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를 박해하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정조 때다. 그 후 여러 차례 뿌리를 뽑으려 했으나 몰래 믿는 자들이 있어 끝내 근절되지 않았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초에 전(전) 승지 남 종삼(南鍾三), 진사 홍 봉주(洪鳳周), 법국(法國-프랑스)사람 *장 경일(張慶一) 등이 모두 형을 받아 죽었다. 남종삼은 승지 남 상교(南尙敎)의 아들로, 북인 명문가 출신이다. 부자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종삼은 범죄 사실을 진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두세 번 서양에 가서 좋은 벼슬을 했는데, 품계가 우리나라 이조판서에 해당한다.” 홍 봉주는 장 경일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의 재산을 몰수할 때 서양 바늘이 여러 상자 나왔다고 한다. 남상교는 공주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그때부터 그 무리를 샅샅이 조사라여 뿌리까지 다 파헤쳤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죽은 자가 전후로 이만 명쯤 되었다고 한다.
* 장 경일 – 프랑스 선교사인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를 가리킨다. 만주 등지에서 약 십 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53년에 우리나라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입국하여 제4대 교구장이 되었다.
포도대장 이 경하가 사람을 잘 죽이다.
이 경하(李景夏)는 운현이 가장 부리기 좋은 사람으로 뽑혔다. 그는 대장에다 포도대장까지 아울러 맡았으므로 죄인을 처형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운현이 이렇게 말했다.
“이 경하는 다른 장점이 없다. 오직 사람을 잘 죽이므로 쓸만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경하는 사람을 마구 죽이지 않았다.
*사학(邪學)이나 사주(私鑄)처럼 죽을 죄를 저지른 사람만 죽였다.”
* 사학 – 주자학에 위배되는 학문을 이르던 말로, 조선 중기에는 양명학을, 후기에는 천주교나 동학을 가리켰다.
임금이 될 것을 예언한 만인에게 대장경을 간행케 해주다.
일찍이 만인(萬印)이라는 한 산인(山人)이 금상의 잠저를 찾아 뵙고 두 번 절하며 축하했다.
“훗날 중흥지주(中興之主)가 되실 분입니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초에 운현이 만인을 찾아 소원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산인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 있겠습니까? 한 가지 은혜를 받자면,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大藏經)] 천 부만 주시면 소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경 간행 사업을 크게 벌였는데, 만인도 스스로 참여했다.
일이 끝나자 그것을 바다에 띄웠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해인사 경판각(經板閣)은 예부터 새들이 똥을 싸지 않아서 영험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만인이 떠난 뒤로는 그러지 못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경판 속에 부적이 있었는데, 만인이 훔쳐 가서 그리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젊었을 때 술사(術士)에게 ‘앞날에 환난이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만인(萬人)을 죽이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 만 명을 죽이겠다고 기약했다.”
만인(萬印)이란 것이 만인(萬人)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운현이 결국 만인(萬印)으로 말미암아 화를 일으킨 일은 없었으니, 역시 항간에서 와전된 말일 것이다.
다만 그때 이러한 말이 떠들썩하게 전해졌다.
병인년 법국 군함의 침입을 양헌수가 물리치다.
병인년(1866, 고종 3년) 9월에 법국 군함이 강화도에 정박했는데, 놀기도 할 겸 훈련하러 온 것일 뿐 침략할 뜻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장 경일 등이 죽자 서양 선박을 더욱 엄하게 금했다. 그러므로 보복하기 이해 온 것이다.”
강화유수 이 인기(李寅夔)가 겁에 질려 달아나자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서양인들이 열흘 동안 그곳을 점령하며 모조리 약탈하고 돌아갔다. 나라에서는 강화도의 지형이 험준하다고 여겨 군량미와 무기와 진귀한 보물을 많이 저장해 두었는데, 이때 모두 없어졌다. 이 경하가 순무사(巡撫使)가 되고 이원희(李元熙)가 중군(中軍)이 되어 훈련도감의 오천 군사를 이끌고 문수산성으로 나아가 진을 쳤지만 강화도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감히 건너가지 못했다. 천총(千摠) 양 헌수(梁憲洙)가 쫓아가 싸우길 청했지만 이원희가 말했다. “군령을 어기는 자는 죽이겠다.” 양 헌수가 말했다. “죽으면 어찌 적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군사 한 무리라도 주십시오.” 이원희가 마지못해 포수 삼백 명을 내어 주었다. 양 헌수가 그날 밤 손돌목에서 바다를 건너가 정족산성에 진을 쳤다. 이튿날 서양인들이 강화부에서 나와 배를 타려고 했지만 밀물이 얕아 잠시 산성에서 쉬려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남문 밖에 이를 무렵,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자 적들은 엉겁결에 물러났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포를 쏘며 약 삼십 명을 죽이고 개선했다. 양 헌수는 발탁되어 황해도병사(병사)가 되었고, 일 년 만에 대장이 되었다. 이 *난리 뒤에 조정에서는 사학을 금했으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 병인양요 당시의 강화유수촌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위치하여 예부터 서울 사진(四鎭)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긴 곳이다. 가장 먼저 개화의 밀물이 밀려온 곳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병인양요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의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범한 사건이다. 프랑스 군은 한때 강화도를 점령했으나 양 헌수의 뛰어난 전략으로 인해 거의 한 달 만에 물러났다. 이 싸움에서 우리나라는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격퇴했다.
* 난리 –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 사람 장 경일 신부를 죽였는데, 프랑스 군함이 이에 보복하려고 강화도에 왔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 척사윤음 – 천주교를 배척하라는 임금의 말씀.
서양 오랑캐가 강화성을 점령하자 이 시원이 자결하다.
판서 이 시원(李是遠)은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그 집안이 중간에 *신임당화(辛壬黨禍)에 연루되어 벼슬길이 막히자 강화도 *사기리로 물러가 살았다. 순조 때 과거에 급제했는데, 인품이 청렴 강직하고 늘 순국의 뜻을 지녔다. 서양 도적이 강화성을 점령하자 *강 만리(江萬里)의 고사에 비추어 둘째 아우인 전 군수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분연히 독약을 마시고 죽으니, 그의 나이 77세 때다. 유소(遺疏)가 올라가자 조정에서는 몹시 슬퍼하여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경(正卿)을 보내 제사를 지내 주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더러 ‘용기가 지나쳤다’라고 헐뜯기도 했다. 후일 그의 손자인 이건창이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시랑 황옥(黃鈺)과 교유한 일이 있었는데, 황옥이 이건창에게 지어 준 글에서 그의 선대의 덕을 서술하며 “죽지 않아도 될 처지에서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을 지녔다”고 했으니, 세인들이 알맞은 기록이라고 했다.
* 신임당화 – 신축년(1721, 경종 1년)과 임인년(1722, 경종 2년)에 걸쳐 일어난 대옥사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간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인 윤(昀-후에 경종)을 지지했고, 노론은 연잉군(연잉군-훗날 영조)을 지지했다. 경종은 세자 때 생모인 장희빈이 죽은 뒤 여러 질환에 시달렸는데, 숙종은 이를 걱정하여 노론의 이 이명을 불러 세자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소론은 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욱 내세웠고, 노론은 연잉군 추대로 맞섰다. 마침내 소론은 노론 4 대신인 이 이명, 김 창집, 이 건명, 조 태체가 역모를 꾀했다고 모함하여 축출한 뒤 환국을 단행했다. 이때 노론 4 대신이 사사되었고, 오십여 명이 국청으로 처단되었으며, 백칠십여 명이 교살되거나 유배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사리리 – 지금의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사기리로 이건창의 생가 뒤에 이 시원의 무덤이 있다.
* 강 만리 – 송나라 충신으로, 고향에 은거해 있다가 원나라 군사가 남으로 내려오자 강에 투신 자살했다.
과거를 치르는 종친들을 모두 급제시키다.
예전에는 진사의 정원을 매번 이백 명으로 한정했는데, 금상 정묘년(1867, 고종 4년)에 와서는 특명을 내려 예전의 정원을 풀어 뽑았다. 게다가 임금과 나이가 같은 자들을 *방목(榜目) 끝에 붙였다. 종친 가운데 시험장에 들어온 자는 가까운 친척이건 먼 친척이건 가리지 않고 특전을 베풀었는데, 그러다 보니 결국 시험장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 방목 – 과거 급제자의 이름을 발표한 명단으로 문과 방목, 무과 방목, 잡과 방목, 사마 방목 등이 있었다.
운현궁의 청지기들이 사대부를 모욕하다.
세상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하인들을 일컬어 청지기라고 한다. 운현의 청지기들은 모두 호탕하고 사납고 간악하여 손님이 올 때마다 조롱하고 비웃었다. 재상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모욕당하는 이들이 자주 있었다.
대원군이 전주 이씨를 십만으로 늘리다.
병인년(1866, 고종 3년) 이후에 이따금 대과(大科)를 베풀었는데, 종친에게만 응시를 허용하여 종친과(宗親科)라고 불렀다. 또 대동보(大同譜)를 만들어 본관이 *완산(完山)인 이씨는 모두 붙여 주었으니, 한번 이 족보에 오르면 사족(士族)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천민들 중에서 본관을 완산 이씨로 고쳐 대동보에 오른 자가 잇달았다. 종친부에서 *화수회(花樹會)를 연 적이 있었는데, 참석한 자가 육, 칠만이나 되었다. 흥선군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라를 위해 십만 정병을 얻었다.” 무진년(1868, 고종 5년)에 대종회(大宗會)를 열고 종친문무과를 베풀었다.
* 완산 – 전주의 옛 이름이다. 전주 이씨를 완산 이씨라고도 부른다.
* 화수회 –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의 친목 모임.
흥인군 이최응이 대원군의 정책을 비난하다.
흥인군(興寅君) 이 최응(李最應)은 운현의 *숙형(叔兄)으로, 아우가 제멋대로 하는 것을 자주 비난했다. 당백전을 사용하던 시절, 그의 *포인(疱人)이 생선이나 푸성귀를 살 때마다 장사꾼들을 불러 모아 직접 몇 전을 대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어찌 한 푼짜리 동전이 백 푼과 맞먹을 수가 있겠는가? 그저 한 푼으로 쓸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물건을 팔고서) 튼 이득을 본 자들이 많았다.
* 숙형 – 형제들의 서열을 백(伯), 중(仲), 숙(叔), 계(季)라 하는데, 자를 지을 때도 이 순서대로 한 글자씩 넣으면 몇째 아들인지 알아보기가 쉬웠다.
* 포인 – 부엌일을 맡아보는 사람.
삼남지방에서 포량미를 거둬들이다.
병인년(1866, 고종 3년) 이후 서양인들이 침입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강화도에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고, 경내에서 포수 삼천 명을 뽑아 강화유수로 하여금 관장하게 했다. (그 비용을 대기 위해) 삼남 지방에 전세(田稅)를 부과하고 이것을 포량미(砲糧米)라 했는데, 수만 석에 이르렀다. 관리들이 이것을 핑계 삼아 농간까지 부였으니, 남도 백성들이 더욱 곤경에 빠졌다.
북촌에서 노론의 썩는 냄새가 나다.
남인 최 우형(崔遇亨)이 잇달아 높은 벼슬에 발탁되어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을 거쳐 군(君)에 봉해져 충훈부(忠勳府)를 아울러 관장했다. 그가 한 번은 초헌(軺軒)을 타고 북촌에 이른 적이 있었는데, 부채를 들어 코를 가리며 말했다. “노론의 썩는 냄새가 어찌이다지도 고약하게 나는가?” 도성 큰길에서 종각 북쪽을 북촌이라 부르는데 노론이 살았으며, 남쪽을 남촌이라 부르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 살았다.
* 삼색 –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졌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는데, 노론이 정권을 오래 잡자 나머지 세 당파를 삼색이라 했다.
대원군이 자신의 무덤 위에 아소당을 짓다.
공덕리 강가 동작나루 하류에 산기슭이 아름답고 여염집이 즐비한 곳이 있는데, 운현이 민가를 철거하고 자신의 *수장(壽藏)을 만들었다. 그 위에 당을 세워 *광중(壙中)을 덮고, 당의 이름을 *아소당(我笑堂)이라 했으며, 광중을 우소처(尤笑處)라 하고, 신 헌(申櫶)에게 명하여 당기(堂記)를 짓도록 했다.
* 수장 – 살아 있을 때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
* 광중 – 시체가 놓이는 무덤구덩이.
* 아소당 –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동도중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무덤은 1927녀에 파주 대덕리로 옮겼고, 아소당은 1962년에 봉원사로 옮겨 세웠다.
미국 군함의 침입을 막다가 어 재연이 전사하다.
신미년(1871, 고종 8년) 여름에 미국인들이 강화도를 침범했는데, 전 병사 어 재연(魚在淵)이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나가 싸우다가 패해 죽었다. 어 재연은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로 들어가 배수진을 치고도 척후병을 세우지 않았다. 적군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엄습했으며, 보(堡)를 넘어 난입했다. 어 재연은 칼을 빼 들고 맞서 싸웠지만 칼이 부러졌다. 그래서 연환(鉛丸)을 움켜쥐고 던졌는데, 맞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연환 마저도 다 떨어지자 적들이 그를 창으로 마구 찔렀다. 그가 반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자 적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 갔다. 어 재연은 이미 죽었지만 적들은 또 다른 방비가 있는 줄 알고 곧 달아났다. 패보가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에서는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는 그를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 했다. 그의 상여가 돌아오자 운현이 조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魚) 병사(兵使)의 상여를 맞이하지 않는 자는 모두 천주학을 하는 자다.” 이에 모두 조정을 비우고 나가 맞았는데, 수레와 말이 수십 리나 이어졌다. 어느 노인이 말했다. “순조 계유년(1813, 순조 13년) 충장공(忠壯公) *정시(鄭蓍)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 재연의 아우 어 재순(魚在洵)도 백의종군했다가 형과 함께 죽었다. 그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정시 – 1811년 가산군수로 있을 때 홍 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반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향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 극동 함대
1871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강화도에 침입함으로써 최초의 조미 전쟁인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미국은 1866년에 대동강에서 불타 침몰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에 대해 응징하고 조선 개항을 위해 원정을 결행했다. 그러나 미국의 목적은 무위로 끝났고, 그 결과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던 대원군은 쇄국책을 더욱 강화하여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민란이 자주 일어나다.
기사년(1869, 고종 6년) 봄에 지방 도적들이 광양을 함락하여 현감 윤 영신(尹榮信)을 사로잡았다. 신미년(1871, 고종 8년) 봄에는 영해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부사 이 정(李柾)이 달아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많아졌다. 윤 영신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무르는 자로, 평소 호탕하여 운현에게 잘 보였다. 이에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에까지 올랐다. 이 정은 문정공(文正公) 이 재(李縡)의 후소이다. 인척들이 귀하게 되고 번성했으며, 그가 절개를 지키다 죽은 것을 자랑했다. 관직과 시호를 내렸으며, 그 아들도 등용했다.
재상 정 원용이 고종의 혼례에 폐백함을 지다.
경산(經山) 정 원용(鄭元容)은 소과와 대과에 모두 *회방연(回榜宴)을 맞았고, 또 회혼례도 지냈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맞아들 정 기세(鄭基世)는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고, 손자 정 범조(鄭範朝)는 *참판에 이르렀다. 이는 모두 그의 생전의 일이었다. 복록을 완전히 누리고 수고(壽考)하고 강녕하기로 근세에 그에 견줄만한 자가 없었다. 금상이 혼례를 올릴 때 복이 많은 사람을 택하여 책례사(冊禮使)로 삼아 폐백함을 지게 했는데, 그가 뽑혔다.
* 회장연 – 과거에 급제한 지 육십 년이 되는 해에 치르는 잔치. 정 원용은 90세까지 장수하여 회장연을 치를 수 있었다.
* 참판 – 참판이 아니라 우의정 총리대신까지 올랐다.
병인양요 때 김 병기가 도성으로 돌아오다.
병인양요 때 김 병기가 여주에 있었는데, 서울이 뒤숭숭하고 사방으로 피난 간다는 소문을 듣고 집안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존망을 사직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하다. 너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고는 그날로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왔다. 운현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미워하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양요 때 달아난 자들을 벼슬에서 제외하다.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하던 자들 가운데 양요(양요)가 일어나자 달아나는 자들이 잇달았다. 이에 운현이 노하여 *[잠영록(簪纓錄)]을 펼쳐 그들의 이름 옆에다 모두 선(仙) 자를 써 놓았으니, 그들이 죽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난리가 평정되자 그들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 잠영록 – 벼슬 높은 관리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 잠영이란 관원들이 쓰던 비녀와 갓끈을 뜻한다.
이 항로와 기 정진을 산림에서 발탁하다.
광해군 때 이 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았을 때 (산림처사로 이름난) 정 인홍(鄭仁弘)을 천거하여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혔다. 그들은 큰일을 처리할 때마다 안팎에서 서로 어울리며 유림의 여론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뜻대로 행했다. 그때부터 집권자들은 이들이 한 짓을 답습하여 정국이 한번 바뀔 때마다 임하(林下)에서 한 사람을 내세워 영수로 삼았다. 그중에는 현명한 자도 있고 간사한 자도 있었는데, 산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은 자가 없었다. 운현이 집권할 때는 그러한 산림처사가 없어 부끄럽게 여겼는데, 마침 벽계(蘗溪) 이 항로(李恒老)와 노사(蘆沙) 기 정진(奇正鎭)이 *양경항의척사(洋警抗議斥邪)를 주장했다. 그중 벽계의 상소문이 더 강직하여 당시에 백 년 이래 가장 이름난 상소라고 불렸다. 이 항로와 기정진은 함께 갑작스럽게 발탁되어 *아경(亞卿)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학술과 문장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했고, 입신하는 과정에서도 본말이 있었으니, 예전에 지름길로 벼슬에 나아가 전력자에게 머리를 굽히던 자들과는 분명 달랐다.
* 양경항의척사 – 서양인들의 침범에 항의하고 천주교를 배척하자는 뜻.
* 아경 – 경(卿) 바로 아래 벼슬로 육조의 참판(종 2품)을 가리킨다.

