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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의 여성 독립 운동가들에게 바치다. (5)

2022-05-11 06:56:19

21. 김일엽(1896 ~ 1971) (승려)

김일엽(金一葉 1896 ~ 1971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출생과 유년기

일엽은 1896년 6월 9일 평안북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기독교 목사인 아버지 김용겸(金用兼) 어머니 이말대(李馬大) 5남매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주(元周)였다. 5 독자였던 아버지 김용겸이 결혼한  6 만에 얻은 자식이 김일엽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이말대는 17  집안의 강요로 초혼에 상처한 22 홀아비 김용겸 억지 결혼을 하였지만  사람은  사이좋은 부부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동생이 4명이 태어났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아버지 김용겸은 개신교 목회자였다. 아버지 김용겸 향교의 향장을 지낸 성리학자였으나 뒤에 기독교 개종하고 목사가 되었다. 개화인사인 아버지 덕에 어려서 서당 다니며 남자 아이들과 함께 한학을 배웠고, 뒤에는 역시 개화하여 신문물을 접한 어머니 덕에 기독교 입교하고, 9 때 구세소학교(救世小學校)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그는 아들 못지않은 기대 속에 자랐다. 1906년 구세소학교 졸업하고 삼숭보통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삼숭보통여학교 재학 중 윤심덕 등을 만나 오래 친구로 지냈다.

 

김일엽의 회고에 의하면, 어머니는 개화한 여성으로 여자가 학교에 다니는 일이 드물었던 시절에 딸을 학교에 보냈으며 집과 땅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고자 하였다고 한다. 남의   아들 부럽지 않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만들고자 했던 어머니였다.

 

소녀 시절

의붓 동생 정일형(계모 한은총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소녀기 무렵 찾아온 집안의 가난과 고독은 그를 괴롭혔고, 가난한 살림 탓에 어머니 이말대는 생업을 위해 일을 나가고 그는 학업을 마친 뒤에는 갓난 동생들을 돌보며 지내야 했다. 살림살이는 어머니  나간 동안 동생들을 돌보며 저녁을 스스로 준비해야  만큼 넉넉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인주를 비롯해 형제들을 각별히 챙겼지만 형제들은 일찍 죽었다. 또한 그는 계모와 친모를 구분하지 않을 만큼 가족애가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1900년 결행 앓던 어머니가 남동생 출산  바로 사망했고, 남동생도 출산 3일만에 죽었다.

아버지는 안악군 살던 과부 한은총(韓恩寵) 재혼하였다. 한은총은 의병장 정원모 아들인 정기찬(鄭基贊) 아내였으나 남편과 시아버지가 연이어 죽자, 어린 아들 정신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인 김용겸과 재혼하였다. 이때 계모 한은총은 본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정일형과 정신형 두었는데, 큰아들인 정일형 두고 어린 아들 신형만 데리고 그의 집으로 왔다.

 

청소년기

1907년 12 때에는 어린 동생이 죽고, 연이어  동생이 죽었다.   그는 순한글로 된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1913년 아버지 김용겸 마저 사망하여 김일엽은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밝고 명랑하게 생활했지만,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신여자 창간호에 그의 단편논설 계시와 함께 실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였다.

나의 과거 꽃답고 기꺼움만이 천진난만하였을 나의 처녀시대?

그러나 불행히 불공평한 운명의 손에 번롱을 받아 파란많고 곡절많은 생활에 슬픔과 눈물로 지내든 처녀시대를 면하고  가정을 지내게   어느듯  겨울을 맞게 되었나이다. 파란많던 처녀시대에 비하여 지금의  생활은 실로 안온하고 따뜻한 것이외다. 그러나 꽃웃는 아침,  돋는 저녁에 마루 위에 고요히 앉아 불귀의  되신 양친을 애모하는 회포로 기꺼운 현재를 깨뜨리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없나이다. ...(중략)... 그래도 아버지는 평양성  공동묘지에 모시었으니까 물론 교육들의 돌봄이 있을 것이고 더구나  조선인의 대표적 독신자로 모든 신자의 선앙과 존경을 받으셨으니까 염려가 적지만은... 어머니는 외따른 우리 본촌에 벌판을 내려보는 한적한 산위에 외로이 묻히셨나이다.

