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33인의 여성 독립 운동가 에게 바치다. (3)

2022-05-08 19:31:47

종로구 낙산길 202-15(창신동 7-26)에 있는 여성 역사 공유 공간인 '서울 여담재(02-6956-1082)'에서는 독립운동사에서 조명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광복절 기간인 8월 25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에는 류준화 작가가 제작한 여성 독립운동가 33인의 초상이 공개된다. 관심 있는 분들의 관람을 권한다. 관람료는 받지 않는다.

11. 이화림(李華林 1905~1999)

이화림 (李華林, 1905년 ~ 199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성장기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춘실(李春實) 숭현소학교에서 유아 교육을 공부하였고 1919 14세의 나이로 3.1 운동 참여하였다. 항일운동에 열심이었던 오빠들이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전단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평양의 학생 조직인 역사문학연구회에 참가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청진의 유아원에 근무하면서 1927년 조선공산당 가입하였다. 오빠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무장 항일 투쟁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식을   없다. 이화림도 25살이던 1930년 상하이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길을 찾다가 김두봉 소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이화림은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이봉창, 윤봉길 등과 활동하였다. 김구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일제의 밀정을 색출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시절 이화림은 "동해"라는 가명으로 불렸다. 이화림은 임시정부가 자금난을 겪자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으로 스스로 생계를 마련하고 경비에도 보탰다. 

 

이봉창이 일본으로 폭탄을 지니고   바지단 안쪽에 주머니를 만들어 숨길  있도록 하였고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 사건에서 폭탄을 던질 때는 부부로 위장하여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따돌리며 사전 답사를 하였으나 당일에는 윤봉길 만이 식장으로 들어섰다. 이화림이 일본어에 능통하지 않아 발각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훙커우 사건 이후 한인애국단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이화림은 훙커우 공원 사건 이후 테러리즘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없다고 판단하고 김구 결별하였다. 백범은  백범일지》에 이화림에 관한 아무런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1938 , 이화림은 백범을 만났다. "동해(이화림의 가명)!  아직도 공산주의자냐? 공산주의를 믿느냐?" ", 저는 공산주의를 믿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럼, 우리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구나."백범은 이화림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단호히 연을 끊었다. 이후  사람은 중경에 머무는 동안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던 공산주의자를 만나지 않기로  것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임시정부 동지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화림을 <백범일지>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납득키 어렵다.

조선의용군 활동

1932 임시정부가 가흥 방면으로 옮길  이화림은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혁명의 기지" 불리던 광저우 향하여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법학과에 들어가 2학기를 공부하였으나 이후 간호과로 옮겼다. 유학생 김창국을 만나 결혼하여 아들 김우성을 낳는다.

 

1935 늦가을 의열단 윤세주 광저우에서 무장 투쟁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화림은  연설에 크게 감화되어 남편과 상의 끝에 홀로 조선민족형명당 있는 난징 찾아갔다. 1936 1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부녀국의 의료담당자가 되었으며 7월에는 난징조선부녀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일어나자 충칭으로 가 조선의용대 합류하였다.

 과정에서 15 연상의 이집중(이종희) 조선의용대 총무부장과 재혼했으나 1939 계림에서 만난 김학철옹의 회상에 따르면 이때 이미 남편과 사이가 멀어졌던 것으로 보아 이혼한 것으로 생각된다.

 

1939 계림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이 되었고 1941년에는 뤄양 선견대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합류하였다. 1942 화북조선인민간부훈련반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후 부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지역은 산악이라 식량이  부족하였다. 이화림은 돌미나리를 뜯으며 도라지 타령의 가사를 바꾸어 불렀는데 모두들  노래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1942년 팔로군 조선의용군의 타이항산 근거지는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활로를 뚫고 퇴각하는 가운데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화림은 광저우 간호학교 시절 배운 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부상자를 돌봤다. 1943년부터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일하였다. 1944 조선의용군은 옌안으로 이동하였으며 이화림 역시 그곳에서 해방 맞았다.

해방 이후

1945 1 이화림은 김무정 권유로 옌안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946 11 21일 중국 공산당 입당하였다. 졸업 뒤에는 하얼빈에서 의사로 활동하였고,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중공군이 되어 참전한다.