이 항로(1792, 정조 16년~1868 고종 5년)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호남의 기 정진, 영남의 이 진상과 더불어 침체되어 가는 주리철학을 일으켰다. 일찍이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세속을 피해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아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다. 병인양요 때는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했다. 구한말 위정척사론 자로 유명한 최 익현, 김 평묵, 류 중교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華西集], [華東歷史合編綱目], [蘗溪雅言] 등이 있다.
사대부에게서도 군포를 거두다.
군정(軍丁) 명부에 오른 자들에게 군역을 베로 대신하게 하면서 폐단이 많아졌다. 이는 약한 백성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된 반면, 사족들은 한가롭게 노닐며 죽을 때까지 신역(身役)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에 이름난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관습에 끌려 끝내 개혁하지 못했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초에 운현이 이러한 백성들의 원성을 힘껏 떠맡으면서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장정 한 사람당 이 민(緡)씩 내게 했으니, 이를 동포전(洞布錢)이라 했다.
척양비를 세우다.
경오년(1870, 고종 7년)과 신미년(1871, 고종 8년) 무렵, 각 주와 현에 명을 내려 척양비(斥洋碑)를 세우라 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오니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니,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명당을 써서 이 시원이 태어나다.
이 시원은 호가 사기(沙磯)이며 27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그의 5대조 이 진급(李眞伋)은 이 진유(李眞儒) 이 진검(李眞儉)과 형제였는데, 이진유와 이진검이 당파 싸움에서 패하자 그의 집까지 연루되어 양 대에 걸쳐 *정배(定配)와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이 진급의 손자인 이 충익(李忠翊)은 호가 초원(椒園)으로, 강화도의 초봉(椒峰) 밑에 살았는데 폐족이 되어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의술에 정통하고 풍수에도 밝았으며 문장이 기이하여 세상에서 삼절(三絶)로 불렸다. 일찍이 강화도 동쪽 둔포(芚浦)에 선조의 묘를 쓰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손 가운데 분명 세상에 이름을 떨칠 자가 나올 것이다.” 또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백로가 날아들면 복이 깃드는 백로하수형(白鷺下水形)이다.” 그의 아들 이 면백(李勉伯)이 진사시에 합격하자 사람들이 축하했는데, 이 충익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이 시원이 과거에 급제하기 몇 년 전에 백로가 조금씩 날아드니, 이 충익이 손가락을 꼽아 보며 말했다. “이상하다, 어째서 맞지 않는가?” 이 시원이 급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꼭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이 충익은 세상을 떴다. 이 시원은 명망과 충절로 널리 알려졌고, 그의 손자 이건창은 문장으로 한 시대를 울렸으며 일찍이 벼슬에서 고결하게 물러나 당세의 명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 정배 – 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일정 동안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한 형벌.

이시원(1790, 정조 14년~1866, 고종 3년)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충의와 강직으로 이름이 높아 특히 철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양명학을 근본으로 한 그의 학문 경향은 관직생활 동안 소외된 백성들에 대한 호의로 나타났다. 향리인 강화도에서 지내던 중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아우인 이지원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사기집(沙磯集)이 있다.
이시원의 글씨
철종이 이 시원을 자주 낙점하다.
철종은 유약하고 아둔한 자질을 타고났다. 게다가 김 씨에게 견제당해 관리 한 사람을 뽑을 때조차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강화도) 잠저에 있을 때 이 시원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이 승지가 좋은 관원이라는 말을 익히 듣고 속으로 기억해 두었다. 철종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이 시원의 이름이 *주의(注擬)에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이름이 비록 부망(副望)이나 말망(末望)에 올라 있더라도 꼭 서열을 건너뛰어 기꺼이 그를 낙점(落點)했다. 개성유수 자리가 비었을 때도 손수 이 시원의 이름을 추가해 쓰고 낙점했다. 그리하여 이 시원은 삼 년간 개성에 살았는데, 이 건창도 유수 관아에서 낳았다. 이건창의 아명이 송열(松悅)이었는데, 이는 개성을 송도(松都)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주의 – 벼슬아치를 임명할 때 임금에게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해 올리던 일을 말한다.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정했는데, 이들 후보자를 차례로 수망(首望), 부망, 말망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임금이 마음에 드는 사람의 이름에다가 표시를 했는데 이를 낙점이라 한다.
귀신같은 감식안을 가진 이 시원.
우리나라 제도에 *성균진사과(成均進士科)는 인(寅), 신(申), 사(巳), 해(亥)년에 치르고, *회시(會試)는 자(子), 오(午), 묘(卯), 유(酉)년에 치렀다. 식년(式年) 때마다 경시관(京試官)을 지방으로 나누어 보내 향시(鄕市)에서 주관하여 인재를 뽑도록 했는데, 여기서 합격한 자를 초시(初試)라 불렀다.
삼남과 평안도는 좌소(左所)와 우소(右所)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으므로 각 도에 두 명씩 보냈고,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는 각 도에 한 명씩 보냈다. 오직 경기도만은 서울에서 1소와 2소로 나누어 경기도와 서울의 선비들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했는데, 다른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시험 보기를 원하는 자들도 모두 허용했다. 응시자가 많았으므로 뽑는 인원도 많았는데, 그 수가 일곱 도에서 뽑은 인원의 절반이나 되었다.
서울은 밖이 따로 없다는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시험 규칙은 차츰 느슨해졌다. 처음에는 법이 매우 엄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응시할 수 없었고, 한 사람이 다른 곳에서 시험을 보고자 하면 증명서를 받아와야만 했는데 이를 ‘월소(越所)’라 한다. 증명서가 없이 월소한 자는 비록 합격하더라도 그 이름을 뺐는데, 이를 ‘발거(拔去)’라 한다. 다만 서울에 와서 응시한 자는 1소와 2소를 막론하고 증명서를 따지지 않았다.
순조 중엽까지만 해도 과거 시험의 규칙이 크게 허물어지지 않아서 경시관은 반드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골랐다. 문장이 뛰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문벌이 좋다고 하더라도 경시관으로 뽑힐 수 없었다. 이 시원이 영남 좌도에서 향시를 주관하여 명망이 높았는데, 그 뒤 영남 우도에서 식년시를 주관했다.
대구는 영남 좌도의 관할 지역이었다. 대구의 응시자 가운데 이씨 성을 가진 자가 지난번 이시원이 주관한 향시에서 뽑혔는데, 올해는 서울로 가서 시험을 보려고 새재를 지나다가 이 시원이 영남 우도의 시험을 주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남 우도로 오며 생각했다.’
이분이 온 걸 일찍 알았더라면 어찌 꼭 서울로 갔으랴. 내 반드시 합격하리라.’ 과연 그는 수석으로 뽑혔다. 수석으로 뽑힌 자의 답안지는 곳 *조리(棗籬)에 내다 걸었는데, 이를 휘장(麾壯)이라 한다. 이 시원이 휘장 뒤로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글은 대구에 사는 이 아무개의 글이 아닌가. 이 사람은 내가 예전에 뽑은 사람으로, 그가 아니면 이런 글을 지을 수가 없다.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왔을 것이고, 또 휘장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빙 문서가 없으니 법을 어긴 것을 어찌하랴. 부득이 발거할 수밖에 없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한탄했으나 그 사람은 기뻐 뛰면서 말했다. “휘장도 세상에 있고 발거도 세상에 있다. 또한 시관의 귀신같은 감식안도 있으니, 오늘의 나처럼 기이한 인연도 있지 않으랴.”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무되어 돌아갔다. 영남 사람들은 지금도 그 일을 이야기하며 아까워한다. 금상 경진년(1880, 고종 17년) 봄에 왕세자가 천연두를 앓다가 쾌차하자 *증광경과(증광경과)를 실시했다.
서울 1소와 2소에 방이 나붙자 비방 여론이 들끓었는데, 임금이 매우 노하여 방을 파할 것을 명하자 지방도 함께 파했다. 얼마 뒤 다시 시험장을 설치하고 지난번에 주관한 시관들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 마침 영남 우도의 시관 조 병필(趙秉弼)이 친상을 당해 이 교하(李敎夏)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건창이 시관으로 영남에 내려온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두메산골에서 이따금 칠,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 응시자들이 서로 부축하고 걸어오면서 말했다. “우린 강화 이 판서가 과거 시험을 주관하던 것을 봤지. 이번에 오는 시관이 이 판서의 손자라니 어찌 가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와서 살펴보고는 이건창이 아닌 것을 알고 모두 흩어져 돌아갔다.
* 성균진사과 – 문과는 세 차례에 걸쳐 치렀는데, 진사를 뽑는 이 첫 시험을 小科나 司馬試라고 했다. 이 시험에 붙으면 성균관에 들어가 大科를 치르기 위해 더 공부했다.
* 회시 – 각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다들이 도성에 모여 치르는 覆試로서 여기서 합격하면 마지막으로 임금 앞에서 殿試를 치렀다.
* 조리 – 과거 시험장 주위에 꽂아 놓은 작은 대추나무.
* 증광경과 – 식년이 아니더라도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시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를 박규수가 불태우다.
*무진년(1868, 고종 5년)에 박 규수(朴珪壽)가 평양감사가 되었다. 미국인 최 란헌(崔蘭軒-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Robert J. Thomas)이 군함 한 척을 이끌고 밀물을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썰물이 되자 움직이지 못했다. 박 규수가 상금을 걸고 그들을 붙잡을 수 있는 자를 구했는데, 한 장교가 나섰다. 그는 조그만 고깃배 수백 척을 모아서 땔감을 가득 실어 불 지르게 하고, 소뇌를 잘 쏘는 궁수를 뽑아 고깃배에다 주살을 매고 일제히 화살을 당기게 했다. 쇠뇌는 맹렬하고 고깃배는 가벼운지라 미국 군함 둘레로 고슴도치처럼 모여들었다. 군함 안에 있는 인화물에다 불을 지르자 군함 전체가 다 타버렸다. 적들은 사나운 불길 속에서 함께 뛰쳐나와 날래게 물살을 헤치며 달아났다. 뒤쫓아 가며 대포를 쏘았더니 네댓 사람이 넘어졌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박 규수는 품계가 올랐고, 장교는 상을 받아 진장(鎭將)이 되었다.
* 무진년 – 실제로는 병인년(1866, 고종 3년)의 일이다.
박 규수, 척화파에서 개화파로 돌아서다.
박 규수는 관청 일에 통달하고 문학으로도 이름나 당시 쓸 만한 인재로 추앙받았다. 다만 운현 시절에는 서양 세력을 배척하자고 힘껏 주장하다가 (고종이 직접 다스리기 시작한) 갑술년(1874, 고종 11년) 이후로는 왜국과 외교를 트자고 주장하여 시류에 영합하는 태도를 취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심했다.

박 규수(1807, 순조 7년 ~ 1877, 고종 14년)
북학파의 거두인 연암 박 지원의 손자로, 일찍이 정 약용과 서 유구 등을 사숙하며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1860년대에서 1870년대에 걸쳐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면서 점점 개화사상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그는 제너럴셔먼 호 사건과 신미양요를 겪고도 미국과 먼저 수교 맺기를 힘써, 고립되는 우환을 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취적인 견해였다. 북학파와 개화파를 잇는 중심인물로서 김 옥균, 박 영효, 김 윤식, 유 길준 등 개화 운동의 선구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 환재집(瓛齋集), 환재수계(瓛齋繡啓)가 있다.
조선, 개화의 길로 들어서다.
강화도 조약
1854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개항한 일본은, 열강에 의한 불평등 조약의 멍에를 벗어나려면 스스로 제국주의적인 강대국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서구 여러 나라와 정면 대결할 수 없는 그들에게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자신들보다 뒤처진 주변 국가들을 병탄(倂呑)하여 아시아에서 절대 강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한반도를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다. 운양호(雲揚號) 사건은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개항하기 위한 첫 신호탄이었다. 1875년 9월 20일 일본은 한 척의 군함을 이끌고 서해 최전선 요새인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했다. 조선은 정체 모를 괴선박의 침입에 즉각 선제 발포에 나섰다.
이에 운양호도 기다렸다는 듯이 월등히 성능이 앞서는 무기를 내세워 초지진을 초토화했고, 그 여세를 몰아 영종도에도 무차별사격을 가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겨우 두 명만 부상을 입은 반면, 조선군은 서른다섯 명이 전사하고 열여섯 명이 포로를 잡혔으며, 백성들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로써 기선 제압에 성공한 일본은 다음 해 운양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한다는 핑계로 대규모 병력과 함께 강화도에 다시 나타났다. 이는 물론 무력으로 조선을 협박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쇄국책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난 상태였고, 그 대신 민 씨 세력이 득세하며 이 기회를 통해 대원군 세력을 약화하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유일한 우방으로 여겨온 청나라가 “만일 조선이 일본과 통상을 끝내 거부한다면 그 뒤의 일은 책을 질 수 없다”라고 함으로써 사실상 방관적 태도를 취했다. 결국 1876년 2월 26일 조선은 국제 조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불평등한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일을 일단락 지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조선과 일본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제1조 내용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는 것인 듯하나 사실은 청나라와 조선의 사대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약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최 익현이 운현을 배척하라고 상소하다.

