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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야기(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2-

조선왕릉 분포도

서오릉(西五陵)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일대 면적 약 183ha의 숲 속에 조선의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후궁의 묘 등 8위의 유택이 묘셔져 있는 사적 제198호 지역이다.

  이곳에는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한 씨(仁粹大妃)의 능인 경릉(敬陵)을 비롯하여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昌陵), 조선 제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와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明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翼陵),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弘陵)의 다섯 릉 외에도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의 세자였던 순회세자(順懷世子 )와 세자빈 공회빈 윤 씨( 恭懷嬪 尹氏)의 무덤인 순창원(順昌園),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 이 씨의 무덤인 수경원(綬慶園 )과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 씨( 禧嬪 張氏)의 무덤인 대빈묘(大嬪墓)가 역내에 있다. 

西五陵    敬陵 追尊 德宗과 昭惠王后 韓氏 同原異岡陵
   昌陵 睿宗과 安順王后 韓氏 合葬陵
   明陵 肅宗과 繼妃 仁顯王后 閔氏, 第二  繼妃 仁元王后 金氏 同原異岡陵
   翼陵 肅宗의 元妃 仁敬王后 金氏 單陵
   弘陵 英祖의 元妃 貞聖王后 徐氏 單陵

10. 경릉(敬陵)

  경릉은 추존 덕종(1438~1457)과 소혜왕후 한 씨(1437~1504)의 동원 이강능으로 고양 동쪽 봉현간좌(高陽東蜂峴艮坐)에 있다. 덕종 경릉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세자묘로 조성되었으며, 경릉으로 봉릉된 뒤에도 석물을 추가 설치하지 않아, 이후 세자묘 조성의 기준이 되었다. 소혜왕후 경릉은 왕후릉으로 조영 되어 덕종릉과 대조를 이룬다. 

  덕종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맏아들로 세조 1년인 1455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20세에 요절하였다. 예종 사후 둘째 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 확의 딸로서 1455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71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대비가 되었으며 성품이 방정하고 지혜가 총명하여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였다. 이후 손자인 연산군이 생모 윤 씨 폐비사건에 대해 보복하려 하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승하하였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왕후의 능이 왕의 능보다 위에 있는 동원 이강형(同原異崗形) 능이다.

11. 창릉(昌陵)

  창릉은 서오릉 재실로부터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데 조선 제8대 왕 예종(1450~1469)과 계비 안순왕후 한 씨(? ~1498)의 동원이강릉이다.

  창릉지 [능전(陵殿)의 산능(山陵)조에 "삼각산에서 산줄기 한 자락이 떨어져 이마산성이 되었다. 이마산성에서 서쪽으로 나직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 전석현이요, 전석현으로부터 산세가 가파르게 일어나 앵봉이 된다. 앵봉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봉우리를 일으키니 이름하여 '소앵봉'이라 하는데 이능(창릉)의 주봉이 된다. 또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는데 모두 간방(艮方)을 들어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니 서쪽은 예종대왕의 능이요, 동쪽은 안순왕후의 능이댜"라고 하여 창릉의 주산은 소앵봉이고 소앵봉은 앵봉-삼각산의 연백에 인함을 설명하고 있음과 좌청룡으로 갈오개를, 우백호로 동산동과 원두동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서 첫째인 의경세자(德宗)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종도 병약하여 제위 1년 2개월 만에 붕어하였다. 불과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에 남이장군(南怡將軍)의 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격동을 겪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아버지 세조의 죽음을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순왕후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서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12. 명릉(明陵)

  명릉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1661~1720)과 제1계비 인현왕후(1667~1701) 민 씨, 및 제2계비 인원왕후(1687~1757) 김 씨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합장능은 고양동 봉현 경릉 동강 갑좌경향지원(高陽洞 蜂峴 敬陵 東岡 甲坐庚向之原)이고, 인원왕후의 능은 익릉 남 갑좌지강(翼陵 南 甲坐之강)에 단릉으로 조영 돼있다. 숙종은 선조(宣祖), 의인황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목릉(穆陵)의 제도처럼 조성하길 원했다. 또한 석물은 조선 왕릉 중 가장 직은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 후릉(厚陵)에 준하게 하였다.

