖, ?~1508)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병마절도사 김석진(金石珍)의 딸인데 용모가 추하여 ‘창암(蒼巖)’이라고 자호(自號)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가례(家禮)』를 읽었다고 하며 평생 음영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 오직 〈자경(自警)〉 시 한 수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自警(자경)
據德懷仁可謂人(거덕회인가위인) 덕에 근거하고 인을 품으면 가히 사람이라 하리니
華簪寶佩莫安身(화잠보패막안신) 화려한 비녀와 보석 패물이 몸을 편하게 하지 못하네
脂豪榮祿吾還畏(지호영록오환외) 좋은 음식과 높은 벼슬이 나는 도리어 두려우니
上有王章下有民(상유왕장하유민) 위에는 왕장이 있고 아래에는 백성이 있기 때문이라네
이 시는 일반적인 여성의 정서가 아니라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남성적인 기개를 담아내고 있다. 그는 사람으로서 덕과 인을 갖추어야 할 것과 살아가면서 부귀영화를 경계해야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나아가 국법과 백성을 의식하여 바르게 살 것을 다짐하는 모습에서 개인적 자아를 사회적 자아로 확대하는 여성의 사회적 인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공식적인 교육 기관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공부란 집안 남자들이 학문하는 곁에서 견외지학을 하거나 스스로 문자를 익힌 후 가정 일을 하는 틈틈이 경전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대사회적 공간에서의 자아를 확립하고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학문하는 여성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어떻게 글을 배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문에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암 [金蒼巖]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김임벽당[ 金林碧堂 ]
김임벽당(金林碧堂, 1492~1549)은 부여 중정리에서 별좌(別座) 김수천(金壽千)의 장녀로 태어나 사간원 사간(司諫)을 지낸 조부 김축(金軸)으로부터 시문과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1509년 18세에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유여주(兪汝舟, 1480~?)와 결혼하여 아들 유위(兪緯)를 두었다. 유여주는 중종 때 현량과에 선발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향리인 비인으로 낙향하여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김씨의 시는 중국에까지 전해져 명나라 때 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이 편집한 『열조시집(列朝詩集)』에 3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는 〈증별(贈別)〉에서 이별의 근심과 한을 남성적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贈別(증별)
恨別渝三歲(한별투삼세) 한스럽게 이별한 지 삼 년
衣裘獨禦冬(의구독어동) 갓옷 입고 홀로 겨울을 막았네
秋風吹短鬢(추풍취단빈) 가을바람은 짧은 귀밑머리 스치고
寒鏡入衰容(한경입쇠용) 차디찬 거울엔 야윈 얼굴 비치네
旅夢風塵際(여몽풍진제) 나그네 꿈은 풍진에 어리고
離愁關塞重(이수관새중) 이별의 시름은 변방에 더하네
徘徊思遠近(배회사원근) 배회하며 멀고 가까운 일 생각하니
流淚滿房櫳(류루만방롱) 흐르는 눈물 방안에 가득하네
임벽당의 또 다른 작품으로 〈빈녀음(貧女吟)〉이 있는데, 〈빈녀음(貧女吟)〉은 동일한 제목 아래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동양역대여사시선』에 각기 다른 작품이 실려 있다. 『동양역대여사시선』에 실린 작품은 『난설헌집(蘭雪軒集)』에도 실려 있어 난설헌의 작품으로 추정되므로 『대동시선』의 작품을 인용한다. 그는 궁벽한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생활을 아주 담담한 어조로 표현해내고 있다.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김씨의 시가 조금 뜻에 들지만 너무 약하여 기운이 적다.”고 했다.
貧女吟(빈녀음)
地僻人來少(지벽인래소) 땅이 구석지니 찾는 이 적고
山深俗事稀(산심속사희) 산이 깊으니 속세의 일 드물구나
家貧無斗酒(가빈무두주) 집이 가난하여 한 되 술도 없어
宿客夜還歸(숙객야환귀) 자고 갈 손님도 밤에 돌아가네
[네이버 지식백과] 김임벽당 [金林碧堂]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신사임당[ 申師任堂 ]
사임당의 시로 한시 3편이 전하는데 모두 효를 주제로 하고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송정(松亭) 신명화(申命和)의 딸로 이원수(李元秀)의 부인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19세에 이원수에게 출가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신명화가 세상을 떠나 부친의 3년 상을 마치고 21세 때 서울에 올라왔다. 이후 한성과 파주, 강릉, 봉평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38세 때 친정어머니를 하직하고 한성에 올라와 수진방(壽進坊)에서 시집의 살림살이를 주관하였다.