최 익현(1833, 순조 33년~1906, 고종 43년)
한말의 애국지사로, 위정척사론의 거두인 이 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기본과 우국 애민 정신을 배웠다. 1868년에 올린 그의 상소는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한 것으로, 대원군 하야의 계기가 되었다. 이에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재수되었으나 간곡히 사양했고, 이어 민 씨 일족을 비판한 상소를 올렸다가 과격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삼 년 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위정척사의 길을 걸었다.
최 익현(崔益鉉)은 경주 사람으로, 대대로 포천에서 살았다. 이 항로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철종 때 명경과(明經科)로 뽑혔다. 신창군수로 있을 때 백성들을 은혜롭게 다스렸다고 이름이 높았다.
그 후 오래도록 등용되지 못해 집에서 머물렀다. 계유년(1873, 고종 10년) 봄에 최익현이 운현을 권신으로 지목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부드럽게 비답을 내렸다.
운현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문을 닫고 직무를 거부했지만 임금은 문안 인사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운현 스스로 임금 앞에 가서 자신의 수고로움을 말했지만 임금은 묵묵히 있었다.
이에 서 석보(徐碩補) 등이 떼 지어 최익현을 공격하며
“골육을 이간시키고 임금을 핍박하여 천륜을 멀어지게 만들었다”라고 했다.
서 석보가 상소에서 “요순의 도는 효제일 따름이다”라는 말까지 하자 임금이 크게 노여워하여 서 석보를 친국할 때 묶어 매달아 거의 절명할 지경에 이르게 했고, 임자도(荏子島)로 천극안치(荐棘安置)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어 최익현을 발탁하여 호조참판에 이르게 했으나,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했다.
청전을 못쓰게 하자 상품과 돈이 유통되자 않다.
청전(淸錢)을 못 쓰게 한 것은 갑술년(1874, 고종 11년) 정월부터다. 그때까지 서울이나 지방에서 교역에 쓰인 것은 청전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명을 내려 청전을 못 쓰게 하니 온 나라에) *전황(錢荒) 이 생겨 상품이 유통되지 않고 실업자가 많아졌다. 상평전(常平錢)을 쌓아 둔 사람들은 장롱 속에 쟁여 놓고 몇 곱절이나 이문을 남겼다. 몇 달이 지나서야 차츰 유통되기 시작했다.
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하다.
운현이 정권을 잡은 십 년간 안팎으로 위엄이 두루 미쳤다.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가 삼천리에 바람처럼 행해졌는데, 천둥이나 끓는 물 같아서 관리와 백성들이 무서워했으며, 관청의 법률이라면 언제나 두려워했다. 아침저녁으로 헛소문이 마구 나돌았고,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오면 붙잡아 죽인다고도 했다. 깊은 산골이나 먼 바닷가의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현이 정권을 내어 놓자) 서로 기뻐하며 축하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정권을 내어 놓지 않았다면 나라가 망해 오늘 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운현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이는 후한(後漢) 백성들이 슬퍼 탄식하면서 *망조(莽朝) 시절을 다시 생각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운현의 어진 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망조 –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잠시 신(新)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를 망조라 부른다. 한나라의 왕족들은 곧 신 나라를 멸망시키고 후한을 세웠다.
고종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인들을 숙청하다.
남인 재상의 자제 가운데 젊은 나이에 이름이 나 운현의 사인(私人)이 된 자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특히 한 기동(韓耆東), 최 봉구(崔鳳九), 채 동술(蔡東述), 권 정호(權鼎鎬), 정 현덕(鄭顯德) 등이 두드러진다. 갑술년(1874, 고종 11년) 초에 (고종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들에게 비밀리에 봉한 글을 내려 성 밖에 나가서 열어 보라고 했다. 열어 보니 멀리 변방으로 가서 한가롭게 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북인 신 헌구(申獻求)도 끼여 있었다. 여섯 사람이 창황히 길을 떠나니, 실은 유배였다. 삼, 사 년 뒤에 차츰 돌아왔는데, 모두 안면을 바꾸고 민 씨들에게 달라붙어서 벼슬이 높아졌다. 다만 권정호는 안기영의 역모 사건에 참여하여 신사년(1881, 고종 18년) 겨울에 처형당했고, 채 동술도 그 사정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았다 하여 함께 처형당했다.
대원군을 송 시열처럼 대로로 추대하다.
현종과 숙종 때 서인들이 우암 송 시열을 추대하여 대로(大老)라고 불렀는데, 운현도 일찍이 스스로 호를 지어 “나도 대로다(我亦大老)” 하며 우암을 조롱했다. 계유년(1873, 고종 10년)에 최 익현이 상소한 뒤, 성균관생 이 세우(李世愚)가 대원군을 높여 대로라 부르자고 청했다. 임금이 매우 옳다고 하여 (권좌에서 물러나는) 대원군을 겉으로나마 높여 대우하려는 뜻을 보였다. 이 세우도 임금의 뜻을 헤아리고 그렇게 청한 것이었다.

고종(1852, 철종 3년~1919) 조선 제26대 국왕으로, 1864년부터 1907년까지 재위했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흥선군과 익종 비인 조대비 간의 묵계에 의해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 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높여져 국정을 총괄했다. 그러나 고종이 장성하면서 친정에 대한 의욕을 보이자 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마침내 1873년에 대원군이 하야하자 정권은 민 씨 척족이 장악했다.
흥인군 이 최응이 민 씨들의 심부름꾼이 되다.
흥인군 이 최응은 아우 대원군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민 승호(민승호)가 이 최응을 추대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대원군과 맞서도록 했다. 임금에게 아뢰기 난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 최응을 시켜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게 했다. 이 최응이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그 남은 찌꺼기를 핥아먹자 운현이 몹시 한탄했다. 운현이 그의 침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휘장을 걷어올리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께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으시니 수양대군 같은 음모라도 꾸미는 것입니까?” 당시 이 최응은 병중임을 알려 왔다.
* 심부름꾼 – 원문에 나오는 ‘창(倀)은 범의 앞장을 서서 먹을 것을 찾아 준다는 못된 귀신을 가리킨다.
민 승호가 정권을 잡자 기강이 해이해지다.
민 승호는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아둔하고 잘 잊어버렸다. 하루아침에 국정을 맡다 보니 기강을 제대로 잡지 못해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곧잘 속였다. 결국 반년도 채 되기 전에 모든 법도가 해이해지고 보는 이들이 어지러워했다. 얼마 안 되어 생모 상을 당했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여막(廬幕)을 지키느라 대궐에 나가지 못했다. 이에 봉서(봉서)로만 의견을 주고받으니 때에 맞게 정사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임금을 사사롭게 뵙는 무리가 또한 중전의 뜻에 따라 정사를 돌보니, 정문(정문)이 쥐구멍 같아지고 권력도 많이 새어 나갔다.
* 여막 – 제연이나 무덤 가까이 두어 상제가 거처한 초막.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내어 놓고 여막에 머물며 삼년상을 치렀다.

김 보현이 선혜청 일을 맡아 국고를 빼돌리다.
호조의 선혜청(宣惠廳)은 나라의 전곡(錢穀)을 맡아 다스리는 관청이다. 선혜청은 쌀과 베를 전적으로 관할했으므로 재부아문(財賦衙門)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청렴과 검약으로 스스로 지키더라도 녹봉이 아주 많았다. 예로부터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관, 훈련대장은 회계하는 일이 없었다. 이 세 자리는 마음대로 전곡을 끌어 쓸 수 있었는데, 나중에라도 감사를 받는 일이 없었다.
김보현(김보현)이 몇 년간 선혜청 일을 맡았는데, 창고지기나 *조졸(漕卒)들과 같이 짜고 간악한 짓을 저질렀다. 양곡을 실은 배가 물에 빠졌다고 속여 남몰래 빼돌리기도 했고, 창고 쌀을 제멋대로 팔아서 이익을 챙기고 쌀 대신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혜청에 저장해 둔 쌀이나 베는 차츰 없어졌고, 장안 백성들은 구제받을 길이 없어졌다. 김보현의 전원은 더욱 살젔고, 누각도 잇달아 들어섰다. 풍류를 즐기는 가락도 당대에 으뜸이었다.
* 조졸 –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배에 실어 도성으로 나르는 일을 맡은 뱃사공.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국고를 일 년 만에 탕진하다.
원자가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과 중전이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內需司)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운현이 십 년간 모은 것을 일 년도 안 되어 모두 탕진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까치 판서 정 기세
정 기세(鄭基世)는 정 원용의 아들이다. 정 씨 집안은 재상을 많이 배출했는데, ‘화이근신(和易謹愼)’을 집안 대대로 지키는 규범으로 삼았다. 혁혁하게 높은 벼슬을 했으나 내세울 만한 기풍이 없어 세상에서는 그 집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 기세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지켜 남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남에게 좋은 소식 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까치 판서라고 불렀다.
민 승호의 집에 불이 나 삼대가 타 죽다.
병자년(1876, 고종 13년) 봄에 경복궁에 불이 나서 고종이 창덕궁으로 이사했다. 그때 민승호의 집에도 불이 나 그가 타 죽었으며, 얼마 뒤에는 흥인군 이 최응의 집에도 불이 났다.
당시 민 승호는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산승으로 하여금 조용한 곳에서 자기 아들을 위해 복을 빌게 하고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바깥에서 함 하나가 전해져 왔는데, 기도하던 곳에서 그 스님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골방에서 열어 보십시오. 이 속에 복이 담겨 있으니 바깥사람은 함께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민 승호가 함을 전해준 이를 찾았지만 이미 돌아간 뒤였다. 민 승호는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함을 보니 구멍이 있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겉에 열쇠가 달려 있어 열어 보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열 살인 그의 아들은 할머니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고, 민 승호는 높이 떴다가 떨어졌는데 온몸이 시커멓게 탄 채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다가 하루 만에 죽었다. 죽을 때 그는 운현궁 쪽을 두세 번 가리켰다. 운현이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여론이 자자했지만 누가 함을 보냈는지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임금과 중전이 매우 슬퍼했는데, 명성왕후는 운현에게 더욱 이를 갈았지만 설욕할 길이 없었다.
마침 흥인군의 집에도 불이 났는데, 왕후는 운현이 흥인군에게 원한을 품어 일어난 일로 생각했다. 두 차례의 화재가 모두 운현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 여기고 곧 비밀스럽게 조사하여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을 잡아들였다. 그는 신 철균(申哲均)의 문객이었는데, 신 철균은 예전 운현의 문하를 드나들던 자였다. 드디어 혹독하게 다루어 옥사를 벌였다.
대원군의 문객인 신 철균이 방화범으로 처형되다.
신 철균은 초명(初名)이 효철(孝哲)로, 병인년(1866, 고종 3년)에 영종첨사로 재직하다가 서양인 유병(遊兵-프랑스 해군) 몇 명의 목을 베고 진주병사(晋州兵使)로 승진했다. 갑술년(1874, 고종 11년) 이후로는 문을 닫고 집에 들어앉았지만, 방술(方術)을 좋아하여 잡객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 무렵 장 아무개가 신 철균에게 아무 날 흥인군의 집에 불이 날 것이라고 했는데, 얼마 안 가 그 말대로 되었다. 이 말이 퍼지자 함께 체포되어 엄히 심문을 당했으며, 신 철균이 거짓으로 자복하여 세 차례 화재를 모두 뒤집어썼다. 이로써 그는 대역죄로 참형을 당했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며, 처자는 멀리 보내져 노비로 충원되었다.
민 영익이 민 승호의 양자가 되다.

민 승호에게는 특별히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민 승호에게 아들이 없어 명성왕후가 양자를 들이려 했다. 당시 민 겸호(閔謙鎬), 민 두호(閔斗鎬), 민 관호(閔觀鎬) 등에게는 모두 아들이 있어 (자신의 아들을 민 승호)의 후사로 세우려 했지만, 왕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 태호(閔台鎬)에게 민 영익(閔泳翊)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촌수가 다소 멀기는 하나 영리하고 숙성하여 왕후의 마음에 들었다. 민 태호가 거절하고 따르지 않자 그의 아우 민 규호(閔奎鎬)가 윽박지르며 말했다. “하늘의 뜻을 어찌 어길 수 있겠습니까? (양자로 보내) 함께 부귀를 도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민 태호가 허락하니 민 영익은 드디어 민 승호의 양자가 되고 왕후도 크게 기뻐했다. 덕분에 민 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都統使)가 되었다.
민 규호가 자신의 호를 황사라고 하다.
근세의 권문으로는 황산(黃山)을 손꼽는데, 황산은 김 유근의 호다. 필가(筆家)로는 추사(秋史)를 쳐주는데, 추사는 김 정희(金正喜)의 호다. 민 규호는 이 두 사람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를 황사(黃史)라고 했으니, 권력은 황산처럼 되고 글씨는 추사같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언제나 “옳다”고만하는 영의정 이 최응.
*흑전청륭(黑田淸隆-구로다 기요타카)이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여러 고관들이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 의논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응당 화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수상 흥인군 이 최응이 “옳다”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응당 싸우는 것이 옳습니다.” (흥인군이) 또 “옳다”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싸웠다가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소?” (흥인군이) 또 “옳다”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싸웠다가) 이기지 못하면(그때 가서) 화해합시다.” (흥인군이) 또 “옳다”라고 했다. 결국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흩어졌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는 그를 *유유정승(唯唯政丞)이라고 불렀다.
* 흑전청륭 – 병자수호조약 체결 때의 일본 대표.
* 유유정승 – 유(唯)는 옳다는 뜻이니, 언제나 옳다고만 말하는 대신을 비웃는 말이다.
전라감사 정 범조가 민폐를 끼치지 않다.
날씨가 몹시 가물면 고을마다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수령이나 방백들도 축문을 지어 예에 따랐으니, 민폐만 더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절간에서 소를 잡고 술을 가져오게 하며 창기까지 데리고 노는 자도 있었다.
전라감사 정 범조만은 조그만 나귀에 어린아이 하나만 데리고 다니면서 *주전(廚傳)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그는 도내의 여러 산을 찾아다니며 직접 기도를 드렸는데, 무등산에서 기도를 드릴 때는 타는 듯한 햇볕 아래 앉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며 하늘에 부르짖었다. 그러자 그가 꿇어앉은 곳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가는 빗줄기가 내리니, 백성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정 범조가 그해 9월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감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감영의 장부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 정 기세가 집권자에게 간청하여 후임으로 같은 당파의 사람을 오게 하여 미봉책을 세웠다. 그 뒤 이 돈상(李敦相)이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 주전 – 주(廚)는 주방이나 음식점을, 전(傳)은 객사나 역마를 일컫는다. 관리가 출장 가면 늘 이러한 시설을 이용했다.
정 범조가 전주 아전의 기강을 잡다.
전주의 아전들은 돈 많고 성질이 사납기로 온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다. 운현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와 평안도 기생과 전주 아전이 그것이다.”
정 범조가 감사로 있을 때 아전 하나가 한 선비에게 매질하여 욕보였는데, 정 범조가 그를 죽이라고 명했다. 아전이 정 기세에게 많은 뇌물을 주며 호소하자 정 기세가 정 범조를 불러 완곡히 타일렀다. “아전이 참으로 죄를 짓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이 감영에서 삼대째 벼슬하면서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었다. 너는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않느냐?” 정 범조가 대답했다. “삼대가 이 감영에서 벼슬했으니 소자가 어찌 직책도 다하지 않으면서 녹봉만 타 먹겠습니까?” 정기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전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김 상현이 출세하기 위해서 스승 정 약용을 떠나다.
경대(經臺) 김 상현(金尙鉉)은 젊었을 때 광주에 살면서 다산(茶山) 정 약용(丁若鏞)에게 글을 배웠다. 나이가 많아지자 다산이 그를 사절하여 보내며 말했다. “자네는 노론의 명문가 자제이니 어찌 나를 스승으로 받들어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북촌에 대산(臺山) 김 매순(金邁淳)이 살고 있는데, 참으로 자네의 스승이 될 만하네. 자네는 그분을 스승으로 받들게나.” 경대는 결국 대산의 뛰어난 제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가르침을 준 연원은 다산이다. 그런데 노년에 후배들에게 대산을 말할 때는 반드시 ‘선생’이라 부르고, 다산을 말할 때는 그냥 ‘다산’이라 불렀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세인들은 그를 낮게 평했다.
정 약용이 실학을 연구하다.
정다산(丁茶山)의 이름은 약용(若鏞)으로, 남인이다. 정조 때 급제했는데, 벼슬은 승지에서 그쳤다. 일찍이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내각에 들어가 크게 칭찬받았는데, 이 때문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많았다. 형 정 약종(丁若鍾)의 옥사에 연좌되어 강진으로 귀양 갔다가 십구 년 만에 풀려났다.
그는 유배지에서 일이 없어 고금의 학문을 연구했고, 백성을 살리기 위한 정책에 유의하여 탐구한 것을 저술했다. 근원과 끝을 다 찾아내어 현실에 쓸모가 있는 학문이 되도록 힘썼으니, 모두 후세에 본이 될 만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방례초본(邦禮草本)], [전제고(田制考)] 같은 책이 그러하다. 우리 동방에서 이런 학문은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반계(磻溪) 유 형원(柳馨遠)과 성호(星湖) 이 익(李瀷)의 학문과 견주어 보면 더욱 확대하여 넓힌 것이다. 그의 시, 문, 잡저로는 또한 [與猶堂集] 이백 권이 있다.
* 초계문신 – 조선 후기 규장각에 특별히 마련한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