그는 분리와 이별의 트라우마를 안고 성장해야 하는, 그렇게 양친의 품을 떠나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야 하는 처녀시대가 꽃답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처녀 시절은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곡절 많은 생활의 슬픔과 눈물로 지낸 시절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그는 땅바닥의 모래알 서너개와 말동무를 삼을 만큼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가수  배우 윤심덕, 교육인 박인덕과는 룡강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그밖에 여성주의 운동을 하면서 만난 나혜석 역시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12년 삼숭여학교 마치고, 같은 학교의 보습과(補習科) 진학했다.

 

이화학당, 이화여전 시절

12세에 동생의 죽음으로 처음  슬픔을 맛보기 시작, 이어서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고는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가정 환경은 어려웠으나, 70 고령의 외할머니의 뒷바라지로 김원주는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3년 이화학당 중등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 입학하였다.

이화학당 중등부 재학  김원주는 문학 동아리인 이문회(以文會)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화학당 중등부 2학년 재학 시절 어느 재산가 청년과 파혼하면서  상처를 받았다.  자산가는 파혼 대신  한채와 토지와  돈을 위자료로 주었다. 그러나 김원주는 그에게서 받은 돈이 많아도 자신의 상처를 메울  없음을 알고는 어떤 돈도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엔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이후 내 '창자를 위로할 만한 음식과 한서를 피할 만한 옷만 있으면 그만이다'라는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터득하였다 한다. 1914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마치고, 이화학당 대학 예과로 진학하였다. 1918년 3월 20일 이화학당 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간호원과정 강습을 수료하였다.

1918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 입학하고, 동시에 도쿄대학 영어준비학원에도 수강한 하였다. 19118년 여름에 닛신여학교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18년 여름 미국 유학파인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사로 있는 40세의 이노익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이노익은 1915년부터 연희전문에서 화학교사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이노익 다리가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  신사와 22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이노익(李魯益) 당시 이혼남이었는데,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이노익 결혼하여 빨리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훗날 회고록에서도 임노월, 백성욱 등에 대한 언급과 애정은 곳곳에서 표현하는 한편, 이노익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일본 유학 생활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하고 일본 유학하여 서구 사상을 익혔다. 1919년 남편 이노익 원조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동경(東京) 영화학교(英和學校) 유학하였고 이때 허영숙, 이광수 등과 교류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잡지 <여자계(女子界)> 주간인 신여성 나혜석 만났는데 나혜석 그보다 6 먼저 일본유학을 와서 1914 잡지 <학지광>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로 유명해졌고 1917년부터는 일본의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의 잡지 <여자계> 주간으로 있었다. 이때 김원주는 귀국  조선에서도 여성 잡지를 발행하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동경 유학 생활에서 일본 유학생이던 시인 노월 임장화를 만났다. 결국 이 때문에 이노익과 이혼을 하게 된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임장화와 한때 동거하였는데, 소설가 김동인은 이를 두고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신여자지를 직접 창간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1년과 1931년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있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문단, 매일신보 등에 칼럼과 논설을 기고하였고, 1925년부터 3년간 아현보통학교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 연애 활동을 하였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종교에 대한 회의를 해오다, 1927 불교잡지 불교의 문예란에 기고하면서 불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1930년대  서울의 선학원 등에서 참선을 하였으며, 1933년 만공선사 하에서 출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1971 입적한다. 출가시 만공선사 선수행을 위해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하라는 말을 따라, 20  집필 활동을 중단하다 1950년대 후반에 다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 발표하고, 1962 <청춘을 불사르고> 발표하며, 1964년에 마지막 저서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발표한다. 불명(佛名) 하엽(荷葉), 도호(道號) 백련도엽(白蓮道葉), 하엽당(荷葉堂),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다른 이름은 원주(源珠)이다.

