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1894, 고종 32년)
청나라 기년을 폐지하다.
개국 504년(청나라 광서 21년, 일본 명치 28년)에 청나라 기년(紀年)을 폐지했다. 그러나 책력 첫머리의 '대조선 개국 504년 세차(歲次) 을미' 밑에는 여전히 '*시헌서(時憲書)' 세 글자를 썼다. 기년은 고쳤지만 역법은 아직 고치지 않았으므로 시헌서라고 쓴 것이다. '시헌력(時憲歷)'이라 하지 않고 '시헌서'라고 한 것도 예전대로 따른 것이다.
청나라 고종의 휘가 홍력(弘歷)이므로, 청나라 사람들은 '역' 자 대신 '서' 자를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갑오년(1894, 고종 31년) 이전의 공문서에서는 '홍'과 '역' 두 글자를 피했다. 김 홍집도(홍 자를 피하고) 김 굉집(金宏集)으로 썼다. 또 역관 중에는 현(玄)씨가 많았는데, 북경에 들어갈 때마다 ('현' 자를 피해) 원(元)씨로 쓰다가 이때부터 비로소 그 성씨를 제대로 부르게 되었다. (청나라) *성조(成祖)의 휘가 현업(玄曄)이기 때문이다.
* 시헌서 - 조선시대의 역법으로, 독일 신부 탕약망이 청나라 세조(世祖-3대 황제인 順治帝)의 명을 받아 제작한 것을 효종 4년(1653)부터 갑오개혁 때까지 사용했다. 중국과 서양의 천문학을 절충한 이 탕법(湯法)은 너무나 복잡해서 이후 매법(梅法), 대법(戴法)으로 개편되었다.
* 역법 명칭 - 예전에는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을 쓰거나 말하지 못했으므로 그 글자 사용을 피하고 음이 같거나 뜻이 같은 다른 글자로 대신했다. 그러므로 원래는 '시헌력'이라고 써야 했지만 청나라 고종(高宗-6대 황제인 건륭제)의 휘(諱)인 '역(歷)' 자 대신에 '서(書)' 자를 써서 그동안 '시헌서'라고 한 것이었다. 아직 양력을 채택하기 전이므로 '대조선 개국 504년'이라는 자주독립의 기년과 청나라 고종의 이름을 피한 구식의 '시헌서' 세 자를 섞어서 쓰게 된 것이었다.
* 성조 - 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
영은문을 헐고 삼전도비를 쓰러뜨리다.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쓰러뜨렸다. 영은문은 서울 서대문 밖 몇 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는 연조문(延詔門)이라 부르던 것을 *순치(順治) 이후에 영은문으로 개칭했다. 그것은 중국의 조사(조사)를 맞이하던 곳이었다.
비석은 한강 *삼전도에 있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정축년(1637, 인조 15년)에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오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억압하여 자신들의 전공을 기록하게 한 것이었다. 죽은 재상 이 경석(李景奭)이 그 글을 지었다. 그 내용은 천자가 십만 명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정벌했다는 것으로, 몽고 글자로 썼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읽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제 청나라와 관계가 모두 끊어지자 사대의 의절도 모두 없애 버렸다. 김 가진은 김상용의 후손으로,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이제야 족히 여러 왕대에 걸쳐 당한 굴욕을 씻고 사사로운 원수도 갚게 되었으니, 개화의 이익이 어떠한가?"
* 순치 - 청나라 3대 황제인 세조의 연호로, 1644년부터 1661년까지 18년간 사용했다.
* 삼전도 -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했다. 서울과 부리도(잠실)를 이어 주던 곳으로, 세종 21년(1439)에 만들었다. 한강에 설치한 최초의 나루다. 상업도시의 요충지로 1950년대 말까지 나룻배가 다녔지만, 잠실교를 놓으면서 주거지로 바뀌었다.
* 삼전도비의 글자 - 사적 101호인 삼전도비에는 몽고문, 만주문, 한문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 봉준과 손 화중을 처형하다.

호남의 적당 전 봉준, 손 화중, 최 경선, 성 두한(成斗漢), 김 덕명(金德明) 등을 처형했다. 그러나 참형으로 다스리지 않고 교수형으로 다스려 사람들이 제대로 처형하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했다. 전 봉준은 처형될 때 박 영효와 서 광범 두 역적을 크게 꾸짖고 죽었다. 적당의 우두머리 최 시형은 달아나 끝내 잡지 못했다.
청나라와 왜국이 마관조약을 맺다.
청나라와 왜국이 강화 조약을 맺으니, 이른바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조약)이라고 한다. 모두 네 개 조로 되어 있다.
1.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한다.
2. 대만 전체와 성경 남부, 요동 일대의 땅을 (일본에게) 할양한다.
3. 전쟁 비용으로 고평은(庫平銀) 이억 냥을 (일본에게) 배상한다.
4. 통상 조약을 개정한다.
이날은 3월 23일(甲午)이었다. 청나라 군사가 잇달아 패하자 마침내 화의 하게 되었다. 정월 중에 장 음환(長蔭桓)과 소 우렴(邵友溓)을 왜국에 보내 협상하게 했지만 왜국에서 그들의 관직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다시 이 홍장을 전권대신으로 뽑아 파견했다.
2월 23일 마관에 이르니, 왜국은 이등박문과 육오종광을 보내 상대하게 했다. 왜국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 서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배상금 삼억 냥에서 합의하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왜놈 하나가 단총으로 이 홍장을 저격해 왜국 전체가 깜짝 놀라고 이등박문 등도 부끄러워했다. 결국 이 홍장의 말에 따라 이억 냥에서 합의했다.

아라사가 *동삼성(東三省)을 욕심내어 동아시아로 통하는 길을 얻으려고 음모를 꾸민 지 이미 오래인데, 이때 왜국이 요동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했다. 이에 덕국, 법국과 연합하여 '왜국이 대만은 할양받을 수 있지만 요동은 결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청나라로 하여금 은 삼천만 냥을 외국에 주어 요동을 반환하게 하니, 왜국도 두려워 그대로 따랐다.(삼국 간섭). 이로써 (청나라가) 요동은 할양하지 않았지만 아라사가 청나라에게 덕을 끼쳤다고 자부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요구를 했으므로 그 손해가 왜국에 요동을 할양한 것보다 더 많았다. 배상액도 너무 많아 한꺼번에 상환할 수 없었으므로 그 기한을 삼십 년으로 했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크게 궁핍해져 거의나라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얼마 뒤 이 홍장의 아들 이 경방(李經方)이 대만양계사(臺灣讓界使)가 되어 대만을 왜국에 할양하려고 했으나 대만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여 일 년 남짓 혈전을 벌였다. 을미년(1895, 고종 32년) 여름까지 죽은 자가 육만여 명이나 되었지만 결국 왜국에게 편입되고 말았다.