이 서구가 정 약용의 기억력을 시험하다.
다산은 기억력이 뛰어나서 세인들은 계곡(溪谷) *장 유(張維)에 견주었다. 어느 날 강산(薑山) 이 서구(李書九) 대감이 *영평(永平)에서 대궐로 오다가 길에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책을 한 짐 지고 북한산의 절로 가고 있었다. 열흘쯤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다시 그 소년을 만났는데, 또 책을 한 짐 지고 오고 있었다. 강산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자네는 뉘기에 책도 읽지 않으며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는가?” 소년이 대답했다. “이미 다 읽었습니다.” 강산이 놀라서 물었다. “지고 있는 책이 무엇인가?” “*[강목(綱目)]입니다.” “[강목]을 어찌 열흘 만에 다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외울 수도 있습니다.” 강산이 곧 수레를 멈추고 책 하나를 뽑아서 시험했더니 돌아서서 잘 외웠다. 이 소년이 바로 다산이었다.
* 장유(1587, 선조 20년~1638, 인조 16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장생의 문인이다. 일찍이 양명학을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의 편협한 학문 풍토에 대해 “학문이 실심(實心)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황한 것이 되고 만다.”라고 비판했다. 주자와 반대되는 것이 많다 하여 비판도 받았지만, 송시열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견줄 만한 이가 없다.”라고 했다. 천문, 지리, 의술, 병술 등 각종 학문에 두루 능통했으며, 서화와 문장에도 뛰어나 이정구, 신흠, 이식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로 불렸다.
* 영평 – 지금의 경기도 포천군에 속한 고을로, 이서구의 집이 여기에 있었다.
* 강목 – 송나라 때 주자가 지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말한다. 이것은 사마광이 이백구십사 권을 지은 편년체 역사책인 [자치통감]에서 요목만 뽑아 59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 최응과 심 순택이 시험을 주관하면 실력 없는 자들이 좋아했다.
흥인군 이 최응과 심 순택(沈舜澤)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명관(명관)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몽매하여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시권(試券)을 대할 때마다 잘되고 못된 것을 분간하지 못했으므로 운이 좋으면 급제하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졌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시험을 주관하면 문장 솜씨가 없는 다들이 모두 좋아했다.
* 명관 – 조선시대 임금이 친히 임한 과거를 주관하던 시험관.
생원과 진사
우리말에 유생으로 늙은 자를 가리켜 생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회시에서 생원에 합격한 자까지 함께 진사라고 부르니, 이는 (생원에 합격한 자들이) 유생과 같이 (생원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초시에서 승보시와 복시로 뽑혀 올라간 자들은 모두 경향(京鄕)에서 유력한 자들이었으므로 더욱 생원이란 칭호를 싫어하여 초장에 많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다 같은 회시라도 진사 시험이 더 어려웠다. 근자에 기회를 엿보는 데 재빠른 자들은 오히려 생원 시험이 쉽다 하여 종장으로 몰려드는 예가 적지 않다.
거벽과 사수
요즘 서울 사대부들은 부귀를 누리며 한가롭게 노니느라 평소 붓을 잡지 않고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려다 놓고 양육하다가 과거 시험이 있으면 급히 데리고 들어가 사역을 시켰다. 이때 대신 글 짓는 자를 거벽(巨擘)이라 하고, 대신 글씨 쓰는 자를 사수(寫手)라 한다. 그들은 드러누워 *조보(朝報)를 들춰보다가 아무 날에 어떤 과거를 실시한다는 기사만 보면 소리쳤다. “거벽과 사수는 어디 있느냐?” 지방 부자들도 이를 따라 하니, 시관이 아무리 공평하게 채점하더라도 선발한 자들은 모두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이에 “공자가 시관을 하고 *석숭(石崇)이 장원으로 뽑혔다(孔子爲考官 石崇作壯元)는 노래가 불렸다.
* 보조 – 조선시대 승정원의 발표 사항을 필사해서 배포한 관보. 여기에는 조정의 결정 사항, 조칙, 장계, 관리 임면 사항, 사건 등을 실었다.
* 석숭 – 중구 서진(西晉)의 부호로, 무역과 항해로 거부가 되었다.
과거 급제 값이 만 냥까지 오르다.
초시를 매매하기 시작할 때는 이백 냥도 받고 삼백 냥도 받아 가격이 고르지 않았다. 오백 냥을 달라면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갑오년(1894, 고종 31년) 이전의 몇 차례 과거에서는 천여 냥씩 해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회시에서는 대략 만여 냥 했으니, 돈이 차츰 많아질수록 그 값어치가 천해졌기 때문이다.

낙폭 전
(시권을 채점하러 서울에서 내려간) 경시관은 녹봉이 없고 오직 임금이 하사하는 노자 팔백 냥만 받았다. 이에 방을 내건 뒤 거둔 묵권(墨卷)을 팔았는데, 이것을 낙폭 전(落幅錢)이라고 불렀다.
충무공의 팔대손이 시원치 않다.
충무공의 종손 이 문영(李文榮)은 외양이 볼품없고 기개도 활달하지 못했다. 병자년(1876, 고종 13년) 봄에 흑전청륭이 강화도에 배를 대고 있었으므로 조정과 민간이 모두 두려워했다. 마침 이 문영이 운현을 뵙게 되자 운현이 우스갯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충무공의 후손이니 왜놈을 격파할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이 문영이 즉시 대답했다. “대감께서는 급히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들을 막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어떤 계책이 있는가?” “충무공의 팔대손이 이처럼 못났으니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의 팔대손인들 어찌 영특하고 용감하겠습니까.” 이 말을 듣는 자마다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그때 흑전청륭이 가등청정의 팔대손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문영 역시 충무공의 팔대손이었다.
충무공과 우암의 후손 가운데 청렴한 자가 없다.
선유(先儒)로는 우암(송시열)을 추앙하고 충훈(忠勳)으로는 충무공을 추앙하는데, 조정에서는 그 후손을 융숭히 대접하여 다른 명신의 집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두 집안의 후손들은 벼슬하면서 탐욕스러운 일을 많이 저질러 청렴 결백하다고 알려진 자가 없다.
신래 길들이기.
신래(新來)를 부르는 것은 고려 말의 *홍분방(紅粉榜)에서 시작되었는데,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이름난 선배 관원이 과거 급제자의 집에 찾아가 소리쳐 부른 뒤, 오라 가라 하며 수없이 욕을 보이며 몹시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는데, 이를 ‘신래’라고 했으며 ‘묵희(墨戱)’라고도 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신래 부르는 자가 없으면 세상에서는 부끄럽게 여겼다. 아무리 선배라 하더라도 반드시 문벌과 지위가 서로 비슷해야 신래를 부를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선배라도 문과를 통해 진출한 자가 아니면 문과 급제자를 부를 수 없었고, 오직 문과 출신이라야 대과와 소과 급제자를 아울러 부를 수 있었다. 소과 출신은 소과 급제자를 부를 수 없었는데, 만약 부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 명의 소과 출신자가 모여야만 한 명의 소과 급제자를 부를 수 있었다. 무과 급제자도 무과 출신자가 불렀다.
* 홍분방 – 나이가 어린 권문자제가 과거에 급제한 일을 놀림조로 이르던 말.
민 영익의 벼슬이 일 년에 몇 차례씩 뛰어오르다.
민 영익이 벼슬을 시작하면서 이튿날 *대교가 되고 그 이튿날은 한림(翰林)이 되며 또 그 이튿날은 *주서(注書)가 되었다. 깨끗하고 화려한 벼슬을 두루 맡지 않은 것이 없더니 일 년 사이에 통정대부에까지 뛰어올랐다. 임금과 왕후가 몹시 총애하여 그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하루에도 세 번 입궐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손님들이 몰려들어 나중에 온 자는 종일 기다려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민 규호가 임금께 말했다. “나이가 어린 자는 글을 읽으며 수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직에 두어 나랏일을 망치게 하고 남들에게 비방을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민 영익이 이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민 규호가 임금께 아뢸 때마다 민 영익이 따라다니며 막아서 드디어 둘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 대교, 한림, 주서 – 대교는 예문관의 정 8품 벼슬이었는데, 나중에는 규장각의 정 7 품부터 9품까지도 대교라고 했다. 한림은 예문관 검열(檢閱)의 별칭이고, 주서는 승정원의 정 7품 벼슬이다.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문장 솜씨를 인정받은 젊은 문관들이 거치는 벼슬로,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민 영익의 집에 필학사가 드나들다.

민 영익의 자는 자상(子相)이고 호는 운미(芸楣)이며, 임금께 하사 받은 호는 예정(禮庭)이다.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고 글과 그림을 좋아했다. 경박하고 아부하는 자들이 다투어 밀려들어 몹시 시끄러웠으며, 행동거지가 일정하지 않아 어린아이의 짓거리 같았다. 당시 민 영익의 집에 드나드는 자들을 팔학사라고 했는데, 이중칠(李重七), 조동희(趙同熙), 홍영식(洪英植), 김흥균(金興均),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 김옥균(金玉均), 어윤중(魚允中)이 그들이다. 민 영익의 서첩을 본떠 글씨를 쓴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지만 어윤중만 혼자 정색하며 말했다. “영감은 금일 책임이 매우 크고 나랏일이 모두 자신의 집안일처럼 되었는데, 어찌 붓을 휘둘러 허물을 보태어 일을 방해하고 정신을 손상시키십니까?” 민 영익이 낯빛을 고쳐 사죄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아첨을 잘한 것이라고 했다.
좋은 자리는 민 씨와 민 씨 사돈들이 차지하다.
민 영목(閔泳穆)은 민 영익과 먼 친척인데, 문장을 잘하고 분별력이 있어 여러 민 씨들이 차츰 훌륭하게 여겼다. 그 역시 남을 뛰어넘으며 발탁되어 몇 년 만에 정경에 이르렀다.
그때 민 영위(閔泳緯), 민 영규(閔泳奎), 민 영상(閔泳商) 등이 모두 화려한 요직에 있었으며, 밖으로는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좋은 자리는 모두 민 씨가 아니면 민 씨의 사돈들이 차지했다. 게다가 명성(明成)도 자기 집안에 빠져서 성이 민 씨이면 촌수가 멀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고 하나로 여겼는데, 몇 년 사이에 먼 시골까지 이어졌다.
민 씨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의기양양하여 사람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러나 여러 민 씨들은 모두 양자로 들어온 이들로, 민 정중(閔鼎重)과 민 유중(閔維重)의 피붙이는 민 영익 부자와 민 영위뿐이었다.
고종은 친척을 멀리하고 왕후는 친정을 가까이하다.
문정공(文正公) 송 준길(宋浚吉)은 우복(愚伏) 정 경세(鄭經世)의 사위이며, 민 유중은 송 준길의 사위다. 명성은 문정공의 집안에 대해 가까운 외가의 의를 느꼈고 정 씨 집안을 추대하여 외척처럼 여겼다. 그리하여 두 집안의 후손들은 크게 은택을 입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자들이 잇달았다. 이때 임금은 운현 때문에 친척들과 사이가 멀어져 꺼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전(內殿)은 친척과 화목한 관계를 줄이고, *대전(大殿)은 늘였으면 좋겠다.” 왕후는 정 경세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 내전과 대전 – 내전은 왕후이고, 대전은 임금이다.
김 좌근의 첩 나합의 손에서 수령들이 많이 나오다.
*나합(羅閤)은 죽은 재상 김 좌근의 첩이다. 나주 기생으로 김 좌근의 집에 들어갔는데, 지략과 술수가 많고 살펴 헤아리기를 잘했다. 김 좌근이 그 독에 빠져 들었다가 오랜 뒤에는 그 여자에게 제압되었다. 그 여자와 더불어 국정을 논하게 되었으니, 많은 방백과 수령들이 그 여자 손에서 나왔다. 버젓이 빈객들과 간통하여 한때 그 권세가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으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아첨하면서 나합이라 불렀다. 한 번은 참판 조 연창(趙然昌)이 나합의 부름을 받고 서로 마주 앉아 있는데, 김 좌근이 갑자기 들어오다가 그를 보고 꾸짖었다. “영감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소?” 나합이 깜짝 놀라 웃으면서 말했다. “대감도 이미 관상을 보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관상을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김 좌근이 이렇게 말하며 나갔다. “그랬군 그래.” 조 연창은 평소 관상을 잘 본다고 이름났는데, 나중에 조 병창(趙秉昌)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 나합 – 나주(羅州)와 합하(閤下)의 준말, 합하는 신분이 높은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삼공이나 대신의 집에는 샛문(閤)이 세워져 있어 그렇게 불렀다.
김 홍집이 [이언]을 고종에게 바치다.

경진년(1880, 고종 17년) 10월에 김 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와 [이언(易言)] 두 책을 임금께 바쳤다.
[이언]은 청나라 사람이 지은 책으로, ‘오늘날 부강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서양 제도와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무려 수십만 자에 달하는데, 대개 책사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남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의 마음과 같이 되기를 바라며 내놓은 견해다.
황 준헌(黃遵憲)이 이 책을 갖고 일본에 갔는데, 김홍집이 얻어다 임금에게 보이려고 했다.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천하대세를 조용히 살펴보게 하고 어느 쪽이 좋을지 자문하려고 한 것일 뿐, 사사로운 뜻을 숨겨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곡해한 유생들이 김 홍집이 천주학 서적을 임금께 바쳤다고 여겨 공박하는 의론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이 항로의 문하에서 최 익현과 류 인석 등이 나오다.
이 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최 익현, 김 평묵(金平默), 홍 재학(洪在鶴), 유 인석(柳麟錫) 같은 이들이 앞뒤로 기백과 절의를 드러내고 명분과 의리로 영향을 미치자 세인들이 (이 항로를) 강학가(講學家) 중에서 빼어나다고 했다.
지 석영이 우두법을 배워 오다.
우리나라에 두진(痘疹 -천연두)이란 병이 있는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천기에 따라 전염되기 때문에 시두(時痘)라고 하는데, 때가 되면 전염된다. 백 년 전부터 차츰 기술이 좋아져 비로소 접종법을 발명했는데, 이를 종두(種痘)라고 한다. 종두를 맞으면 잠시 전염된 듯하다. 시두는 증세가 상당히 위험해서 어릴 때 죽는 이들이 줄을 이었는데, 종두를 하면 감염이 되더라도 독이 차츰 죽으므로 완치하기가 아주 쉽다. 근세에 우두법(牛痘法)이 서양에서 나와 오대주에 이르기까지 성행한 지 이미 수십 년이나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 지 석영(池錫永)이란 자가 살고 있었는데, 역관의 집에서 태어나 시를 익혔고 서화도 알았다. 일본에 유학 갔다가 우두를 배웠는데, 기묘년(1879, 고종 16년)과 경진년(1880, 고종 17년)에 서울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지방의 노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쳤다. 그리하여 우두법이 차츰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 종두는 시두 치료법으로 완전하다고 할 만하지만, 어쩌다 부작용으로 죽는 자도 있었다. 우두법이 나오면서 만 명 중 한 명도 죽지 않게 되자 드디어 종두를 폐지했다. 그러나 우두를 처음 시작할 때도 사람들은 종두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여전히 의심을 품었다.
석유를 수입하다.
석유는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는데, 어떤 사람은 바다 가운데서 꺼낸다 하고 어떤 사람은 석탄에서 빼난다 하며 어떤 사람은 돌을 삶아서 걸러 낸다고 하는 등 설이 다양하나 천연자원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진년(1880, 고종 17년)부터 석유를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빛깔이 붉고 냄새가 고약했으며 한 홉으로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 몇 년 되지 않아 빛깔이 희어지고 냄새도 좋아졌지만 화력이 줄어들어 한 홉으로 겨우 사나흘 밤 밖에 쓸 수 없었다. 석유가 등장하면서 산이나 들에 기름 짜는 열매가 더는 번성하지 않았으며, 온 나라에 아래위를 막론하고 석유 등잔 없는 집이 없었다. 대체로 같은 성질의 물건은 양쪽이 다 클 수가 없다. 가령 서양 솜이 나오면서부터 목화 농사가 시들해졌고, 양철이 나오면서부터 철광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종종 나타나니 토한 이상한 일이다. 석유가 나타나면서부터 양수호통(洋燧火筒)도 성행했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자기황(自起黃)이라 불렀다.
* 자기황 –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유황’이라는 뜻으로 성냥을 말한다. 양수는 서양 부싯돌을 말한다.
공산품을 들여오고 천연자원을 내보내다.
개항 이래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물건은 그 값이 매우 쌌는데, 장사꾼들이 넘겨다 팔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일본인들의 속임수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심해졌는데, 모두 우리나라 간사한 자들이 그렇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수입한 외국 상품 가운데 열의 아홉은 공산품이고 외국으로 나가는 우리 상품은 열의 아홉이 천연자원이니, 우리의 아둔함이 너무 심하다. 대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상품은 비단, 시계, 칠기 등 교묘하고 기이한 물건이며, 외국으로 나가는 상품은 모두 쌀, 콩, 가죽, 금, 은 등 평소 생활에 필요한 보화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척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년 백여 명을 천진으로 유학 보내다.
신사년(1881, 고종 18년) 가을에 김 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삼아 중국 천진(天津)에 보냈다. 그때 임금이 외교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는데, 왜국이나 서양을 많이 의심하고 오직 청나라에게만 급한 형편을 의지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북학(北學)이 거론되었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돌봐 주던 이 홍장(李鴻章)이 그때 북양총독(北洋總督)이 되어 천진에 관청을 설치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문무관의 자제 가운데 총명한 자 백여 명을 뽑아 김 윤식으로 하여금 이끌고 가서 이 홍장의 도움을 받아 중국이나 서양의 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신사유람단을 일본으로 보내 정세를 엿보다.
김 윤식이 천진으로 떠난 뒤 조정에서는 다시 관리 가운데 재주와 덕망이 있는 자를 뽑았으니, 어 윤중, 박 정양(朴定陽), 심 상학(沈相學), 조 준영(趙準永), 염 세영(廉世永), 조 병직(趙秉稷), 이 원회(李元會) 등 여덟 명이다. (한 사람은 생각나지 않는다. -원주). 이들을 유람조사(遊覽朝士)라고 불렀는데, 일본으로 들어가 정세를 엿보게 했다. 얼마 뒤 모두 돌아왔지만 어 윤중만은 (일본) *강호(江戶)에서 곧바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임금이 글을 보내 중국을 두루 둘러보면서 한 가지라도 얻어 오라고 했기에, 임금의 원대한 계략에 조금이라도 부응하려고 한 것이었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감탄하며 말했다. “어 윤중이 두 차례나 큰 바다를 건넜으니, 이는 내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자신의 괴로움을 잊고 간 것이다.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조 영하(趙寧夏)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허락도 없이 국경을 넘어간 죄인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강호 – 도쿄의 옛 이름.
을사년 태생 네 사람의 부귀가 극에 달하다.
조 성하(趙成夏)와 그의 사촌 아우 조 영하, 이 재면과 조 경호(趙慶鎬)는 모두 을사생(1845, 현종 11년)으로, 다 같이 부귀가 극에 이르렀다. 장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사을사(四乙巳)라 했다. 굶어 보지 않으면 먹어도 맛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상례인데, 조 성하는 자라면서 고량진미로 날마다 여섯 끼씩 먹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평생 음식 맛을 몰랐다.” 당(堂)을 내려갈 때마다 그는 가마가 아니면 수레를 탔기 때문에 일 리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대개 근세에 귀인이라고 불린 자들은 어릴 때 가난했거나 늘그막에 실패했는데, 오직 조 성하만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부귀가 극에 이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조 성하를 가리켜 태중귀인(胎中貴人)이라 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다.
임오년(1882, 고종 19년) 6월 9일(계해)에 경영군(京營軍)이 큰 소란을 일으켰다.
갑술년(1874, 고종 11년) 이래 대궐에서 쓰는 비용이 끝이 없다 보니 호조나 선혜청의 창고가 고갈되어 경관(京官)의 월급도 주지 못했고, 오영(五營) 군사들도 자주 끼니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영을 없애고 이영(二營)을 세워 노약자마저 쫓아내자 쫓겨난 자들이 갈 곳이 없었으므로 팔을 걷어붙이고 난리를 일으킬 생각을 했다. 이때 군인들의 월급은 이미 반년이나 밀려 있었다. 마침 호남의 세미선(稅米船) 몇 척이 경창(京倉)에 이르러 짐을 풀게 되자 군인들의 밀린 월급부터 먼저 주게 했다.
선혜청 당상 민 겸호 집의 하인이 선혜청 창고지기로 출납을 담당했는데, 그가 속임수로 쌀에 겨를 섞어 사사롭게 많은 이익을 챙겼다. 이에 많은 군인들이 크게 분노하여 갑자기 일어나 그를 두들겨 팼다. 민 겸호가 주동자를 잡아서 포도청에 가두어 죽이겠다고 선언하자 군인들이 더욱 원망하고 분노하여 칼을 뽑아 땅을 치며 말했다.
“굶어 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죽는 것이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찌 마땅히 죽일 놈을 죽여서 억울함을 풀지 않으랴.” 마침내 서로 호응하여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크게 외치고는 곧바로 민 겸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점거하니, 진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군중이 외쳤다.
“한 푼이라도 훔쳐 가는 자는 죽이자.” 물건을 뜰에 모아 불을 지르자 비단과 구슬에서 오색 불꽃이 타오르고, 인삼, 녹용, 사향 타는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펴졌다. 민 겸호는 담장을 넘어 달아나 대궐 안에 숨었다.
임오군란 당시의 구식 군대