홀로 되신 어머니를 강릉에 남겨두고 한성 길에 올라 대관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다. 율곡 이이가 〈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 “자당께서 임영(臨瀛), 강릉으로 근친(覲親)을 가셨는데 돌아오실 때에 자친(慈親)과 울면서 작별하고, 대관령 중턱에 이르러서는 북평(北坪, 사임당의 친정 동네)을 바라보며 백운(白雲)의 생각을 견딜 수 없어 한참 동안 가마를 멈추고 쓸쓸히 눈물 흘리며 시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친정어머니 이씨 부인은 당시 62세였으며 아들이 없었으므로 강릉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은 사임당이 한성으로 오는 길에 대관령 중턱에 앉아 친정을 바라보며 지은 시로, 늙은 어머니를 외로이 남겨두고 시댁으로 가야만 하는 딸의 안타까운 마음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늙으신 어머니는 임영에 계시는데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장안을 향해 홀로 가는 심정이여
回首北坪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때때로 머리 돌려 북평을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나는 밑에 저녁 산이 푸르구나
또 〈사친(思親)〉과 낙구 한 구절이 전하는데 이는 모두 사임당이 한성에 와서 생활할 때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로 보인다. 어린 시절 느꼈던 어머니에 대한 정을 그리며 어머니 곁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과 살아계실 때 고향에 가 친정어머니를 꼭 뵙고 싶어 하는 애끊는 효심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思親(사친)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 첩첩 산봉우리 고향집 천리건만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 돌아가고 싶은 마음 꿈속에서도 끝이 없구나
寒松亭畔雙輪月(한송정반쌍윤월) 한송정 가엔 두 개의 둥근 달
鏡浦臺前一陳風(경포대전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沙上白鷗恒聚散(사상백구항취산) 모래 위 흰 갈매기 항상 모였다 흩어지고
波頭漁艇每西東(파두어정매서동) 물결 위 고깃배들 오가는 곳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언제나 임영 길 다시 밟아
綵舞斑衣膝下縫(채무반의슬하봉) 색동옷 곱게 입고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할까
落句(낙구)
夜夜祈向月(야야기향월) 밤마다 달을 보고 비는 것은
願得見生前(원득견생전) 생전에 만나 뵙기를 바라는 것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임당 [申師任堂]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운초[ 雲楚 ]
기녀 출신으로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던 운초는 비교적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풍부한 감정과 다양한 언어구사로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운초(雲楚)의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용(芙蓉)이다. 그는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추당(秋堂)의 딸로 태어나 중부(仲父)인 일화당(一和堂)에게 글을 배우며 자랐다. 16세에 군(郡)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시재가 뛰어났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기녀가 되었다가 1831년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의 소실이 되었다. 운초의 작품과 다른 여러 기록을 참고해 볼 때, 그는 1805년 전후에 태어나 1851년에서 1853년 사이 졸한 것으로 보인다.
운초의 시는 그의 생활환경 변화에 따라 소재와 작품 세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운초 시의 배경은 크게 기녀시절과 연천 김이양을 만나 그의 소실이 되어 같이 지낸 시기, 연천 사후 동료 여성들과 교유하며 지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녀시절, 그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자신의 천부적인 재질에 대한 자부심과 주위의 인정으로 그는 자신을 절세가인에 비유하고 있다.
四絶亭(사절정)
亭明四絶却然疑(정명사절각연의) 정자 이름 사절은 도리어 맞지 않네
四絶非宜五絶宜(사절비의오절의) 사절이 아니라 오절이라야 마땅하지
山風水月相隨處(산풍수월상수처) 산과 바람 물과 달 서로 어울린 곳에
更有佳人絶世奇(갱유가인절세기) 절세가인이 또 있지 않은가
사절정은 영변도호부 동쪽 어천(魚川)에 있는 정자인데 산과 바람, 물, 달이 빼어나 ‘사절(四絶)’이라고 이름 하였다. 이에 대해 운초는 다시 여기에 절세가인인 자신을 더하여 ‘오절(五絶)’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재주가 돋보이는 시이다. 일찍이 송도 명기 황진이가 자신을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자부한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는 작품이다.
戲題(희제)
芙蓉花發滿池紅(부용화발만지홍) 연꽃이 연못 가득 붉게 피어
人道芙蓉勝妾容(인도부용승첩용) 사람들이 나보다 연꽃이 예쁘다고 말하지만
朝日妾從堤上過(조일첩종제상과) 아침에 내가 연못가를 지나가면
如何人不看芙蓉(여하인불간부용) 사람들은 어찌하여 꽃을 안 보나
이 시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연못에 가득 핀 연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내가 연못가를 걸으면 사람들은 연꽃을 안 보고 모두 나만 본다고 노래하고 있다. 연못에 가득한 붉은 연꽃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자기에게는 못 미친다는, 여성으로서의 대단한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자긍심과 적극적 성격으로 시기(詩妓)로서의 명성을 더해가던 중 운초는 연천 김이양을 만나게 되었다. 김이양은 1783년 생원시에 장원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함경감사·한성판윤·의금부 판사·좌참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1826년 예조판서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명승지를 찾아 소요하며 지냈다. 1843년 사마회갑(司馬回甲)을 맞아 하사품을 받고 봉조하(奉朝賀)로 지내다 1845년 세상을 떠났다.
연천과의 만남은 운초의 삶뿐만 아니라 시세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연천을 만나기 전의 운초의 시는 주로 기녀로서 사대부들의 연회에 참여하여 연회의 감흥을 읊거나 그들과 명승지를 유람하며 자연에 대한 감회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천을 만난 이후에는 연천을 그리워하는 사모시와 그와 주고받은 화답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奉和淵泉相公(봉화연천상공)
天地無情思(천지무정사) 천지는 정과 그리움 없건만
人何惜別愁(인하석별수) 인간은 어찌하여 이별 수심 버리지 못하나
虛靈如有待(허령여유대) 마음은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하고
怊悵若相求(초창약상구) 슬픈 모습은 상대를 구하는 듯하네
林鳥棲皆定(임조서개정) 숲 속의 새는 모두 정해진 곳에 깃들고
江雲祗自流(강운지자류) 강가 구름은 다만 저절로 흘러가네
平生多少恨(평생다소한) 평생 다소의 한이 있어
終日獨登樓(종일독등루) 종일토록 홀로 누각에 올라있네
이 시는 그가 연천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연천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이별 근심을 자연과 대비시켜 볼 때 더욱 망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을, 초창한 모습으로 홀로 누각에 올라 오지 않는 임을 종일토록 기다리는 안타까운 여인의 모습으로 표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자(一字) 2구(二句)로 시작하여 18자 2구로 끝나는 〈층시(層詩)〉를 써서 연천을 그리는 애통한 마음과 연천에 대한 연모의 정을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토로하기도 하였다.
