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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識人의 눈으로 바라본 開化와 亡國의 歷史 (梅泉野錄) - 4 -

매천야록 제1권(하) 갑오년(1894, 고종 31년) 전

 

경학원과 연무공원을 설치하다.

 

무자년(1888, 고종 25년)에 경학원(경학원)과 연무공원(연무공원)을 설치하여 문무를 함께 쓰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설치하는 과정이 어지러워 실제로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연무공원 초대 교관인 다이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 양성이 좌절되자 정부는 장교를 양성하고 군대를 근대식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미국인 교관 다이 W. M. Dye를 초빙했다. 그는 을미사변 때 왕궁을 수비하는 시위대 지휘관으로도 재직했다.

 

 

[승정원일기]가 소실되다.

승정원 우사당(右史堂)에 불이 나서 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서양인들이 아기를 삶아 먹는다는 소문나다.

장안에 '서양인들이 아이를 삶아 먹는다'는 뜬소문이 돌아 민가에서 아이들을 지켜 밖으로 내보지 않았다. 거리에 자기 아들을 업고 지나가는 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저놈이 아리를 훔쳐다 팔려고 한다'라고 하자 모두 주먹으로 때리고 발고 찼다. 그 사람은 미쳐 변명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서양인들이 이 소문을 듣고 불평하자 임금이 오부(五部)에 명하여 방을 붙여 진정하게 했다. 오래 지나 그 소문은 없어졌다.

 

임금이 피난 가기 위해 춘천에 유수부를 설치하다.

춘천에 *유수부(留守府)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부사를 독련사(督練使)로 바꾸어 양 헌수를 임명했다가 얼마 뒤 독련사를 없애고 민 두호를 유수로 임명했다.

  임금이 임오년(1882, 고종 19년)과 갑신년(1884, 고종 21년) 이래 주변에서 일이 일어날 것을 언제나 두려워하여 미리부터 피난 갈 생각을 했다. 가마꾼 이십여 명을 잘 대접하여 궁성 북문에 대기시켜 놓고는 대궐 안에 전등을 밝혀 새벽까지 켜놓게 했다. 전등 하나에 하룻밤 천 민이나 들었다. 또한 안동이나 무주처럼 험한 곳에다 행궁을 세우게 하여 출행에 대비했다. 일찍이 임금이 신 정희(申正熙)에게 말했다.

  "춘천은 서울과 가깝고 험한 곳이니 내가 유수영을 설치하여 급할 때 힘을 얻고자 한다. 그대가 이곳을 맡아 달라."

  신 정희가 대답했다.

  "천자는 천하 사방을 모두 집으로 삼고, 제후는 한 나라를 집으로 삼습니다. 집안을 잘 다스려 어지럽지 않게 하고 나라를 잘 보살펴 위태하지 않게 하면 뜻밖의 환난은 없을 것입니다. 불행히 액운이 닥치더라도 서울은 종묘사직이 있는 곳이니 백관과 군사와 백성이 모여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뒤라야 신하들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다로부터의 침략이 그친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아직 편안한데, 전하께서 아침저녁으로 목숨만 구차하게 연명할 생각을 하시니 신하가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게다가 오늘과 같은 기강과 물정으로 볼 때 전하께서 한번 궁을 나가시면 무사히 춘천까지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마땅히 유수영 공사를 그만두시어 관동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힘써 원만하게 다스리신다면 추앙하는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장안의 백만 생령(生靈)이 모두 전하의 자제나 수족 같은 군사가 될 것입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라 한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신은 *금려(禁旅)에서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대궐을 드나들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녹봉만 받아먹으며 이미 물의를 일으켰는데, 하물며 이처럼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어도 감히 뜻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멍하니 있다가 나가라고 명했다. 다시 김 기석(金箕錫)을 불러들였지만 명을 받들지 않았다. 양 헌수로 바꿔 명했지만 노련한 장군을 중용하시라고 핑계를 대고는 일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민 두호에게 명하자 그가 공사를 빙자하여 사리를 채워 백성들의 논밭을 빼앗아 춘천에 커다란 농장을 마련했다. 이에 관동의 백성들이 원망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 유수부 - 조선시대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에 설치한 특수 지방 관서로, 원래 개성, 강화, 수원 광주에 두었는데 후에 춘천에도 두었다.

     * 금성탕지 - 쇠로 만든 성과 그 둘레에 파 놓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못이라는 뜻으로, 방어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성을 일컫는다. [한서漢書)의 괴통전(蒯通傳)에 나오는 말이다.

     * 금려 - 궁궐 수비대.

 

박문국을 없애다.