1881년 일본의 지원으로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하고 이듬해 종래의 오영(五營)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 이영(二營)으로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된 구 군영의 군병들은 자신들보다 월등히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했다. 게다가 구군영 소속의 군병들에게 십삼 개월이나 급료를 지급하지 않자 그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1882년 6월 9일에 이영의 군사들이 일본공사관과 별기군을 급습했는데, 그 결과 별기군 교관인 일본의 굴본예조와 고관 이 최응, 민 겸호가 살해되고 명성황후는 피신길에 올랐으며, 고종 친정 이후 세력을 거세당한 대원군은 이 사건을 이용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굴본예조가 죽고 화방의질은 달아나다.

일본으로 탈출한 화방의질 일행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당시 일본 공사관의 화방의질 일행은 인처으로 탈출한 뒤 영국 군함 비어호 편으로 서둘러 귀국했다. 가운뎃줄 중앙에 있는 자가 화방의질이다.
이해 봄에 장정들을 모집하여 외군식으로 군사 훈련을 시켰는데, 이를 별기대(別技隊)라고 불렀다. 왜군 굴본예조(堀本禮造-호리모토 레이조)가 교관이었는데, 남산 북쪽에 훈련장을 만들었다. 총을 메고 뛰느라 먼지가 날려 공중을 덮으니, 장안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개화 이래 이해를 분간하지 않고 왜놈들 이야기만 나오면 어금니를 갈며 죽이려 했는데, 일반 백성들은 더욱 심했다. 이때 성난 군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들을 뒤쫓으니, 굴본에조는 훈련장에서 *구리개로 달아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그 밖에도 성에 들어왔다가 죽은 왜놈이 일곱이나 되었다.
난민들이 *천연정(天然亭)을 에워싸고 손에 몽둥이를 들고 죽이겠다고 외쳤다. *화방의질(花房義質-하나부사 요시모토)과 그를 따르는 왜놈들이 무리를 이루어 달아났는데, 포를 쏘고 칼을 휘둘러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달아나 인천에 다다랐는데, 길가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화방의질은 인천에 이르러 부사 정 지용(鄭志鎔)에게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공무로 동래까지 가야 합니다. 공은 배를 마련하여 우리를 보내 주시오.” 그들이 조금도 틈을 주지 않고 재촉하자 정 지용이 증명서를 보여 달라고 했다. 화방의질이 증명서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는 당시 경기도관찰사로 있던 김 보현(金輔鉉)이 정지용이 왜놈들의 출국을 막을까 염려하여 화방의질의 요구대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화방의질은 곧 배를 타고 달아났다. 다음날 서울에서 군대가 추격해 이르자 정 지용은 김 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국이 갑자기 변한 것을 알고 약을 먹고 죽었다.
* 구리개 – 지금의 을지로 입구 일대를 가리키며, 동현(銅峴)이라 했다.
* 천연정 – 독립문 근처에 있던 누각으로 일본 공사관이 여기에 있었다.
* 화방의질 - 1871년부터 조선에 와서 통상 업무를 보았으며, 대리공사로 있다가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 뒤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다시 돌아와 제물포조약을 채결했다.
왕후는 달아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다.
6월 10일(甲子)에 난병들이 대궐에 침입하니, 중궁은 밖으로 달아나고 이 최응, 민 겸호, 김 보현은 모두 살해되었으며 대원군 이 하응이 정사를 맡았다.
이날 새벽에 난병이 흥인군의 집을 에워싸니, 이 최응이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창에 찔려 돈화문으로 향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총알이 문짝을 맞혔는데, 멀리서 들으니 콩 볶는 소리 같았다. 궐문이 열리자 여러 사람이 따라 들어갔다.
” 임금이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원군을 부르자 대원군이 난병을 따라 들어갔다 난병들이 대전으로 올라가다가 민 겸호와 마주치자 그를 끌어 잡아당겼다. 민 겸호는 당황하여 대원군을 붙들고 머리를 도포 소맷자락 속으로 들이민 채 호소했다.
“대감! 날 좀 살려 주시오.” 대원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이 민 겸호를 층계 아래로 잡아 내리고 총칼로 마구 때려 짓이겼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쳤다.
“중궁은 이디 있느냐?” 그들의 말은 흉악하고 무도하여 차마 다 들을 수 없었다. 사방을 수색하느라고 장막과 벽을 창으로 찔렀는데 마치 고슴도치 같았다. 이때 부대부인(府大夫人)도 입궐했는데, 중궁을 몰래 데려다가 사인교(四人轎) 안에 숨기고는 휘장으로 가리고 나왔다. 궁인 하나가 이들을 가리키자 난병들이 사인교의 휘장을 찢고 중궁의 머리채를 끌어내 땅바닥에 팽개쳤다.
무예별감(武藝別監) *홍 재희(洪在羲)가 크게 외쳤다. “이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이니 오인하지 말라.
그가 중궁을 등에 업고 달아나자 군중이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김 보현은 경기감영에 있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창황히 대궐로 들어갔다. 승정원에 이르자 그의 조카 김 영덕(金永悳)이 승지로 입직하고 있다가 그를 만류하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오늘의 사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들어가지 마십시오.”
김보현이 옷자락을 뿌리치고 나서면서 말했다.
“내가 재상의 지위만 차지한 채 책임을 다하지 못한 데다 또 방백까지 맡고 있다. 이제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으니, 비록 죽는다 해도 어찌 가보지 않겠느냐?”
결국 그는 입궐하다가 섬돌에서 맞아 죽었다. 군중이 그의 시체를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놈은 돈을 좋아했으니 돈으로 그 배를 채워 주는 게 좋겠다.”
이에 그의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대로 마구 짓누르니, 엽전이 갈비뼈 사이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민 겸호의 시신과 함께 끌어다가 궁궐 개천에 버렸다. 마침 큰 비가 와서 물이 불어 개천이 넘쳤는데, 날씨까지 흐리고 무더워서 시신이 버려져 있는 며칠 동안 살이 물속에 잠겨 하얘졌다.
그것은 (짐승을) 잡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 홍재희 – 나중에 홍계훈(洪啓薰)을 이름을 바꾸었다.
인심을 얻은 김 병시와 조 영하는 살아남다.
임금이 중궁과 서로 떨어졌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하여 두려워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병시(金炳始)가 임금을 업고 조 영하가 그 뒤를 지키며 별전으로 피했다. 난병들이 섞여서 따라왔지만 그가 김 병시인 것은 알지 못하고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놈도 죽여야 한다.” 마침 그를 알아보는 자가 있어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승동(升洞) 대감이다. 죄가 없는데 어찌 범할 수 있느냐.” 조 영하는 몇 년간 훈련대장으로 있었으므로 훈국 병사들이 모두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는데, 평소 그들을 잘 어루만졌기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대원군이 예전 제도를 되살리다.
임금이 대원군에게 군국사무(軍國事務)를 처분하라고 명했다. 대원군이 곧 대궐 안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려 기무아문(機務衙門)과 무위영(武威營), 장어엳(壯禦營)을 폐지하고, 오영군(五營軍) 제도를 되살렸다. 그리고 군인의 급료를 지급하게 하고 난병을 물러가게 한 뒤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난병들이 죄지은 민 씨들의 집을 불태우다.
난병들이 대궐에서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성 안팎의 여러 민 씨들 가운데 죄악을 일삼던 자들, 세도를 부이던 재상들, 애인들과 결탁하여 시세에 영합하며 은혜를 구하던 자들의 집은 모두 불타고 부서졌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전 참판 민 창식(閔昌植)도 살해되었는데, 그는 노봉(老峰) 민 정중의 종손으로 음탕하고 더럽고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동료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색력(色力)도 뛰어나 일찍이 승정원에 입직하면서 양경(陽莖)을 발기시켜 창호지를 뚫은 적도 있었다. 그의 더러운 짓이 이와 같았는데도 늘 동궁(東宮)의 벼슬을 지냈다.
민 영익이 보리밥에 부추김치를 맛있게 먹다.
민 영익은 머리를 깎고 삿갓을 쓰고 짚신을 신은 채 뒤뚝거리며 하루에 팔십 리를 달아나, 양근(양근)에 있는 김오위장(金五衛將) 집에 이르렀다. 김오위장은 그의 식객이었다. 보리밥에 부추김치를 차려 대접하니 민영익이 배불리 먹은 뒤 숟가락을 놓고 감사하며 말했다. “어찌 이렇게도 맛이 있는가?” 김오위장이 웃으며 말했다. “영감께서 이런 일이 없었다면 어찌 이 맛을 아셨겠습니까? 소인의 음식이 비록 거칠지만 영감 댁에서 식객들에게 먹이는 음식에 비하면 잘 차린 것입니다. 영감께서 댁으로 돌아가시면 밥 짓는 계집종들에게 주의를 주십시오.” 그러자 민 영익이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했다.
조 충희가 말 판 돈을 왕후의 피난 비용으로 바치다.
중궁이 대궐을 빠져나가 화개동에 있는 전 사어(司御) 윤 대준(尹泰駿)의 집에 몰래 이르렀다. 윤 태준이 중궁을 곁방에다 모시자 익찬 민 응식(閔應植)과 진사 민 긍식(閔肯植)이 문밖에서 엎드려 모셨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끝까지 머물 수가 없었으므로 시골로 피난 갈 생각을 했다. 여비가 없음을 걱정하다가 윤 태준이 전 승지 조 충희(趙忠熙)에게 소식을 보내자, 조 충희가 마침 말 판 돈 오백 민을 가지고 있어 그 돈을 모두 바쳤다. 이것으로 가마를 세내어 중궁을 모셨는데, 두 민 씨와 이 용익(李容翊)이 따라갔다. 여주에 이르러 전 판서 민 영위의 집에 며칠 있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 민 응식의 집으로 갔다. 중궁이 복위하자 조 충희를 영광군수로 임명했다.
왕후가 피난길에서 모욕당한 마을을 없애다.
중궁이 (피난하면서) 한강을 건너려고 하자 뱃사공들이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 ”서울에서 뱃길을 끊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행색이 의심스러우니 건네줄 수가 없습니다.” 중궁이 금가락지를 빼 가마 밖으로 던져 주자 비로소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광주를 지나 쉬는데, 어떤 촌 할미가 다가와 보고는 피난 가는 아낙네로 생각하여 떠들며 말했다. “중전이 음란하여 이런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 오게 되었구려.” 중궁은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환궁한 뒤 이 마을을 모두 없앴다. 따라간 자들이 뱃사공의 죄도 다스리자고 했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서자 이 재선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다.
신사년(1881, 고종 18년) 겨울에 이 재선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재선은 운현의 서자로, 갑자년(1864, 고종 1년) 이후 별군직에 있었지만 머리가 아둔하여 콩과 보리를 분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운현에게 서자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운현이 세력을 잃은 지 오래되자 그의 가까운 문객으로 알려진 자들도 정권에 소외되어 폐적(廢籍)된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그들은 모두 이를 답답하고 분통하게 여겼다.
전 승지 안 기영과 권 정호가 유생 임 철호(任哲鎬), 정 건섭(丁健燮) 등과 함께 이 재선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중양절에 높은 산에 올라간다는 핑계를 대고 자기 친구 채 동술(蔡東述)을 끌고 남한산성으로 놀러 가 거사할 것을 알렸다. 채 동술은 위험을 느껴 응하지 않았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했다.
전 현감 유 도석(柳道錫)은 죽은 재상 유 후조(柳厚祚)의 손자로, 모의에 참여하면서 십 년 동안 경상감사 자리를 받기로 약속했다. 이 모의에 참석한 자는 남인과 북인뿐이었고, 노론으로서 참여한 자는 북촌의 서얼 몇 명뿐이었다. 광주의 토교(土校) 이 풍래(李豊來)도 모의에 참여했지만 정세를 관망하다가 역모를 고발했다.
이로써 안 기영, 권 정호, 임 철호, 정 건섭 이하의 여러 역적들이 처형당했고,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채 동술은 모의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고, 유 도석은 그의 할아버지가 임금이 등극하던 초기에 공을 세웠다 하여 사형을 면하는 대신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재선은 서대문 밖에 있는 민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슨 죄에 연루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슬퍼했다.
이 옥사를 왕후가 꾸몄다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안팎으로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 그러나 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변이 황후에게까지 미치자 사람들은 이 사건도 운현이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이 홍장이 마 건충을 보내 대원군을 납치하다.