 

일본 유학 중 3.1 운동 소식을 접하고 국내에 잠입, 1919년 3.1 운동  김원주는 여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 자기  지하실에서 전단을 등사, 배포하다가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영화학교 재학 , 31 운동 1 후로 이른바 문화정치 시기여서 언론 집회  출판에 대한 시책이 완화되자 다시 잡지를 발간하려 하였다.

 

만세 운동이 무위로 돌아간  냉혹한 국제정세에 실망하고 여성 운동에 돌입한다. 이후 여성 계몽, 언론 활동을 전개하며 1920년 3월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였다.  잡지는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로 꼽힌다. 이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도 친구 사이로서 공개적인 글을 주고 받는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이광수 그에게 일엽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 히구치 이치요 (樋口一葉, ひぐち いちよう, 1872 5 2 ~ 1896 11 23)처럼 한국의 이치요가 되라고, 일엽 (이치요의 한국발음)이라는 필명을 지어준다. 김일엽은 이후 이를 필명으로 그리고 출가후에는 법명으로 사용한다. 신여자 1호에서는 원주라는 본명을 사용하지만, 2호부터는 일엽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남편 이노익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화학당 시절 교수 중 그를 높이 평가한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으로 일엽은 여성종합잡지 신여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총각으로 알았던 남편 이노익 교수가 총각이 아니라는 것과 이노익 교수가 의족을 한 남자로 첫 번째 결혼 때 남편의 다리를 보고 놀란 신부가 충격받고 도망갔던 사실을 김원주는 전혀 몰랐고, 뒤늦게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22. 임봉선(林鳳善1897~1923)

일제강점기 대구 서문외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생애

1897 10 10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517에서 태어났으며, 대구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1919 3 8일 대구 서문외(西門外)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3 2 10일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 시위 준비 과정

33인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며 경상도의 연락 책임을 맡은 이갑성(李甲成) 2 28일에 독립선언서 600매를 받아, 이 중 200매를 3 1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에게 건넸다. 이용상은 3 3일에 대구 기독교계 인사인 이만집(李萬集)에게 전달하였다. 이만집은 남산당교회의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와 의논하여 서문외시장의 장날인 3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정재순(鄭在淳)·정관순(鄭光淳)과 계성학교 교사인 백남채(白南埰)·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도 가담하여 시위 준비와 시위 군중 동원에 들어갔다.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의 제휴가 이루어진 가운데,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은 3 7일 대구로 내려온 평양숭실학교 학생 김무생(金武生)과 김천교회 전도사 박제원(朴齊元)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의 만세시위에 여성들이 벌인 활약상을 전해 들었다. 두 사람은 임봉선에게 만세시위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을 찾아와 만세시위에 대해 상의하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인 허범(許範)에게서도 학생 동원을 부탁받았다. 여기에 성경학교(聖經學校)까지 가담하면서 3 8일 서문외 시장 장날에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성경학교 연합 시위가 성사되었다.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백남채가 예비검속되었다.

 

2. 3 8일 시위

3 8일 오후 3시 주동 인물인 이만집과 김태련이 장터에 나타났다. 100여 명에 달하는 계성학교 학생과 성경학교 학생 20명도 시장으로 들어왔다. 임봉선은 머리와 허리를 수건으로 졸라맨 신명학교 여학생 50명을 이끌고 나와 근처 인가에 잠복해 때를 기다렸다. 오후 3시가 되기 직전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이 행진을 막아서는 기마헌병들과 충돌하며 장터에 나타나자 계성학교 학생들이 달려들어 길을 터 주었다.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부하고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 시위대가 앞장서자 임봉선은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열에 합세하였다. 기마 헌병과 경찰이 행진을 가로막자 학생들은 저지선을 뚫고 돌진하며 비가 오는 가운데 행진을 벌였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가 달성군청 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을 걸어 놓고 기다린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자, 시위대는 더 이상 행진을 할 수 없었다. 군인·헌병·경찰은 시위대에 달려들어 시위군중을 구타하고 검거하였다. 결국 학생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 이 날 검거된 인원은 157명이었고, 이 중 6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3 8일의 대구 만세시위는 경북 지역 3·1운동의 효시로 이후 경북 지역 3·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봉선은 1919 3 8일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4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3. 정종명(鄭鍾鳴1896~?)

