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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의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2)

2022-05-06 17:13:44

종로구 낙산길 202-15(창신동 7-26)에 있는 여성 역사 공유 공간인 '서울 여담재(02-6956-1082)'에서는 독립운동사에서 조명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광복절 기간인 8월 25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에는 류준화 작가가 제작한 여성 독립운동가 33인의 초상이 공개된다. 관심 있는 분들의 관람을 권한다. 관람료는 받지 않는다.

6.   강주룡(姜周龍 1901 ~ 1931)

1901년경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이나 유년 시절 성장 및 수학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파악할 수 없다남편은 최전빈(崔全斌)이며, 만주 퉁화현(通化縣)에서 결혼하였다. 최전빈은 백광운(白狂雲)이라고도 불린 채찬(蔡燦)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병사하였다. 24세에 남편을 잃은 후 60대의 노부모, 15세의 어린 동생을 이끌고 귀국하여 평양에 정착하였다평양에서 생계를 위해 고무 공장에 취직하여 직공 생활을 하였다. 남편의 항일 투쟁 활동을 보면서 누구보다 항일 의식이 강하였는데, 1930년 평원 고무공장에서 종사하던 1,800여 명의 직공을 선동하여 한인 노동자의 권익을 외치며 대대적인 파업을 주도하였다.

평양고무직공 파업 포스터(『동아일보』 1930.6.19)

 

1931 5월 초 정달헌의 파업 지시를 받고 평원 고무공장에서 제1선으로 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공장주는 남자 직원 9명을 고용하고 경찰 몇 명을 공장 주변에 배치하여 동맹파업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5 9일 공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 파업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들은 공장으로 출동하여 한인 노동자들을 진압하였다. 5 31일 경찰을 피해 혈혈단신 을밀대(乙密臺)로 갔다. 여기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일본 경찰들과 평양 주민들에게 노동 생활의 참상과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호소하면서, “임금 감하에 복종하는 것은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이며, 2,000여 노동자를 위하여 죽는 것이 아깝지 않다”라고 연설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평양 을밀대 위에서 단식 농성 중인 강주룡

1931년 정달헌(鄭達憲)을 만나 평양 적색 노동조합(平壤 赤色 勞動組合)에 가입하였다. 평양 적색 노동조합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정달헌이 1931 1월에 조직한 것이었다. 정달헌은 1926 610 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으로 이동하여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인 1931년 평양에 잠입하였다. 그가 평양을 활동 지역으로 선택한 것은 당시 평양에는 공장 노동자가 많고 노동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왕성하게 진행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 평양 노동연합회(平壤 勞動聯合會)를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는 노동쟁의를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조치였다.

평양 을밀대 위에서 단식 농성 중인 강주룡

단식 운동은 체포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를 부담스러워 한 일본 경찰들은 5 31일 오후 11 30분에 석방하였다. 석방되어 경찰서에서 나오는 즉시 파업단 본부로 가서 파업을 독려하였다. 6 9일 공장 사주 측은 새로운 직원을 선발하여 공장을 운영하는 한편,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20여 명을 해고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공장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출동해 있던 경찰에 다시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죽음을 불사한 단식을 지속하였다.

1년여에 걸친 옥중 생활과 잦은 단식으로 인해서 신경쇠약과 위장병에 걸리게 되었다. 평양지방법원은 6 7일 병보석으로 출옥시켰다. 하지만 출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6 13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뜻을 같이하였던 동료 100여 명은 서장리(西章里) 묘지에 고인을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7. 심영식(沈永植, 1896 ~ 1983)

심영식은 한국의 시각장애인 , 전도사 , 독립운동가이다 .

세례명을 심명철(沈明哲)로 받았으며, 본적은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이다.