 

*박문국(博文局)을 없앴다. 갑신년(1884, 고종 21년)에 저동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전 교리 여 규형을 주사로 임명하여 왜놈 정상각오랑(井上覺五郞-이노우에가쿠고로)과 함께 일을 맡기면서 박문국이라 했다. 그러나 박문국을 설치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실용적인 도움이 없고 국비만 낭비했으므로 폐지했다. 시작하고 없애는 데 일정한 원칙이 없어 아이들 장난같았느니,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다. 을사년(1905, 고종 42년) 이후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이 통감이 되어 정국을 휘어잡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박문국이 그 조짐이었다." 

     * 박문국 - 신문과 잡지 편집과 인쇄를 맡던 관청. 1883년 8월에 생겼는데, 처음에는 영희전 자리에 있다가 10월에 동문학(동문학) 자리로 옮겼다.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불타자 이듬해 교동 왕실 건물로 옮겼으며, 적자가 누적되자 1888년 7월에 통리교섭통상아문에 부속되어 없어졌다.

 

정상각오랑이 사대부들의 허세를 비웃다.

정상각오랑은 얼굴이 못생겼지만 문학에 재능이 뛰어났고 우리말도 알아 시속배와 왕래했다. 한 번은 눈 내린 밤에 외무아문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여러 주사들이 자리를  함께하며 운을 내놓고 시를 지었다. 술이 취하자 정상각오랑이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 밤은 아주 즐거우니 거리낌 없이 말해도 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괜찮다"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공들은 평소 큰소리로 사대부를 자처하면서 우리를 가리켜 꼭 '왜놈, 왜놈' 하는데, 사실 왜놈은 왜놈이지요. 그러나 왜놈을 꺾어 굴복시킨 뒤라야 왜놈도 스스로 왜놈임을 인정할 것이오. 공들이 입으로 사대부라는 세 글자만 떠든다고 해서 오늘날 왜놈을 물리칠 수 있겠소? 사대부들께서는 이 왜놈을 보시오."

  그러고는 촛불 곁에 *연약(연약)을 빼어 들고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자 붉은 바퀴 모양이 생기더니 지붕 위에라도 오를 듯한 기세가 되었다. 불꽃이 늠름한데 정상각오랑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조금 뒤 연약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촛불 오른쪽 가운데 자리에 서서 웃으며 말했다.

  "제 공은 우리나라를 욕하지 마시오. 서양과 통상하던 초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칼로 찌르려 했소. 그런데 내가 검술을 이루자마자 (외국과) 강화하여 배운 것이 쓸모없어졌고. 조금 전에 보인 것이 바로 그 검술 재주요. 제 공이 입으로만 사대부라 큰소리치고 검술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왜놈이라고만 한다면 우리 왜놈이 수긍하겠습니까?"

  좌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서로 돌아보면서 "훌륭한 검술이다"고만했다.

     *연약 - 담뱃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왜놈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소문이 떠돌다.

여름에 호남 지방 백성들 사이에 뜬소문이 돌았는데, 왜놈과 서양인들이 민간에 흩어져 우물에 독약을 넣었는데, 그 물을 마신 사람은 바로 죽는다는 것이었다.

 

주미 공사 박 정양을 소환하다.

박 정양을 미국에서 소환했다. 정해년(1887, 고종 24년) 여름에 박 정양이 내무협판으로 있다가 특파전권공사로 미국에 부임하여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한 번은 미국인이 연회를 베풀고 각 나라 공사를 초청했는데, 박 정양도 참석했다가 청나라 공사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다. 청나라 사신은 "속국이 외국과 마음대로 외교하고 감히 대등하게 대하려 한다"며 본국에 호소했다. 북경에서 잇달아 질책하는 말이 전해 오자 임금은 모르는 일이라며 그 죄를 박 정양에게 돌렸고, 임무를 끝내기도 전에 돌아올 것을 명했다. 그러고는 그 일에 연루시키고 책임을 미루어 전 하묵(全夏默) 등을 귀양 보냈다. 박 정양은 일 년 남짓 할 일 없이 지냈다.

  임금은 외교 업무를 처리하면서 처음에는 독단으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하나라도 일이 어그러지면 아랫사람에게 허물을 돌렸다. 이 때문에 책임을 맡은 신하들이 머뭇거리며 힘을 다해 일하지 않았다.

 

개에게도 벼슬을 주고 대가를 요구하다.

충청도 바닷가 강 씨 집안에 늙은 과부가 살았다. 살림은 다소 넉넉했지만 자녀가 없고 복구(福狗)라는 개 한 마리와 같이 살았다. 지나가던 객이 복구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남자 이름인 줄 알고 강 복구(姜福九)라는 이름으로 감역(監役)에 억지로 뽑았다. 그 대가를 받아 가기 위해 사람이 오자 과부가 탄식하며 말했다. 