정종명(鄭鍾鳴1896~?)은 일제강점기 근우회 지명 집행위원,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간호사

생애 및 활동사항

전라남도 목포 출신이다. 1922 4 1일 동지 김영준(金永俊)·전유덕(田有德)·유현숙(劉賢淑)·이완구(李玩昫)  20여 명의 신여성과 함께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소외되고 가난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불우 여성에 대한 교육을 전담했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의 또 다른 경향과 분야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운동은 민족주의적 기반 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1924년 이후 사회주의적 여성운동과 연관되어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종명도 처음에는 민족주의계의 영향을 받았으나 1920년대 중반 전후 사회주의계로 전환해 갔다. 1925 5월에 동지 박원희(朴元熙)·김필애(金弼愛)·정칠성(丁七星)·허정숙(許貞淑)·주세죽(朱世竹)·오수덕(吳壽德)  20여 명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최초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서울에서 조직,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뒷날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여 항일과 계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 단체는 여성해방과 단결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정종명은 1926 12월에 조직된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에도 참여하였다. 1927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별동자매대와 같은 성격으로 5 27일 서울에서 좌우합작과 만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동지 김활란(金活蘭)·황신덕(黃信德)·최은희(崔恩喜)  50여 명의 민족·사회주의계 여성을 망라해 이 모임을 결성하였다. 정종명은 근우회의 지명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근우회를 이끌어 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8 5월 근우회창립 1주년기념식을 거행하려 할 때 일제의 탄압이 있자 허정숙과 함께 교섭위원으로 집회 허가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임시대회를 같은 해 7 14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 대교당에서 개최할 때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사회자로 이 모임을 이끌어 나갔다.

 

1929년에는 동 임시집행부 선거에서 의장으로 선임되어 부의장으로 뽑힌 김순희(金順姬)와 함께 근우회를 운영해 갔다. 1927·1928년에 동 중앙집행위원, 1930년에는 정칠성 등 5명과 함께 검사위원(檢査委員)에 선임되었다. 1929 12 20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근우회의 허정숙·유덕희(劉德姬)·박차정(朴次貞)·박호진(朴昊辰) 등과 같이 붙잡혔다.

 

이보다 앞선 1927 8 27일 근우회 전주지회에서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과 단결’이라는 제목으로 동지회창립축하기념강연을 행한 바 있다. 또 이듬 해 2월 동 경성지회(京城支會)를 설치할 때는 심은숙(沈恩淑)·권봉주(權鳳珠)·김필수(金必壽)·강석자(姜石子)·김영희(金瑛禧)  7명과 함께 서무부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이처럼 정종명은 1931년 근우회가 해소될 때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회주의계 여성을 대표하면서 여성운동에 투신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8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4.  김경희(金慶喜, 金敬喜, 金敬姬 1888~1919)

김경희(金慶喜, 金敬喜, 金敬姬 1888~1919)는 일제강점기 송죽회(松竹會) 및 평양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한자로 金敬喜 혹은 金敬姬라고도 쓴다.
김경희 사망 보도(『독립신문』 1919.10.2)

생애

188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졸업하였다.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 비밀결사인 송죽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1919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병으로 귀국, 1919 9 19일에 작고하였다.