 

연안에서 의대 공부를 마치고 의사로서 활동하던 , 조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인민군 위생소장으로 합류한 것이다. 전쟁 도중 미군의 폭격에 의해 다리에 파편을 맞아 부상으로 심양에 돌아온 , 그녀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참고로  때의 ‘인민군’ 전력이 독립운동가 이화림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1955 중국으로 돌아가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를 지냈다.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1984 은퇴하였고 1987 대련시 조선족 노인 협회의 명예 회장을 지냈다.

1999 2 10 9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언에 따라 전재산을 대련시 조선족 학교에 기부하였다.

기념

연변작가협회가 이화림을 기념하여 화림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오랫 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995 8 요녕민족출판사가 출간한 이화림의 구술 회고록 《정도》가 유학생 박경철에 의해 발굴되어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한국전쟁 참전 경력이 문제가 되어 독립유공자 서훈이 되지 않고 있다. 2017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이화림을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서훈을 추진한  있다. 

 

 

12. 이애라(李愛羅1894 ~ 1921) 이애일라(李愛日羅), 이심숙(李心淑)  

이애라(李愛羅, 1894 ~ 1921)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애일라(李愛日羅), 이심숙(李心淑) 이라고도 한다. 남편 역시 독립운동가인 이규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본명 이심숙(李心淑), 이명은 이애일라(李愛日羅)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고종 31) 1월 7일 서울에서 시종을 지낸 이춘식(李春植)의 셋째딸로 출생하였다. 1912년경 이화학당(梨花學堂) 중등과를 졸업한 후 충청남도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여선교사 샤프(Mrs. Sharp)의 중매로 같은 학교 교감 이규갑(李圭甲)과 결혼하였다. 결혼 뒤에도 영명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남편과 함께 여자야학교도 설립하여 여성계몽에 노력하였다.

이후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주하여 정진소학교(正進小學校)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에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구금되었다.

 

석방 후 남편이 있는 서울로 와서 여성비밀결사인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에서 기독교 여성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 다시 체포되었는데, 이때 일본헌병이 백일 된 갓난아이를 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석방 후 남편을 찾았으나 이규갑이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만나지 못하고 공주로 왔다가 다시 연행되어 남편의 거처를 대라며 고문을 받았다.

 

이후 충청남도 천안의 양대여학교(良岱女學校) 교사로 근무하다 남편이 있는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함경북도 웅기에서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중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석방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1921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남편을 만난 몇일 후 1922년 9월 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3. 김순애(金淳愛, 1889 ~ 1976)

김순애(金淳愛, 1889 ~ 1976)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김순애의 남편 김규식

김규식의  번째 부인인 그녀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단체, 사회단체, 대한적십자사 등에서 활동했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 참석중인 남편 김규식 도와 국내 호응을 이끌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으나 함태역과 김성수 만류로 출국했다. 이후 1919년 한국부인회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부활된 대한적십자사에도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재중 교포 부녀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홍보, 모금, 선전 활동 등에 주력하였다. 성실함과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교포 사회 여성단체의 중망있는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1진으로 귀국, 남편 김규식 활동을 도왔으나 1950년 한국 전쟁  피랍되면서 정계에서 은퇴, 이후 교육 사업에 투신하였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친정 5 종고모이다. 남편도 독립 운동가인 김규식이다. 본관은 광산.

 

출생과 수학

김순애는 황해도 장연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집안은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인 개화 지주 집안으로, 독립 운동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2.8 독립 선언에 참가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낸 김마리아는 그의 종고모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운동가 서병호는 그의 큰 형부이고, 서재현은 조카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만주와 몽골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김필순은 남동생이다. 중국의 영화인인 김염은 그의 조카이다. 고황경은 둘째 오빠 김윤오의 외손녀이다. 해방 이후에 목사를 지낸 서경석은 첫째 언니 김구례의 손자이다.

김순애는 고향에서 송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상경하여 한성부에서 기독교 북장로파 계열의 연동여학교(정신여자교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1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김순애는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 및 지리를 가르쳤는데, 이 일로 박해 조짐이 보이자 김필순과 함께 만주로 이동했고, 1915년 난징의 명덕여자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이후에도 조선 지도의 제작과 보급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다.