  "손님께서 복구를 보시겠소?"

  그러고는 큰소리로 부르니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왔다. 객 또한 크게 웃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충청도에 '개 감역'이 있게 되었으니, 다른 일의 형편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전주 아전들이 관노와 사령들을 멸살하다.

대원군 이 하응이 집권할 때 전주 아전들이 나쁜 버릇이 나라의 삼대 폐습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전주 감영에 있는 자들은 평소 모질고 교활하며 호탕하고 거만하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서울의 권력가들이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아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하응이 백 낙서(白樂瑞)의 패악을 양성한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때부터 교만하고 방자한 것이 습성이 되어 마침내 사대부를 욕보이고 감사를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르렀다. 반면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엄했다. 관노(官奴)나 사령(使令)은 아전과 겨우 한 단계 차이밖에 없는데도 위세로 제압하는 것이 마치 주인과 종 같았다. 이에 관노와 사령들은 두려워 떨며 오직 복종했는데, 속으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기축년(1889, 고종 26년) 정월에 아전의 자식으로 통인(通引) 노릇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총각머리를 한 어린놈이 한 늙은 관노에게 몸가짐과 행동이 조심성 없다며 꾸짖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로 차 넘어뜨렸다. 이에 관노와 사령들이 더는 모욕을 참을 수 없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그 통인의 집에 불을 질렀다. 아전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감사에게 무기를 꺼내 관노와 사령들을 때려잡자고 청했다. 

  그때 이 헌직(李憲稙)이 감사로 있었는데, 나약하여 이를 제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권한이 아전들의 손에 있어 어찌할 수도 없었다. 아전들이 저마다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무기고를 부수고 군기를 꺼내 대적했다. 반석리(盤石里)에 불을 질렀는데, 남천교 남쪽에 있는 이 마을은 약 오백 호쯤 되며 관노와 사령들이 살고 있었다. 횃불 하나로 잿더미를 만드니, 죽은 자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지만 아전들이 이 헌직을 위협하여 관노와 사령들이 난을 꾸몄다고 속여 조정에 보고하게 했다. 조정에서 그 실상을 알았으므로  의당 그 죄를 아전들에게 돌려야 했음에도 아전의 무리가 변을 일의킬까 두려워했다. 또 권력자들이 비호해 주어 서둘러 마무리 짓고 주동자 몇 명만 유배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난은 차츰 진정되었지만 아전들은 관노와 사령들이 없으면 관청 일을 볼 수가 없다고 의논하고는 그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각기 옛 자리로 돌아갔다. 흩어져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던 관노와 사령들은 돌아와서 울분을 참아가며 때를 기다렸다.

  을미년(1895, 고종 32년) 겨울에 이르러 날을 잡아 거사하기로 했는데, 감사를 받들어 먼저 일으켜 그들을 제압한 뒤 아전의 집안을 몰살하기로 했다. 그러나 모의가 누설되어 아전들이 가족을 이끌고 모두 달아났다. 이에 죽임을 당한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전들도 결사대가 갑자기 일어날까 두려워 예전부터 있던 관노와 사령들을 모두 쫓아내고 다른 사람을 고용해 대신하게 했다. 진위대(鎭衛隊)를 창설하자 아전들은 혹 쫓겨난 관노와 사령들이 응모할까 두려워하여 자기 자식들을 내보내 부대를 충원했다. 관노와 사령들은 끝내 원수를 갚지 못했다.

 

조 병식이 자기의 비리를 밝힌 아전 전 제홍을 때려죽이다.

 

조 병식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천안군의 아전 전 제홍(全濟弘)을 불러다가 심복으로 삼았다. 전 제홍은 조 병식의 크고 작은 부정에 모두 간여했다. 이 건창이 어사가 되어 사실을 조사하려고 왔는데, 조 병식의 측근이던 모든 아전들이 달아나 버려 조사할 방도가 없었다. 이 건창이 꾀를 내어 전 제홍을 불러다 놓고 살려 주겠다 약조하고는 착취한 내역을 적으라 했다. 전 제홍이 사흘 동안이나 엎드려 울더니 말했다. 

  "저는 죽일 놈입니다. 그러나 오늘 살려주시겠다는 은혜를 입었으니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구슬을 꿰는 것처럼 낱낱이 조목을 대니, (착복한 돈이) 약 십만 냥이나 되었다. 조정에 장계가 올라가자 조 병식은 그러한 자료가 전 제홍에게서 나온 것임을 탐지하고 늘 이를 갈며 욕했다. 