1831년 운초가 연천의 소실이 된 이후 두 사람은 50여 년에 가까운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인정과 믿음으로 안정된 사랑을 나누었던 것 같다. 연천은 운초의 자질을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여 〈증운초(贈雲楚)〉, 〈희증운초(戲贈雲楚)〉 등 운초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또한 그는 1843년 사마회시를 맞아 임금께 하사품을 받은 뒤 그 영광을 조상들께 고유(告由)하기 위해 성묘하러 갈 때 운초를 대동하였다. 이 때 연천의 정실부인은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운초를 부인의 자격으로 데려간 듯하니 연천의 운초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얼마나 각별하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런 연천이었기에 운초에게 그의 죽음은 산과 바다가 무너지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곡연천로야(哭淵泉老爺)〉는 연천의 죽음을 당하여 쓴 시로, 그는 이 시에서 연천의 뛰어난 자질을 기리는 한편 연천과 이승에서의 인연이 끝난 것을 탄식하고 있다.
哭淵泉老爺(곡연천로야)
風流氣槪湖山主(풍류기개호산주) 풍류와 기개는 자연의 주인이요
經術文章宰相才(경술문장재상재)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재질이었네
十五年來今日淚(십오년래금일루) 십오 년 함께 지내다 오늘 눈물 흘리니
峨洋一斷復誰裁(아양일단부수재) 한 번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 줄고
연천이 죽은 뒤 운초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동료 여성들과 만나 시작 활동을 하며 지냈다.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는 신분에 따라 다양한 작가 군을 형성하여 사대부 계층이나 중인층 문인들이 중심이 된 시사(詩社)를 중심으로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경향은 여성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신분의 특성상 내외 출입과 사회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소실, 기녀 출신 작가들의 모임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일명 삼호정시회(三湖亭詩會)로 불리는데 삼호정은 용산 한강변에 있는 정자로 규당학사(奎堂學士) 김덕희(金德喜)의 소실인 김금원(金錦園)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곳에 신분적 처지가 비슷한 5명의 여성이 모여 시를 짓고 교유하였는데, 그 5명은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의 소실인 운초와 삼호정(三湖亭) 주인인 김금원(金錦園), 송호(松湖) 서태수(徐太守)의 소실인 박죽서(朴竹西), 주천(酒泉) 홍태수(洪太守)의 소실이며 김금원의 동생인 김경춘(金瓊春), 화사(花史) 이상서(李尙書)의 소실인 문화인(文化人) 경산(瓊山)이다.
운초는 특히 경산과 친하게 지내 그에게 준 시가 17수나 된다.
旣望夜呈瓊山(기망야정경산)
玉露凄凄積漸多(옥로처처적점다) 쓸쓸한 옥 이슬 점점 많이 쌓이고
舟人相語夜相過(주인상어야상과) 뱃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며 밤을 보내네
好敎明月參朋席(호교명월참붕석) 친구들 모인 자리에 밝은 달까지 함께하니 좋은데
誰遣淸簫入棹歌(수견청소입도가) 맑은 피리 소리 보내 뱃노래에 어울리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自是江山當赤壁(자시강산당적벽) 본디 이 강산은 적벽의 경치 같으니
且詩詞賦許東坡(차시사부허동파) 시사 또한 소동파와 겨룰만하네
雲鬟翠黛含情緖(운환취대함정서) 구름머리 푸른 눈썹 미인은 정을 머금고
淺笑褰帷弄素波(천소건유롱소파) 휘장 열어 엷은 미소로 흰 물결 희롱하네
이 시는 16일 밤 경산에게 보낸 시로, 운초는 자신들이 거처하는 삼호정 앞 한강변의 경관을 중국 소동파가 노닐던 적벽에 비유하고 있다. 시우(詩友)들과 함께 한 자리에 밝은 달이 비추고 누군가 부는 맑은 퉁소소리까지 뱃노래에 들어오니 소동파가 즐기던 적벽의 풍광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읊어내는 시와 문장 또한 소동파의 시문과 겨룰만하다고 하여 그는 자신들의 시 모임에 대한 자긍과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초 [雲楚]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송덕봉[ 宋德峰 ]
사임당이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주제로 시를 창작하여 유교적 규범에 순응하는 모범적인 여성상을 구현한데 비해 송덕봉은 당시 일반 여성과는 약간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송준(宋駿)의 딸이며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부인이다. 자질과 성품이 명민하여 성장하면서 서사(書史)를 섭렵하여 여사(女史)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16세에 유희춘과 결혼했는데 유희춘은 18세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그러나 27세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종성(鐘城)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 송덕봉은 고향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40세(1560)에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유배지 종성으로 찾아갔다. 〈마천령상음(磨天嶺上吟)〉은 덕봉이 종성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시이다.
磨天嶺上吟(마천령상음)
行行遂至磨天嶺(행행수지마천령) 가고 또 가서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東海無涯鏡面平(동해무애경면평) 동해는 끝이 없어 거울처럼 평평하네
萬里婦人何事到(만리부인하사도) 만 리 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는가
三從義重一身輕(삼종의중일신경) 삼종의 도는 무겁고 이 한 몸은 가볍기 때문이라네
그는 남편 없이 홀로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이번에는 남편의 유배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북방 만 리 길 종성을 향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험난한 길에 오른 것은 남편을 따라야만 하는 삼종의 도가 무겁기 때문이라고 하여 유교적 덕목을 묵묵히 실천하는 부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미암은 대사헌, 부제학,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뒤 57세에, 덕봉은 그 이듬해인 58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송덕봉과 미암은 평생 금슬이 좋았으며, 특히 아내에 대한 미암의 사랑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암은 1571년 덕봉의 나이 51세 때 처조카 송진(宋震)을 시켜 그 동안 덕봉이 지은 시 38수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덕봉집(德峰集)』을 내 줄만큼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 시문집은 전하지 않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덕봉의 한시는 미암이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거의 매일같이 기록한 『미암일기(眉巖日記)』와 그 부록에 실려 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미암은 성품이 강직·청렴하여 학문과 저술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생활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덕봉은 집을 새로 짓고 재산을 증식하는 것도 모두 알아서 했으며, 때로는 미암의 융통성 없는 성품을 깨우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암의 이런 성품은 다음 시에서도 볼 수 있다.