전주에 약령을 설치하다.
전주에 약령(藥令)을 설치했다. 예부터 한약재 파는 시장을 영(令)이라 했다. 해마다 2월과 10월에 대구에서 먼저 열리고 공주에서 나중에 열려 약 십 일 간격으로 도라가며 행했는데, 벌써 수백 년이 되었다.
금상 경인년(1890, 고종 27년)과 신모년(1891, 고종 28년) 사이에 민 응식이 청주에 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하고 공주의 약령을 청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따르지 않아 끝내 무산되었다. 이때 전라감사 이 도재가 전주의 피폐한 상황을 조정에 아뢰고 공주약령을 그곳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청주로 옮기려고 할 때처럼 소요가 일어났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허하다.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했다. 옛 제도에서는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했는데, 작년에 왜승(倭僧) 좌야전려(佐野前勵:사노젠레이)가 정부에 서한을 올려 승금(僧禁)을 해제해 달라고 청하자 김 홍집이 경연에서 아뢰어 이 명을 내렸다.
학교를 세우다.
사범학교, 어학교, 법률학교, 사관학교를 세우고, 나이 어리고 총명한 자를 뽑아서 일본에 유학을 보냈다.
호열자가 유행하다.
전염병이 의주에서 시작해 십일 만에 관서와 해서 지방으로 두루 퍼지더니 서울까지 번져 사망자가 속출했다. 먹은 음식이 갑자기 체하여 속이 막히고 토사를 계속해 발병한 지 하루나 이틀 만에 죽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괴질이라고 불렀는데, 서양인들은 호열자(虎列刺:콜레라)라고 했다. 서울에 검역소를 설치하여 오이 같은 날것을 먹지 못하게 했다.
공문서에 국한문을 섞어 쓰게 하다.
옛 제도에 공문서를 보낼 때는 서울 관사(官司)에서 각 도로 보내고 감영에서 각 고을로 통보했는데, 이를 관자(關子)나 감결(甘結)이라고 했다. 또한 고을에서 감영으로 상달하고 감영에서 서울 관사로 상달하는 것을 보장(報狀)이라고 했고, 수령이 백성에게 알리는 글을 전령(傳令)이나 하첩(下帖)이라고 했다. 이때 관자와 감결을 훈령(訓令)과 지령(指令)으로 개칭하고, 보장을 질품(質稟), 보고(報告), 청원(請願)으로, 전령과 하첩을 고시(告示)로 개칭했다. 국한문을 섞어 썼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울릉도에 도감을 설치하다.
8월에 울릉도에 도감(島監)을 두었다. (울릉도는) 오랫동안 내버려진 땅으로, 근래 비로소 백성들의 입주를 허락했다. 차츰 마을을 형성하니 도감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왜놈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왕후를 시해하다.
8월 20일(戊子)에 왜국 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가 대궐에 침입했다. 왕후 민 씨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 이 경직(李畊稙)과 대대장 홍 계훈이 적에게 대항하다가 죽었다.
왕후는 오랫동안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왜국 공사) 정 상형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임금에게 정권을 돌려주도록 했다. 그러나 궁에 들어앉아 예전처럼 권세를 부리려고 했으므로 *박 영효가 미워하여 지난 5월에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신임 공사) 삼포오루는 박 영효가 왕후 시해를 노린다는 말을 익히 들었다.
그 무렵 왕후는 차츰 권세를 회복하여 밤마다 궁중에서 놀이를 벌이고 노래를 들었다. 왜국인 소촌실(小村室:고무라)에게는 영리한 딸이 있었는데, 왕후가 그녀를 사랑하여 날마다 불러들였다. 삼포오루는 부하들에게 광대들과 섞여 연극을 보게 하면서 몰래 왕후의 초상을 수십 매 그리게 하여 간직했다. 기일을 정해 거사를 감행했는데, 남의 국모를 시해했다는 죄를 뒤집어쓸까 두려워 대원군과 내통하여 음모를 꾸몄다.
그날 밤 공덕리로 가서 대원군을 가마에 실어 앞세우고 많은 왜놈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 왕후의 초상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소촌실의 딸이 그들을 인도하여 곤령전(坤寧殿)에 이르자, 궁중에 횃불이 훤히 밝아 땅강아지와 개미 새끼까지도 셀 수 있었다. 이 경직을 만나 왕비가 있는 곳을 물으니 이 경직이 모른다고 했다. 그가 곧 소매를 들어 왜놈들을 막으니, 저들이 그의 좌우 팔을 잘라 죽였다. 왕후는 (옥호루) 벽에 걸린 옷 속으로 피신했지만 왜놈들이 머리채를 잡아 끄집어냈다. 소촌실의 딸이 확인하자 왕후가 연신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왜놈들이 칼로 마구 내리쳐 그 시신을 검은 천에 싸서 녹산 아래 숲 속에서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은 주워 불을 지른 곳에 파묻었다. 왕후는 기지가 있고 영리하며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정사에 간여한 지 십 년 만에 나라를 망쳤고 끝내 천고에 없던 변을 당하고 말았다.
왜놈들이 처음 궁궐에 들어오자 홍 계훈이 큰소리로 물었다.
"칙령이 있어서 군사를 불렀는가?"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들것에 실려 돌아갔지만 며칠 만에 죽었다. 홍 계훈은 졸병에서 시작해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성격이 청렴결백하고 몸가짐을 삼가여 사대부를 대할 때도 예의에 어긋남이 업었으니, 당시 아첨하여 총애를 얻은 자들과는 달랐다. 그의 어머니도 언제나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정 병하(鄭秉夏)는 19일 밤 대궐에서 숙직했다. 왕후는 이미 바깥의 소문을 얼핏 듣고 피신하려고 생각했다. 이에 정 병하에게 물으니 그가 말해다.
"일본군이 비록 대궐에 들어오더라도 진실로 성궁(聖躬:왕후)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이 잘 알고 있으니 조금도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후는 평소 정 병하를 자기 사람이라고 여겼으므로 깊이 신뢰했다가 결국 화를 입었다.

변란이 일어나기 전날 남원 사람이 김승집(金升集)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날 밤 어떤 자가 조심스레 와서 김 승집에게 귓속말을 하고 갔다. 김 승집이 갑자기 불안해하기에 남원 사람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그 이튿날 참변이 일어 난 것이었다.