  "내가 전 제홍을 죽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몇 년 뒤 조 병식이 형조판서가 되어 개좌(開坐) 하려고 관아로 나아가는 길에 전 제홍을 봤다. 이에 종자에게 소리쳐 그를 잡아들이도록 했다. 형조로 들어와 한마디도 묻지 않고 큰 매로 다스려 전 제홍을 죽이니, 조 병식의 음험하고 표독한 성질이 이와 같았다.

 

벼슬과 시호가 저승에까지 흘러넘치다.

이 봉구는 갑신년(1884, 고종 21년)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몇 년 뒤에 죽었는데, 특별히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태인에 유 사현(劉士賢)이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죽은 뒤 그 집에서 수십만 냥을 관가에 바치며 유 사현이 학식과 덕행이 있었다고 속였다. 그리하여 판서와 제학 벼슬을 받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명기(明器)가 혼잡해져 저승에까지 흘러넘치니, 끝까지 간 것과 다름없다.

     * 명기 - 장례 때 무덤 속에 넣는 부장품. 여기에서는 벼슬이나 시호가 부장품으로 추락했다는 뜻으로 썼다.

 

중국인 죄수를 살려 준 이 덕유가 나라 밖에 큰 농장을 갖다. 

이 덕유(李德裕)는 서울의 중인이다.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민 영준과 비교해도 더 앞선다. 젊었을 때 역관으로 북경에 들어가다가 요동을 지날 때 한 죄수를 보았다. 돈 천금만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하기에 이 덕유가 전대를 풀어 그에게 주었다. 수십 년 뒤 그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휘장을 쳐서 잔치를 베풀어 놓고 조선인 이 아무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죽었을 죄인입니다. 공의 돈을 갚으려 했지만 공이 오지 않아서 그 돈을 불려 밭을 사고 큰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해마다 들어오는 소작료만 해도 보리와 기장이 만석이나 됩니다. 이 장부를 보십시오."

  그는 품속에서 장부를 꺼내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이 그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한 데다 백성들이 그 사이에 살아서 부자라고 해봤자 소소할 뿐이다. 다른 나라에 농장을 가진 것은 이 덕유가 처음으로, 그의 집에는 *마제은(馬蹄銀)이 여러 창고에 가득했다. 그의 이름이 이웃 나라에까지 알려지자 임금이 중국 지방에 재물을 쓸 일이 있으면 이 덕유에게 어음을 받아 보냈다. 청나라 장사꾼들이 우리 임금의 옥새보다 이 덕유의 어음을 더 믿은 것이었다. 우리말에 *별(䇷)이란 어음을 가리킨다.

     * 마제은 - 청나라 때 쓰던 말발굽 모양의 은화.

     * 별 - 씨를 모종 내는 것인데, 여기서는 재물을 옮겨 주는 증서를 뜻한다.

 

임금도 이 덕유에게 돈을 빌리다.

 

이 덕유는 성품이 지극히 검소하여 나갈 때도 수레나 말을 타지 않고 개만 한 작은 나귀를 타거나 걸어 다녔다. 겨울철에는 무명으로 만든 갖옷을 입었으며, 한 끼 찬값은 백 전으로 한정했다. 그는 벼슬해서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재산 모으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임금은 돈이 궁색할 때마다 이 덕유를 불러 *차비문(차비문)에서 만났다. 민 영환은 문을 닫아걸고 찾아오는 손님을 거절했지만 *이 음죽(이음죽)이 왔다고 하면 들어오게 했다. 일찍이 이 덕유는 음죽현감으로 임명되었는데, 몇 달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 차비문 - 궁궐 정전의 앞문과 종묘의 상문, 하문, 앞전, 뒷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이음죽 - 양반들 사이에서는 벼슬한 지방의 이름이나 그 벼슬을 성씨에다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이 덕유가 음죽 현감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임금이 벼슬을 팔면서 배 동익의 어음인지 확인하다.

서울의 시전 상인 가운데 배 동익(裵東益)이란 자가 있었는데, 돈줄이 매우 확실했다. 관리를 새로 임명할 때마다 벼슬을 사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어음을 바쳤는데, 임금은 반드시 "이 어음이 배 동익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고 물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큰 부자로 이름난 자들을 임금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 영석이 놋그릇을 바치려고 징과 꽹과리를 다 사들이다.