至樂吟(지락음)
園花爛漫不須觀(원화난만불수관) 정원의 꽃 난만해도 모름지기 볼만한 것이 없고
絲竹鏗鏘也等閑(사죽갱장야등한) 거문고 퉁소소리 요란해도 마음에 두지 않네
好酒姸姿無興味(호주연자무흥미) 좋은 술 아름다운 자태에 흥미가 없으니
眞腴唯在簡編間(진유유재간편간) 진짜 맛은 서책 사이에 있네
미암은 이 시에서 아무리 꽃이 만발하고 악기소리가 요란해도 자신은 좋은 술과 고운 자태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서책에서만 지극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덕봉은 다음의 시로 화답해 미암이 책만 보지 말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져 그 생각을 넓힐 것을 권유하고 있다.
春風佳景古來觀(춘풍가경고래관) 봄바람 아름다운 풍경 예부터 보는 것이요
月下彈琴亦一閑(월하탄금역일한) 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 또한 하나의 한가로움이지요
酒又忘憂情浩浩(주우망우정호호) 술은 또 근심을 잊게 하고 정을 넓고 크게 하는데
君何偏癖簡編間(군하편벽간편간) 당신은 어찌하여 서책 사이에서 편벽된 생각만 하십니까
덕봉은 남편에게 봄바람 좋은 풍경을 완상하고 달 아래 거문고 타는 여유로움을 누릴 것을 권하며 심지어 근심을 잊고 마음을 넓혀줄 수 있는 술까지 과감히 권하고 있다. 남편이 학문에만 몰두하여 편벽된 생각을 갖게 될까 염려하는 아내의 진심어린 권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덕봉은 늘 학문과 저술에만 몰두하여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남편의 사직을 수차례 권했던 것으로 보인다.
眉岩升嘉善作(미암승가선작)
黃金橫帶布衣極(황금횡대포의극) 황금 띠를 둘러 포의로는 극진함을 다했으니
退臥茅齋養氣何(퇴와모재양기하) 물러나 초당에 누워 건강을 돌보심이 어떠한지요
爵祿可辭曾有約(작록가사증유약) 벼슬은 사양할 수 있다고 일찍이 약속했으니
遊庭見月待還家(유정견월대환가) 뜰에서 달을 보며 집에 돌아오시길 기다립니다
이 시는 1571년 10월, 전라감사를 지낸 미암이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어 곧 서울로 올라가려고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글을 보고 덕봉이 지어 보낸 시이다. 덕봉은 남편에게 세상의 명예는 이미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제는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을 돌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고향에서 남편과 자손이 커가는 것을 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1571년 덕봉이 새집을 짓고 단오 날 시누이 오자(吳姊)와 함께 새집에서 노닐며 지은 시인 〈단오여오자회신사(端午與吳姊會新舍)〉를 보면 그는 하느님이 삼신을 통해 수명을 주시고 자기에게는 백세의 영화를 주었으니 자기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창고가 가득한 것이 나의 소원이 아니요 / 원앙처럼 화락하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바람입니다(萬廩盈倉非我願 鴛鴦和樂乃丹誠)”라고 읊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1570년 4월 미암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서울에서 홀로 관직생활을 하며 시를 보내자 덕봉이 이에 화답한 시이다.
自比元公無物慾(자비원공무물욕) 스스로 원결처럼 물욕이 없다더니
如何耿耿五更闌(여하경경오경란) 어찌하여 오경까지 근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 하십니까
玉堂金馬雖云樂(옥당금마수운락) 옥당의 금마가 비록 즐겁다지만
不若秋風任意還(불약추풍임의환) 가을바람에 마음대로 돌아오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원결(719~772)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으로 안녹산의 난을 피하여 장시성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759년 숙종(肅宗)의 부름을 받아 우금오병조참군(右金吾兵曹參軍)이 되어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정이 강했으며 전란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과 사회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미암은 평소에 원결처럼 물욕이 없다고 자부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덕봉은 원결처럼 물욕이 없다면서 왜 새벽까지 시름하며 잠 못 드느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임금 가까이 있는 옥당의 높은 벼슬도 좋지만 사직하고 돌아와 고향에서 마음껏 노니는 것만 못하다고 하여, 미암에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은근히 권하고 있다. 남편의 안위를 염려하는 아내의 곡진한 정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편 덕봉은 남편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친정아버지 묘에 비석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모름지기 성심을 다해서 묘 옆에 비석을 세워달라고 한 친정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는 석물은 마련했으나 비용 부족으로 비석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미암이 전라감사가 되자 그 숙원을 이룰 수 있을까하여 비석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는데 미암은 동복끼리 사비로 하면 나머지 일은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덕봉은 〈착석문서(斲石文序)〉와 〈착석문(斲石文)〉을 통해 미암의 태도를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즉 그는 미암이 장가오던 날 친정아버지가 ‘금슬백년(琴瑟百年)’이란 시구를 보고 어진 사위를 보았다고 좋아한 일과 자신의 형제는 과부가 된 자도 있고 곤궁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어 그 비용을 거둘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은 마음과 있는 힘을 다해 예로써 장사 지내고 제사를 모셔 남의 며느리로서 부끄러운 점이 없이 행했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미암은 덕봉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오직 소식(素食)만 하고 삼년 안에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장인의 뜻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만일 자신이 이런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가부장제 권위에 눌려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아내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떳떳한 행동을 들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하는 당당한 여인의 모습으로 조선시대 여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 시는 덕봉이 미암에게 〈착석문〉을 보냈을 때 미암이 그에 대한 내용은 없이 부부금슬만 노래한 시를 보내자 다시 차운하여 보낸 시이다.