삼포오루가 우리 외부에 이렇게 조회했다.
"어제 병란이 일어났는데 외간에서는 이렇게 전해진다. '이달 8일(음력 20일) 새벽에 (조선의) 훈련대가 대궐 안으로 돌진해 원통한 일을 호소했는데, 편복을 한 일본인 몇 사람이 섞여 들어가 행패를 부렸다.' 본 공사는 이 말이 와전된 것이라 보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번거롭지만 귀 대신은 진실을 확실히 조사해서 회답해 주기 바란다."
김 윤식이 회답했다.
"우리 군대를 조사해 보니, 그날 대궐에 호소하러 갈 때 만약 시위대(侍衛隊)와 만나면 서로 알아보지 못해 충돌이 날까 봐 외국 복장을 한 것이었다. 이는 무기를 겨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사실은 일본인이 아니었음을 회답한다."
이때 훈련대를 감원하여 군인들의 마음이 불안했으므로 삼포오루가 이것을 핑계로 탈출구를 마련하려고 이렇게 선언했다.,
"훈련대와 떠돌이 왜인들이 섞여서 난당(亂黨)을 조직했다."
그러고는 자기는 모르는 일인 것처럼 했다. 김 윤식도 "섞여 들어온 자들은 사실 왜인이 아니라 훈련대가 왜인으로 가장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왜국이 두려워 그들을 비호해준 것이었다.
* 고종의 권력 회복 - 갑오개혁이 시작될 때 고종은 결재권을 대원군에게 위임했으며, 대원군이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정치가 행해졌다. 그러다가이해 윤5월 20일에 고종이 직접 결재권을 행사하겠다고 천명했다.
* 박 영효의 음모 - 음 5월 14일에 박 영효가 임금과 왕후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명성황후
1851(철종 2년) ~ 1895(고종 32년)
여덟 살의 어닌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라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했다. 흥선대원군은 지난 60여 년간 외척에 의한 국정 농단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 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곧 정치적 수완을 드러내며 왕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혀함으로써 일생을 두고 대원군과 대립했다. 사십오 세 되던 해 침략의 야욕에 불탄 일본 제국주의의 자객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1897년 명성황후로 추서되었다.
왕후를 폐했다고 종묘에 아뢰다.
왕후를 폐했다고 종묘에 고하기 위해 전 참판 서 상우에게 조서를 지어 올리라고 했으나 서 상우가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말했다.
"내 팔을 자를 수는 있어도 이 글을 지을 수는 없다."
결국 이 승오(李承五)에게 지어 바치게 했다.
왕후가 죽은 지 오 일 만에 엄씨를 입궁시키다.

예전에 상궁으로 있던 엄씨를 입궁시켰다. 황후가 있을 때는 임금이 두려워하여 감히 곁눈질도 하지 못했다. 십 년 전에 우연히 엄씨를 총애한 적이 있었는데, 왕후가 크게 화를 내며 죽이려 했다. 임금의 간곡한 만류로 엄 씨는 죽음을 면했지만 밖으로 쫓겨났다. 이제 다시 불러들이니,변란을 당한 지 겨우 닷새밖에 되지 않았다. 장안 백성들은 임금이 양심도 없다며 모두 한탄했다.
엄 씨는 생김새가 민비와 비슷하고 권모와 지략까지도 그와 닮아 입궁한 뒤로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정사에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으니, 점점 민비가 있을 때와 같아졌다.
왜국이 시해 사건의 주동자들을 다 놓아주다.
10월에 일본 정부가 공사 삼포오루를 소환했다. 왜놈들의 재판 결정서에 의하면, 삼포오루 등은 그 범행의 증거가 뚜렷하지 않아 모두 풀어 주었다. 또한 각 보고서에 대원군이 대궐에 들어가 변란을 주동하자 삼포오루는 왕명을 받고 구출하러 들어갔을 뿐 왕후 시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크게 떠들었다. 이는 모두삼포오루를 두둔하기 위한 말이었다.
왕후를 복위하고 역적들을 토벌하기로 하다.
10일에 왕후 민 씨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법부에 명해 흉악한 적당을 체포하도록 했으며, 군부대신 조 희연과 경무사 권 형진에게 책임을 물어 파면했다. 8월 이후에 외국 공사들이 반역자들을 심문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잇달아 청했다. 김 홍집 등은 왕후가 달아났다는 핑계를 대고 날짜를 끌었지만, 실상이 차츰 드러나면서 더는 가릴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여러 외국 사신들과 함께 어전에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왕후를 복위하고 역적을 토벌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조 희연 등을 파면했다. 이때 이 두황과 우 범선(禹範善) 등은 모두 달아났다. 칙명의 내용은 이러했다.
"지난번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왕후의 소재를 모르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날 승하한 증거가 뚜렷이 드러났다. 8월 20일 묘시(卯時-오전 5시에서 7시까지)에 왕후가 곤령각에서 승하했음을 중외에 반포하여 알린다."
임금이 먼저 머리를 깎고 단발령을 내리다.

11월 15일(辛亥), 임금이 먼저 단발하고 중외 신민들에게 단발령을 내렸다. 두루마기 착용을 발표한 뒤로 단발한다는 말이 차츰 퍼지더니, 10월 중에 왜국 공사가 빨리 단발하라고 임금을 위협했다. 이에 임금이 *인산(因山) 뒤로 기한을 정했다. 이때 유 길준과 조 희연 등이 왜군을 인도하여 궁성을 포위하고 주위로 대포를 묻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임금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정 병하(鄭秉夏)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가 내 머리를 깎는 게 좋겠소."
정 병하가 가위를 들고 임금의 머리를 직접 깎고 유 길준이 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단발령을 내리자 곡성이 하늘을 진동했고, 사람들이 분하고 노하여 숨이 끊어질 듯했다. 형세가 격변하자 왜놈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대기시켰고, 경무사 허 진(許璡)이 순검들을 이끌고 칼을 가지고 길을 막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았다. 민가에도 들어가 (머리 깎을 자를) 찾느라 두루 헤맸으니, 깊숙이 숨어 있는 자가 아니면 머리를 깎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나들이를 왔다가도 길에 나갔다 하면 상투를 잘렸으니, 모두 상투를 주워 주머니 속에 감추고는 통곡하며 성을 나갔다. 머리를 깎인 자는 깨끗이 깎이지 않고 상투만 잘린 채 머리카락이 드리워져 마치 장발승(長髮僧) 같았다. 오직 아낙네와 어린아이들만 깎이지 않았다.