특히 어릴 적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는 심영식(沈永植) 1919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 3일에 어윤희, 신관빈, 권애라 등과 개성지역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5 6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0월형을 받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또 투옥 중인 1920 3 1일 서대문 감옥 여옥사 8호 감옥에서 유관순·임명애 등과 옥중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고문으로 고막을 다쳐 평생 고생을 했다. 그리고 당시 유관순 등과 감옥에서 불렀다는 '대한이 살았다'는 노래가 아들(문수일)을 통해 2019년 언론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8 .  어윤희(魚允姬1880~1961)

개성에서 여성들에 의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여성들에 의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 본관은 함종(咸從). 충청북도 충주 출생.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 청상과부가 되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개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1912년 개성 미리흠 여학교(美理欽 女學校) 기예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전도사로 외딴섬의 전도와 독립정신계몽을 자원하였다.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이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전달되었으나 그가 소심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자, 어윤희가 보따리 장사를 가장하고 대낮에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것을 본 호수돈 여학교 사감 신관빈(申觀彬), 장님 전도부인 심명철(沈明哲) 등이 합류하였다. 그 결과 개성의 만세시위운동은 여성들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만세시위 주모자로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제히 옥중 만세를 불렀다.

출감한 뒤에도 독립운동자들에게 비밀리에 여비를 마련하여주었으며, 육혈포 탄환 등을 감추어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개성에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하여 고아 사업을 하였으며, 6·25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2년 서강교회 장로로 10년간 시무하였으며, 1953년 나이팅게일 기장, 1959년 인권옹호 공로표창을 받았다. 그 뒤 서울 마포에 서강 유린보육원을 설립, 운영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9 .  방 순 희 (方順熙, 방순이 方順伊 1 9 0 4 ~ 1 9 79)

여성 독립운동가 방순희

출생과 가계

방순희는 1904년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부 남산동 163번지에서 온양 방씨 아버지 방도경(方道京)과 어머니 김복녀(金福女)의 장녀로 태어났다. 남매로는 10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당하자, 1911년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방순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한인 기독교회가 운영하는 중등교육기관인 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에 진학하였다. 중학과정을 졸업한 후 부친으로부터 고국에서 교육받고 돌아와 한인 동포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것을 권유받았다. 고국에서 학문을 더 배우고자 하여 15세 되던 해인 1918년 조국에 돌아와 여성교육의 명문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정신여학교 재학 중에 서울 중구 회현동에 기거하였다. 방순희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왜경에 고문을 당하다기도 했다. 그녀는 4년제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1923년 제15회로 졸업하였다.

 

교육, 사회 활동

부모님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본가로 다시 돌아가 신한촌의 백산(白山)소학교에서 2년간 한인들에게 교육을 가르쳤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 당국이 민족교육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연해주 일대 한인학교들은 점차 폐쇄되었고 더 이상 한인 민족교육에 종사할 수 없게 되었다.

방순희는 1925 8 24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러시아 영사관에서 통역으로 고용되었으나 약 1개월 만에 사직하고 서울 체부동(體府洞)에 기거하면서 여러 활동을 모색하는 가운데 북풍회 등에 가입하여 선전활동에 참여하였다. 1925 10 31일 서울 제동(齊洞)에서 개최된 경성청년회 월례회의에 북풍회 여성단원의 신분으로 참석하였다. 한편, 재러 한인사회의 동포 자격으로 정동의 러시아영사관 개관식에 참석했을 때, 그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백색의 옷을 입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일제의 치안유지법 발효로 일제의 요주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로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朴熙道)의 의용대장 임명장을 전달한 혐의자로 지목, 체포되어 이틀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입국한 목적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북풍회는 민족주의 진영이 상대적으로 활기를 띠고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민족협동전선론이 강력하게 대두함에 따라 1926 4 14일 결성된 정우회(正友會)로 합류하여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분열과 갈등 속에서 혼란에 빠진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그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량을 결집했고, 독립운동계의 좌우합작 운동에 동참해 독립의 완성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쉼 없이 분투했다. 특히 방순희는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남편 내조에 그치지 말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와 함께 소련 전문가로서 주중소련대사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활발히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 운동가로 유명해지면서 일제의 경계가 극심해지자 그녀는 만주를 경유하여 상해로 탈출하였고 1931년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 복역 중 병보석을 기화로 탈출한 현익철(玄益哲, 18901938)과 결혼하였다. 1932 4 29일 홍구(虹口)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프랑스 조계지 일대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본경찰의 검거 선풍이 몰아치면서 임시정부는 피난생활에 들어갔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가흥(嘉興), 남경(南京) 등지로 흩어졌으며, 1938년에 임시정부는 광동성 장사(長沙)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8 5 6일 창사 남목청(楠木廳) 6호의 임시정부 청사에서는 '남목청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3당의 통일회의가 열린 자리에 갑자기 난입한 이운한(李雲漢)이 권총을 난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가 중상을 입었고, 방순희의 남편 현익철이 사망하였다. 갑작스러운 남편과 사별로 인한 슬픔을 이기고 방순희는 193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정기의회에서 새로 선출된 18인을 포함, 재적의원 총 33인 중 방순희가 유일한 여성이었다. 본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1940년도 임시정부 세입세출안을 통과시키고 3년 간 독립운동의 총역량을 집중시킬 조직, 군사, 외교, 선전, 재정 등 5개 항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워 독립을 준비하였다.