7월 초에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이르렀고, 13일(정유)에 대원군을 구금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해 봄에 어 윤중은 상해에서 천진으로 가서 김 윤식이 있는 곳에 머물렀는데, 6월에 본국에 변란이 있어 중전이 시해됐다는 소식을 전보를 통해 알았다.
그는 김 윤식과 함께 이 홍장을 만나 (대원군의) 죄를 물으라고 간청했다. 이 홍장 또한 중국이 오랫동안 다투지 않았으니 한 번쯤 *외번(外藩)에게 위엄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마 건충(馬建忠)과 정 여창(丁汝昌) 등을 파견하고 수군 수천 명을 선발하여 별빛이 밝은 밤에 우리나라로 떠나게 했다.
그들은 남양 마산포에서 숭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는데, 민심을 달랜다 하여 군율을 엄히 하고 거동을 한가롭게 했다. 이에 서울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 건충 등이 대원군을 초대했는데, 대원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찾아가자 여러 장수들이 매우 정성껏 맞아 주었다. 두 번째 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다시 초대받자 대원군이 아무 걱정 없이 수레를 준비하라고 명했는데, 정 현덕이 말렸다.
“이번에 가시면 분명 돌아오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듣지 않았다. 청나라 진영 제1문에 이르자 수레에서 내리게 했다. 제2문에서는 따라온 자들을 막았다. 전날과 달리 변이 생긴 것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 건충이 대원군을 결박하라고 호령하더니 밀랍덩이로 그의 입을 막아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는 가마에 태워 힘세고 날쌘 장정 한 패로 하여금 교대로 들게 하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번개처럼 동작나루를 건너 마산포에 이르자 재빨리 떠났다.
시종들이 군영 밖에 있다가 대원군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묻자 그들이 거짓으로 답했다. “태공과 긴급히 타협할 일이 있다. 오늘은 군영에서 묵고 내일 돌아갈 것이다.”
이튿날 숭례문에 방을 붙어 서울 백성들에게 알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태공이 왕후 시해 사건에 간여했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힘들어 황제가 물어보고자 하여 어제의 일이 생겼다. 일이 밝혀지면 곧 돌려보내겠다.” 이에 서울과 지방이 크게 뒤숭숭해졌다.
* 외번 – 국경 밖에 있으면서 자기 나라를 방어해주는 속국을 말한다. 여기서는 조선을 가리킨다.
청나라 제독군문 오 장경이 왕십리 백성들을 살육하다.
청나라 시랑(侍郞) *오 장경(吳長慶)이 제독군문(提督軍門)으로 (마 건충)에 이어 부임했다. 오 장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군사를 풀어 성내를 도륙하려고 했다. “6월의 변란(임오란)은 예부터 들어 본 적이 없다. 위아래의 신민이 적을 하나도 토벌하지 못했으니. 법대로 하면 모두 죽여야 한다.” 마침 조 영하가 접대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중국말을 할 줄 알아서 힘껏 변명했다. 그는 대궐에서 오 장경의 진영까지 하루 밤낮에 열 번이나 오갔다. 오 장경이 수긍하고 허락하며 말했다. “앞장서서 난을 일으킨 자들은 훈련도감 군사들이다. 그들의 집이 왕십리에 많이 있으니 왕십리만 도륙하겠다.” 왕십리에 살던 난병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가족을 데리고 먼저 달아났다. 이때 달아나지 못한 노약자들만 수십 명 죽임을 당했다.
* 오 장경 – 임오군란 때 민 씨 일파의 요청으로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주하여 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했으며, 민 씨 정권의 배후를 뒷받침해주다가 이듬해 철수했다.
임오군란의 배상금을 사십만 원으로 협상하다.
왜국 공사 화방의질이 달아났다가 얼마 뒤 정상형(井上馨-이노우에 가루오), 고도병지조(高島鞆之助-다카시마 토모노스케), 인례경범(仁禮景範-니레 카케노리)과 함께 두 개 중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주했다. 그들은 군란에 대한 책임을 조선 정부로 돌린 뒤에 화의하자고 했는데, 매우 혹독하게 칙임을 추궁했다. 조정에서는 황급히 이 유원(李裕元)을 전권대신으로 삼고 협상하도록 했는데, 왜놈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어 죽은 왜놈들에게 오만 원을, 군비로 오십만 원을 배상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왜병이 서울에 주둔하게 되었다. 또한 저들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 만식(金晩植), 박 영효(朴泳孝), 김 옥균 등을 외국으로 보냈다. 당시 김 옥균 등은 미친 듯이 왜국을 흠모하여 개화에 열심이었다. 그가 정성껏 따르겠다는 뜻을 몰래 알리자 왜놈들이 기뻐하며 배상금을 사십만 원으로 줄여 주었다.
남산 발치 사십 리가 왜놈 마을이 되다.
공사 궁본수일(宮本守一-미야모토 슈이치)이 *녹천정(錄泉亭)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이곳은 남산 발치 주동(注洞) 마루에 있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하고 샘물이 솟아나는 깊숙한 곳으로 예전에는 양절공(襄節公) 한 확(韓確)의 별장이었고 근래에는 전 판서 삼상현이 머물렀다. 왜놈들이 다시 오면서 전보다 몇 배나 으르렁대고 능멸하자 조정에서는 그들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하여 자세를 굽히고 따랐다. 마침내 이 정자를 빼앗아 그들의 공관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차츰 차지하여 주동(注洞), 나동(羅洞), 호위동(扈衛洞), 남산동(南山洞), 난동(蘭洞), 장흥방(長興坊)에서 서쪽으로는 종현(鐘峴), 저동(苧洞)까지 미치고, 옆으로는 진고개 일대까지 뻗쳤다. 이로써 상남촌(上南村)의 오분의 사를 아울러 사십여 리가 모두 왜놈 마을이 되었다.
* 녹천정 – 원래 김 이양(金履陽)의 별장으로 경치가 좋기로 이름났다.
묄렌도르프가 외무협판에 임명되다.
목인덕(穆麟德 - 묄렌도르프: Paul George Mollendorff)을 외무협판에 임명했는데, 그는 덕국(德國-독일) 사람이다. 임금은 그가 외교와 통상에 임명했는데, 그는 덕국(德國-독일) 사람이다. 임금은 그가 외교와 통상에 뛰어나다고 몹시 사랑하여 박동에 집도 한 채 내려 주었다. 목인덕이 사모관대를 갖추고 다른 관리들처럼 조회에 참석하니, 백성들이 그를 목 참판이라 불렀다.

전환국을 설치하여 당오전을 만들다.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여 당오전(當五錢)을 만들어 내니 물가가 급등했다. 명목으로는 다섯 푼에 해당한다고 했지만 실제 가치는 한 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북쪽의 함경도 이십 개 군과 남쪽의 전주 이남과 경상도 일대는 예전처럼 엽전을 쓰게 했다.
김 옥균을 표경사로 임명하다.

김 옥균을 포경사(捕鯨使)로 임명했다. 그는 장 김의 먼 일가로, 그의 아버지 김 병기(金炳箕)는 음직(蔭職)으로 부사를 지냈다. 김 옥균은 재주가 많지 않아 급제한 지 십여 년이 되도록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서양 학문을 연구하고 손바닥을 치며 부강책을 담론하여 명예를 구했다. 박 영교(朴泳敎)와 그의 아우 박 영효, 이 도재(李道宰), 신 기선(申箕善), 서 광범(徐光範), 홍 영식 등이 서로 당을 지어 김 옥균을 영수로 추대했다.
이러한 소문이 임금에게도 알려졌는데, 김 옥균을 포경사(捕鯨使)로 임명했다. 그는 장 김의 먼 일가로, 그의 아버지 김 병기(金炳箕)는 음직(蔭職)으로 부사를 지냈다.
김 옥균은 재주가 많지 않아 급제한 지 십여 년이 되도록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서양 학문을 연구하고 손바닥을 치며 부강책을 담론하여 명예를 구했다.
박 영교(朴泳敎)와 그의 아우 박 영효, 이 도재(李道宰), 신 기선(申箕善), 서 광범(徐光範), 홍 영식 등이 서로 당을 지어 김 옥균을 영수로 추대했다. 이러한 소문이 임금에게도 알려졌는데, 기이한 재주와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 임금도 그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이에 특별히 포경사라는 벼슬을 만들어 먼저 김 옥균을 임명했다. 서양인들은 고래를 잡아 많은 이익을 얻었는데, 왜놈들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김 옥균은 문밖도 나서지도 않고 입으로만 고래잡이의 이익을 말해 당시 사람들이 비웃었다.
대신들이 무당 진령군에게 아부하다.
중전이 충주로 피난 가 있을 때 한 무당이 찾아와 뵙고 환궁할 때를 점쳐 주었다. 그 날짜가 들어맞자 중전이 신기하게 여겨 그 여자를 데리고 환궁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무당이 손으로 아픈 곳을 만져 주면 증세가 줄어들었다. 날마다 총애가 더해지니 무당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침내 무당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 정성껏 받들라.”
중전이 그 말대로 따르고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했다. 무당은 아무 때나 대궐에 나아가 임금과 중전을 뵈었으며, 때로는 남자 옷으로 단장하기도 했다 임금과 중전이 그를 가리키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군(君)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금은보화를 상으로 주니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화와 복이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렸으니, 수령 방백들이 자주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아부하니, 혹은 자매라 부르기도 했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
조 병식(趙秉式), 윤 영신, 정 태호(鄭泰好)가 특히 심했다. 무당에게는 김 창열(金昌烈)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버젓이 벼슬아치들과 자리를 나란히 했다. 무당은 본디 제천과 청풍 사이에 살았다고도 한다.
이 유인이 귀신 장난을 하여 진령군의 마음을 사로잡다.
이 유인(李裕寅)은 김해 사람으로, 가난하고 천한 무뢰배로 무과에 급제하여 서울 바닥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진령군이 정권을 휘두르며 잡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이 유인이 귀신을 부리며 비바람도 일으킨다”라고 전하게 했다.
진령군이 깜짝 놀라 즉시 그를 불러 귀신을 시험해 보라고 청했다. 이 유인이 말했다.
“그야 쉬운 일이지만 무서워 떨 것입니다. 며칠간 목욕재계해야 합니다.”
이 유인이 밖으로 나와 영남 사람들 가운데 떠돌아다니는 불량배들을 불러다 몰래 계략을 말해 주고, 정한 날짜가 되자 진령군을 끌고 한밤중에 북산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솔숲이 깊고 칠흑 같은 데다가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반짝거려 벌써 사람이 사는 곳과는 달랐다.
이 유인이 점잖게 말했다.
“내가 있으니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머릿수건을 휘두르며 불렀다.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그러자 귀신 하나가 엄숙히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온몸이 남청색으로, 열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서는 더 오지 않았다. 진령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에 뭐가 떨리겠느냐?”
이 유인이 말했다.
“조용히 하고 좀 기다리십시오.”
다시 불렀다.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그러자 키가 십 척쯤 되는 한 귀신이 나타났다. 온몸이 붉은빛이고, 머리는 기성(箕星) 같으며, 튀어나온 사각 눈은 붉은 유리 같았다. 입으로는 붉은 피를 내뿜어 비린내가 나는 것이 야차(夜叉)처럼 무서웠다. 손을 뻗으며 일어서니 진령군이 잠깐 쳐다보다가 이 유인의 발을 밟으며 말했다.
“빨리 거두어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붉은 귀신은 가면을 쓴 것이었다.
진령군이 돌아가 이 사실을 임금과 중전께 아뢰자 곧 이 유인을 입시케 했다.
그는 일 년 만에 양주목사에까지 이르렀다.
이 유인은 진령군과 모자의 연을 맺고 북묘(북묘)에서 머물렀는데, 추잡한 소문이 들렸다.
대원군의 측근 여덟 명에게 사약을 내리다.
4월에 전 판서 이 회정(李會正), 임 응준(任應準) 조 병창과 그의 아들 전 참판 조 채하(趙采夏), 전 승지 정 현덕, 조 우희(趙宇熙), 군수 이 원진(李源進), 전 교리(敎理) 이 재만(李載晩)에게 모두사약을 내렸다.
이 여덟 명은 모두 운현의 측근이다.
임오년(1882, 고종 19년) 여름에 운현이 달포 간 정권을 잡았을 때 이 회정은 예관(禮官)으로 국상 절차를 정했고, 임 응준은 *문임(文任)을 청나라에 아뢰는 글을 지었으며, 조 병창은 다시 막하에 들어가 비밀스러운 의견을 아뢰었다. 정 현덕과 이 재만 등은 운현의 수족으로 세상에 알려져 임금과 중전의 노여움을 샀다.
이들을 죽이자고 의논하니, 민 태호가 아래에서 그 뜻을 받들어 계획을 다 정했다.
민 태호가 개성유수로 임명되어 임금께 하직하고 서울을 떠난 그 이튿날 일이 일어났다.
재상 여덟 명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처형당하니, 백 년 이래 처음 있는 참사였다.
조 병창 부자가 죽으니 사람들이 더욱 슬퍼했다.
이날 명을 내리자 서울 안은 무서워 벌벌 떨었고, 남촌에 사는 주요 사대부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때 운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데다가 경향의 무뢰배들이 몰래 대궐로 들어가 임금께 아뢰었으므로 뜬소문이 일어났다. 임금은 조 병창 등 여러 사람이 모의를 할까 두려워 이들을 먼저 없애 버렸다.
* 문임 – 임금을 보좌하여 주로 글을 짓던 벼슬아치. 대제학이 가장 높다.

조선시대 관리의 행차 모습
구한말로 접어들면서 벼슬아치들의 부패상은 극에 달했는데, 마치 벼슬아치들이 수탈하기 위해 백성들이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정치 기강은 크게 흔들려 민중 봉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성주에 민란이 일어나 목사 이 용준을 내쫓다.
성주에 반란이 일어나서 목사 이 용준(李容準)을 내쫓았다. 당시 관리들이 탐욕스러워서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켜 내쫓았지만, 위아래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법 집행도 느슨했다. 쫓겨난 자는 서울에 들어가 줄을 잘 타 승진하여 다른 고을로 부임해 갔다. 관리를 임명할 때는 아무 고을의 수령이 병이 났으니 바꿔 달라고 청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고을의 수령과 서로 바꿔 주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민망하여 웃으며 서로 물었다. “아무개 수령이 병이 났는데 그대로 있으면 낫지 않고 고을을 바꾸면 낫는단 말인가?”
대원군의 측근 이 근수를 역모로 몰아 죽이다.
경상도의 사대부 가운데 이름난 집안은 대부분 남인이다. 운현이 (집권하던) 십 년 동안 이들을 잘 보살펴 주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은 뼛속 깊이 고마워하며 이구동성으로 대원군을 칭송했다. 대원군이 서쪽으로 끌려갔는데도 조정에서 모셔올 뜻이 없고 날마다 나쁜 소식만 들려오자 안팎에서 그를 가련하게 여겼는데, 특히 영남 사람들은 그를 친척처럼 가깝게 생각했다. 과거 응시를 포기하는 선비들도 많았는데, 세상이 이처럼 무도하니 사군자(士君子)가 과거에 응시할 시절이 못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근수(李根洙)는 문학을 잘하고 사람됨이 뛰어나며 남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수십 년간 지냈는데, 조 성하가 그를 국사(國士)로 대우했다. 운현과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임오군란 초에 이 근수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시국을 논하다가 몇 가지 정책을 건의가게 되었다. 그 내용이 운현에게 들리자 운현이 무릎을 치며 칭찬했다. 다른 사람과 마주하고도 큰소리로 말했다.
“국사를 의논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이 근수뿐이다.”
얼마 안 되어 또 변이 일어나자 운현의 여러 문객들은 저마다 의심하여 달아났고, 이 근수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방금 초시에 합격했지만 복시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더욱 비분강개하여 술을 마셨고, 화제가 시국에 미치면 눈을 부릅뜨고 노했다.
그의 친구 이 문구(李文九) 등도 그를 본받으니,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미워했다.
어사 조 병로(趙秉老)가 조정을 떠나며 사은하자 임금이 그러한 사실을 알려 주고는 차츰 커지는 세력을 없애라고 했다. 조 병로는 평소 잔인하고 혹독했는데, 이 근수 등을 붙잡아 상주 감옥에 가두었다.
그 무리를 심문하며 대꼬챙이로 찌르고 불로 단금질하는 등 *오독(五毒)의 고문을 가했다.
이 근수가 크게 외쳤다.
“선비는 저마다 뜻이 있다. 때에 따라서는 과거를 보지 않을 수도 있으니, 꼭 물어볼 것도 없다.
나는 모역을 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당이 있겠느냐? 죽이려면 편안하게 죽여라.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
이 탁원(李卓元)을 죄도 없이 끌어들이느냐?”
그러고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서 마침내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의 시신을 살펴보니 대꼬챙이에 찔린 곳이 대여섯 군데나 되었다.
그는 평소 이 건창과 가까웠는데, 이 건창이 슬퍼하며 *[추수자전(秋水子傳)]을 지었다.
이 문구 또한 이 일에 연좌되어 죽었다.
조 병로는 진주에 이르러 하루저녁에 갑자기 죽었다. 이 근수는 쇠같이 검붉은 얼굴에 키도 커서 신선이나 검객처럼 늠름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위험한 말을 많이 하다가 마침내 터무니없는 화를 당했다. 자기의 호를 위사(韋士) 또는 동인(桐人)이라고 했다.
* 오독 – 죄인을 참혹하게 다스리는데 쓰는 다섯 가지 형구로, 편(鞭), 추(箠), 작(灼), 휘(徽), 전(纏)을 말한다.
* 추수자전 – 이건창이 자신의 지기인 추수자 이 근수에 대해 지은 전으로 이 건창의 시문집인 명미당집(明美堂集)에 실려 있다.
복식 제도를 간편하게 개혁하다.
6월에 복식 제도를 개혁하여 공사 귀천에게 모두 새로운 법식을 반포했다. 박 영효 등은 서양 제도를 흠모하여 미친 듯이 좋아했다. 이에 임금께 복식 제도를 바꿀 것을 권하면서, 한 가지로 간편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급선무라고 했다. 민 영익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의논하고는 합당하다고 하여 윤 5월에 비로소 절목(節目)을 정했다.
공복(公服)은 소매가 넓은 홍단령(紅團領)을 없애고, 위아래 관리들은 모두 소매가 좁은 흑단령(黑團領)을 입도록 했다. 사복도 도포, 직령(直領), 창의(氅衣)처럼 소매가 넓은 옷은 다 없애고 양반과 천민이 모두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를 입도록 했다. 벼슬하는 사람은 전복(戰服)을 더하고, 그 밖의 자세한 조목은 대략 넓은 소매를 금하는 원칙에 따르며 지나친 장식도 없앴다.
그러자 나라 안이 발칵 뒤집히고 사람들이 새 절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언(正言) 이 수홍(李秀弘) 등이 상소했고, 옥당(玉堂)에서는 연명으로 상소했으며, 성균관 유생 심 노정(沈魯正) 등도 상소했다. 임하에서는 송 병선(宋秉璿)이 상소했고, 재상 가운데는 박 제교(朴齊敎)가 상소했다.
예조판서 이 인명(李寅命)은 곧바로 시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죄를 기다리며 상소했고, 지방의 대신으로는 *봉조하(奉朝賀) 이유원과 송 근수(宋近洙)가 상소했다. *시원임대신(時元任大臣) 김 병국, 홍 순목(洪淳穆), 김 병덕(金炳德) 등이 잇달아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려 힘껏 간했지만, 임금이 모두 물리쳤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멀어지고 조정이 야단법석을 떨다가 점점 가라앉자 비로소 안팎으로 반포하게 되었다.
* 봉조하 – 종 2품 관리가 퇴임한 뒤 특별히 임명되던 벼슬로, 의식에만 나가며 종신토록 녹봉을 받았다.
* 시원임대신 – 현직에 있는 대신과 전직 대신.
* 연명차자 – 두 사람 이상이 이름을 함께 써서 간단히 임금에게 아뢰던 일.
왜국 공사관을 새로 짓고 이사하다.
왜국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다케조에 신이치로)이 교동에 신관을 짓고 이사했다. 그는 문장을 잘했는데, 예전에 중국에 들어가 하남 성과 섬서 성을 거쳐 촉(蜀) 땅까지 들어갔다가 *삼협(三峽)으로 나와서 오(吳)와 초(楚)까지 이르렀다.
이 여행을 기록하여 [잔운협우기(棧雲峽雨記)]라는 책을 썼는데, 이 홍장이 머리말을 썼다. 공사로 임명되어 서울에 온 뒤 김 옥균과 한 무리가 되어 날로 친해졌다.
김 옥균 등이 정을 쏟으며 성원하여 이사를 시키고 가까이 끌어들였는데, 죽첨진일랑도 그대로 따랐다.
* 삼협 – 양자강 중류에 있는 무협(巫峽), 구당협(瞿塘峽), 서릉협(西陵峽)의 세 협곡을 가리킨다.
갑신정변이 일어나다.

