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6 15:19:47
1.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
차미리사 선생의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 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 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 여학교(培花 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 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 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 여자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 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 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 안경신(安敬信1888년 ~ ?)
일제강점기 대한애국부인회 평양본부 교통부원, 강서지회 재무를 담당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남도 대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군중을 선동,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를 살았다. 이 해 11월 오신도·안정석과 ‘대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약(주로 모집한 군자금을 임정에 전달하는 역할)하다가 상해 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11일) 후 1920년 초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 해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오자, 평안남도 안주에서 경찰 1명을 쏘아 죽인 후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이때 안경신은 임신 5개월 된 임산부의 몸이었다. 1921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10년으로 감형되었다. 7년이 되던 해 가출옥을 해 친오빠의 집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의 행방은 묘연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3. 권애라(權愛羅 1897 ~ 1973)
1897년 2월 2일에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교동면(喬桐面)에서 태어났다. 이후 옮겨간 개성에서 자랐고 호수돈 여학교에서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서울 이화학당(梨花學堂) 보육과에 입학해 1917년에 졸업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2년 선배로 졸업한 뒤 호수돈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개성 북부교회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吳華英)이 독립선언서를 개성 지방으로 전달하였다. 이를 전해 받은 남 감리파 전도사 김지환(金智煥), 목사 강조원(姜助遠), 호수돈 여학교 서기 신공량(申公良) 등은 독립선언서를 어윤희(魚允姬), 신관빈(申寬彬)에게 전달하여 3월 1일 개성 시가지에 배부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의 영향으로 3월 3일 개성에서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 행진을 시작하였고 약 2,000명이 넘는 인원이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30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제7조와 조선 형사령 제42조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7월 4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감옥 여옥사에서 유관순(柳寬順), 어윤희, 신관빈, 김향화(金香花), 심명철 등과 함께 옥고를 겪었다.
출소한 이후 서울 도렴동 종교교회에 머물면서 연동교회, 중앙청년회관 등지에서 여자 교육회 주최의 강사로 시국 강연을 하였고, 1920년 6월 6일 승동교회에서 최덕규 ・ 김영신 ・ 이남규 ・ 최종환 등과 함께 반도 청년 웅변학회 발기위원이 되었다. 독립군 자금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1920년 7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인민대표회의에 한국 여성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때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과 만나 결혼하였다. 국내로 돌아와 1922년 10월 여자 강연 대회에서 자유연애, 여성 단발 문제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며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하였다. 1926년 1월 21일에 개최된 단발 가부(斷髮 可否) 토론회에서 단발 부인의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하였다.
1929년 중국 쑤저우(蘇州) 경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이어갔다. 1942년 4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시가둔(施家屯) 영신(永新) 농장에서 아들 김봉년과 함께 관동군 특무대에 체포되어 장춘 형무소에서 다시 옥고를 겪었다. 수감 중이던 1945년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남편 김시현의 정치적 동지로서 활동하였고 1967년 안동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4. 정칠성, 정금죽 (丁七星, 丁錦竹 1897 ~ 1958)
대구 출신으로 이명은 정금죽(丁錦竹)이다. 상경 후 남도 기생들이 중심이 된 한남권번(漢南券番)의 기생이 되었다. 1922년 일본 동경(東京)의 영어 강습소에서 수학하고, 1923년 귀국한 뒤 물산 장려운동에 참여했다. 10월 대구 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4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인 조선 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해 발기인·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경북 도 단위 사상 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 여자 기예학교에 입학했고, 사상 단체인 삼월회(三月會)에 참여했다. 1926년 삼월회 간부로 『조선일보』에 “진정한 신여성은 불합리한 환경을 모두 거부하고 강렬한 계급의식을 지닌 무산여성”이라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1927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1928년 임시전국대회 자격 심사위원, 1929년 제2회 전국대회 준비위원회 의안부(議案部) 책임자와 중앙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이때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의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고, 일본 경찰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소위 ‘조선 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31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이 되었으나,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에는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서울 낙원동에서 가게를 운영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좌익계 여성 단체인 조선 부녀 총동맹의 중앙 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의 중앙 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하다가 월북했다. 이후 1948년 최고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5년 평화옹호 전국 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반 종파투쟁 당시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당하였다.
5. 허정숙(許貞淑 1902 ~ 1991)
허정숙은 1902년 7월 16일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허헌(許憲)과 그의 부인인 경주 정씨의 둘째 딸로 경성부 종로방 관철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자(貞子), 호는 수가이이다.
1913년 경성부 배화학당에 입학하였다. 선대의 부로 아쉬울 것 없는 유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배화학당 시절에 그는 글과 시를 잘 지어서 백일장 등에 나가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의 그는 시를 읽기를 즐겨하였다. 배화학당 시절 그는 차미리사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917년 배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 고등여학교에 편입, 1918년 평양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 여성동우회, 조선 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의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 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 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38선 이북의 북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과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상, 1959년 사법상과 최고 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55년 정계에 복귀, 9월 최고 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 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7,8기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임, 재선 되었다.
그는 사랑 없이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조선공산당의 간부인 임원근, 송봉우, 중국(延安)의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최창익의 부인이고, 신일룡 등의 연인이었다. 본명은 허정자(許貞子), 다른 이름은 허정숙(許貞淑) 또는 허정숙(許正淑), 필명은 수가이(秀嘉伊)이고 가명은 정은주(鄭恩珠), 별칭은 '조선의 콜론타이'이다. 1945년 이름을 정자에서 정숙(貞淑)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