次眉岩韻(차미암운)
莫誇和樂世無倫(막과화락세무륜) 화락함이 세상에 짝이 없다 자랑 말고
念我須看斲石文(염아수간착석문) 모름지기 나를 생각해 착석문을 읽어 보십시오
君子蕩然無執滯(군자탕연무집체) 군자는 호탕하여 막힌 데가 없어야 하니
范君千載麥舟云(범군천재맥주운) 범공의 맥주일을 천년 뒤에 생각해 보십시오
덕봉은 먼저 화가 난 마음에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부부의 화락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일침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한다면 착석문을 읽어보고 도량을 넓혀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유교적 규범을 완전하게 수행한 여성이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유교적 굴레를 벗어나는 대범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덕봉 [宋德峰]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정양정[ 鄭楊貞 ]
정양정(鄭楊貞, 1541~1620)은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딸이며 문양(文陽) 유자신(柳自新, 1541~1612)의 아내인데, 『시화휘성(詩話彙成)』에는 봉래부인(蓬萊夫人) 정씨(鄭氏)로 기록되어 있다. 정유길은 중종 26년(153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우찬성, 판금의금부사, 판돈녕부사를 거쳐 벼슬이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자신은 공조판서 유잠(柳潛)의 아들로 형조정랑,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고 셋째 딸이 광해군의 비(妃) 혜장왕후(惠章王后)가 되어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의 부인인 정씨 역시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에 봉해졌으며 서빙고강사(西氷庫江舍)에 살았다고 한다. 〈출강사(出江舍)〉, 또는 〈강사(江舍)〉로 전하는 다음 시는 낙엽 지는 가운데 토란과 밤, 게를 거두는 가을의 풍성한 정경과 달빛을 대하여 잠 못 이루는 서늘한 가을밤의 맑은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出江舍(출강사)
來訪沙鷗約(래방사구약) 갈매기와 약속하고 찾아와보니
江皐木葉飛(강고목엽비) 강 언덕엔 나뭇잎 날리네
園收芋栗富(원수우율부) 동산에서는 토란과 밤을 가득 거두고
網擧蟹鮮肥(망거해선비) 그물을 건지니 살찐 게가 신선하네
褰箔看山翠(건박간산취) 발을 걷고 푸른 산 바라보며
開樽對月輝(개준대월휘) 술동이 열고 달빛을 대하니
夜凉淸不寐(야량청불매) 밤은 서늘하고 맑아 잠 못 이루는데
松露滴羅衣(송로적라의) 소나무 이슬이 비단옷 적시네
다음 〈경차주상전하사시옥운(敬次主上殿下賜詩玉韻)〉은 만력 을묘 8월 12일 봉원부부인 정씨가 주상전하가 내린 시에 차운한 시로, 임금의 덕을 송축하고 성은에 감사하며 이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표백하고 있다.
敬次主上殿下賜詩玉韻(경차주상전하사시옥운)
未死殘骸幸凡全(미사잔해행범전) 죽지 않고 다행히 살아있는 한
御風重近紫宸前(어풍중근자신전) 대궐 앞 겹겹이 이는 바람 막으리
日邊佳氣衣邊襲(일변가기의변습) 태양 가의 아름다운 기운 옷에 스미고
天上恩光席上連(천상은광석상연) 하늘의 빛난 은혜 자리에 이어졌네
霞醞宣來欣醉飽(하온선래흔취포) 술을 내리시니 기뻐 마셔 취하고
少陽昇座賀仁賢(소양승좌하인현) 동궁에 오르시니 어짊을 경하하네
패歌寶叶翔鸞字(가보협상난자) 임금 시에 화답하니 난새가 춤추는 듯
歸與兒孫萬歲傳(귀여아손만세전) 돌아가 자손에게 만세도록 전하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정양정 [鄭楊貞]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홍천민의 부인 유씨[ 柳氏 ]
봉원부부인 정씨가 임금이 보낸 시에 차운하는 시를 지어 자신의 시재를 외부에 드러낸데 반해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때 사람인 유씨(柳氏)는 학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글 짓는 것을 심히 꺼렸다고 한다. 유씨는 유탱(柳樘)의 딸로 율정(栗亭) 홍천민(洪天民, 1526~1574)의 부인이며,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1572~1645)의 어머니이다. 유몽인의 누이동생으로 어릴 때 몽인이 학업하는 것을 곁에서 보고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으며, 남편 율정의 상을 치른 뒤에도 매월 초하루, 보름에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낸 다음 곧 태워 버렸는데 그 문사가 너무 비엄(悲嚴)하여 차마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문장이 뛰어났으나 스스로 음영하지 않아 다음 일절만이 남아있는데, 한껏 무르익은 봄날의 풍취를 노래하고 있다.
入洞穿春色(입동천춘색) 마을에 들어서니 봄빛이 한창이구나
行橋踏水聲(행교답수성) 물소리 밟으며 다리를 건너네
[네이버 지식백과] 홍천민의 부인 유씨 [柳氏]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허난설헌[ 許蘭雪軒 ]
지금까지 여성 한시의 주제가 여성의 기본적인 생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약간 색다른 주제를 다루었다 하더라도 작품 수가 극히 한정되었던데 비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가정사는 물론 사회적 문제에까지 시선을 돌려 여성 한시 문학의 범주를 대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였다. 그리고 작품 수도 기존 여성한시 작가보다 월등히 많아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시작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허난설헌은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딸로 서당(西堂) 김성립(金成立)의 부인이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의 누이다. 당대 문벌가에서 자란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해 8세에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여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유교적 윤리와 제도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태어난 것과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이백이나 두목지 같이 출중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세 가지 한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난설헌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난설헌의 시가(媤家) 역시 허씨 가문에 비견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김성립은 결혼 후에도 급제를 하지 못하다가 난설헌이 사망하던 해인 28세에 기축증광시의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난설헌은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남편 김성립과도 불화했다. 김성립은 과거시험준비를 구실로 강가에 집을 짓고 따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상 부부간의 정을 누리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난설헌의 시에는 남편에 대한 원사(怨詞)가 많다.