전라도 부자 가운데 오 영석(吳榮錫)이란 자가 있었는데, 한 해에 만석이나 거둬들인다고 했다. 민 영환이 그를 끌어들여 문하에 드나들게 했다. 서울 사람들이 그를 오금(烏金)이라고 불렀는데, 오(吳)와 오(烏)가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는 음직으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가가 임피현령으로 있을 때 임금이 *내하(內下)로 쓸 놋쇠 오 합 오백 벌을 *별복정(別卜定)으로 올리라고 했다. 그가 갑자기 마련할 수가 없어서 민간에서 갑절로 돈을 주고 사들였는데, 여러 고을의 징과 꽹과리가 다 없어졌다. 농촌에서는 여름처레 농부들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김매기를 돕는데, 이를 농악이라 한다. 징이나 꽹과리는 놋쇠가 아니면 만들 수가 없다.

     * 내하 -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려주는 것으로 내사(內賜)라고도 한다.

     * 별복정 - 지방마다 특산물을 규정에 따라 바치도록 정해 놓은 것 외에 서울의 각 관아와 각 도, 각 군에 따로 바치도록 한 것을 일컫는다.

 

왕후가 달밤에 외설스러운 잡가를 즐기다.

승지 이 최승(李最承)은 월사(月沙) *이 정구(李廷龜)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가주서(假注書)로 대궐에서 일했다.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 번은 밤이 깊었는데 노래와 연주 소리가 들려 *액례(掖隷)를 따라가다 소리가 나는 한 전각에 이르렀소. 낮같이 밝았는데 임금과 중전이 평복을 입고 떨어져 앉았으며, 섬돌 아래에는 머릿수건을 두르고 소매를 걷어붙인 수십 명이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고 있었다오. 잡가를 부르는 자도 있었오. '오다가다 만난 님과 죽으면 죽었지 헤어질 수가 없네.' 외설스럽고 비루해서 듣는 자들이 얼굴을 가렸지만 명성왕후는 넓적다리를 치면서 '좋지, 좋아' 하며 좋아했소."

     * 이 정구 - 1564(명종 19년)~1535(인조 13년) 신 흠(申欽), 장 유(張維), 이 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월사집(月沙集)]이 있다.

     * 가주서 - 주서는 승정원의 정 7품 벼슬로, 임금 곁에서 정사를 기록했다. 두 사람이던 주서가 유고하면 임시로 가주서를 임명했다.

     * 액례 - 대궐 안을 액정이라 하고 대궐 안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관청을 액정서라고 하는데, 액례란 액정서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를 일컫는다.

 

세자가 고자다.

세자에게는 음위(陰痿) 증세가 있었다. 타고난 고자라고도 하고, 어린 시절에 궁녀가 그 생식기를 빨아 한번 나온 뒤로 수습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도 했다. 나이가 차츰 많아지는데도 생식기가 오이처럼 늘어져 발기될 때가 없었고, 아무 때나 소변이 저절로 나왔다. 언제나 자리를 적셔 하루에 한 번은 요를 갈았고, 바지도 수 번 갈아입혔다.

  혼례를 치른 지 몇 년이 지나도 부부 관계를 갖지 못해 명성이 한탄하며 몹시 조급해했다. 한 번은 궁비를 시켜 세자에게 부부 관계를 가르치게 했다. 명성이 문밖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잘되느냐?"

  궁비가 대답했다.

  "잘 안 됩니다."

  명성이 몇 차례나 한숨을 쉬다가 가슴을 치며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를 완화군을 죽인 업보라고 했다.

 

남 공철과 서 승보 같은 재상도 고자다.

서울에는 예로부터 고자가 많았다. 근세의 재상 남 공철(남공철)과 서 승보(徐承輔) 같은 이들도 그중 잘 알려진 사람이다. 남 공철은 얼굴도 잘생겼고 이십 대에 예문관에 드나들어 길 가는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관(仙官)' 같다고 했다. 한 번은 그가 입궐하는데 부인이 조복을 펼쳐 입혀주며 등 뒤에서 그의 어깨를 깨물며 대성통곡했다. 그의 얼굴은 잘생겼으나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 승보의 부인은 임종할 때 서 승보를 불러 영결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깨끗한 몸으로 갑니다."

 

왕후가 의화군에게서 양자 얻기를 바라다.

세자가 이미 양도(陽道)를 펴지 못해 치료할 수 없게 되자 명성은 대를 이을 희망이 없게 된 것을 한탄하고, 왕자 이 강(李堈)이 아들 낳기를 기다려 세자의 뒤를 잇게 하려고 했다. 이에 이 강을 조금도 박대하지 않았으니, 완화군을 대하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신묘년(1891, 고종 28년) 겨울에 임금에게 일러 이 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했다.