 

활동사항

1. 송죽회 활동

김경희는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시덕(黃愛施德)과 이효덕(李孝德), 기독교인인 안정석(安貞錫) 등과 함께 박현숙(朴賢淑)·이마대(李馬大)·채광덕(蔡光德)·송복신(宋福信)  20여 명의 학생을 포섭하여 숭의여학교 기숙사에서 송죽회를 결성하고, 1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송죽회는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의 합칭으로,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라고도 하였다. 송죽회는 철저한 점조직으로 횡적인 관계는 비밀로 하고 수직적으로만 연결하여 회원 명부도 만들지 않고 이름도 변명(變名)을 사용하면서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였다. 회원들은 매주 1회 기도회 형식의 비밀회의를 열었고, 방학에는 수예와 편물 등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월 회비 30전을 납부하였다.

 

송죽회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 활동자금과 생활비를 송금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는 필요한 숙식비와 여비 등을 제공하였다. 또한 평양 시내에 있는 교회의 부인회들과 연락하여 월례회를 개최하고 전도사업과 여성계몽에 대한 방법을 토의하였다. 1916년부터는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서 장로교 계통 여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평남, 황해, 전남, 전북, 경남, 제주 등에 지역 조직을 만드는 활동을 펼쳤다.

 

2. 교사 면직과 만세시위 주도

송죽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김경희는 1916년에 학생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한 혐의로 면직되었다. 1915년에 지리를 가르치던 중 하얼빈을 가리키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사살한 곳으로, 독립하면 그 곳에 안중근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이듬해에 발각되면서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후 김경희는 송죽회 활동을 이어가면서 서문밖교회에서 권사로 활동하였다.

 

1919 2월부터는 평양 만세시위 준비에 가담하였으며, 3 1일에 기독교계 여성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에 쫓기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평양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의 권유로 귀국을 결심하고 1919 7월에 평양숭실학교 학생인 김정목(金鼎穆)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김경희는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부인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결성 준비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고문으로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9 9 19일에 작고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두 달 후인 1919 11월에 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는 1920 1 17일에 추모회를 열고 김경희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렸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5. 조마리아 (조성녀趙姓女1862~1927)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조마리아 (1862~1927)여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말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실로 조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가문 배경

조마리아(趙姓女) 1862년에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조마리아의 가문은 조선 선조 대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趙福立), 효종 대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趙灌), 현종 대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조응건(趙應建)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문과 급제가 점차 어려워지자 무과를 통해 관직 진출을 모색하였다.

 

조마리아의 고조부 조완옥(趙完玉)은 무과 급제 후 훈련원 주부(主簿, 6)로 봉직했다. 증조부 조기원(趙箕源)은 실제 업무가 없는 명예직인 통덕랑(通德郞, 5)의 품계를 받았으며, 오빠 조규증(趙珪增, 1854-1911)과 사촌 오빠 조철증(趙喆增)은 고종 대에 각각 행()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3)와 충훈부도사 겸 선략장군(4)을 지냈다.

 

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安泰勳, 1862-1905)과 혼인하였다. 안태훈의 본관은 순흥으로 본래 해주부의 향리가문이었으나 5대조 안기옥(安起玉) 이래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망 있는 무반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반가문이라는 공통점은 두 가문의 결속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마리아의 남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황해도내 양대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한편 평소부터 개신교나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1896년 가을 명동성당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1897 1월에는 형제, 아들, 조카들과 함께 빌렘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가운데 10개월 후에는 어머니, 아내, 누이동생들도 뮈텔 주교에게 영세를 받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민족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추진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대한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1905년 가을 안중근은 중국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상해로 이동했으며, 안태훈은 남은 가족과 함께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안중근의 귀국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안태훈이 지병으로 서거했으므로 조마리아는 신천군 청계동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아들들을 따라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06년 봄, 진남포로 돌아온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 2대 교장을 역임하면서 1907 8 1일에 해외로 망명할 때까지 학교의 운영을 맡았다.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미곡상을 경영하는 한편 석탄판매회사인 삼합의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일정 부분은 조부 안인수에게 물려 받은 유산을 활용했는데, 이는 부친 안태훈 사후 집안의 어른이었던 조마리아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안중근 형제들의 민족교육운동 역시 조마리아의 지원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일제의 한국침략이 극에 달한 1907 1,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을 이끈 서상돈(徐相敦)은 일본에서 빌린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나라를 잃을 것이라며 2천만 동포모두가 참여하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는 가운데 안중근은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1907 2월 평양 명륜당에서 천여 명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자신의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국채보상금으로 의연하게 하였고, 1907 5월에는 동생 정근과 공근도 형의 뜻을 받들어 삼흥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34원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안중근이 국채보상운동에 매진하고 있을 때 모친 조마리아도 이에 적극 동참했다. 1907 5월 조마리아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납부하였다. 이 같은 정황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전부터 조마리아 역시 국권 회복을 위해 미력이나마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중근 의거와 해외 망명