  숙종은 1674년 현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라 왕권을 강화하고 붕당과 정쟁을 완화시키고 조선사회 전반을 재정비하였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 민유증의 딸로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승하하자 1681년에 가례를 올리고 첫 번째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 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다. 제2계비 인원왕후 김 씨는 경은부원군 김 두신의 딸로 제1계비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녀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에 승하하였다.

 

13. 익릉(翼陵)

  익릉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1661~1680)의 단릉으로 명릉 북쪽 산등성이 북북동 언덕(明陵 右北崗 乙坐辛向)에 위치한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 만기의 딸로 현종 12년(1670)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1674년에 숙종이 즉위하자 왕후에 책봉되었다. 1680년 10월 26일 창경궁 회상전에서 천연두를 않다가 2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오릉에 있는 능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14. 홍릉(弘陵)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은 영조가 그 우측에 자신의 자리로 정해 비워두었으나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지금까지 우허지(右虛地)로 남아 있다.

 

   홍릉(弘陵)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 씨(貞聖王后 徐氏1692~1757)의 단능으로

창릉 좌강 이 을좌신향(昌陵左崗 以 乙坐辛向)에 위치한다.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혼인하였고,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 없이 승하하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며 영조가 되었고 그의 비(妃)가 되었다.  왕비가 되어 43년간 궁중 생활을 하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의 신위를 모시는데 정성을 기울였고,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 씨를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에 소생 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자리 오른쪽을 자신의 신후지지로 잡아 쌍릉 자리로 조성했으나 막상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동구릉의 원릉자리가 더 길지라고 주장하여 그곳에 영조를 장례 지냄으로서 지금까지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서삼릉(西三陵)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일대 면적 약 25 ha를 차지하고 있으며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의 무덤인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조성되면서 3 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 묘, 왕자, 공주, 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 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1870(고종 7)에는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 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 씨의 회묘(懷墓)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 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엔 귀인 장 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 릉 3 원 1 묘 및 왕자, 공주, 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 54기의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西三陵    禧陵 中宗妃 章敬王后 尹氏 單陵
   孝陵 仁宗과 仁聖王后 朴氏 雙陵
   睿陵 哲宗과 哲仁王后 金氏 雙陵

 

15. 희릉(禧陵)

  희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 씨(1491~1515)의 단릉이다. 

  장경황후는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 신 씨가 중종반정의 여파로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봉해졌는데 그도 인종을 낳은 지 7일 만에 승하였다. 

  처음에는 태종의 능침인 헌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는데 중종의 사돈인 김안로가 세자인 인종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정적제거를 위한 옥사를 일으키며 벌인 일이 희릉 천장 사건이다. 즉 김안로의 정적이었던 정광필과 참여 지관과 공사담당 관리들을 대역 죄인으로 몰아 결국 신분을 모두 박탈하고 자손들 까지도 처벌받도록 하였다. 그런 이유로 중중 32년인 1537년에 지금의 위치(高陽 南 元堂里艮坐)천장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544년 중종이 자신을 희릉 옆에 안장해 달라는 유교를 함에 따라 희릉이 동원이강릉(同原異崗陵)이 되었고, 능호도 정릉(靖陵)으로 바뀌었지만, 제2계비 문정왕후가 중종을 지금의 서울 삼성동(선정릉)으로 천릉하면서 원래 능호로 돌아와 단릉인 희릉이 되었다.

 

16. 효릉(효릉)

  효릉은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 1515~1545)과 비(妃) 인성왕후 박 씨( 仁聖王后 朴氏 1514~1577)의 쌍릉으로 고양 희릉 서강 간좌곤향(高陽 西岡 艮坐坤向)에 자리한다. 효릉은 상례를 줄이고 산릉 공역을 축소하여 병풍석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국장 이후 33년 만인 1578년 10월에 대왕릉의 격식을 갖추어 병풍석을 설치하였다.