이때 학부대신 이도재가 상소하여 *개원(改元)과 단발령을 반대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상소문의 내용은 대락 이러했다.
며칠 전 내각에서 두 안건을 제출하여 신에게도 서명을 요구했는데, 하나는 연호 개정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단발에 관한 것입니다. 신은 주상을 높이는 것은 그 이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섬기는 것이며, 백성을 교화하는 것도 그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란이 빈번하여 국세가 위태로우니 상하가 한마음으로 내실을 갖추는 데 힘써도 나라를 구하지 못할까 두려운 판입니다. 연호 개정도 헛된 이름으로 단장한 것일 뿐이니, 몇 년 뒤로 미루어 나라가 넉넉해지고 군대가 강해지면 하십시오. (우리나라가) 동양을 호랑이의 눈으로 보게 되는 날에는 (연호 개정 작업이) 전례를 살펴 글로 응답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테니, 어찌 오늘 급히 시행하십니까?

단발에 대해서도 의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단군과 기자 이래로 머리를 땋아 기르던 것이 상투를 트는 풍속으로 바뀌어 머리털 아끼는 것을 매우 큰일로 여기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게 한다면 사천 년 동안 굳은 습관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며 만백성의 흉흉한 마음을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니,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옛날에 청나라 사람들이 북경에 들어가 무력으로 명나라 의관 제도를 다 없앴는데, 그때의 분노가 삼백 년이 지나도 록 풀이지 않았습니다. *장발적들이 한번 호령하고 일어나자 사방에서 모여들어 수십 년에 걸친 싸움 끝에 겨우 평정되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 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한 움큼의 짧은 머리털을 아껴 나라의 계획을 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누차 생각해도 그 이로움이 보이지 않고 해만 보이기에 감히 거짓으로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김병시도 상소하여 한사코 간했으나 유 길준의 제지로 임금에게 올라가지 않았다.
* 인산 - 왕이나 왕비의 장례. 여기서는 명성황후의 장례를 가리킨다.
* 개원 - 임금이 즉위하면 연호를 고쳤는데, 한 임금이 여러 번 고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몇 차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연호를 빌려 썼다. 우리나라가 연호를 따로 만들어 쓴다는 것은 중국의 지배에서 독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독립할 능력도 없으면서 일본의 강요로 연호를 만들었으므로 단발령과 마찬가지로 반대가 많았다.
*장발적들 -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킨 홍 수전(洪秀全)의 무리를 가리킨다. 청조를 대신해 한인의 왕조를 세우겠다고 일어선 이들은 모두 머리를 길게 길렀다.
강제로 머리를 깎자 의병이 일어나다.
공주 관찰사 이 종원(李淙遠)이 금강을 막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머리를 억지로 깎느라 길이 거의 막혔다. 이때부터 온 나라가 들끓어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은 수령들이 의병에게 살해되다.
서 상열(徐相說)이 강원도에서 일어났고, 류 인석이 경기도에서 일어났으며, 주 용규(朱庸奎)가 충청도에서 일어났다. 권 세연(權世淵)이 안동에서 일어났고, 노 응규(盧應奎)와 정 한용(鄭漢容)이 진주에서 일어났다. 원근이 서로 호응하자 유 길준 등이 서울의 군사를 보내 치게 했다. 류 인석은 고 지평(持平) 류 중교의 종질이자 이 항로의 문인으로, 유학으로 이름났고 강개한 기질이 있었다.
낙동강 좌우의 수십 고을이 벌떼처럼 일어나 권 세연에게 호응했고,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은 수령들이 이따금 살해되었다. 대구관찰사 이 중하는 지역 백성들을 잘 어루만져 평소 인심을 얻었고 이때도 강제로 머리를 깎지 않아 백성들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는 성문을 굳게 닫고 서울 군사들이 도우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백정들에게 면천을 허락하다.
12월에 백정들을 면천하고 갓을 쓰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예전 풍속에 영남과 호남 백정들은 감히 갓을 쓰지 못하고 파랭이만 쓰고 다녔는데, 이때 내부(內府)에서 여러 차례 지시하여 평민과 같이 갓을 쓰게 했다. 이것으로 천민들의 마음을 수습하려고 한 것이었다. 백정들이 의구심을 가져 감히 갓을 쓰지 못했는데, 강제로 한 뒤에야 겨우 시행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쓰지 않는 자도 있었다.
아관파천.

*12월 27일에 임금이 경복궁을 나갔다. 이 범진과 이 윤용 등이 임금을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기고 김 홍집과 정 병하를 잡아 죽였지만, 유길준, 장 박(張博), 조 희연 등은 달아났다.
임금은 처음부터 헌정(憲政:갑오개혁)에 묶인 것을 싫어하여 이 범진, 이 윤용 등과 더불어 아라사의 힘을 빌려 김 홍집 등을 제거하려 했다. 아라사인들도 우리나라에 기반을 닦으려고 엿보다가 왜국에 선수를 빼앗기자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8월 (을미사변) 이후 이 범진 등이 아라사 공사관에 숨어들어 많은 뇌물을 주고 말했다.
"만약 정국을 뒤엎는 데 원조한다면 마땅히 온 나라가 왜국을 섬기듯 (아라사의) 명령을 듣겠다."
아라사 공사가 매우 기뻐하여 그 청을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니, 인천에서 잇달아 입성했다. 이 범진 등이 엄 상궁에게 은 사만 냥을 주면서 변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밤낮으로 임금을 두렵게 했다. 이날도 엄 상궁이 울면서 오늘 저녁에 변란이 일어날 기미가 있으니 궁 밖으로 피하자고 호소했다. 이에 임금도 놀라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범진 등이 가마 두 채를 빌려 임금과 태자를 태우고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겼다. 임금이 경무관에게 명하여 김 홍집 등의 목을 베게 했다. 이때 김 홍집은 직방(直房)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달아나라고 권하자 탄식하며 말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 영효를 본받아 역적이란 이름을 얻겠는가!"
이에 그는 정 병하와 함께 체포되었다. 정 병하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외쳤다.
"대신인 우리를 어찌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재판을 받은 뒤에 죽게 해 주시오."
그러자 김 홍집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찌 말이 많은가. 나는 마땅히 죽겠네."