1907 7월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모친인 조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때 조마리아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 같은 격려를 해주었다. 조마리아의 이러한 가르침은 안중근이 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1909 10 26,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의 혁명운동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고, 더 나아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주시하던 서구 열강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일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남겨진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일제는 의거 직후부터 진남포에 소재한 안중근 가족의 거처는 물론 신천군 청계동의 안중근 친척들의 거처까지 수시로 수색하였다.

 

특히, 안중근의 동생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09 11 7일 이전에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의거 관련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한 달 넘게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뤼순의 안중근을 면회하기 위해 12 13일 인천에 당도했는데, 일제는 다시 이들을 수일간 구류하고 구타하였다.

 

조마리아는 평양으로 가 안병찬(安秉瓚)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다. 이때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헌병과 경관을 파견하여 조마리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조마리아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아들 안중근이 러일전쟁 당시 밤낮으로 국사를 근심하였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온 집안사람들에게 국채보상 의연금을 내게 하였고, 평소 가내 생활에서 매사에 정당주의를 모색했던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하였다.

 

아울러 조마리아는 1910 2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며 일제의 안중근 재판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마리아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또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서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조마리아는 안중근보다 보름 늦게 태어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1910 5월 이후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장녀이자 자신의 손녀딸 안현생을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뒤 자신은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조마리아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찬양과 주목을 받았으며, 동시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아들의 유지를 제대로 선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연해주 생활과 독립운동 지원 활동

1910 5월 조마리아는 정근 혹은 공근의 가족과 함께 안중근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했다. 조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안중근의 유족은 그 해 겨울을 크라스키노에서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연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조직된 안중근유족구제공동회가 모금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 최재형의 손을 거쳐 안중근유족에게 전해진 것이다.

 

조마리아를 비롯한 안중근유족은 안창호(安昌浩)의 도움 하에 크라스키노를 거쳐 1911 4월 동청철도 동부선상의 목릉(물린) 팔면통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서북출신들이 많이 살고, 미간지가 넓은 곳이었다. 안정근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안공근은 형의 지원으로 러시아수도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

 

1914 3월 조마리아 등 안중근유족은 목릉을 떠나 불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이때 안중근유족은 안정근의 장모인 황해도의 만석꾼 왕재덕과 독립운동가 이갑의 동생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어 정근·공근 형제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보내준 자금을 바탕으로 1919년부터 니콜리스크에서는 최초로 벼농사에 성공하여 200석 가량을 수확하였다. 안정근은 벼농사의 성공을 계기로 니콜리스크에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필요한 항구적인 재원을 마련하려 하였다.