 

외교 활동과 한국독립당 활동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여성들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중국과 연계한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조국 독립과 민족해방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방순희는 주미대표부대표권 문제, 광복군 창설, 대일·대독선전포고 및 조소앙의 건국강령채택문제 등 입법 활동과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미·영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각 정부를 상대로 대표를 파견했을 때, 그는 대() 소련 대표로 선임되어 중경(重慶)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러시아 사정에 능통하고 러시아어가 유창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한국독립당과 임시의정원에서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의 동지인 김관오(金冠五)와 재혼하는 한편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 제5구 중 제1구에 소속되어 다가오는 독립에 대비하여 국가 건설을 준비하며 활약하였다.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가 1941 5 8일부터 9일까지 개최되었을 때, 그는 홍진, 최동오, 이중민, 채형세, 김현구 등과 함께 토교(土橋) 선출대표로 출석하여 활약하였다. 본회의에서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합법적으로 한국독립당의 주의(主義)와 정강(政綱) 정책(政策)을 실현할 의()와 권리(權利)가 있도록 규정하여 한국독립당의 이당치국(以黨治國)과 일당단정(一黨專政)의 원칙을 실행할 것 1940년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결된 광복군 공약 3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수정해서 정부에 넘겨 빠른 기일 안에 분명하게 법령을 공포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안건을 검토, 새로운 안을 마련하고 이를 결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여성의원]

34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는 1942년 10월 25일에 중경시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건물에서 방순희 선생을 비롯한 19인의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34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래 가장 성황을 이룬 의정원회의로 기록된다. 본 의회는 ‘1.국가독립 2. 민족자주 3. 국권탈취라는 세 가지 임시약헌의 정신에 의거하여 개최되었으며, 이날 주석 김구는 단체와 당파의 대립이 한국임시의정원으로 완전 통일되었다는 내용의 선언을 하였다. 34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한국 독립운동계가 이데올로기와 파벌을 초월하여 통합을 이룬 역사적인 회의이다. 이 때 부군인 김관오도 새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에 합류하였다.

방순희 의원이 유일한 여성의원이었던 것에 대해 『우리통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십 여 명 의원 중 여자의원은 오직 방순희 여사 일인 뿐이니 만록총중에 일점 홍이다. 부녀가 아직도 억울한 경경에 있는 조선 사회이므로 방 여사의 책임은 더욱 크다. 고군분투의 고독감도 있을 것이나 일천만 여성의 후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용기도 날 것이다.

방 의원은 1942년 한국독립당의 충칭구 당부의 간사에 피임되어 부군인 김관오와 한국독립당 충칭구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동지이자 부부로서 언제나 함께 활동하였다.

1943 3 1일 오전 10시 충칭에 거주하는 교민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신생활운동복무소(新生活運動服務所) 대강당에서 3·1절 기념대회가 거행되었다. 기념식 주석을 맡은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의 개회사에 이어 여러 인사들의 연설이 있은 후 한국청년회 대표 안원생과 한국애국부인회 대표 방순희 선생의 치사가 이어졌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영도 하에 더욱 단결하고 적극 공작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고 각 민주 우방의 적극적인 원조를 바라며, 이들과 철저히 합작할 것을 요망하였다.

방 의원은 1943 8 19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생계부 생활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지원

1940년대에 주의·이념을 초월하여 각 당파에서 모두 임시정부를 지지 옹호하자, 여성들도 이러한 흐름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이루는 데 앞장섰다. 한국광복진선에 동참한 여성동지들은 항일역량을 강화하여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강력한 여성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오랫동안 이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때마침 한국독립당이 성립되어 독립당의 지도와 원조 하에 여성조직 결성이 속도를 더하게 되었고 1940 6 16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었다.