고종 21년(1884) 10월 17일(무자) 밤, 박 영효와 김 옥균 등이 반란을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여 임금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고, 좌찬성 민 태호, 지사 조 영하, 해방총관(海防摠官) 민 영목, 좌영사 이 조연(李祖淵), 우영사 윤 태준, 전영사 한 규직(韓圭稷)을 속여 불러서 모두 죽였다.
환관 류 재현(柳載賢)은 역적들을 꾸짖다가 죽었다. 처음부터 박 영효 등은 왜국과 서양을 다녀와서 부강을 누리고자 했으며, 예전의 나라 풍속을 모두 버리고 서양 제도를 배워서 개화의 열매를 맺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임금이 우유부단한 데다 정책이 여러 곳에서 나와 획일적인 법을 시행할 수 없어 걱정했다. 이에 비밀스럽게 모의하여 임금을 위협하여 다른 궁으로 옮기고, 민 태호 등 수구파 대신과 장병들을 모두 제거하며, 왜놈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어 군대를 주둔케 하여 청나라 군사를 막으려 했다.
일이 성공하면 계획한 일을 차례로 시행하려 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꾀어 인천까지 가서 배에 태워 왜국으로 내보낸 뒤, 서양의 민주 제도를 본떠 박 영효 등이 임금을 갈아치우려 했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팔도를 분할해서 여러 역적들이 저마다 한 지방의 임금이 되려 했다”고도하며, 또 어떤 사람은 “청나라와 관계를 끊고 왜국과 손을 잡으며 임금을 높여 대황제로 만들려 했다”라고 한다.
그 뒤에 여러 역적들이 빠져나가 심문할 길이 끊어졌으므로 끝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거사를) 준비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모의한 사실이 차츰 새어 나갔다.
서 재필(徐載弼)은 윤 태준의 이종 조카로, 마침 윤 태준에게 들렸더니 윤 태준이 국수를 차려 주어 함께 먹었다. 윤 태준이 물었다. “바깥에서는 금릉위(錦陵尉-박 영효) 일파가 장차 대사를 거행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너는 듣지 못했느냐?” 서 재필은 대답하지 않고 수저를 놓은 뒤 곧 나갔다.
오래도록 들어오지 않아 내다보니 그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윤 태준이 크게 놀라 이 사실을 민 태호에게 알리자 민 태호가 말했다. “그대는 이제야 그 말을 들었는가? 나는 이미 오래전에 들었네. 그러나 믿기 어려운 점도 있으니 사헌부에 뜻을 알리고 상소하여 울릉도 사건을 논의하려고 하네.
김 옥균에게 캐묻는다면 반드시 단서가 잡힐 것일세.” 그때 김 옥균이 왜국에게 울릉도를 팔았다는 말이 있었다. 김 옥균 등은 계획한 일이 이미 드러난 것을 알고,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10월 17일 밤에 우정국에서 연회를 베풀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온 사람은 오직 민 영익뿐이었다.
여러 역적들이 민 영익을 친밀히 대접하니 거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얼마 뒤 밖에서 불이 일어나자 민영익이 이를 보려고 뛰쳐나갔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그를 칼로 내리치자 귀가 떨어지고 어깨에도 상처를 입었다.
민 영익이 땅에 쓰러지자 목 인덕이 그를 부축해서 달아났다.
박 영효 등이 대궐로 달려가 대궐 문밖 곳곳에 불을 지르게 하고 큰소리로 외쳐 기세를 돋웠다.
이어 중희당(重熙堂)으로 들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청나라 군대가 난을 일으켜 사태가 급박하니, 상감께서는 잠시 왜국 공사관으로 가셔서 관망하십시오.”
임금이 그 말을 따르려고 하자 중궁이 말했다.
“서둘러선 안 됩니다.”
그러자 박 영효 등이 온갖 협박을 하며 말했다.
“그러시면 경우궁으로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박 영교가 앞에 엎드려 임금을 끌어 업고 경우궁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임금에게 *‘일병래호’(日兵來扈)라는 네 글자를 써달라 하여 왜국 공사관에 전했다.
이에 죽첨진일랑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달려와 경우궁 담장을 에워쌌다.
날이 밝자 주모자들이 교지를 꾸며 민 태호 등을 불러들였다. 조 영하가 민 태호에게 말했다.
“사태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여러 병영의 군사들을 일으키고, 원세개(袁世凱) 진영에 연락하여 그들을 끼고 들어가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민 태호가 말했다.
“임금이 포위된 가운데 친히 조서를 내려 부르는데, 어찌 우리가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마땅히 먼저 들어갈 테니 공은 뒤처리를 잘하고 들어오시오.”
이때 조 영하도 창졸간에 따라 들어갔고, 민 영목 이하 여러 사람들도 어지러워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역시 감히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들어서자 서재필이 생도들을 이끌고 칼을 휘두르며 오는 대로 내리치니 모두 죽고 사지가 떨어져 나갔다. 임금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할 뿐이었다. 조 영하는 칼을 맞고 미처 죽기 전에 큰소리로 외쳤다.
“조선의 법에 누가 문신에게 칼을 차지 못하게 했느냐? 수중에 칼이 있어 너희 무리를 만 동강으로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내시 유 재현이 수라를 올리자 김 옥균이 발로 차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시국이라고 수라 따위를 편안하게 즐기느냐?”
류 재현이 크게 꾸짖었다.
“너희는 모두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출신이 아니더냐. 무엇이 부족해서 이처럼 천고에 없던 미치광이 반역을 일으켰느냐?”
김 옥균이 칼을 뽑아 베자 (류 재현이) 섬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임금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 김 옥균이 옥새와 *옥로(玉鷺)를 가져다 박 영효에게 주면서 말했다. “곧바로 즉위하는 게 좋겠소.”
여러 주모자들이 임금을 헤치려고 모의하자 심 상훈이 달래며 말했다.
“대가들이 무능하게 되었으니 공들은 실컷 안락하게 되었소. 이제 무엇을 꺼려서 (임금을 시해했다는) 천하의 악명을 얻으려는 것이오?”
이로써 모의를 그만두게 되었다. 심 상훈은 임금을 호위하다가 저들의 흉악한 행동을 보고 겉으로 붙어서 충성을 다했는데, 저들도 그를 신임했다. 임금이 다행히 죽음을 면했으니 심 상훈의 힘이 컸다. 시종 하던 여러 신하들도 그를 많이 신뢰했다.
* 일병래호 – ‘일본 군대가 와서 호위하라’는 뜻.
* 옥로 – 옥으로 해오라기의 모양을 만들어 갓머리에 달던 장식품으로 높은 벼슬아치나 외국에 가는 사신들이 썼다.

갑신혁신정강
갑신정변 때 개화당이 개혁 정책의 지침으로 공포한 정강으로, 청에 대한 사대 외교 폐지, 인민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지조법 개정, 국가 재정의 일원화, 내각 회의를 통한 군주권 제한, 내각 권한 확대 등이 골자다.
원 세개가 왜군을 물리치고 고종을 환궁시키다.
10월 19일, 청나라 제독군문 원 세개가 대궐에 들어와 호위하니, 왜병은 물러가고 임금은 북관묘(北關廟)에 행차했다. 홍 영식과 박 영교는 죽임을 당했고, 박 영효, 김 옥균, 서 광범, 서 재필, 등은 왜병과 함께 달아났으며, 임금은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원 세개는 하도감(下都監)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궁궐에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정세를 헤아릴 수 없어 갑옷을 걸치고 대기해 있었다. 전 승지 이 봉구(李鳳九)가 보루를 치고 크게 통곡하며 구원을 요청하자 원 세개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이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문에 이르렀다.
왜병들은 소나무에 의지하거나 담장 구멍을 통해 총을 비 오듯 쏘아 댔다.
원 세개가 변발한 머리를 목에 감고 뛰어올라 문을 지키던 병졸들을 죽이고 칼춤을 추며 충돌하니, 온몸이 마치 배꽃과 같았다. 총알이 어지럽게 땅에 떨어지는데, 여러 진영에서 온 우리 군졸들이 원 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들어갔다. 양군이 격전을 벌이다가 왜군이 조금 물러났다. 죽첨진일랑이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자 박 영효 등도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죽첨진일랑을 따라 달아났다.
임금이 명했다.
“창덕궁은 군사와 무기로 꽉 차 있으니 잠시 북묘로 행차하겠다.”
홍 영식과 박 영교는 판세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임금을 보시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라 생각하여 북묘까지 따라가 임금의 주위를 둘러서서 ‘어찰(御札)을 내려 원 세개의 군사를 물리치게 하라’고 힘껏 청했다.
임금은 아직도 두려움이 진정되지 않았는데, 잠깐만 일어나려고 해도 두 역적이 끌어 앉히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도 떠나실 수 없습니다.”
섬돌 아래에 있던 많은 군사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무예청에서 먼저 소리쳤다.
“다 같이 역적을 죽이자.”
모든 군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두 역적을 끌어다 땅바닥에 내던지고 칼로 짓이긴 뒤에 모두 만세를 불렀다. 임금이 궁을 깨끗하게 치우라고 명한 뒤, 북묘에서부터 청나라 통령(統領) 오 조유(吳兆有)의 영방(營房)을 두루 들렀다. 날이 저물고 길이 어두운데도 백성들이 기뻐 소리쳤는데, 집을 허물고 횃불을 내다 거는 자도 있었다. 이튿날 임금이 환궁했다. 이 싸움에서 원 세개가 거느린 군사는 이천 명이었다.
개화파가 왜국으로 망명하다.
도성 백성들은 왜당(倭黨-개화당)의 반역에 분노하여 저들을 만나기만 하면 잡아 죽이고 때로 몰려가 공사관을 불태웠다. 죽첨진일랑과 박 영효 등은 이미 달아났다. 죽첨진일랑은 인천에 이르러 천세환(천세환)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일본 공사관에는 큰 궤짝 하나가 있었는데, 태평관(太平館)이라 쓰여 있었다. 그 속에는 여러 역적들이 음모한 서류가 들어 있었는데,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처음에는 여러 역적들이 왜국과 약속하여 군함이 와서 도와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함이 바다 가운데까지 오다가 두 차례나 화통이 터져 수리하느라 여러 번 기일을 어겼다.
이에 여러 역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서둘러 거사를 일으켰다.
일이 실패하자 군함은 스스로 물러갔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왜놈 기림진삼(磯林眞三-이소바야시 신조)도 공사관이 불탈 때 죽임을 당했다.

도일 전의 박 영효
박 영효(1861~1939)는 1872년 철종의 사위가 되었으나 삼 개월 만에 사별했다. 큰 형을 따라 박 규수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북학파의 학맥을 이은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켜 일시에 병권을 장악하는 듯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1894년 봄, 동학란을 계기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귀국한 뒤, 김 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복귀했다.
갑신정변에 참여한 사관생도들을 처형하다.
생도 서 재창(徐載昌)과 오 창모(吳昌模) 등을 처형했다. 서 재창은 서 재필의 아우이며, 오 창모는 전 병사 오 진영(吳晉泳)의 서자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총명하고 준수한 젊은이들을 널리 뽑아 왜 말과 기예를 익히게 하여 왜 학생도(倭學生徒)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사대부 가운데 한미하고 가난한 자나 서얼, 중인, 무뢰배들이 많이 지원했다.
10월 변란 때 서 재필이 이들을 지휘했는데, 이때 죽은 여러 대신들이 모두 이들의 손에 당했다. 일이 실패하자 이들은 머리를 깎고 왜놈 옷을 입고 왜군과 섞여 달아났다. 함께 가지 못한 자들은 밤낮으로 내달려 동래관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왜놈들이 그들을 감싸 주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왜국으로 들어갔다. 오 진영은 (아들이 죄에) 연좌되어 유배지 하동에서 죽었다.
홍 영식의 아버지와 아내가 자살하다.
홍 순목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늙은 신하가 역적 아들을 길러 세상에 죄를 얻었으니, 만 번 죽은들 어찌 속죄하랴.”
홍 영식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직 열 살도 안 되었다. 홍 순목이 말했다.
“이 씨를 어찌 남겨 둘 수 있으랴.”
그러고는 독약을 먹여 죽인 뒤, 자신도 대궐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약을 마시고 죽었다. 홍 영식의 아내 한 씨도 자살했는데, (홍 영식의 형인) 홍 만식(洪萬植)이 시킨 것이었다.
박 영효의 아버지가 자살하다.
박 영교의 아버지 참판 박 원양(朴元陽)이 자살했다. 박 영교에게는 열 살 된 아들이 있었는데, 박 원양이 먼저 죽였다. 박영효는 자식이 없었다. 박 영교의 가운데 아우는 이름이 박 영호(朴泳好)로,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름을 바꾸고 진안의 산속으로 숨어들어 갑오년(1894, 고종 31년)에 (개화파가 집권하자) 나왔다.
서 재필의 부모도 자살하다.
서 재필의 생부인 진사 서 광언(徐光彦)이 아내 이 씨와 함께 자살했다. 형 서 재형(徐載衡)은 은진 감옥에서 죽었고, (동생인) 서 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
서 광범의 아버지는 무슨 죄인지도 모르고 감옥에 갇히다.
서 광범의 아버지 서 상익(徐相翊)은 칠, 팔 년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무슨 죄에 연좌되었는지도 모르고 날마다 돼지 먹이로 주는 술지게미를 먹다가 죽었다. 서 광범의 아내 김 씨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절개를 지키다가 갑오년(1894, 고종 31년) 이후 남편을 다시 만나 함께 살았다. 오직 김 옥균의 아내 송 씨만 옥중에서 음탕한 짓을 했다.
왜국으로 망명한 주동자들을 처벌하지 못하다.
여러 역적들의 집은 헐어서 연못을 만들고 그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네 명의 역적은 달아나 국법대로 다스리지 못했고, 이미 죽은 자도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처리하지 못했으니, 이는 왜국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를 분하게 여겼다.

