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2 10:56:39
30. 임명애(林明愛 1886 ~ 1938)
파주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을 외친 임명애(당시 32세) 지사는 구세군 사령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 살았습니다. 1919년 3월 10일과 26일, 파주 교하에서 남편 염규호와 마을 주민들과 격문을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체포된 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옥고를 치렀으며,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하였다가 아이와 함께 재 입소한 후 1921년 4월에 출소하여 교하리로 돌아왔습니다. 1938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1919년 만세 운동에 참여해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됐던 여성 독립 운동가들이 있다.
1. 유관순(1902~1920)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했다. 1918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두시위에 참가했다. 학교휴교령으로 고향인 천안에 내려가 인근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만세시위 중에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가 총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됐다.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 받았으며,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에 감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고문당했고 18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2. 동풍신(1904~1921)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화대동 장처에서 만세시위에 동참한 아버지 동민수가 총에 맞아 시위현장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아버지를 대신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로써 만세 시위가 다시 전개 되었고 그녀는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함흥지방법원 재판정에서 '만세를 부르다 총살된 아버지를 대신해 만세를 불렀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후 옥중에서 순국했다.
3.권애라(1897~1973) 개성에서 출생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 개성 충교 기독교회 안에 유치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윤희와 함께 개성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강연회를 통해 여성들의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데 주력했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 대표로 참가했다.
4.김향화(1897~?) 1897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3월 29일 수원 자혜병원 앞에서 기생 3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다 주동자로 체포되어 2개월 동안 감금됐다. 이후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 분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5.신관빈(1885~?) 황해도 봉산군에서 출생했다. 기독교 남감리파 전도부인으로 3.1운동 당시 3월 3일 경기 개성군 개성읍 만월정 등지에서 전도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 2000매를 마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다가 체포되었으며, 4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6.심영식(1887~1983)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했다. 시각장애인 전도사로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개성에서 동료 전도사들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5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7.어윤희(1180 ~ 1961)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1912년 개성의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로 활동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개성 일대에 배포하고 3월 3일에는 1,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의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에 체포된 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당시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재소자들과 함께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출옥 후 독립 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다.
8.임명애(1886~1938)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과 26일에 파주 와석에서 군중 700여 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와석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로 향하던 중 경찰에 붙잡혀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임신한 상태로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1919년 10월 출산이 임박하여 출소한 후 11월 아기와 함께 재입소하여 남은 옥고를 치렀다.
31. 황에스더(1892 ~ 1970)
황 에스더(황애덕·황애시덕·黃Esther, 1892~1970년)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다. 1892년 4월 19일 평양 의성 출생으로 부친 황석청(黃錫淸)과 모친 홍유례(洪裕禮)의 1남 6녀 중 넷째로 태어난 황애덕은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진 여성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선교활동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해외 선교사와 안창호, 조만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직접적으로 교류하면서 민족이 처한 현실과 한국여성이 해야 할 과제를 직시했다.
3.1 운동 때 많은 기독교인이 투옥되자, 오현관·오현주·이정숙 등과 함께 옥에 갇힌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애국부인회의 총무가 되어 의연금을 모집하는 한편, 전국에 지부를 확장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후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와 통합 발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총무부장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숭의여학교 비밀결사대 조직 뒤에서 조력했던 교사였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발족했다. 일본 도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해방 의지를 다지며 3.1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이자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선진기술'도입과 기술교육의 일선에 여성의 진취적인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 실천은 농촌 계몽운동과 직업기술교육으로 피어났다. 고아와 여성의 자립을 위해 시작한 기술교육은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 설립 참여로 이어졌다. "무너진 내 집과 내 강토를 내 손으로 건설하겠다."라고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자각하고 당당하게 맞섰던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이 땅의 자랑스러운 교사였다.
32. 이신애(李信愛 1891 ~ 1982)
생애 및 활동사항
1913년 결핵 발병으로 개성 호수돈여숙(好壽敦女塾) 3학년을 중퇴, 1914년 원산성경학교(元山聖經學校)를 졸업한 뒤 원산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樓氏女學校斗山里分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8년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지도하에 조국광복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루씨여학교를 사직한 뒤 상경하여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 같은해 5월 혈성부인회(血誠婦人會) 간부에 취임, 장선희(張善禧)와 더불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모금에 주력하였다.
한편, 대동단(大同團)에 입단, 『대동신보(大同申報)』 간행을 보조하였으며, 같은해 11월 단장 전협(全協)의 지시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망명을 주선하였으나, 12월 기밀이 누설되어 대동단 동지 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중 1920년 3월 유관순(柳寬順)과 3·1운동 1주년기념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방파열의 고문을 받았으며, 징역 5년 구형, 징역 4년 선고를 받고 3년 8개월 복역 끝에 출감하였다. 1945년 공주에서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를 조직하였고, 1947년부터 11년간 부녀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