 

망명 생활 초기

1918년 형부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9년 서병호, 김필순 등의 소개로 김규식 만났다. 당시 고된 시집살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그는 독신주의(獨身主義) 고집하였으나, 병석에 있던 어머니 안씨의 거듭된 간청을 이기지 못해 결혼하게 되었다. 후일 그가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 이정식에게 회고한 바로는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애원하여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규식과는 이미 1904년 무렵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때 김규식은 상처한 처지였는데 서병호와 김필순의 소개로 김순애를 만났다. 본래 김규식은 조은수와의  결혼 이전에 김순애와도 혼담이 오갔다. 김규식은 결혼 직후 구식 여성이던 본처 조은수를 정신여학교 입학시켰는데, 김순애는 조은수의 정신여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순애의 사람됨을 알아본 조은수는 죽기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김순애와 재혼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줄 것이니  김순애 양과 결혼하라' 것이었다.

 

 부인과 사별한 김규식을 김필순의 소개로 만나 1918년 12월 말 난징 어느 선교사 댁에서 결혼한  다시 상하이 이동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여운형의 신한청년당 조직되어 있었고, 서병호도  단체에 참여 중이었다.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회회의 참가하여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김규식에게 맡기면서, 결혼한  보름만에  길을 떠났다. 김규식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영어가 유창했고 김순애도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출국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수행될 것이다. 남편 김규식 출국한 , 그는 자신이  역할을 하겠다며 다른 남자 특공대원과 함께 배편으로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김순애는 3.1 운동 참가를 위해 일시 귀국했다. 상하이에서는 지역별로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시위를 조직하도록 했으며, 김순애는 대구 지역을 담당하여 백남채  기독교 인사들과 만난  상경했다. 민족대표 33인   명인 이갑성 재직 중이던 세브란스병원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3·1 운동 준비 세력들이 연락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곳에서 함태영 접촉하여 평양 파견되었다가 거사일 전날인 2월 28일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때 그는 한성부 또는 평양에서 조선총독부 관헌에게 체포, 희생될 계획이었으나, 그가 만약 체포되어 희생된다면 파리에서 활동중인 김규식 받을 정신적 타격이  것이라는 함태역 김성수의 권고를 받아들여 결국 다시 출국하게 된다.

 

1919년 2월 열차편으로 국경을 넘어 흑룡강으로 갔다. 이때 그는 흑룡강에 체류중이던 오빠 김필순 찾아가 흑룡강 사범학교의 교감으로 특별 초빙되었다. 그러나 김순애의 행적을 추적하던 조선총독부 경찰의 연락을 받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1918년 출국 당시 중국 국적을 취득한 상태였으므로 즉시 송치되지 않았고,  사이 흑룡강성 정부에 연락하여 석방되었다. 이어 신변보호 요청이 받아들여져 중국 관헌의 호송하에 탈출 성공, 다시 상하이 되돌아왔다. 상하이 도착 직후 3.1 만세 운동 터진 소식을 접하였다.

 

대한부인회, 적십자사 활동과 임시정부 측면지원 활동

3.1 운동 일어난  상하이에서 이화숙(李華淑), 이선실(李善實), 강천복(姜千福), 박인선(朴仁善), 오의순(吳義順)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고, 대한적십자사 조직했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의 김순애는 한국 지도(地圖) 제작  태극기의 제작 보급, 임시정부의 회의장 준비  임시정부의 선전을 민중의 저변으로 확대시키는 독립운동을 담당하였다. 또한 구한말(舊韓末) 있었던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한일 합방 더불어 해체되었던 것을 1919년 8월 상하이에서 서병호(徐丙浩), 이희경(李喜儆), 안창호 등의 주도로 대한적십자회 발기되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사검(査檢) 선임되었다. 그해 11월 23일 병원의 설립과 간호원양성소 설립을 목적으로 대한적십자회 회원 모집 경쟁회의를 공고하였다.

 

1920년 1월 상하이에서 손정도(孫貞道), 김철(金徹), 김립(金立), 윤현진(尹顯振), 김구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1월 27일 간호원양성소 설치 건의가 성사되어, 남녀 13명으로 구성된 적십자 간호원양성소를 개교(開校)하여 소장이 되었으며, 국제적십자회에 대한적십자회를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간호원양성소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를 양성, 광복군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치료, 진료가 목적이었다.

