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1 12:39:50
26. 오광심(吳光心1910~1976)
생애 및 활동사항
1931년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난징[南京]으로 이주하여 만주지역과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 부녀부에서 활약하였고, 1936년에는 난징의 대한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립될 때, 여군으로 김정숙(金貞淑)·지복영(池復榮)·조순옥(趙順玉)·신순호(申順浩)·민영주(閔泳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2년 2월 임시정부 군무부 제6징모분처의 간부로서 주임위원 김학규·김광산(金光山)·서파(徐波)·박찬열(朴燦烈)·지복영·오희영(吳姬英) 등과 함께 안후이[安徽]·허베이[河北]·산둥[山東]지역에서 초모·선전·파괴 등의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6월 제6징모분처가 통합, 광복군의 제3지대로 확충, 개편될 때 제3지대장 김학규 휘하에서 기밀실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계속 중국에 머물면서 1947년 선양[瀋陽]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는 등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귀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7. 나혜석(정월, 羅蕙錫1896~1948)
시대를 앞서 간 최초의 여성 화가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며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활동하던 여성 지식인이었다. 또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 우리 근대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업적들에도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으로 인해 근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곤 한다.
나혜석은 수원의 큰 대문 참판댁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시흥 군수, 용인 군수 등을 지낸 아버지 나기정(羅基貞) 덕에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나혜석은 오빠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렇듯 고등교육을 받은 그녀에게 당시의 남녀차별 문제는 매우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조선인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學之光)〉에 양부현부(良夫賢夫)에 대한 교육은 없으면서 현모양처(賢母良妻)에 대한 교육만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것은 둘째 오빠인 나경석이었다. 그는 오사카의 빈민굴에서 생활하며 사회봉사를 했던 혁명적 인물이었다. 나혜석은 이러한 오빠 덕분에 일본에서 당시 조선 여성이 지니기 힘든 자유와 도전정신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유학 1년 만에 그녀는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와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떴고 자의식이 강한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학지광〉의 발행인 최승구(崔承九)와 사귀는 중이었다. 최승구가 1916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끝이 났다. 나혜석은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한동안 방황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나혜석은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했다. 이 회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경희〉는 여성의 자아 발견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그러던 나혜석에게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왔다. 교토 국제대학교에 다니던 김우영이었다. 김우영은 이미 한 번 결혼했던 처지였으나 교토와 도쿄를 오가며 나혜석에게 열렬히 구애했다. 그러나 당시 그녀의 관심은 오직 일본 제국주의에 고통받고 있는 민족과 여성뿐이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나혜석은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이듬해인 1919년에는 동경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귀국한 김마리아, 황에스더와 함께 3·1운동에 관여하면서 5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그때 변호사였던 김우영이 그녀의 변론을 맡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6년 동안 계속된 김우영의 구애는 결국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나혜석은 결혼에 앞서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막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따로 살게 해 줄 것, 넷째 연인이었던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줄 것 등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김우영은 이를 수락했고, 두 사람은 1920년 4월 서울 정동 예배당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두 사람의 결혼식은 당시 대단한 이슈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최초의 서양회화 전시회를 열었다. 〈매일신보〉는 당시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성공적인 전시회였다고 평했다. 그 후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발령이 나자 나혜석은 그를 따라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부영사의 아내로서 안정된 삶에 만족하지 않고 야학을 열어 여성들을 가르치고 남몰래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3남 1녀를 낳고 기르는 와중 육아와 가사일에 지치고 예술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들을 시댁에 맡기고 3년간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러한 그들의 행보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부부의 여행 소식은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한 달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나혜석은 서양회화 작품들을 연구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이 시기 나혜석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무희(캉캉)〉, 〈파리 풍경〉, 〈나부〉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리에서 나혜석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신파의 거두인 최린(崔麟)을 만났는데, 이 만남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최린은 나혜석의 남편인 김우영과도 친분이 있었다. 김우영은 법률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아내를 부탁했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파리에서 둘은 위험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오히려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에 대한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다. 구미 일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1929년 그녀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에 관한 소문이 조선 사교계에 퍼지면서 김우영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김우영은 이혼을 원했고, 나혜석은 재산 분배를 요구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김우영은 이듬해 신정숙이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정원〉은 일본 제12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짝 개화한 예술 활동과 반비례하듯 살림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런 데에다 출품 준비 중이던 작품이 화재로 불타 버린 후에는 충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미술 개인지도를 하고 초상화를 그리는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게 되었다.
1934년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원고지 1,500장 분량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자신의 약혼과 결혼, 최린과의 만남, 이혼에 이르는 과정 등을 상세히 밝히면서, 조선 남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행동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 ……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
그러나 〈이혼고백서〉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만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조선 사교계에서는 오히려 그녀의 뻔뻔함을 욕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최린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최린이 파리에서 강제로 자신에게서 정조를 빼앗았고 김우영과 이혼하면 생활을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1만 2,000원의 위자료를 청구한 것이다. 그때 최린은 중추원 참의가 되면서 본격적인 친일(親日)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혜석은 소송을 취하하기로 하고 최린에게 수천 원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만났던 이광수, 최린, 김우영 등이 모두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단죄받았으나 그녀에게서는 친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 후 나혜석은 세상으로부터 잊혔다. 게다가 1935년 충무로에서 개최한 소품전이 완전히 실패하자 예술에 대한 의욕마저 잃게 되었다. 첫아들이 폐렴으로 열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게 했다. 김우영은 그녀가 자녀들을 만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녀는 불교로 개종한 후 수덕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 오빠 나경석의 도움으로 양로원에 몸을 의탁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나왔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자제원(侍立慈濟院, 지금의 시립남부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났다.
28. 조신성(趙信聖 1867 ~1952)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세에 남편이 죽자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요코하마여자전문학교[橫濱女子專門學校]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중 돈을 모아 평양 진명여학교 경영권을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이 일로 인해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1월 영원·덕천·맹산 지방에서 청년 다수를 모아 중국 관전현(寬甸縣)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도화선·권총·인쇄기와 활자 등을 사들여 맹산의 선유봉(仙遊峰) 호랑이굴에 감추어 놓고, 사형선고문을 인쇄해 일본 관헌과 친일파들에게 보내 심리적 위협을 하였다.
대한독립단 청년을 구하기 위해 불심검문하는 일본 순경을 껴안고 뒹굴어 공무집행방해죄로 6개월 징역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만기 출옥할 즈음 맹산 선유봉의 독립운동활약 사실이 밝혀져 또다시 복역하게 되었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우체부를 습격, 3,000원을 빼앗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 일환으로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고 1928년 평양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되자 지회장에 추대되어, 근우회의 민족주의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추진하였다. 1930년에는 근우회 전국회장에 추대되었다. 안창호(安昌浩)와 의남매를 맺었으며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도 가담하였다.
광복 후 평양에서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에 임명하여 공산주의운동에 동조하도록 하였으나 “공산당은 내 동포가 아니다.”라며 1948년 월남, 대한부인회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6·25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9. 김마리아(金 瑪利亞 1891~1944)
생애 및 활동사항
1895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집에서 여공(女功: 길쌈 등 여자들의 일)을 수업하며 한문공부에 열중하였다. 1895년에 아버지를, 1904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0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했다가 교파 관계(敎派關係)로 곧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 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 1910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黃愛施德]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세운 뒤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귀국 후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5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그 해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절대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맡기 위한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그 해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다시 붙잡혔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普門庵)에서 요양하다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6월 미국으로 가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황에스터·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였는데,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렸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