일본 망명 당시의 김 옥균
사진 왼쪽이 김 옥균이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 옥균은 훗날을 기약하고 박 영효, 서 광범, 서 재필 등 아홉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를 박해하여 1886년 오가사와라 섬으로 귀양 보냈으며, 1888년에는 북해도로 추방하여 연금했다. 그 뒤 1894년에 청나라로 건너갔으나 민 씨 수구파가 보낸 자객인 홍 종우에게 암살당함으로써 풍운의 사십삼 년 생애를 마감했다.
민 영익이 삼년상 중에 벼슬하며 외국으로 돌아다니다.
민 영익의 부상은 심했지만 목 인덕이 서양 의사에게 치료를 부탁해 귀와 팔이 아물었다. 목 인덕은 민 영익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다. 전에 민 태호의 아내가 죽었을 때 민 영익은 *기복(起復)을 청해 외국을 드나들었다. 이번에는 민 태호가 죽었지만 역시 삼년상을 지키지 않고 상해와 향항(香港-홍콩)을 오가다가 기복 하여 전영사(前營使)가 되었다.
* 기복 – 상중에 있는 관리를 탈상 전에 복직시키는 것. 본디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법도이며, 서민들이라면 혼사를 하지 않았다. 민 태호의 아내라면 민 영익의 생모다.
전주 아전 이 봉구가 이 충신이라 불리며 총애받다.
이 봉구는 전주의 아전이다. 풍수지리술로 민 영익을 설득하여 *민 치구(閔致久)의 묘를 옮기게 했다. 얼마 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에 임명되었고, 박 영교가 어사로 있을 때 그를 재주 있다고 천거하여 승지에 올랐다. 이때 원 세개를 만났는데, 임금의 원수를 갚는 데 노고가 있다고 하여 *사건이 진정된 뒤 참판에 오르고 우영사(右營使)에 제수되었다. 임금은 그를 이 충신(李忠臣)이라 불렀고 원 세개도 그렇게 불러 한때 총애를 받았다. 수레가 종로를 지날 때면 수종들이 구름처럼 따랐고 발소리가 땅을 울렸다. 저자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이 전주 (將臣)이다.” 이 봉구는 매우 교만하여 사대부를 대할 때도 예의가 없었다. 이에 모두 그를 미워하여 ‘죽일 놈’이라 했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가 죽으니, 특별히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내렸다.
* 민치구 – 흥선대원군의 장인이자 고종의 외할아버지.
* 사건 – 갑신정변을 말한다. 이 책 73쪽의 ’원 세개가 왜군을 물리치고 고종을 환국시키다’ 편에서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갑신정변 주동자의 집안에서 돌림자를 바꾸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여러 역적들은 모두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 출신으로, 한꺼번에 역적들이 나란히 나오자 일가가 수치스럽게 여겨 항렬자를 고쳤다. 김 씨는 균(均)을 규(圭)로, 박 씨는 영(泳)을 승(勝)으로, 서 씨는 광(光)을 병(丙)으로, 재(載)를 정(廷)으로, 홍 씨는 식(植)을 표(杓)로 고쳤다.
만국공법에 의해 국사범들이 보호받다.
근래 만국공볍(萬國公法)에 이른바 국사범(國事犯)과 사사범(私事犯)이라는 조항이 있다. 사사로운 죄를 저지르고 달아났을 때 본국에서 죄인을 잡아 보내라고 하면 들어주지만, 백성이나 나라와 관련한 죄인은 모두 국사범이라 하여 (망명국에서) 힘껏 보호해 준다. 오랑캐 나라에는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여러 주모자들이 왜국으로 달아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송환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왜놈들은 비웃었다. 대사 정 상형은 조선에 와서 도리어 불탄 공사관과 살상된 왜놈들에 대해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사상자에 대해서는 십만 원을, 소실된 공사관에 대해서는 이만 원을 배상하고, 기림진삼을 죽인 자는 엄벌하라고 했다. (이때 우리 조정에서는) 김 윤식을 *관반(館伴)에 임명했는데, 그가 이치에 맞게 따지자 정 상형도 다소 수그러졌다. 그러나 국력이 이미 쇠약해져 옴짝달싹할 수 없었으므로 정 상형이 요구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화의의 국면으로 굳어 가자 외무독판 조 병호(趙秉鎬)를 대관(大官)에 임명하고, 홍 순학(洪淳學)을 부관으로 삼아 인천 상무(商務)를 감리하게 했다. 이어 예조참판 서 상우(徐相雨)를 전권대신에 임명하고, 외무협판 목 인덕을 부사로 삼아 왜국에 들어가 외교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죽첨진일랑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왜왕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죄를 물어서 관리 자격을 박탈했다고 한다.
* 관반 – 서울에서 묵고 있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임시 관리.
조정에서 벼슬한 외국인이 늘어나다.

뭴렌도르프와 알렌
뭴렌도르프는 대한재국 통리아문 참의와 협판을 역임하면서 외교와 세관 업무를 맡았다. 알렌은 의료 기술을 익힌 미국 선교사로, 1884년 갑신정변이 이러나기 몇 달 전에 조선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는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 명성황후의 배려로 궁중 어의로 활동했으며, 오 년 뒤 미국 공사관 서기관 일을 맡아보았다.
이때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한 외국인들이 많았다. 청나라 사람으로는 옥 석창(玉錫鬯)이 군국아문의 참의가 되었고, 마 건상(馬建常)이 찬의(贊議)가 되었으며, 미국인으로는 안련(安連 – H. N. Allen)과 혜론(蕙論 – J. W. Heron)이 함께 2품의 계를 받았고, 구례(具禮 – C. W. Greathouse)와 이 선득(李善得 – C. W. LeGendre)과 덕니(德尼-O. N. Denny)가 아울러 호조참판이 되었다. 법국 사람 묵현리(묵현리 – M. F. Merrll)와 하문덕(하문덕 – J. H. Hont)이 아울러 호조참판이 되었고, 사납기(史納機 – J. F. Schoenicke)와 백리(帛黎 – T. Pity)와 격류(格類 – E. F. Greagh)가 모두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영국인 해래백사(奚來白士 – T. E. Hallifax)도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 중 목 인덕이 가장 이름났다.
구주(유럽)나 미국 사람들은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을 뿐인데, 자기 나라말로 서로 부르다가 동아시아에 와서 비로소 번역해서 썼다. 성을 가진 것 같지만 실은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발음도 새의 지저귐 같아서 글자가 궁해 번역하기가 힘들다. ‘타’가 굴러서 ‘토’가 되기도 하고, ‘하’가 굴러서 ‘호’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번역한 인명이나 지명이 반쯤은 들어맞지 않고 육서법(六書法)으로도 풀 수 없으니, 이는 원래 동서가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서 역관에게 말했다.
“나는 본래 성이 없습니다. 이제 귀국에 왔으니 마땅히 귀국의 풍속을 따르겠습니다. 구국의 귀한 성이 무엇입니까?”
역관이 말했다.
“국성(國姓) 이 씨가 가장 귀합니다.”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저도 마땅히 이 씨로 성을 삼겠습니다.”
이에 그를 이 선득이라 했다. 그 다음은 왕후의 성인 민 씨라고 하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저는 민 씨로 성을 삼겠습니다.”
이에 그는 민 아무개가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허리가 꺾어지게 웃었다.
서양 여러 나라와 차례로 통상하다.
양 여러 나라와 차례로 통상했다. 영국과 덕국과는 갑신년(1884, 고종 21년)에, 아라사(러시아)와는 을유년(1885, 고종 22년)에, 의국(義國 – 이탈리아)과는 병술년(1886, 고종 23년)에, 법국과는 정해년(1887, 고종 24년)에, 오국(奧國 – 오스트리아)과는 임진년(1892, 고종 29년)에 통상했다. 왜국에 이어 임오년(1882, 고종 19년)에 시작한 것은 미국이다. 임오년에 원산항을 열었고, 계미년(1883, 고종 20년)에 인천항을 열었으며, 병술년에 회령항을 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다.
고종 22년(1885) 8월 27일(癸巳)에 운현이 돌아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왔는데, 임금이 숭례문까지 나가 휘장에서 맞이했다.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운현이 임오년(1882, 고종 19년) 7월 천진에 이르러 보정부에 구금되었는데, 물이 좋지 않아서 지내는 것을 근심했다. 땅을 파서 새 우물을 얻었는데 물맛이 좋았다. 이에 그곳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갇혀 사는 동안 할 일이 없어서 소일거리로 난초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석파란이 중국에 퍼졌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혹은 운현을 멀리 귀양 보내라고 했고, 혹은 돌려보내라고 해 상소문이 수레에 넘쳤다. 오래 지나 운현도 다른 길을 통해 청나라 고관들에게 몰래 뇌물을 바쳤다.
또한 입고 먹는 것도 마땅치 않아서 본국의 배추김치나 새우젓 따위를 상선 편으로 실어 왔는데, 해마다 그 비용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운현이 십 년간 축적한 재물을 이때 다 탕진했다고 한다. 그는 뇌물을 은으로만 줘서 청나라 사람들이 그를 ‘은항아리’라고 했다.
운현이 집으로 돌아오자 높고 낮은 사대부들이 그를 뵈려고 물려 들었는데, 그 이름을 기록한 것만 해도 여러 책이 되었다. 장사꾼, 군인, 아낙네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절하며 기뻐했고, 교동과 재동 사이에는 열흘이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청나라 복장을 한 대원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왕명으로 사태 수습을 위임받고 달아난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함으로써 재집권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민 씨 세력이 요청한 청나라의 무력 개입으로 사태가 역전되면서 그는 3 년간 청나라 보정부에서 감금 생활을 겪어야 했다. 1885년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 세개와 같이 환국한 뒤에도 대원군은 정권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민 씨 척족 타도를 위해 기회를 노려 정치적 부침을 거듭했다.
원 세개가 대원군을 도와주다.
원 세개는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운현의 사람됨을 익히 들었다. 그가 돌아오자 가서 뵙고 위급하게 되면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마음을 기울여 서로 사귀었다. 이때 중궁이 운현을 끊임없이 미워하여 꼭 해치려고 했지만, 원 세개를 꺼려 뜻대로 하지 못했다.
조정에서 대원군의 환국을 달가워하지 않다.
대원군이 보정부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 사신들이 북경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을 기청사(祈請使)라 했다. 그러나 소명하는 내용이 별스럽지 않았고, 운현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으며, 용서해 달라는 간청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청’이 아니라 *‘방색(防塞)’이라 했다.
나중에는 이 건창에게 명하여 소(소)를 짓게 했다. 그는 대원군을 구금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낱낱이 설명했는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임금이 김 윤식과 어 윤중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려 고치게 했는데, 이 건창이 듣지 않자 결국 그 글은 쓰이지 않았다.
* 기청 – 돌려보내기를 청한다는 뜻이다.
* 방색 – 돌아올 길을 막는다는 뜻이다.
토문강 국경
안변부사 이 중하(李重夏)를 감계사(勘界使)로 삼아, 청국의 차관(差官)과 함께 *토문강(土們江) 사하의 국경선을 살펴 정했다.
* 토문강 –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한 지류.
이 잔상의 문집이 간행되자 영남에서 배척하다.
이 진상(李震相)의 호는 한주(寒洲)로, 은거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며 힘써 정진하여 학문에 스스로 얻은 바가 많았다. ‘심즉리(心卽理)’ 세 글자를 종지(宗旨)로 삼고 그 학설을 설명하여 [심학종요(心學宗要)] 수십 권을 저술했다.
어떤 사람은 양명학이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 승희(李承熙)가 장차 유고집을 간행하려고 허 훈(許薰)에게 교열을 부탁했다. 허 훈은 심학의론(心學議論)이 퇴계의 학설과 어긋나 영남에서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극구 사양했다. 결국 제자 곽 종석(郭鐘錫)이 일을 맡았다. 문집이 나오자 먼저 퇴계의 서원에 보냈다. 여러 이 씨들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이단으로 배척하여 책 뒤에 글을 써서 돌려보냈다.
“이 책은 가야산 골짜기에 깊이 감춰 두었다가 우리의 도가 끊어진 뒤에야 비로소 꺼내어 세상에 돌릴 수 있으리라.”
이에 온 도내 선비들이 모여서 그 책을 모아 불살랐다. 이 승희의 집안은 몇십 년 동안 영남에서 거의 용납되지 않았다. 허 훈의 호는 방산(舫山)으로, 시와 문장을 잘 지었다. 일찍부터 과거를 그만두고 글과 술로 스스로 즐겼다. 아우 이 위(李蔿)는 갑오년(1894, 고종 31년)에 비로소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진상(1818(순조 18년~1886, 고종 23년) 조선 말기 유학자로, 호가 한주(寒洲)다. 조선시대 유학은 크게 퇴계 이 황을 잇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 이를 잇는 기호학파로 나뉘는데, 19세기에 이르면 이 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지고 중요한 학자별로 독자적인 연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화서 이 항로를 연원으로 한 화서학파, 노사 기 정진을 연원으로 한 노사학파, 간재 전우를 연원으로 한 간재학파, 한주 이 진상을 연원으로 한 한주학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조선 성리학의 재무장을 시도했지만, 그 실천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이 진상의 한주학파는 화서학파, 노사학파와 더불어 전통 주자학을 수정하는 쪽에 서 있었는데, 특히 심(心)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설을 제창함으로써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기 정진의 문집이 간행되자 기호에서 배척하다.

노사 기 정진은 몸가짐이 독실하고 학문에도 정통했다. 그는 이기(理氣)를 논하면서 선인들에게 아부하며 기대지 않고 자기의 견해를 스스로 터득하여 문빗장을 뽑고 자물쇠를 열 듯 아주 깊이 연찬했다.
그가 지은 [납량사의(納凉私議)] 여러 편은 충청도와 경기도의 유학자들을 쓸어 냈을 뿐만 아니라, 율곡에 대해서도 불만의 뜻을 나타냈다. 그가 죽은 뒤 대상(大祥)도 지내기 전에 그의 문집을 활자로 간행하려 했는데, 영남에 있는 그의 문이들이 나서서 이렇게 주장했다.
“활자는 오래갈 수 없다.”
이에 신축년(1901, 고종 38년)과 임인년(1902, 고종 39년) 연간에 단성(丹城)에 문집간행소를 설치했다. 나무를 베고 판목에 글자를 새겨 일 년 만에 완성했다. 근래 문학을 한다는 자들은 재상이나 유림이나 따질 것 없이 모두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문집을 간행했는데, 이처럼 성대한 적도 없었다.
연재(淵齋) 송 병선(宋秉璿)은 기 정진을 해칠 마음을 품고 자기 제자들을 사주하여 통문(通文)을 내어 공격하고 비뚤어진 학문으로 때렸다. 기 정진이 율곡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기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마땅히 성토해야 한다.”라고 하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무리가 경기도 진위군에 모여 날마다 소를 올리며 대궐 문 앞에 엎드려 기 정진의 문집 판목을 불사르라고 청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일이 많아 유생들의 논의가 옳은지 그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사가 비록 율곡과 다른 학설을 세웠지만 스스로 터득한 것을 설명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의 공정한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옳거늘 어찌 급급하게 무리와 어울려 결판을 내려고 하는가.”
또 어떤 이는 그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민이다. 저들이 대궐 문 앞에 엎드리기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뽑아 군대에 편입시키자.”
이에 모인 유생들이 스스로 흩어져 차츰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태가 끝났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평했다.
“퇴계의 후손들이 [한주집(寒洲集)]을 불사른 것과 연재가 노사를 막으려고 한 것은 똑같이 상대를 시기했기 때문이다.”
이 건창이 기 정진의 학문에 감탄하다.
양제(寧齋) 이 건창은 중년 이래 성명학(性命學)에 깊이 관심을 가져 그 보는 바가 아주 자세하고도 명석했다. 비록 늙어서야 극에 달했지만, 보성에 귀양 가서 처음으로 [노사집(蘆沙集)]을 얻어 읽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참다운 학문이다. 우리나라에만 없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찾는다 해도 원나라와 명나라의 여러 유학자들 가운데 짝할 만한 자가 드물다. 성리학에 관한 그의 글을 뽑아서 두세 책으로 엮어 천하에 전하고 이름난 산에 간직해 두는 것이 마땅하다.”
이 건창은 언제나 그의 문하에 찾아가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굴복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