 

독립운동과 부인회 활동

1920년 일본이 간도 출병(間島出兵)에서 저지른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독립 운동을 계속하여 1920 11월에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의원으로 피선된 그녀는 임시정부가 중경(重慶)으로 이전될 때까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 초에는 대한적십자회를 일본적십자회에서 독립시키기 위한 국제적십자회의의 교섭을 파리위원부의 이관용을 대표로 하여 전개하였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권애라(權愛羅), 김원경(金元慶)  사람의 대표를 한국부인회의 대표자로 파견하였다. 1922년 상하이에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그녀 한국부인회의 대표로 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어떤 결론도 얻지 못하고 임시정부 내의 개조파(改造派) 창조파(創造派) 대립으로 부인회 회장직에서 사퇴하였다.

 

1923년 한국국민대표회에 참가하고, 1926 7월에는 안창호, 염온동(廉溫東), 엄항섭(嚴恒燮), 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훠원회를 발족시켜 재정난에 허덕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 지원, 홍보,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16일 한국독립당 산하 여성 조직인 한인여자청년동맹 조직, 김구경(金九經) 박영봉(朴英峰) 등과 함께 1933년까지 활동하였다. 한편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의 수배로 수시로 피신하면서 안정적인 생계를 잇지 못하던 남편 김규식 대신하여 바느질과 길쌈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다른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가족들이 남편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나 다른 중국인, 한인 교포들과 성추문이 있기도 하였으나 깨끗하게 처신하여 재중국 한인 부녀회의 명망있는 인사로 천거되기도 했다.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는 각주에 추대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

 1942년 쓰촨성 충칭에서 개국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방송인 충칭 방송에 출연하여 홍보, 광고 활동을 하였다.

1943 2 23일 쓰촨성 충칭에 있던 각계 각파의 부인 50여명이 임시정부 집회실에 모여 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다. 재건대회에서 그녀가 각주으로 선출되었고 방순희(方順熙)·연미당(延薇堂)·김윤택(金潤澤)·권계옥(權桂玉)·정정화(鄭靖和)·최소정(崔素貞)·강영파(姜映波) 등이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임원들과 함께 3·1독립운동 당시 애국 부인회의 혁명적 애국활동을 이어 구국의 위한 애국여성이    7개의 강령을 제시하였다. 재건된 애국부인회는 방송으로 국내외의 동포여성들에 대한 분발과 각성을 촉구 호소, 위문금품의 모금 활동, 무력항쟁하는 광복군(光復軍) 찾아 위문하는  독립투쟁에 앞장을 섰다. 또한 포로수용소를 통해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한국으로 되돌려보내도록 주선해주거나 계몽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했고, 해외각지의 한국 교민 여성단체들과의 연락 활동을 추진하였다.

 

1943년 5 광복운동을 위한 중국 각지에 있던 당파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재중국자유한인대회(在中國自由韓人大會) 개최될 , 그는 한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때 함께 참석한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洪震)·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광(金忠光)·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金奎光) ·무정부주의 연맹의 유월파(柳月波)·한국청년회의 한지성(韓志成) 등이 참석하여 공동의장의 한사람으로 추대되었다.

 

귀국과 생애 후반

임정 귀국 제1진 사진(뒷줄 왼쪽은 남편 김규식, 가운데는 김구, 오른쪽은 김구의 며느리 안미생, 앞줄 왼쪽의 소녀는 김순애의 셋째 딸 김우애

광복 후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1진에 함께 귀국하여 삼청장(三淸莊) 정착하였다. 1946년 모교인 정신여자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조직에 참여하였고,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당시에는 108인의 문화, 예술인들의 남북협상 지지 성명을 두고도 북행길을 주저하는 김규식 향해 한번 죽는 것이지 두번 죽느냐며 당신이 죽게 되면 내가 과부가 되고 아이들을 기르면 되지 않느냐며 방황하던 남편 김규식 독려하기도 했다.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다가 이승만 대립하여 정계에서 밀려난 김규식이 한국 전쟁  북한으로 가면서 사망 시점까지 건국훈장 받지 못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0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뒤 북한 납북된 남편 김규식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수소문하고 노력하였으나 행방을 파악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970년 초에 남편 김규식이 만포진 근처에서 병사 또는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만년에는 서울 손자 김건필(金健必, 김진동 아들) 집에 머무르다가 1976 5 17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생전 납북 인사의 가족이라 하여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표창받지 못하다가 사망 이듬해인 1977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추서 받았다.