한국혁명여성동맹 한국광복진선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한국광복군에 대한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1 5백만 한국여성동포들의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일깨워 한국혁명에 힘을 보탤 때, 반도에 태극기가 휘날릴 날이 더욱 가까워질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 때 방순희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주임으로 임명되어 통일전선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외에 집행위원으로 오광심(겸 재무부주임), 정정화(겸 조직부주임), 김효숙(겸 훈련부주임), 김정숙(겸 선전부주임), 감찰위원으로 최형록최소정이순승이 참여하였다. 한국여성은 혁명여성임을 자처하며 조국 독립 완성과 세계 평화실현을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중국 여성과 전 세계 피압박 민족 여성들과 연계 분투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의 창립과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1943 2 23일 각 정파의 여성들 50여명은 충칭 임시정부 집회실에 모여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는 물론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 결성된 애국부인회의 애국활동을 계승하고 남녀평등의 여권 확장을 통해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동참하고자 애국부인회를 재건한 것이다. 이제 여성들도 남성의 지원, 남편에 대한 내조 차원이 아닌 민족해방운동의 전사로서, 그리고 조국 광복과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주체로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통합과 조국 독립을 달성해 나가야 할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이 대회의 주석에 김순애, 부주석에는 방순희 선생이 선임되었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 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행동강령을 선포한 뒤,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의연금 모금에 협력하고 대일전선에 부상당한 이들과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벌였으며, 해외 각지의 한인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들 단체는 대한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을 목표로 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남녀가 정치·경제·사회·문화 제 분야에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자유한인대회 개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정기간 한국을 신탁통치 한다는 워싱턴 회의의 논의 결과가 미국 「시카고선」지에 보도된 후 이 소식이 중경에 전해지자 동포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에 각 혁명 단체가 1943 5 10일 오후 2시 중경 모처에서 3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인 가운데 재중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전후의 한국독립문제를 진지하게 토의했다. 장내 분위기는 장엄하고도 열의에 찬 가운데 총주석인 홍진이 개회사를 하였고, 방순희를 비롯해 조소앙·손두환·박건웅·류월파·성현원 등이 연설하였다. 본 대회에서는 즉석에서 대회 선언문이 통과되고 5 10일자로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보내는 전문이 발송되었으며, 완전독립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회결의안이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광복운동진영의 단결을 내외에 크게 과시하고 전후 한국의 완전독립과 어떤 형식이든 외세의 간섭을 반대한다는 한인사회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취임과 교육활동

1943 6 1일 국무회의에서는 선전부에 대한 직원 선임이 있었다. 선전부장에 안원생이 선임되었고, 방순희는 1944 6 1일부터 안원생과 함께 선전부 선전과 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방송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포로 중 한인 사병들을 위문하였고, 위문금품을 거두어 전선에서 활동하는 항일 군인들도 위문하였다.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는데 힘을 쏟았다.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위안부 여성 10여 명이 충칭 임시정부로 인계돼 보호받게 되자 이들의 교육을 전담했다. 일제가 침략전쟁 중 전선에 개설한 위안소에서 살아남아 자유의 몸이 된 여성들은 임시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광복군과 함께 1946 3,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내선전 연락원으로 뽑혀 선발대로 귀국하게 될 때까지 굵직굵직한 일들을 도맡아 조국광복의 초석 역할을 톡톡히 한 여장부의 삶을 살았다.

 

광복 이후

방순희는 부군인 김관오와 한국독립당 당원이자 각각 임시의정원의 함경도 강원도 의원인 혁명의 동지로서 함께 하였다. 1945 8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방 선생 부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 임명되어 조국으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각지에서 선무공작을 펼쳤다. 임시정부 요인들 1진과 2진이 고국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중국에 남게 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다시 상해로 모이게 되었다. 1946년 4월 26일 방 선생 가족은 이범석이 이끄는 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미군이 제공한 군함 LST (Clnatan Clay)편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인천항에 도착했으나 당시 콜레라가 돌아 부산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에야 상륙 수속이 끝나 인천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환국 기반을 마련하고자 전력을 다했지만 광복된 조국은 극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48 4 14일에 한미호텔에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가 개최되어 새로이 조직을 개편했을 때 방순희는 여기에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실행 조직인 5분과(재무, 정치, 문화, 후생, 국방) 8(비서부, 조직부, 선전부, 청년부, 훈련부, 재정부, 노동부, 부인부)가 갖추어졌을 때, 그는 부인부를 맡아 여성문제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백범 김구가 살해당하자 한국독립당은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6.25가 발발하면서 민족통일의 염원은 좌절되고 말았다. 6.25전쟁 당시, 육군사단장과 유격사령관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국군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남편 김관오 장군과는 1965년 사별하였다. 이후 방순희 선생은 1979 5 4,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0. 권기옥權基玉 임국영(林國英1901~1988)