 

왕후가 의화군을 낳은 장 씨를 불구로 만들다.

의화군 이 강은 상궁 장 씨의 소생이다. 이 강이 태어나자 명성은 성을 내며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 씨의 처소로 가서 창문에 칼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칼을 받으라."

  장 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한 손으로 창문을 밀치고 나가 엎드려 살려 달라고 빌었다. 쪽진 머리가 구름처럼 흐트러져 얼굴을 가렸다. 명성이 가엾게 여겨 칼을 던지고 웃으며 말했다.

  "대전이 사랑할 만하구나. 지금 죽일 수야 없지. 그러나 궁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러고는 힘센 사내를 불러다 결박하고 음부의 양쪽 살을 도려낸 뒤 떠메어 밖으로 내보냈다. 장 씨는 그의 형제들에게 의지해 십여 년을 살았지만 상처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왕후가 황주 기생을 질투하여 죽이라고 하다.

진연(進宴) 때 궁에 들어온 황주 기생이 있었는데, 임금이 그 기생을 좋아해 몰래 불러들여 총애했다. 그리고 정 낙용(鄭洛鎔)에게 명하여 금가락지 한 쌍과 *세장전(洗粧錢) 삼천 냥을 주었다. 왕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포도청에게 일러 그 기생을 죽이라고 했다. 왕후가 정 낙용도 몹시 책망하니, 장차 심상치 않은 처분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정 낙용이 온갖 방법으로 용서를 구하여 드디어 일이 무마되었다.

     * 세장전 - 화장을 지우는데 드는 돈이란 뜻이다.

 

임금이 바른말하는 재상들을 싫어하다.

김 유연(金有淵)을 재상으로 임명할 때 임금이 사사롭게 말했다.

  "김 유연은 대신의 품격을 갖추었지만 고집이 세어 부리기가 힘들다."

  얼마 뒤 김 유연을 파면했다. 조 병세(趙秉世)가 우의정이 되어 처음으로 *경연(經筵)에 나오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직하여 뜻을 돌리기 어렵다."

  그가 재상 자리에 있을 때 여러 번 바른말을 했는데, 임금이 싫어하여 그를 파직하고 다시는 등용하지 않았다. 심 순택만은 여러 번 쫓겨났다가도 다시 복직되었으니, 임금의 은총이 시들지 않았다. 임금이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없지 않았으나 아첨을 좋아하는 게 흠이었다.

 

이 규원이 청렴하게 고을을 다스리다.

이 규원(李圭遠)은 이 건창의 친척으로, 그의 집안은 몇 대째 무(武)를 업으로 했지만 두드러진 자가 없었다. 이 규원은 재주와 슬기가 있고 청렴결백하다고 이름나 당하관으로 일곱 고을의 부사를 거쳤다. 벼슬을 마치고 돌아온 날은 으레 저녁부터 꾸어 먹었고, 정해진 집이 없어 가는 곳마다 세 들어 살며 옮겨 다녔다.

  민 태호가 경기감사로 있을 때 이규원이 통진부사로 있었는데, 민 태호가 그를 알아보고 힘껏 조정에 천거했다. 이 규원은 몇 년간 금위장(禁衛將)과 해방사(海防使)를 역임하면서 무예로 이름을 빛냈다.

 

운현궁에 도둑이 들고 폭약이 터지다.

임진년(1892, 고종 29년) 봄에 운현궁에 도둑이 들었지만 잡지 못했다. 대원군이 쫓겨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운현궁에 드나드는 자들이 번번이 큰 화를 입었으므로 손님이 아주 끊어져 문밖에는 잡초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명성왕후는 끝가지 그를 꺼려해 몰래 해를 끼치려고 음모를 꾸몄다. 이런 일은 아주 비밀스러워 외간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하루는 밤에 대원군이 심사가 뒤숭숭하여 혼자 자리에 들기가 싫어 베개와 이부자리를 가져다 놓고 자는 모양을 해놓고는 밀실로 옮겨 엿보았다. 조금 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서 가서 보니 베개에 비수가 꽂혀 있었다. 하인의 낯빛이 달라지니 대원군이 말했다. 

  "함부로 말을 퍼뜨리지 말라. 이는 분명 도깨비장난이다."

  이튿날 부대부인 민 씨가 크게 놀라 곧바로 임금 앞에 나아가 울면서 호소했지만, 임금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민 씨가 울면서 나오자 장안 백성들이 이 기를 하면서 "춥지도 않은데 떨린다"라고 했다.

  그 뒤 또 어느 날 밤에 대원군이 심신이 편치 않아 다시 지난번과 같은 생각이 들어 탄식했다. 