 

14. 박차정(朴次貞, 1910 ~ 1944)

박차정(朴次貞)은 독립운동가로, 김원봉의 두 번째 부인이며, 북한의 초대 국가원수 겸 초대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딸이었다

박차정(朴次貞 1910 ~ 1944)은 한국 독립운동가로, 김원봉  번째 부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초대 국가원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조카딸이었다. 근우회와 부녀복무단에서 활동했다.

동래 일신여학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의열단 가입,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의열단장 김원봉 결혼하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교관,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9 2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후유증 등으로 1944 5 27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독립 운동  사용한 가명은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이다.

 

남편 약산 김원봉/ 김원봉과의 결혼 사진 (1931년)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이던 현 부산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했고, 숙부 박일형 외가의 친척들, 오빠들이 항일 운동에 뛰어든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김두전(金枓全), 김두봉(金枓鳳) 친척인 어머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숙부 박일형(朴日馨) 등의 영향을 받았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조카딸이었고, 독립운동가 김두봉은 해방  북한의 초대 국가원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동래여자고등학교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체포, 구금 당했다.

 

학창 시절과 독립운동 참여

이곳에서 항일민족의식과 남녀평등사상을 더욱 고취시키며 일신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또한 뛰어난 문학적 기질을 바탕으로 교지 『일신』에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성부로 올라와 근우회가 결성되자 가입하였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하던  1929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 1 서울지역 11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와 노동자 파업 주동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자, 둘째 오빠 박문호 건너가 있던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망명

1930년 봄 그는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로부터 중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배편으로 중국으로 떠났다. 망명한 그는 국내에서 항일투쟁공로가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이미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과 의열단 간부에 선임되었다.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다가 안광천의 소개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1931년 결혼했고, 김원봉(金元鳳)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였다. 김원봉 본래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한다그러나 본처가 병사하고, 나중에  장가를 든다. 후일 정화암 그가 박차정을 만나기 전에 본처가 있었으며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과의 결혼은 새장가라고 증언하였다.

 

군사 활동

이후 난징(南京)으로 거주지를 옮겨 남편이 난징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일했다. 당시 그는‘임철애, 임철산’  가명을 사용하며 교관과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의 남경조선부녀회 조직했고, 중일전쟁 시작되자 기고  방송 활동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규탄하고 조선 부녀자들의 일치 단결과 투쟁을 촉구하는  독립 운동에 매진했다.

 

사망 

만년에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얻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또한 지병인 관절염으로도 오래 고생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 한중 연합 전선 무장 세력인 조선의용대 구성하자 여군 격인 부녀복무단을 설치하여 단장을 맡았다. 1939년 2월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전투 중에서 일본군과 전투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등의 후유증을 앓았다. 약산 김원봉 장군(임정 군무부장)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4세였다.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 송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으로는  〈개구리 소래〉와 소설 〈철야〉, 일본어  수필 〈가을 아침〉 등이 있다.

 

사후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평가 받지 못하였다. 공적에 비해서는 뒤늦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 동래구현, 동래고등학교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되고 부산 금정구 동상이 마련되어 있다.

 

상훈 

1995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15. 정정화(1900 ~1991) 

정정화(鄭靖和, 1900 ~ 1991)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정묘희(鄭妙喜)이며 아호는 수당(修堂)이다. 독립운동가 김의한의 아내이자 김가진의 며느리이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한 안주인이었다..

 정정화(鄭靖和)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정묘희(鄭妙喜)이며 아호는 수당(修堂)이다.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나 1910년 어린 나이에 김의한 결혼했다. 남편은 구한말 고위 관료인 김가진 아들이었다.

김가진은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전격 망명했고,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1920년 역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연로하신 시아버지를 모셔야한다' 일념때문이었다.
그녀는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아서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10여년간 자금 모금책,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또한 중국 망명 27 동안 자신의 가족  아니라 이동녕, 백범 김구  임정요인   가족들을 돌보며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서 임정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 조직하여 간부를 맡았고 충칭 3·1 유치원 교사로도 근무했다.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이 되는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광복  인생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미군정 홀대 속에 1946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고, 오랫동안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구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김의한은 안재홍, 조소앙 등과 함께 납북되었으며, 남한에 남은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되는  고초를 치렀다.

 

저서로는 회고록 《녹두꽃》(1987, 개정판 《장강일기》 남겼다.  회고록을 토대로 연극 《장강일기》 《치마》, 《아! 정정화》  정정화의 일생을 소재로  연극이 공연되었다.

198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