두 사람이 죽은 뒤 그 시신을 저자에 늘어놓으니, 장안 사람들이 단발령을 주도한 김 홍집을 원망하며 다투어 돌과 기왓장을 던졌다.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그 살점을 베어 날로 씹는 자도 있었다. 조 희연, 유 길준, 장 박, 권 형진, 우범선, 이 두황, 이 범래(李範來), 이 진호(李珍鎬) 등은 모두 왜국 공사관에 숨어 우리 군인들이 체포할 수 없었다. 며칠간 온 장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김 홍집은 비록 왜국과 화의를 주장하여 맑은 의론(淸議:위정척사파)과 배치했지만,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계략도 무리 가운데 뛰어났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부인 *아무개 씨는 변란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고 젖먹이 어린것은 포대기 속에서 죽었으니, 사람들이 더욱 가엾게 여겼다.
김홍집은 병자년(1876, 고종 13년) 대흉년 때 흥양현감으로 있었는데, 굶주린 백성 만여 명을 살렸다. 또 그가 다니던 길가에는 예전 충신의 *정려(旌閭)가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걸었으므로 노복들이 모두 기억했다. 비록 비 오는 캄캄한 밤이라 하더라도 그냥 지나지 않았으니, 그의 몸가짐이 이처럼 단정했다.
이 범진 등이 일으킨 이번 거사는 충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아라사를 도와주고 왜국을 방해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권력 다툼일 뿐이었다. 세상에서는 김 윤식과 어 윤중을 청당(淸黨)이라 하고, 김 홍집과 유길준을 왜당(倭黨)이라 하며, 이 범진과 이 윤용을 아당(俄黨)이라 했다. 이 세 당이 교대로 집권하니 나라가 잘될 리 없다. 갑오년(1894, 고종 31년)과 을미년(1895, 고종 32년)에는 왜놈들이 국권을 장악하더니 이제는 아라사인들이 장악했다. 곧바로 임인년(1902, 고종 39년)에 이르러 (아라사와 왜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뒤로는 왜국이 다시 뜻을 펼쳤다.
* 12월 27일 - 이는 음력으로 양력으로는 1896년 2월 11일이다. 1895년 11월 17일(양력 1896년 1월 1일)부터 건양(건양)이라는 연호와 양력을 사용했는데, 황현은 이후에도 한동안 음력을 사용했다.
* 아무개 씨 - 원문에 한 글자가 빠졌다.
* 정려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어 윤중이 살해되다.
어 윤중이 용인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김 홍집이 죽는 것을 보고 자신도 같은 죄를 받을까 두려워 부인의 가마를 타고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고향인 보은으로 잠시 피신하려고 한 것이었다.
용인의 어사리(魚死里)라는 주막에 이르러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오래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던 마을 사람 정 원로(鄭元老)와 안 관현(安寬鉉)이 그가 달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망명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원수를 갚겠다며 역적으로 지목했다. 무리를 이끌고 뒤쫓아 가서 몽둥이로 마구 때려 박살을 내니, 사람들이 (어사리라는) 주막 이름이 들어맞았다고 했다. 어 윤중은 평소 점을 잘 쳤는데, 이때 동쪽으로 가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동대문으로 나갔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어윤중은 고집이 세고 끈질겨서 원한을 사더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았으며, 그르치는 일 또한 많았다. 그러나 부지런히 공무에 힘쓴 바, 어울리던 무리 가운데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이에 김 홍집과 함께 시대를 구할 인재로 칭해졌다. 그가 죽자 개화파에 사람이 없다고 모두 탄식했다.
갑오년(1894, 고종 31년) 여름에 중전이 탁지부에 새우젓을 올리라고 분부하자 어 윤중이 심부름 온 내시를 꾸짖었다.
"새우젓은 이미 많이 가져갔는데 또 달라고 한단 말이냐?"
한 번은 청나라 서태후(西太后)를 욕했다.
"늙은 계집종이 반드시 청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이는 중전을 빗대어 욕한 것이었다. 하루는 임금이 조 희연에게 노하여 군부대신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여러 각료들이 그는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했다.
"대신 하나도 물리치지 못한다면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옥새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짐은 임금이 아니니 경들이 이것을 가져가라."
대신들이 벌벌 떨며 감히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어 윤중이 천천히 일어나 물러서면서 말했다.
"성인이 말하길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써 섬긴다'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신들을 이렇게 대하시니, 장차 신들은 어떻게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바라건데 노여움을 푸시고 굽어 살피시어 공의를 펴소서."
임금이 잠자코 있었다.
법관들이 원로대신들을 마구 죽이자고 논하면서 그 죄가 교수형에 해당한다고 하자, 임금이 특지(特旨)를 내려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했다. 이는 임금에 대한 역심이 쌓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 윤식이 성 밖으로 나가 벌을 기다렸으나 임금이 문책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 윤중도 달아나지 않아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민간에서는 민 영익이 아라사로 들어가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느니 민 영준이 그랬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있었지만, 사실은 이 범진이 몰래 아라사와 연락한 것이었다. 그가 아라사가 장차 출병할 것이라고 떠들었으므로 왜군도 감히 출병하지 못했고 아라사도 관망할 뿐이었다. 이에 정사가 모두 이 범진에 의해 결정되었다.
병신년(1896, 고종 33년)
조정 서류에 양력을 쓰다.
개국 505년(건양 원년, 청나라 광서 22년, 일본 명치 29년), 임금이 아라사 공사관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시헌서를 고쳐 시헌력이라 하고, 나라의 제삿날이나 사전(祀典), 경축일 등을 위 칸에 차례로 썼다. 태양력의 일, 월, 화, 수, 목, 금, 토는 아래 칸에 차례로 썼다. 공사 간에 모두 음력에 따라 행했지만, 오직 조야에서 오가는 서류에는 양력을 썼다. 수천 년간 내려온 습관이 갑자기 바뀌기 어려웠다.
영남의 수령들이 잇달아 피살되다.
1월에 이 남규(李南珪)를 안동관찰사로 임명했다. 영남 일대는 모두 남인들이 차지했는데, 이 남규도 남인이었다. 조정에서는 그가 영남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여 관찰사의 지위를 주어 의병들을 해산하게 했다. 그러나 이 남규는 의병들을 두려워하여 안동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장계를 올려 상주군에서 다스리겠다고 했다.
이때 영남 전역의 수령들이 잇달아 피살되어 고을이 텅 비었으므로 서울에서는 그곳을 사지(死地)로 여겼다. 이에 영남 사람 중 교활한 자는 처음에 의병에 붙었다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다시 벼슬을 넘겨다보며 이따금 서울로 들어와 "만일 지방관으로 뽑아 주기만 하면 한 번 호령하여 난을 가라앉히겠다"라고 큰소리쳤다. 정부는 반신반의했지만 그들의 말대로 벼슬을 주었다. 그러므로 이해 봄, 여름 동안 영남 출신으로서 영남 수령이 된 자가 사십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고을에 부임하자마자 의병들과 몰래 통했고, 벼슬을 탐내고 녹봉을 도둑질했다.