  "괴상한 일이다. 이러다간 내가 끝내 죽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고는 곧 일어나 마루 앞을 산책하는데 갑자기 방 안이 펑하면서 무너져 내리고 불덩어리가 떨어지며 들보를 쳤다. 화약이 잇달아 폭발한 것이었다. 대원군이 급히 명해 작은 사랑채와 산정(山亭)의 아궁이를 점검하게 했다. 모두 한 말 남짓 화약덩이가 나왔는데, 도화선이 미쳐 다 타지 않았다. 작은 사랑채에는 아들 이 재면이 거쳐했고, 산정에는 손자 이 준용(李埈鎔)이 있었다. 이튿날 대원군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할아비, 아들, 손자가 모두 동갑으로 금년생이다."

  삼대가 모두 이날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었다.

 

정 수동의 술주정을 김 병덕이 다 받아 주다.

정 지윤(鄭芝潤)은 호가 하원(夏園)이고, 자가 *수동(壽銅)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했는데, 그는 그 업을 버리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다. 재주가 높고 학식이 넓었으며 시에 더욱 뛰어났다. 술에 취하면 노래 부르고 세상을 꾸짖으며 늘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의 재주를 아끼는 사대부들이 이따금 그를 불러다 대접했지만 오래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오직 김 병덕만 그를 부지런히 대접하며 술주정을 편히 받아 주었는데, 조금도 기색을 보이지 않고 수십 년을 하루같이 대했다. 김 병덕은 문학이 짧았음에도 정 수동을 그와 같이 사랑했으니, 천성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만하다.

  어느 날 저녁에 정 수동이 뒷간에 가서 돌아오지 않아 촛불을 들고 찾아가 보니 화원의 돌 위에 걸터앉은 채 죽어 있었다. 김 병덕은 돈을 대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는 천성이 근실하여 법도를 벗어난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은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처럼 두터운 풍류를 지니기도 했다.

     * 정 수동 - 정 지윤의 자는 경안(경안)이다. 태어날 때 손바닥에 수(壽)자 모양의 문신이 있어 수동(壽銅)을 별호로 사용했는데, 나중에는 정 수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동학교도들이 최 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다.

처음에 최 복술(崔福述=崔濟愚)이 처형당하자 그의 조카 최 시형(崔時亨)이 보은의 어느 산속에 숨어서 요술을 몰래 전파했는데, 이를 동학(東學)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뜬소문을 퍼뜨렸다. 

  "세상에 큰 환난이 올 텐데 동학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진인(眞人)이 나타나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장수와 재상이 새 임금을 도울지니, 모두 동학교인 가운데서 나온다."

  이렇게 백성들을 선동하고 유인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학정에 괴로워하다가 기꺼이 모여들었다. 그 세력이 충청도와 전라도에 가득했다. 

  경인년(1890, 고조 27년)과 신묘년(1891, 고종 28년) 이후로는 여러 차례 통문을 돌려 모였는데, 십 명이고 백 명이고 떼를 지어 제멋대로 돌아다녀도 지방 관리들은 무사한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함부로 금하지 못했다. 이에 저들은 조정이 어찌 우리를 업신여기겠느냐고 생각하여 2월 중에 수천 명이 떼를 지어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했다.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이 먼저 성토했고, (좌포장) 신 정희는 모두 죽여서 난리의 싹을 꺾어 버리자고 주장했지만, 임금이 듣지 않고 그들을 타일러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여론이 몹시 나빴으므로 *권 봉희(權鳳熙)가 상소하여 언급했다(동학의 전말에 대해서는 [동비기략(東匪紀略)]에서 자세히 기록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언급한다. - 원주-

     * 권봉희 - 전 승지인 그는 "동학과 서학을 엄금하고 유학을 진작하여 사회 기풍을 바로잡고 병든 나라를 일으키자"는 내용으로 상소했다. 이 상소문이 본래 이 앞에 실려 있지만 너무 길어서 싣지 않았다.

 

어 윤중이 동학교도를 편들다.

동학 적당( 匪徒)들이 드디어 해산하고 홍 계훈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기색이 펴져서 서로 축하했다. 그러나 숨어 있는 근심은 이때부터 커져 갔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사대부들은 모두 어 윤중이 실책을 저질렀다고 했다. 어 윤중은 보은에서부터 여러 고을을 순회했다. 처음에 이 도재의 형 아무개가 충청도에 살면서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토민들에게 살해당했는데, 마침 이 도재가 귀양가 있었으므로 세력이 꺾여 형의 원수를 갚을 수가 없었다.