 

정근·공근 형제가 목릉과 니콜리스크에서 일가족의 생활안정과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힘쓰는 동안 조마리아 역시 쉬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신문》1920 1 30일자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활동과 방문활동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조마리아 여사 회갑기념 사진 1922.04.08(음), 러시아 니콜리스크

조마리아는 러시아 동부를 순회할 때 깊은 밀림에서 산적이나 맹수를 만나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로운 술책과 담력으로 상황을 타개하여 동행한 남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조마리아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만주에서 이사를 가는데 마차에다 이삿짐을 잔뜩 싣고 가는데 마적들이 나타났어요. 총을 마구 쏘면서. 그러니까 같이 가던 청년들 수십 명이 전부 땅에 엎드려서 꼼짝 못해요. 이때 안중근의 어머님이 척 내려오더니 ‘이놈들아, 독립운동 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할거냐?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 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벌벌 떠는 마부를 제치고 스스로 말고삐를 확 쥐더니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고 소리를 질렀다죠. ‘에야’ 소리 지르며 마차를 몰아 결국 무사했다는 것 아닙니까?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조마리아는 이처럼 담대한 기상을 바탕으로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각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상해 생활과 임시정부 지원 활동

1919 3·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1919 4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5월 미국에서 상하이로 들어와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던 국무총리 이승만을 대신하여 임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한편,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안정근에게 임정 최대 외곽단체인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을 맡겼다.

 

안정근은 니콜리스크의 농장을 동생 공근에게 맡기고, 1919 11월경 큰아들 원생, 형 중근의 자녀인 현생과 준생, 그리고 동생의 큰아들 우생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와 임정에 가담하였다. 1920 1, 안창호와 안정근 러시아어에 능통한 안공근을 임정의 러시아 외교특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안공근은 1920 5월경 연해주의 생활기반을 사촌 안경근(安敬根)에게 부탁하고 상해로 진출하였다. 이때 안정근은 임정 북간도 특파원으로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단체를 통합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안중근유족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에 본격 가담하면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아들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다. 그녀는 1922 4월 니콜리스크에서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회갑잔치를 치렀으며, 이후 상해로 이주하여 다시금 아들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924 2월 안정근이 처자를 데리고 안창호를 따라 북경 근처 해전농장으로 이주하여 농장 개척을 통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함에 따라 조마리아는 안중근·안공근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는 자기보다 세살 위인 백범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동기간처럼 지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일찍이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태훈은 동학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관군의 추격을 받던 김구와 그 부모를 자신의 거처인 청계동으로 초빙하여 보호해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와 곽낙원이 친분을 쌓았고, 더불어 안중근유족과 김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북경의 안정근이 1925년 이후 뇌병이 발생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자, 안공근을 필두로 하는 상해의 안중근유족이 김구의 최측근에서 임정의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중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상해 거주 당시 조마리아는 동포들 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이때 이해 당사자들은 조마리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의 모친으로 평소 모범을 보인 가운데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전반에 안정근이 북만주에서, 1920년대 중반에 안공근이 상해 일원에서, 1920년대 후반에 안경근이 북만주에서 독립단체 통합운동을 벌였던 것도, 모두 안중근의 동생들이자 조마리아의 아들 내지 조카라는 후광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상해에서 조마리아는 셋째아들 공근에게 의지하였다. 동·서양 언어에 능통한 안공근은 임정을 대표하여 프랑스조계 당국과 협상을 담당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수년간 구미공사관에서 통역과 정탐원 생활을 하며 자신의 가족과 큰형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그의 수입은 11명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기에 충분치 못하였다. 1925 5월에 안공근은 가게를 세내어 아이스크림장사를 해보기도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안중근유족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안중근의 자녀들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있다가 1926년에 국립 기남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입학하였다.

조마리아는 가정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였음에도 오히려 같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 후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27 7 19일 밤 상해 거주동포 208명이 상해 삼일당(三一堂)에 모여 안창호의 사회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간단한 헌장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안창호가 주도한 경제후원회는 모든 회원들로부터 법정세금을 받고, 매년 1인당 1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아 곤경에 처한 임정의 경제적 궁핍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위원장에 안창호, 서무위원에 조상섭, 재무위원에 진희창 등이 선출되었고, 조마리아, 최승봉, 김순애(김규식 부인) 등이 위원에 선출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

조마리아는 생전 ‘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조마리아는 한국 여성독립운동가의 전범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 7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장례는 프랑스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해 교민장으로 치렀고,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시개발로 묘지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