서울에 빈대가 크게 번식하다.
을미년(1895, 고종 32년) 9월, 서울에 빈대가 비 오듯 쏟아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물의 이름에 밝지 못해 빈대(臭蟲)를 갈(蝎)이라고 잘못 불렀는데, 이 말이 굳어져 고칠 수가 없게 되었다.
예전 서울에는 빈대(蜰)가 없고 점방(店房)에만 간혹 있었는데, 생기는 대로 잡았으므로 번식하지 못했다. 이때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 땅이 빈대로 가득하니, '비(蜰)가 비 오는 듯하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집집마다 빈대가 생겼는데, 마치 샘솟는 듯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궁궐 안은 더욱 심해 임금이 잠을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식자들은 궁궐이 텅 빌 징조라고 했다.
전보국을 설치하다.
6월에 서울에 전보국을 설치하여 의주까지 통했다. 육지에서의 전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의 일은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
의병장 류 인석이 압록강을 건너가서 마을을 이루다.

7월에 동남쪽으로 출정한 장수와 병졸들이 돌아왔다. 이때 여러 도의 의병들이 흩어졌는데, 류인석은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갔다. 지나는 곳마다 노자와 양식을 요구해 잘 단속하지 못한다는 비방을 많이 들었다.
평안도 유림의 연원은 모두 이 항로에게서 시작하는데, 류인석의 충의에 감동해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요동의 산속으로 들어가 여러 곳에 큰 마을을 이루었다. 류 인석은 공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내는 법을 가르치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변방의 풍속을 교화했다. 청나라 사람들도 어린아이를 포대기에 업고서 찾아오니, 그 명성이 동방에까지 들렸다.
아라사어 통역관인 김 홍륙을 학부협판에 임명하다.
10월에 비서원승(秘書院丞) 김 홍륙(金鴻陸)을 학부협판에 임명했다. 김 홍륙은 (함경도) 단천의 민가 출신으로, 아라사어 통역관이 되어 날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임금이 아라사 공사에 의지했으므로 그의 말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라사어는 통역하기가 어려워 통역관은 오직 김 홍륙 뿐이었다. 이에 그는 제멋대로 속이고 농락했다. 아라사 공사가 아무개를 기용하려고 한다고 말하면 임금이 즉시 윤허했다. 갑자기 대신으로 뛰어오른 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임금이 경운궁으로 옮겨 가다.
12월 20일(庚辰), 임금이 아라사 공사관에서 *경운궁(慶雲宮)으로 옮겼다. 백관들의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내렸다. 경운궁은 서부 정릉방(貞陵坊)에 있는데, 선조가 계사년(1593, 선조 26년)에 피난길에서 돌아온 뒤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인목대비가 폐위된 뒤 거처한 서궁(西宮)이기도 하다.
이때 구미의 각 공사관이 모두 대. 소 정동에 있었는데, 그중 아라사 공사관이 가장 가까이 있었다. 임금은 항시 급한 변란이 일어나면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할 생각을 했다. 이에 경운궁을 수리하여 거처로 삼은 것이었다. 옛 궁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는 상소문이 수레에 넘쳤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날마다 토목 공사를 하니, 그 화려함이 두 대궐보다 더한 것 같았다.
* 경운궁 - 지금의 덕수궁.
정유년(1897, 고종 34년)
우체 규칙을 반포하다.
(건양 2년, 청나라 광서 23년, 일본 명치 30년 1월에) 우체 규칙(郵遞規則) 51조를 반포했다. 이때부터 우체국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교전소를 설치하다.
교전소(交典所)를 설치하여 대신을 총재로 임명했다. 이는 신구(新舊) 전식(典式)을 절충하여 한 책으로 만들려고 한 것으로, 남 정철의 상주에 따른 것이었다.
이 용익을 철도로 유배 보내다.
이 용익을 십 년간 철도(鐵島)로 유배 보냈다. 그는 박 인환(朴寅煥), 조 종순(趙鍾純)과 더불어 감 홍륙, 김 중환(金煥), 한 규설(韓圭卨), 이 윤용을 죽을죄로 모함했는데, 조사해 보니 사실 무근으로 드러나 도리어 그가 죄를 썼다.
홍 종철과 송 진용이 정부를 뒤집으려다 발각되다.
5월에 전 시독(侍讀) 홍 종철(洪鍾哲)과 총순(摠巡) 송 진용(宋鎭用) 등이 각국 공사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호를 광무로 고치다.
7월 16일(癸卯)에 "올해 7월을 광무(光武) 원년 8월(陽曆)로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서 광범이 미국에서 죽다.
서 광범이 미국에서 죽었는데,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미국인이 그의 유산을 팔아서 아내 김 씨에게 보냈다. 김 씨는 김 석규(金錫圭)의 누이다.
환구단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다.

환구단(圓丘壇)을 쌓고 일월, 성신, 풍운, 뇌우, 악진(岳鎭), 해독(海瀆)의 여러 신에게 합제(合祭)를 올렸다. 단은 남서(南署) 회현방 소공동에 있는데,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위치한다. 예경(禮卿) 김 규홍(金圭弘)이 의견을 내고 의정(議政) 심 순택이 정했다.
* 해좌사향 -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를 바라보는 방향.
환구단
아관파천 뒤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임금의 환궁과 자주독립을 바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겼다. 육 개월 뒤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환구단(구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져 대한제국 수립을 공포했다. 1913년에 총독부가 환구단을 헐었는데, 지금 그 터에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고 3층 팔각정의황궁우(皇穹宇)만 남아 있다.
임금이 황제로 즉위하다.
9월 17일(癸卯)에 임금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했다.
고종의 셋째 아들 이 은이 태어나다.
10월 26일(壬午) 해시(亥時:오후 9시부터 11시까지)에 황제의 셋째 아들 이 은(李垠)이 태어났다. 이에 그를 낳은 상궁 엄 씨를 귀인에 봉했다. 아이를 낳을 때 산기가 전혀 없어 울음소리가 들린 뒤에야 태어난 줄 알았다. 임금이 그를 몹시 사랑하여 항상 무릎에 앉혀 놓고 대소변을 닦아 주며 좋아했다.