寄夫江舍讀書(기부강사독서)
燕掠斜簷兩兩飛(연략사첨양양비) 제비는 비스듬한 처마에 쌍쌍이 날아들고
落花撩亂拍羅衣(낙화료란박라의) 떨어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스치네
洞房極目傷春意(동방극목상춘의) 깊은 규방에서 멀리 내다보며 봄뜻을 잃었는데
草綠江南人未歸(초록강남인미귀) 강남에 풀 푸르러도 임은 돌아오지 않네
이 시는 중국 『역대여자시집(歷代女子詩集)』과 『명시종(明詩綜)』에는 실려 있으나, 『난설헌집(蘭雪軒集)』에는 음탕하다는 이유로 실리지 못했다. 화자는 꽃을 떨어뜨릴 정도로 서로를 부대끼며 처마 밑을 쌍쌍이 드나드는 제비의 모습을 보며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빈방에서 눈이 미치는 곳까지 멀리 내다보며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감각적이며 능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洞仙謠(동선요)
紫簫聲裏彤雲散(자소성리동운산) 자주 빛 퉁소소리에 붉은 구름 흩어지고
簾外霜寒鸚鵡喚(렴외상한앵무환) 발 밖엔 찬 서리 내리고 앵무새 지저귀네
夜闌孤燭照羅帷(야란고촉조나유) 깊은 밤 외로운 촛불 비단 휘장 비추고
時見踈星度河漢(시견소성도하한) 때때로 성근 별 은하수 건너가네
丁東銀漏響西風(정동은루향서풍) 똑똑 물시계 소리 서풍에 메아리치고
露滴梧枝語多蟲(로적오지어다충) 이슬 젖은 오동나무가지에 벌레가 우네
鮫綃帕上三更淚(교초파상삼경루) 한밤중 생명주 수건에 눈물 흘리니
明日應留點點紅(명일응류점점홍) 내일 보면 응당 점점이 붉은 빛이리
깊은 밤 임 없이 홀로 있는 어두운 공간에 외로이 타는 촛불과 성긴 별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런 고요 속에 밤의 깊이를 시각과 청각으로 잴 수 있을 만큼 화자의 감각은 예민하게 작용한다. 똑똑 떨어지는 물시계 소리와 벌레의 울음소리는 외로움의 깊이만큼 크게 울려 화자를 지배하고, 이런 공규(空閨)의 적막감은 화자로 하여금 결국 피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오지 않는 임에 대한 원망이나 비난 없이 인내하는 가운데 그는 “길이 한하기는 임의 마음도 저 조수처럼 / 아침에 잠깐 나갔다가 저녁엔 다시 돌아오기를(長恨郞心似潮水 早時纔退暮時生 〈죽지사(竹枝詞)〉)”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름의 깊이가 속으로 삼키기엔 너무나 깊었던지 난설헌은 향락을 추구하는 남성들의 자유분방한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少年行(소년행)
少年重然諾(소년중연락) 젊은이는 신의를 소중히 여겨
結交遊俠人(결교유협인) 의협스런 사람들과 사귀어 노네
腰間玉轆轤(요간옥록로) 백옥 노리개 허리에 차고
錦袍雙麒麟(금포쌍기린) 쌍기린 수놓은 비단도포 입고
朝辭明光宮(조사명광궁) 조회 마치자 명광궁에서 나와
馳馬長樂坂(치마장락판) 장락궁 언덕으로 말을 달리네
沽得渭城酒(고득위성주) 위성의 좋은 술 사 가지고
花間日將晩(화간일장만) 꽃 사이에 노닐다 해가 저무네
金鞭宿倡家(금편숙창가) 황금채찍으로 기생집에서 묵으면
行樂爭留連(행락쟁유연) 즐거움에 다투어 더 머물라 하네
誰憐楊子雲(수련양자운) 가 양자운을 가련타 했나
閉門草太玄(폐문초태현) 문 닫고 들어앉아 태현경을 초했다는데
젊은 남자들은 대개 신의를 소중히 여기고 의협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무절제한 협기는 잘못하면 젊은이로 하여금 유흥과 환락의 길로 빠져들게 하기 쉽다. 이 시에서는 귀한 집 자제들이 학문에 힘쓰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세월을 탕진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남자들의 삶과 10여 년 간 문을 닫고 집안에 들어앉아 우주를 논하는 『태현경(太玄經)』을 지은 양웅(揚雄)의 삶을 견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환락을 추구하며 무모하게 삶을 허비하는 남성의 행위를 경계하는 것으로, 결국 과거 공부와 독서를 핑계로 집을 나가 유락에 빠져 있는 남편을 비판, 풍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난설헌은 병약하여 친정에서 자주 요양을 하였으며, 게다가 어린 아이 둘을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온전한 가정생활은 더욱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곡자(哭子)〉에는 두 해에 걸쳐 딸과 아들 희윤(喜胤)을 잃고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잃게 될까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지독한 슬픔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哭子(곡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마주보고 서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이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소나무 숲에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尊汝丘(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맑은 물 부어 놓는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응당 알겠거니 너희 형제의 넋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라 노닒을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지만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어찌 장성하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 나는 슬픔 속으로 삼키네
당나라 측천무후에게 아들 넷이 있었는데, 무후가 태자 홍(弘)을 독살하여 둘째 아들 현(賢)이 태자가 되었다. 그가 자신도 죽게 될까 두려워하며 지은 글이 〈황대사(黃臺詞)〉인데, 결국 그는 무후에게 죽임을 당했다. 백양나무 쓸쓸한 무덤가에서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하며 애곡하는 처절한 모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난설헌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붕당의 소용돌이에 부친과 오빠, 동생 모두 화를 입는 가화(家禍)로 이어졌다. 동인(東人)이었던 아버지와 오빠들이 서인의 탄핵으로 모두 화를 입었고 동생도 벼슬길이 끊기는 참화를 입게 된 것이다. 〈기하곡(寄荷谷)〉은 귀양살이하는 오빠 하곡에게 부친 시이다.