  인종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맏아들로서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30세의 나이로 왕워에 올랐다.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에 제위 기간이 가장 짧지만 성품이 어질고 학문을 사랑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했다고 전한다. 부친인 중종이 병이 나자 식음을 전폐한 채 밤낮으로 관과 띠를 풀지 않고 곁을 지켰으며 친히 약을 달여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고 한다. 중종이 승하하자 며칠간 식음을 끊고 다섯 달간 곡을 했다고 한다.

  제위 9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보령 31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자신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죽기 전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자신을 부모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 윤 씨의 능은 서삼릉 역내에 있었다. 그러나 제2계비 문정황후 윤 씨(명종의 모친)의 주장으로 아버지 중종의 능은 서울시 강남구 선정릉으로 천봉되었고 장경왕후 윤 씨의 능만 홀로 남았다.

 

17. 예릉(睿陵)

  예릉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 1831~1863)와 후(后) 철인장황후 김 씨(哲人 章皇后 金氏 1837~1878)의 쌍릉으로 철종은 희릉 우강좌오향(高陽 禧陵 右岡坐午向)이고, 철인장황후는 동원 계좌정향 (同原 癸坐丁向)이다.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릉한 옛터에 건립하면서 옛 정릉의 돌거리를 재사용하였다. 동쪽에는 장경황후의 희릉이 있고, 서쪽에 인종의 효릉이 있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철종은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 씨의 서장자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 원범이고 휘는 이 변이다.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순조의 정비였던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 씨의 명으로 궁에 들어와 덕완군에 책봉된 후 우여곡절 속에 왕이 되었다. 19세 때 왕위에 오른 후 3년간 순조의 비인 순원숙황후로부터 수렴청정을 받았고 이후 직접 정치를 하였다.

  안동김 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삼정(田政, 軍政, 還穀)이 문란한 상황이었으나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특별기구를 설립하여 이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철인 장황후 김 씨(哲人章皇后 金氏)는 영은부원군 김 문근의  딸로 185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김문근이 임금의 장인으로서 안동 김 씨 가문의 실세가 되면서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뤘다. 대규모의 민란과 동학이 파급되었으며 천주교 사상도 유입되었다. 1908년 순종황제가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였다. 

 

*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1862년(철종 13) 5월에 설치한 관서이다. 조선 후기의 이정청(釐整廳)은 원래 군제(軍制)의 문란을 정리하고 군정을 쇄신하기 위한 일종의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을 위한 제도로서 1703년(숙종 29)에 설치하여 각 군문(軍門)의 군액(軍額)을 감하고, 일영오부제(一營五部制)로 개혁되었다.

그러나 경비의 부족으로 오부제의 편성도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게 되어 여러 가지 변통절목(變通節目)을 정하였으나, 그 또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영조 때 균역법(均役法) 실시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철종 때에 들어와 오랫동안 누적된 삼정문란과 탐관오리의 착취로 삼남일대는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안핵사(按覈使)·선무사(宣撫使)·암행어사 등을 파견하여 그 수습책을 강구한 결과 안핵사 박규수(朴珪壽)의 상소로 시정책이 건의되었다.

그래서 1862년 5월 26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할 것을 결정하고, 정원용(鄭元容)·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조두순(趙斗淳) 등 원로 중신급을 총재관(總裁官)으로, 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 등 판서급을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여 그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결과, 전정(田政)·군정(軍政)은 민의에 따라 현황을 시정하고 환정(還政)은 파환귀결(罷還歸結)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 교구책으로 각 지방의 민란은 소강상태를 회복하였으나 5∼6월의 한재와 7월의 수재가 심하여 민심은 계속 흉흉하였고, 삼정이정청은 그 해 윤 8월 19일「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책으로 반포하여 철폐되고, 그 뒤의 삼정업무는 비변사에서 관장하였다.