무술년(1898, 고종 35년
대원군이 죽다.
(광무 2년, 청나라 광서 24년, 일본 명치 31년) 2월 2일(丙辰)에 대원군 이 하응이 죽으니, 그의 나이 79세였다. 임금이 대유재(大猷齋)에서 발상(發喪)하고 신 기선을 보내 대신 제를 올리게 했다. 복제服制)는 *자최(齊衰)를 입되 지팡이를 짚지 않고 일 년 상을 치르기로 했으며, 호상(護喪)의 예는 (12월 16일에 세상을 떠난) 부대부인과 함께 예장청(禮葬廳)에서 행하기로 했다.
이하응이 위독해지자 (맏아들) 이재면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주상을 보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렇게 서너 차례 말했지만 이 재면은 죄를 입을까 두려워 끝내 아뢰지 않았다. 잠시 뒤 (이 하응이) 다시 물었다.
"주상께서 거동하지 않으셨느냐?"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쉬고 운명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목메어 울었다.
이 하응은 십 년간 집권하면서 그 공과가 반반이었다. 갑술년(1874, 고종 11년) 이후에는 명성과 관계가 악화하여 여러 차례 위급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십수 년간 두문불출했으나 나라에 변란이 생길 때마다 군중에 의해 추대되었다. 여러 번 일어났다가도 여러 번 쓰러져 자숙할 만한데도 죽을 때까지 복수에 대한 일념이 변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대단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며 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조야에서 그를 대로(大老)로 의지했다. 그가 죽자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애도했다.
* 자최 - 굵은 삼베로 짓되 가장자리를 접어 꿰맨 상복으로 , 조선시대 오복(五服) 중의 하나였다. 부모상에는 삼 년, 조부모상에는 일 년을 입었다. 고종은 한 등급 내려 조부모상에 준해 자최에 지팡이를 짚지 않고 일년상을 지냈다.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다.
2월에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목사 이 병휘(李秉輝)를 내쫓았다. 육지에 살던 방 성칠(房星七)이라는 자가 갑오년(1894, 고종 31년)에 제주도에 들어가 요사스러운 점괘로 무리를 미혹하여 섬을 거점으로 임금이 되려고 했다. 마침 이 병휘가 탐욕스럽고 포학했으므로 방 성칠이 무리를 고무하여 그를 축출했고, 귀양살이하는 모든 관원들에게 관직을 주어 작은 조정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때 김 윤식, 이 승오, 서 주보(徐周輔), 정 병조(鄭丙朝) 등이 유배 중에 있다가 크게 놀라 명월포로 달아난 뒤 방을 붙여 이치로써 타일렀다. 백성들을 모집하여 역적을 토벌하고, 아전 장교들과 내응 하여 방 성칠을 결박해서 죽였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7월에 김 윤식 등을 육지 고을에 속한 여러 섬으로 옮겼다.
첩을 시켜 벼슬을 구하던 남 정철을 면직하다.
내부대신 남 정철을 면직했다. 그는 그 자리에 오래 있으려고 했지만, 김 홍륙을 알지 못했다. 당시 백관들의 진퇴는 반이 김홍륙에게서 나왔다. 남 정철은 자신의 첩과 김홍륙의 첩이 자매 관계를 맺도록 해 그에 기대려고 했다. 마침내 서로 왕래하니, 남 정철의 첩이 김 홍륙과 정을 통하여 김 홍륙의 첩이 질투했다.
하루는 남 정철이 잔치를 베풀어 손님들이 자리에 가득했는데, 갑자기 기생 하나가 당으로 뛰어오르며 욕을 퍼부었다.
"남 정철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김 협판(김홍륙)의 첩이다. 네 벼슬자리를 오래 누리려면 스스로 방도를 찾을 것이지 아찌 첩에게 간통질을 시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느냐? 네가 그러고도 대신이냐?"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귀를 막고 일어섰다. 남 정철이 다른 일을 핑계 대며 벼슬을 바꿔 달라고 청했는데, 세 번 상소 끝에 면직되었다.
[황성신문]을 창간하다.

[황성신문]을 처음으로 간행했다. 국한문을 섞어 시정을 논박하고 인물을 비판했다. 눈치를 보거나 꺼리는 일이 없어 사방에서 다투어 먼저 사 보았다.
대원수부를 설치하다.
4월에 대원수부(大元帥府)를 설치하고 관속을 두었다. 황제가 친히 육군과 해군을 통수했으며, 황태자가 원수(元帥)로서 모든 업무를 통솔했다. 군무와 관련한 모든 일은 원수부에서 공문을 만들어 내외로 보냈는데, 구미 각국의 예에 따른 것이다.
동학 교주 최 시형을 처형하다.
5월에 동학 괴수 최 시형을 처형했다. 최 시형은 갑오년(1894, 고종 31년)에 이천과 원주의 산곳에 숨어 있었는데, 같은 무리인 황 만기(黃萬己), 박 윤대(朴允大), 송 일회(宋一會)의 고발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그를 박은 사진이 나라 안에 퍼졌는데, 그 모습이 매우 흉하고 괴상했다. 그를 밀고한 세 사람도 형을 살았다. 전 현감 황 기인(黃夔仁)이 이렇게 상소했다.
"안팎의 신하 가운데 일찍이 최 시형과 통모한 자들이 많은데, 이는 *봉 서(封諝)가 *장 각(張角)과 내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청컨대 그 뿌리까지 조사하소서."
법부에서는 황 기인을 무고죄로 몰아서 태형(笞刑)을 내렸다.
* 봉 서와 장 각 - 장 각은 한나라 영제(靈帝) 때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우두머리이고, 봉 서는 그에 내응 하기로 약속한 환관이다.

해삼위로 유입한 백성이 육만 호가 되다.
6월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유입한 서북 지방 백성들이 약 유만 호나 되었다. 그들이 정부에 글을 올려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애 달라고 요청했다.
배화학당을 설립하다.
7월에 북촌에 있는 여학당(女學堂) 부인들이 여제자를 모집해서 입학시켰다. 공문을 만들어 돌려 남녀의 동등권을 누리자고 했다.
임금을 독살하려던 김홍륙을 처형하다.