寄荷谷(기하곡)
暗窓銀燭低(암창은촉저) 어두운 창가에 촛불 나지막하고
流螢度高閣(유형탁고각) 반딧불은 높은 집을 넘나드네
悄悄深夜寒(초초심야한) 깊은 밤 시름겨워 더욱 차갑고
蕭蕭秋落葉(소소추낙엽) 가을 잎은 쓸쓸히 떨어지네
關河音信稀(관하음신희) 변방에선 소식 드물고
端憂不可釋(단우불가석) 끝없는 이 시름 풀길이 없네
遙想靑運宮(요상청운궁) 멀리서 청련궁을 생각하니
山空蘿月白(산공나월백) 빈 산 담쟁이덩굴에 달이 밝네
허봉(許葑, 1551~1588)은 난설헌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난설헌이 21살 때인 1583년 동인(東人)으로 병조판서인 이이를 탄핵하다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갑산으로 이배되었다. 난설헌은 오빠가 있는 곳을 ‘청련궁’이라 하여 오빠를 이백에 견주며, 멀리 적거(謫居)하고 있는 오라버니의 안위를 염려하는 형제애를 곡진하게 표출하고 있다.
한편 난설헌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당시 사회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의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자 했다.
貧女吟(빈녀음)
夜久織未休(야구직미휴) 밤늦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
戞戞鳴寒機(알알명한기) 삐걱삐걱 베틀소리 차갑게 울리네
機中一匹練(기중일필련) 베틀에 있는 한필의 옷감
終作阿誰衣(종작아수의) 결국 누구의 옷이 되려나
手把金剪刀(수파금전도) 손에 가위를 잡았으나
夜寒十指直(야한십지직) 밤이 추워 열손가락 곱아지네
爲人作嫁衣(위인작가의) 다른 사람 시집갈 때 입는 옷 지으며
年年還獨宿(년년환독숙) 해마다 나는 홀로 잔다네
화자는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시집도 가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밤늦도록 베를 짜고 추운 밤 곱은 손으로 시집갈 때 입는 옷을 짓지만 결국 자기는 입어 보지도 못하고 해마다 독수공방하는 비애를 한 서린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박대 받는 빈녀의 고단한 삶을 통해 시속(時俗)의 비정(非情)함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築城怨(축성원)
千人齊抱杵(천인제포저) 천 사람이 모두 절구질하니
土底隆隆響(토저융융향) 땅 밑까지 쿵쿵 울리네
努力好操築(노력호조축) 힘들여 쌓는 것은 좋다 하여도
雲中無魏尙(운중무위상) 운중의 위상 같은 이 없구나
築城復築城(축성복축성) 성을 쌓고 또 성을 쌓으니
城高遮得賊(성고차득적) 성이 높아 적을 막을 수는 있겠네
但恐賊來多(단공적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적이 많이 몰려와
有城遮未得(유성차미득) 성이 있어도 막지 못하는 것이라네
이 시에서 그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고 있지만 많은 적이 쳐들어와 성이 있는데도 막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다. 즉 나라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몇 겹으로 쌓고 있지만 지금은 위상(魏尙) 같은 인물이 없으니 나라의 안위가 성을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위상은 한나라 문제 때 운중(雲中) 태수를 지낸 사람으로 그는 군사들에게 일정한 급료를 주고도 자신의 사비로 닷새마다 소 한 마리씩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그랬더니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져 흉노들이 감히 운중의 진영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고 한다.
위상의 고사를 인용해 난설헌은 당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위상과 같이 덕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덕인이 있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수에서 말하는 많은 적은 성의 내부에서 생기는 적을 말하는 것으로 나라를 굳건히 보전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는 민심을 얻어 안정된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당대 정치 현실의 문제를 예리한 시각으로 지적해내는 정치적 안목이 돋보이는 시이다. 또한 난설헌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국경에서 싸움하는 변방수비대의 모습과 고뇌, 변방의 상황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독특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출새곡(出塞曲)〉, 〈새하곡(塞下曲)〉, 〈입새곡(入塞曲)〉 등이 있다.
한편 난설헌의 시에는 선계(仙界)를 지향하는 시가 많은데 이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심적 갈등으로 현실을 초탈하려는 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존여비와 유교적 이념으로 완전하게 무장된 봉건제도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제도적으로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고자하는 무한한 욕망으로 그는 결국 선계를 지향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선사(遊仙詞)〉 87수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난설헌 [許蘭雪軒]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신순일의 부인 이씨[ 李氏 ]
이씨(李氏)는 부사(府使) 신순일(申純一, 1550~1626)의 부인이며, 연안 이정현(李廷顯)의 딸이다. 『일사유사(逸士遺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문에 능하고 시도 공교했다. ······ 타고난 자질이 유한정정(幽閑貞靜)하고 시문 외에 서법에 공교하여 항상 『주역』과 『이백집』을 손으로 베껴 다락 위에 두고 완상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장(場)에서 자제들이 집에 돌아오면 그 초(草)한 것을 보고 높고 낮음을 예정하였다. 우연히 방에 붙은 사람을 보면 문득 탄식하기를 “세상에 문에 능한 자가 없어 이런 사람이 과거에 뽑혔구나.”라고 하였다. 남편을 대신해 편지에 답하면 보는 사람들이 부인의 필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이름이 대내(大內)까지 전해져 임금이 비단 여덟 폭을 내려 부인의 필적을 구하니 이로부터 서명(書名)이 더욱 중해졌다. 시집 한 권이 있었는데 병화(兵火)에 잃어버리고 남아 전하는 시가 약 20여수이다.