 

파주삼릉(坡州三陵)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일대 면적 약 135 ha의 사적 제205호로 지정된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공릉(恭陵)과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순릉(順陵), 영조의 맏아들 추존(追尊)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와 그의 후(后) 효순 소황후(孝順 昭皇后) 조 씨(趙氏)의 영릉(永陵)이 모여 있는 릉군(陵群)으로 혹 능의 앞 자만 따서 공순영릉(恭順永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파주 지역에 있는 세 개의 릉이라 하여 파주삼릉(坡州三陵)이라고도 불린다.

  파주삼릉은 한북정맥 중 감악산, 파평산, 도락산, 노아산, 박달산, 신산이 봉일천으로 이어 내려온 중심에 순릉이 자리하고 입구 측 서편으로 공릉이, 좌측으로 영릉이 자리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인조와 인렬왕후 한 씨의 장릉과 영조의 사친 숙빈 최 씨와 추존 진종의 사친 정빈 이 씨의 무덤인 소령원과 수길원이 있다.

 
坡州三陵    恭陵 睿宗의 正妃 章順王后 韓氏 單陵
   順陵 成宗妃 恭惠王后 韓氏 單陵
   永陵 追尊 眞宗 昭皇帝와 孝順 昭皇后 趙氏 雙陵

   
18. 공능(恭陵)

  공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한 씨(1445~1461)의 단릉`으로 파주 남 보시동 술좌(坡州 南 普施洞 戌坐)에 자리한다. 

  장순왕후는 세조대의 공신 한명회의 셋째 딸로 세조 6년(1460년)에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12월 5일 인성대군을 낳은 후 3개월 만에 죽는다. 인성대군 또한 3세에 죽고 만다. 1462년 2월 17일 세조는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2월 25일 세자빈 묘를 단출하게 조성했다. 그 후 성종 1년(1470) 능호를 공릉이라 하고, 성종 3년(1472) 장순 빈에서 왕후로 추존되어 묘호가 원비 휘인 소덕 장순왕후 한 씨(徽仁 昭德 章順王后 韓氏)로 되었다. 

 

19. 순릉(順陵)

  순릉은 조선 9대 왕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 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의 단릉으로 파주 공릉 남강 보좌유향(坡州 恭陵 南崗 卯坐酉向)에 위치한다.

  공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 건너편에 있는 공릉(恭陵)에 잠들어 있는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와는 자매 사이이다. 세조 13년(1467)에 자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리고, 성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성종 5년(1474) 4월 15일 왕후가 된 지 5년 만에 19세의 나이로 자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 파주 삼릉 경내에 두 번째로 안장되었다. 능호는 순릉(順陵), 묘호는 공혜왕후 한 씨(恭惠王后 韓氏)이다. 공혜왕후는 왕비의 신분으로서 돌아가신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에 비해 구성물이 더 많다.

 

20. 영릉(永陵)

  영릉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 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 1719~1728)와 효순 소황후 조 씨(孝純 昭皇后 趙氏 1715~1751)의 쌍릉으로 파주 순릉 좌강 을좌신향(坡州 順陵 左崗 乙坐辛向)에 위치한다.

  진종은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정빈 이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로 숙종의 손자가 된다.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으로 봉해지고 7세 때인 1725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2년 후인 1727년에 가례를 올렸으나 10세가 되던 1728년에 죽어 효장(孝章)이란 시호를 받고 이후 효장세자로 불렸다. 그 후 영조는 이 효장세자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삼았으나 당쟁에 휩싸여 뒤주에 갇혀 죽고 그의 아들인 정조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를 이었다. 정조가 왕으로 즉위 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養父)가 되어 1908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효순 소황후(孝純 昭皇后)는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로 1727년 12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현빈에 봉해졌으나 소생 없이 37세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다가 1908년에 다시 효순 소황후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