독립운동가이며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權基玉), 임국영(林國英)은 권기옥(權基玉)의 가명이다.

학창시절과 3·1운동

권기옥은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호적대장에서는 1903년 1월 11일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1913년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이 해에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과 정일성의 영향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3·1운동을 준비하였고, 직접 거리에 나가 만세 시위를 하다 유치장에 구류되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공채를 팔아 송금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 9월 미국 국회의원 동양시찰단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대대적인 시위 행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질 목적으로 독립단원들을 국내에 잠입시켰다. 권기옥은 숭현소학교 석탄창고를 은신처로 제공하여 독립단원들이 이곳에서 폭탄을 제조, 그 해 8월 3일 거사에 사용하게 하였다.

 

중국 망명과 비행학교 졸업

권기옥은 1920년 동료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1921년 중국어와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서양선교사가 경영하는 항주의 홍도여학교 중학과에 입학해 1923년 6월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로 돌아와서 인성학교 교사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권기옥은 이 기간 동안 비행사가 되기 위하여 영어를 습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비행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학창시절인 1917년 미국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1923년 12월 권기옥은 한국인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육군 항공대 창설과 비행사 양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에 권기옥은 임정 요인인 이시영의 추천서와 중국인 혁명가 방성도(方聲濤), 운남성장 겸 독군 탕자오[唐繼堯]의 추천서를 받아 항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25년 2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비행탑승 적성검사에 합격해 비행사가 되니,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다.

 

결혼과 비행사 활동

비행사가 되어 1925년 5월 상하이로 돌아왔지만, 임정의 재정 상황이 열악하여 항공대 창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권기옥은 계속적인 비행 연습을 위해 중국 비행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군벌 간의 경쟁으로 피난을 가거나 군이 해산되면서 한군데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장가구(張家口)·내몽골·베이징[北京] 등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1926년 초 장가구에서 이상정(李相定)과 혼인하였다.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10월 내몽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7년 전 운남항공학교 교장 유패천(劉沛泉)의 소개로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張介石]의 국민혁명군 항공사령부 소속 비행사로 합류하였다. 난징[南京]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난징으로 이동해 국민정부 항공서(1935년 이후 항공위원회로 개칭) 1대 소속 부비항원(副飛航員)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중외일보』(1927.8.28)에 따르면, 권기옥은 다른 재중 조선인 비행가들과 함께 “중국혁명전선의 한국인 비행가”로 불렸다. 권기옥의 비행시간은 총 7000시간이었다.

남경에 머무르면서 권기옥과 이상정은 김원봉을 비롯하여 의열단과 관련을 맺었고,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교류하였다. 일제 첩보 자료(『사상휘보』 4, 1935.9)에 따르면 권기옥은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비행사이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6년 하반기 권기옥과 이상정은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체포·수감되었고, 8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이리하여 권기옥의 13년 비행 경력은 끝이 났다.

 

임시정부 및 해방 뒤 활동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1937년 11월 이상정과 함께 난징을 떠나 1938년 3월 충칭[重京]에 도착하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민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라디오 방송(일본어)을 듣고 내용을 기록하여 군에 제출하는 정보 수집 업무도 수행하였다. 1943년에는 김순애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고,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던 최용덕 등과 함께 중국 공군의 한국인 비행사를 활용하여 광복군 비행대 편성 및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해방 후 1949년에 귀국하였다. 남편 이상정은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으로 먼저 귀국하였는데, 11월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권기옥은 1950∼1955년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정계에도 입문하였으나, 1956년 신익희의 사망과 함께 더 이상 정치를 꿈꾸지 않았다. 1966∼1977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및 재향군인회부인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별세하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3년 국가보훈처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