8월에 김 홍륙을 처형했다. 김 홍륙이 귀양 가면서 아편 한 봉지를 꺼내 어선주사(御膳主事) 공 홍식(孔洪植)에게 주면서 음식을 만들 때 넣어 올리라고 했다. 공 홍식은 김 종화(金鍾和)에게 시키면서 은 천 원을 주겠다고 약조했다. 김 종화는 평소 서양 요리를 맡아서 임금에게 올리던 자다. 만수절에 아편을 소맷자락에 숨겨 주방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가배다(呵啡茶:커피)가 끓고 있어 그 속에 아편을 집어넣었다. 임금은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바로 토했으며, 태자도 맛을 보다가 어지러워 쓰러졌다. 내시와 희빈들도 맛을 본 이는 다 토하면서 복통을 일으켜 대궐 안이 온통 뒤집어졌다.
국청(鞠廳)을 설치하자 김 종화와 공 홍식은 고문을 받기도 전에 자백했다. 김 홍륙이 잡혀 오기 전 공 홍식이 증거를 없애려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다. 김 홍륙이 잡혀 오자 큰 소리로 승복했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가 많았다.
김 홍륙, 공 홍식, 김 종화는 모두 교수형에 처했고, 김 홍륙의 아내 김 씨는 마침 임신한 지 오 개월이 되었으므로 삼 년간 유배시켰다. 장안 백성들은 김 홍륙의 시신을 끌어내 살점을 베었다. 이때부터 민 영소가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반드시 음식 맛을 보아 이러한 사태를 예방했다.
독립협회장 윤 치호가 정부를 탄핵하다.

의정 심 순택이 배장(拜章)을 올리고 귀향하자 특지로 윤 용선(尹容善)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내려 심 순택을 대신하게 했다.
김 홍륙의 옥사에 대해 독립협회장 윤 치호(尹致昊) 등이 상소했다. 그 내용은 법부대신 신 기선과 재판장 이 인우(李寅祐)는 제대로 감금하지 못했고, 심 순택과 윤용선은 엄히 성토하지 못했으며, 이 재순(李載純), 심상훈, 민 영기 등은 가배다 맛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모두 한데 몰아 준엄하게 성토했다. 특히 심 순택을 우두머리로 몰아세우자 심 순택이 분노를 참지 못해 사직하고 성 밖으로 나갔다.
김 홍륙이 이미 처형당하자 중추원의장 신 기선이 옛 법에 따라 연좌해서 처형하라고 청했다. 그러자 윤 치호 등이 새로 반포한 홍범(洪範) 중에 '죄인을 연좌하지 않는다'는 조문을 들어 연이어 상소하며 공박했다. 아울러 일곱 대신의 죄상까지 공박하며 대궐에 엎드려 물러가지 않았다. 또한 찬정(贊政) 조 병식을 면전에서 꾸짖었다.
"벼슬살이 오십 년에 나라를 좀먹게 하고 백성들을 병들게 했다. 늙어서도 죽지 않으니 그만 쉴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파리처럼 윙윙대고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대정(大政)에 참여했다. 반드시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것을 봐야 시원하겠는가?"
조 병식이 부끄러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당시 장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이를 갈았지만 일어설 만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독립협회가 공의를 지킨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뒤질세라 달려왔다. 고관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비분강개하며 뜻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자 윤 치호가 일곱 대신들을 공격했고, 고 영근(高永根)도 조 병식, 민 종묵(閔種默), 유 기환(兪箕煥), 이 기동(李基東), 김 정근(金禎根)을 오흉(五兇)이라 지목하고는 여섯 차례나 상소하여 죽이라고 청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대궐을 지키며 땅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외쳤으며, 종로에 커다란 목책을 설치하고 단결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임금이 엄한 비답과 온화한 말로 타이르며 여러 차례나 해산하라고 명했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변란의 조짐이 이미 뚜렷이 나타났다.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다.
9월에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여 의장과 부의장 각 한 명과 의관 오십 명을 두었는데, 반은 정부가 추천하고 반은 독립협회가 추천했다. 임금은 *대간(臺諫) 제도를 오랫동안 폐지하여 언로가 막혔다고 생각하고 중추원으로 하여금 대간의 직분을 겸하여 시비를 논하게 했다. 그러나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결원이 생길 때마다 돈 천 민을 바치면 바로 의관 벼슬을 얻을 수 있었으니, 이로써 매관매직의 길이 더욱 넓어졌다.
* 대간 -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고 관리의 잘못을 규탄하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킨다.
독립협회 간부들을 법부에 가두다.
독립협회 두령 이 상재(李商在), 방 한덕(方漢德), 유 맹(劉猛), 정 항모(鄭恒謨), 현 제창(玄濟昶), 홍 정후(洪正厚), 이 건호(李建鎬), 변 하진(卞河璡), 조 한우(趙漢禹), 염 중모(廉仲謨), 한 치유(韓致愈), 남 궁억(南宮檍), 정 교(鄭喬), 김 두현(金斗鉉), 김 귀현(金龜鉉), 유 학주(兪鶴柱), 윤 하영(尹夏營)을 법부에 가두고 형률에 따라 태(苔) 사십 대를 판결했다.
염 중모는 정승 정 범조의 하인으로, 갑오년(1894, 고종 31년) 후에 조관의 반열에 올랐다. 한 번은 중추원에 이르러 여러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뱃속에 묵은 먼지가 가득하니 어느 때라야 개화할 수 있겠소? 꼭 개화하려고 한다면 이 염 중모가 황실과 혼인하는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신분 제도는 이미 어지러워져 명분의 한계가 없어졌다. 사대부가 예전의 하인배와 마주 앉아 대등한 예를 행해도 오히려 억눌려 뜻하지 않은 욕을 당하기도 했다.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다.
11월에 홍 종우와 길 영수(吉永洙) 등이 민회(民會)를 공격하여 해산했다. 당시 이 석렬(李錫烈)이 상소하여 박 영효 사면을 청했고, 이어 윤 시병(尹始炳)이 정부에 둘 만한 사람 열 명을 천거했는데 박 영효도 끼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협회 외원이었다.
임금이 잇달아 엄한 교지를 내리고 궐문에서 타일렀지만 무리가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홍 종우 등이 임금의 밀지를 받고 강원도와 경기도의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하여 정릉에서 새문에 이르기까지 앞뒤를 막고 공격했다 보부상들의 흰 지팡이가 비처럼 쏟아졌고, 죽은 사람도 열댓 명이나 되었다. 남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백성들은 점포를 닫았다. 군부에서 병력을 보내 정동을 지키며 노표(路票)를 조사하니, 장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고 영근은 왜국 공사관으로 피했다. 다음 날 민회를 다시 열어 홍 종우, 길 영수, 조 병식, 이 기동, 민 종묵, 민 영기 등의 집을 부수었으나 이때부터 민회는 부진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