지금은 〈실제(失題)〉 한 편이 전하는데 비오는 날 자신의 아름다웠던 청춘을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失題(실제)
雲斂天如水(운렴천여수) 구름 걷히니 하늘은 물과 같고
樓高望似飛(루고망사비) 누대는 날아가는 듯 높게 보이네
無端長夜雨(무단장야우) 끝없이 내리는 비속에
芳草十年思(방초십년사) 꽃다운 십 년을 생각하네
[네이버 지식백과] 신순일의 부인 이씨 [李氏]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
광산 김씨[ 光山 金氏 ]
조선시대 여성문집은 주로 남편이나 후손 등 가족의 관심과 도움으로 발간되었다. 미암 유희춘의 아내인 송덕봉과 부사 신순일의 아내인 이씨가 개인문집을 발간했으나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송덕봉의 시가 남편의 문집인 『미암일기』에 전하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문학활동이 일부 사대부가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산(光山) 김씨(金氏)의 시 역시 남편 이찬의 문집인 『국창집(菊窓集)』 말미의 「부국창선조비령인광주김씨일고(附菊窓先祖妣令人光州金氏逸稿)」에 실려 전하고 있다.
광산 김씨는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의 딸로 국창(菊窓) 이찬(李燦, 1575~1654)의 부인이며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의 누이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문사(文史)에 능하고 행실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찬은 서애 유성룡의 생질로 문인이지만 의술에도 능했으며 음직으로 현감을 지냈다. 광산 김씨의 시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에 대한 연모의 정을 표출한 시가 많다.
寄遠(기원)
生來人間赤繩纏(생래인간적승전)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부부인연 맺었는데
一朝相別兩可憐(일조상별양가련) 하루아침에 서로 이별하니 둘 다 가련하네
天寒旅舍何如在(천한여사하여재) 추운 날 객사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寂寞空閨獨不眠(적막공규독불면) 적막한 빈방에서 홀로 잠 못 이루네
그의 시에는 가족, 친척에 관한 시도 많은데, 다음 〈춘일기사제사마(春日寄舍弟司馬)〉는 동생인 김령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김령은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비판하다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그의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 헌납, 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매번 사양하였다고 한다. 화창한 봄날 동생의 안부를 알지 못해 근심하는 누이의 정이 끈끈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春日寄舍弟司馬(춘일기사제사마)
不見司馬弟(불견사마제) 사마 동생을 만나지 못해
佳辰轉多情(가진전다정) 아름다운 봄날 생각이 많네
近來消息絶(근래소식절) 근래엔 소식이 끊겨
愁聽斷鴈聲(수청단안성) 외기러기 울음소리 시름겹게 들리네
〈열친척(悅親戚)〉에서는 객지에서 쓸쓸히 지내는 가운데 친척을 만나 정담을 나누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친척을 본 지가 오래되어 고향 소식이 궁금했는데 다행히 오늘 친지를 만나 정담을 나누다보니 어느덧 삼경이 되었다고 하며, 친지간 만남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悅親戚(열친척)
不見親戚久(불견친척구) 친척을 못 본 지 오래 되어
思鄕萬感生(사향만감생) 고향 생각에 만감이 생기네
幸逢今日會(행봉금일회) 다행히 오늘 만나
情話到三更(정화도삼경) 정다운 이야기 하다 삼경이 되었네
한편 김씨는 그리 건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말년에는 통풍으로 손이 마비되어 많이 고생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은 병중에 지은 작품이다.
病中(병중)
臥病深房日已久(와병심방일이구) 깊은 방에 병으로 누운 지 오래 되어
精神氣力漸消然(정신기력점소연) 정신과 기력이 점점 약해지네
平生辛苦寧容說(평생신고녕용설) 평생의 고생과 괴로움을 어찌 다 말하랴
命在今朝更可憐(명재금조경가련) 운명이 오늘 아침에 있으니 가련하도다
병으로 몸져누워 정신과 기력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김씨는 지난 일을 돌이켜 본다. 그는 자신의 인생은 평생 괴로움이 많았다고 하며 그 가운데 살아온 자신을 가련하게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김씨의 시를 보면 그는 남편과도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카 셋을 잃는 슬픔을 당하기도 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괴로운 삶 속에 지금은 병까지 겹쳐 누웠으니 자신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다음은 조카 셋을 연이어 잃은 참담한 심정을 읊은 시이다.
哭姪一(곡질1)
相見未半月(상견미반월) 서로 본 지 보름도 안 되었는데
豈知訃音來(기지부음래) 부음이 올 줄 어찌 알았겠나
身後事寂寞(신후사적막) 죽은 뒤의 일 적막하니
思之尤可哀(사지우가애) 생각할수록 더욱 슬프구나
哭姪二(곡질2)
去年哭二姪(거년곡이질) 지난 해 조카 둘을 잃고
今年哭一姪(금년곡일질) 올해도 조카 하나 잃었네
痛哭問天公(통곡문천공) 통곡하며 하느님께 묻노니
無情何此極(무정하차극) 어찌 이토록 무정하신가
哭姪三(곡질3)
八年不得歸故鄕(팔년부득귀고향) 팔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悵望東雲思欲絶(창망동운사욕절) 슬퍼하며 동쪽 구름 바라보니 생각도 끊어지려하네
聞道中庭玉樹摧(문도중정옥수최) 정원의 옥수가 도중에 꺽였다는 말을 들으니
令人痛哭心腸裂(령인통곡심장렬) 사람으로 하여금 통곡하고 심장 찢어지게 하네
전체적으로 볼 때 광산 김씨의 시는 삶의 애환을 섬세한 여성적 어조로 곡진히 표현한 애상적인 시가 많으며, 시세계가 가정, 친족 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산 김씨 [光山 金氏] (한국고전여성시사, 2011.3.25, 국학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