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0 17:17:55
16. 유관순(1902 ~ 1920)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일제 강점기에 3.1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형사들에게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
3.1 운동
191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인 시애리시 부인(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사후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시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업적(초기 활동)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이복언니가 있음)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905년 집을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지령리(현 용두리)로 돌아왔다.
이화학당 재학과 만세 운동
1916년에 개신교 감리교회 충청남도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 (엘리스 샤프, Alice Sharp, 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고,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였다. 교비생은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연이어 3월 5일의 서울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독부 학무국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폐교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천안으로 돌아왔다.
만세 운동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인원(趙仁元)· 김구응(金球應,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등이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개신교교회와 유림계를 규합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並川)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군중을 모았으며, 당일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아우내 만세 운동 가담과 체포
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면에서는 이종성(李鍾成) 등의 주동으로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趙仁元), 지역 유지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후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투옥과 사인
재판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징역형 선고와 옥사
유관순의 1심 선고형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 전영택 등이 징역 7년설을 거론했으나, 2000년대 중반에 '병천·동면 지역 형사사건부'가 발견되어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음이 확인되었다.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결혼하면서, 특사로 형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형무소 에서 옥사하였다.
이태용 부모의 사인
이 자료에는 아우내 만세 운동 당일의 시위자도 기재되어 있는데, 유관순 열사의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이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또, 이 자료에는 유중권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류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로 표기돼 있어 유관순의 어머니인 이소제씨로 추정되고 있는데, 유중권과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는 자료의 내용은 1987년에 작성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열 아홉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기록과 같다.
사후 추모각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 사망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마지못해 월터 교장서리에게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4일에 정동감리교회에서 김종우 목사가 장례예배를 집례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에 택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는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박인덕 등 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관을 인수한 이들이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시체가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뜨려졌다.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시신을 잃어버려 1998년 10월 12일에 그의 고향 근처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열사기념관(柳寬順烈士記念館)을 개관하여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2003년에 문을 열었다.
2019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7. 김향화(1897 ~ ?)
일제강점기의 기생·독립운동가. 향화는 기명으로, 본명은 순이(順伊)다. 행화(杏花)라고도 불렀다. 경성 출신으로 15세의 나이에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기생이 되었고, 수원기생조합 최고의 기생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3월 25일부터 4월 4일까지 수원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 29일 동료 기생 30여 명과 함께 수원군 자혜병원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던 중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붙잡힌 뒤에는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200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제90주년을 기념하여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18. 박자혜(朴慈惠 1895 ~1943)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후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성부에서 자라던 그녀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 만세 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일제 산하 기관에서 산파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직접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1919년 봄 회문(匯文)대학 의예과(1927년 연경대학으로 대학 개칭 후 연경대 의예과, 1949년 북경협화의원(北京協和醫院)에 전입)에 입학한 박자혜 선생은 북경 생활 1년 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대학을 중퇴, 이듬해 첫아들 신수범(신채호의 차남) 선생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채 경제적 어려움때문에 남편과 헤어져 국내로 들어오고 말았다.
한편 신채호는 1923년 동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선생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고, 박자혜도 남편 신채호와의 연락을 계속하면서 국내에서 가능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 선생이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하여 주었다. 나석주 의사가 토지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설립)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 당시에도, 서울의 길 안내를 지원한 것이 박자혜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전향하면 가출옥시켜주겠다는 유혹을 견디어내면서 옥고를 치르다 운명을 달리하기까지(조정래, 태백산맥 3권,해냄), 옥바라지는 물론 자녀 교육, 생계를 모두 떠맡아야만 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둘째아들 신두범(신채호의 삼남) 마저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유일한 희망인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병고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 노순경(盧順敬 1902 ~ 1979)
1919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시위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으로 12월 18일에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 남자현(南慈賢1872 ~ 1933)
생애
남자현은 1872년 12월 7일 아버지 남정한(南珽漢)과 어머니 진성이씨(이원준(李元俊)의 딸)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남자현의 유년시절을 알려주는 자료는 수학과정에 관련된 기록뿐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부친 남정한이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7세에 한글을, 8세에 한문을 터득하고, 12세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하고, 한시를 지었다.”는 기록이다.
남자현은 성장하여 19세가 되던 1891년 무렵,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하였다. 결혼한지 6년 후 남편 김영주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896년 7월 11일 진보군 진보면 흥구동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후 아들 김성삼의 회고가 실린 보도에서는 ‘한국 의병 소장’이었다고 실려 있다. 남자현은 남편 사후 양군 수비면 계동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1896년 12월 6일 3대 독자인 유복자 김성삼을 낳아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여 진보에서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독립 운동
1907년 가을, 열사의 선친 이신 남정한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자택을 임시 의병장소로 삼고 활약할 때 남자현은 장정소집과 정보수집 책임을 지고 적의 후방교란 등 대담무쌍한 활약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남자현은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우고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한국 내에는 두 차례 잠입했다. 1924년 참의부의 채찬, 이청산과 함께, 1926년에는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한국 내로 들어왔고, 두 번째 잠입은 사이토 마코 총독의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 이규동,의성단장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흰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국제연맹에 독립의지를 호소한 일화가 알려져 있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변장한 채 하얼빈 교외 정양가에서 정탐을 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2월 27일,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60세가 넘은 나이로 6개월동안 갖은 혹형을 받고 보름에 걸친 단식투쟁 전개로 건강을 잃었다.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곧 사망했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62년 3월 1일에 정부는 독립유공자 58명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국가보훈처 차관을 지낸 김시복은 남자현의 손자이다.
평가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린다. 남자현의 일생을 추적해 《나는 조선의 총구다》 제목의 저서를 펴낸 이상국 시인은 "왜 이토록 역사는 남자현을 지워버렸는가"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 그녀의 삶이 던져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마흔이 된 나이에 문득 '아녀자'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죽음을 불사한 투쟁에 뛰어든 것에 있다. 저 흑백사진 속의 남자현이 그토록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는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을 전하려는 그녀의 의욕이 아닐까?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과 리더들이 변절하고 말을 바꿨던가…그녀는 식민지의 여성으로서 가장 자기초월적인 생을 걸었다. | ” |
2002년 독립기념관에 이 구절을 새긴 남자현 어록비가 세워졌다.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라는 시가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도 하다.
“ | …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 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
” |
— 고정희.〈남자현의 무명지〉,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