  이때 어 윤중이 선무사(宣撫使)의 위세를 빙자하여 그자를 대려 죽였다. 또 사람을 보내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인) 악양(岳陽)의 손 씨 선영에다 *치총(置塚)했다. 치총이란 예전의 수장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 풍속에 남의 무덤을 침범하는 것은 금했다. 그러나 손 씨는 선무사의 권세에 위축되어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일 모두 선무사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 윤중은 본래 풍수지리에 빠져 스스로 그에 정통하다고 여겼다. 그는 전후 장계에서 동학을 가리켜 '비도(匪徒)'라 하지 않고 '민당(民黨)'이라고 했으며, 서양의 민권주의자들과 같은 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식자들은 그가 실언했다고 탓했다.

     * 치총 - 사람이 죽기 전에 묏자리를 미리 잡아 무덤처럼 만들어 놓은 것.

 

동학을 막기 위해 향약을 시행하다.

민 영준은 동학이 치열해지는 것은 고례(古禮)가 행해지지 않아 풍속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임금께 아뢰었다. 

  "두 지방의 관찰사를 신칙하시어 호남에서는 향약(鄕約)을, 영남에서는 향음주(鄕飮酒)를 시행케 하소서."

  이에 기일을 정해 차례로 시행하자 수령들이 자기 고을만 뒤질세라 여름에도 백성들을 다그쳐 시행하니, 땀을 흘리며 무릎 꿇어 절하고 돈을 추렴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농사일에 방해가 되자 마을마다 매우 괴로워했다.

  또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조사해 쌀과 고기를 내리고 주직(壽職)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 등의 직첩을 내려 주고는 돈 삼십 민씩 거두어들였다. 그의 자손까지 잡아다 독촉하니, 노인이 있는 가난한 집에서는 빚을 내어 조달했다. 그래서 이것을 '노인 난리'라고 했다.

 

안 효제가 무당 진령군을 죽이라고 상소하다.

 

7월에 전 정언 안 효제(安孝濟)가 상소하여 요사스러운 무당 진령군을 죽이라고 청했다. 안 효제는 의령현 사람이다. 상소문이 접수되었을 때 민 영주와 박 시순(朴始淳)이 승정원 승지로 있었는데,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두르고는 임금에게 바칠 것인지를 의논했다. 민 영주가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이처럼 흉악한 상소를 어찌 주상께 올릴 수 있겠소?"

  박 시순이 말했다.

  "이것은 언사(言事)인데 어찌 올리지 않을 수 있겠소?"

  정 인학(鄭寅學)이 말했다. 

  "도승지와 의논하는 것이 좋겠소."

  그때 김 명규(金明圭)가 도승지로 있었는데, 상소문을 가져다 민 영준에게 보이며 임금께 올릴지 말지를 물었다. 민 영준이 화를 내며 옷자락을 떨치고 나가면서 말했다.

  "상소를 올릴지 말지조차 도승지가 결정하지 못하니 세상에 도도승지(都都承旨)가 또 있다는 말인가?"

  김 명규가 돌아와서 말했다.

 "내 역량으로는 올릴 수가 없소."

  그리고는 마침내 상소를 각하했다. 박 시순이 탄식하며 말했다.

  "비록 자기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남이 하는 말까지 막아서야 되겠는가."

  상소문은 관철되지 않았지만 부본(副本)이 서울에 두루 퍼져 임금과 왕후도 이미 다 보았다.

 

탐관오리들이 온 나라에 깔려 있어 심한 자만 귀양 보내다.

12월에 외무참의 박 용선(朴用先)을 파견하여 개성에서 일어난 민란을 조사하게 했다. 김 세기(金世基)가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잠삼(潛蔘)을 색출한다고 빙자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불법으로 빼았다. 개성 부민 김 흔(金 炘) 등이 무리를 모아 난리를 일으키자 김 세기가 옷을 바꿔 입고 달아났다.

  이때 탐관오리들이 온 나라에 깔려 있어 어지럽지 않은 고을이 없었는데, 더욱 심한 자만 조사해서 죄를 주었다. 이때를 전후해 귀양 간 자로는 이 돈하(李敦夏), 이 용익, 정 광연(鄭匡淵), 이 근호(李根澔), 이 원일(李源逸), 홍 시형洪時衡), 김 영적(金永迪), 심인택(沈仁澤), 윤 병관(尹秉寬), 조 준구(趙駿九), 이 용직(李容直), 조 만승(曺萬承), 김 세기 등이었다. 그러나 그물이 세어 정작 큰 고기는 다 빠져나갔으니, 제대로 징계할 수가 없었다.

     * 잠삼 - 관청의 허가 없이 몰래 파는 인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