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옮긴이의 머리말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매천 황 현이 1864년(고종 원년)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 사십칠 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책으로, 6권 7책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개화와 척사의 갈등 속에 망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황현은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민족의 존망을 걱정하는 지식인의 눈으로 당대의 역사를 기록했다.
[매천야록] 제1권에서는 갑오경장 이전 삼십 년간의 역사를 짧게 기록했다. 황현은 이 시기를 갑오경장을 위한 준비 단계로 파악했다. 듣고 본 대로 기록했으므로 여기에는 정확한 연월일도 없고, 연대순이 바뀐 것도 있으며, 과장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제2권부터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다.
황현은 서른이 되기 전에 과거 초장에서 장원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이 그를 시골 출신이라 하여 둘째로 내려놓았다. 이에 그는 조정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절감했고, 더는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길을 단념했다. 오 년 뒤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다시 생원 회시에 응시하여 장원했지만, 역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뒤 다시 정권을 잡는 수구파 민씨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를 보고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이라 꾸짖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리산 아래에 서재를 마련한 황현은 삼천 권이 넘는 책에 파묻혀 독서와 학문에 전념했다. 시대를 걱정하는 그의 관심은 언제나 역사적인 현실에 가 있었다. 유건에 학창의를 입고 돋보기를 쓴 그의 사진을 보면, 정면을 매섭게 쏘아보는 눈이 인상적이다. 그는 그 매서운 눈으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본 것이었다.
그는 동학을 비적이라 표현했고, 의병도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 역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소식을 듣고 자결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시에서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탄식한 것처럼, 그는 자기 시대 지식인으로 서의 책임을 다했다.
매천야록 제1권(상) 갑오년(1894, 고종 31년) 전
운현궁에 왕기가 서리더니 임금이 태어나다.
*관상감(觀象監)을 일명 서운관(書雲觀)이라고도 하는데, *금상의 잠저(潛邸)가 바로 서운관 자리다. 그래서 이곳을 운현궁(雲峴宮)이라고 부른다.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삼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상이 태어났다. 임금이 즉위한 뒤 대원군 이 하응(李昰應)이 이곳을 넓히고 새롭게 했으며, 몇 리나 되는 담장에 네 게의 문을 만들고 궁궐처럼 장엄하게 꾸몄다.
* 관상감. – 천문 지리를 맡아 보던 관청.
* 금상의 잠저. – 금상은 고종을 가리키며, 잠저는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 운현궁 - 흥선대원군 이 하응의 사가이자 고종의 잠저인 운현궁은 고종이 임금에 오른 뒤 궁궐에 필적한 만큼 대폭 확장하여
궁으로 불렸으나,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변형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다.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상징하는 건물로, 조선조 말기의 역사적 사건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상쟁이 박 유붕이 임금이 될 것을 예언하고 출세하다.
청도에 사는 박 유붕(朴有鵬)이 관상을 잘 보았는데, 자기의 얼굴을 보고 한쪽 눈이 애꾸가 되면 귀하게 된다고 하여 결국 한쪽 눈을 찔렀다. 그는 임금이 어렸을 때 찾아 뵙고 주위를 물리치게 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임금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누설치 마십시오.” 갑자년(1864, 고종 1년) 이후 그는 남양부사에서 수사(水使)에까지 올랐다.
완화군을 원자로 삼지 못하게 말리다가 독살당하다.
궁인 이씨가 완화군(完和君)을 낳자 계(季)씨 성을 내려 주었다. 이때 임금의 나이 17세로 매우 기뻐하며 완화군을 원자(元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중전에게 경사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서두르지 말라고 간했다. 고종이 박 유붕을 불러다 (완화군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박 유붕이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원자 책봉을) 조금 늦추십시오.”
임금이 매우 노여워하며 박 유붕이 운현궁의 사주를 받았다고 의심했다. 오래되지 않아 박 유붕은 죽었다. 구례 사람 류 재관(柳濟寬)은 무과에 급제하여 서울에 살면서 박 유붕과 내왕하는 사이였다. 그가 하루는 박 유붕의 집을 찾아갔더니 박 유붕이 마침 뒹굴면서 죽어 가고 있었다. 아홉 개의 구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놀라서 물어보니 박 유붕이 팔을 저으면서 대답도 못 하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어떤 사람이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라고 말했다며 류 재관이 내게 말했다.
외척 장동 김 씨가 세도를 잡다.

*김 조순(金祖淳)은 예전에 *자하동(紫霞洞)에서 살았다. 이 동네는 경복궁 북쪽 창의문 아래에 있는데,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시냇가에 숲이 우거져 깊숙하고 고요하니 성안의 다른 곳과는 달랐다. 동네 이름을 부를 때 어쩌다 소리가 줄어들면 자동(紫洞)이라 들리고 어쩌다 빨리 부르면 장동(壯洞)이라 들린다. 김 조순은 *국구(國舅)가 되어 조정의 권세를 잡은 위에 장동에서 교동(校洞)으로 이사했다. 임금 대신 국명을 집행하면서 삼대에 걸쳐 국혼을 맺으니,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이처럼 외척이 번성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안동 김 씨를 ‘*장김(壯金)이라고 불렀다.
김 조순이 죽자 그의 아들 김 유근(金逌根)과 김 조근(金左根), 손자 김 병기(金炳冀)가 계속 교동에 살았다. 김 문근(金汶根)도 철종의 국구가 되었는데, 아들 김 병필(金炳弼)이 어려서 조카 김 병학(金炳學)과 김 병국(金炳國)이 정사에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전동(典洞)에 살면서 김병기와 함께 권력을 잡았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전동과 교동을 (외척이 사는 동네라고) 하며, 지금까지도 여염에서는 전동과 교동 시절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 김 조순(1765 영조 4년~1832 순조 32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일찍이 기량과 식견이 뛰어나고 시벽 당파에 휩쓸리지 않아 정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순조의 장인이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을 함양하는데 힘썼다. 여러 요직에 제수될 때마다 조심스럽게 사양하는 등 그 자신은 권세에 탐하지 않은 듯하나,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이 훗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혜단을 남겼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저서로 [풍고집(楓皐集)]이 있다.
* 국구 – 임금의 장인으로 부원군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 자하동 – 지금의 종로구 효자동과 창성동 일대.
* 장동 김씨 – 장동 김씨는 김방경 가문의 구안동 김씨와 구분하여 신안동 김씨라고도 하는데 서울에 사는 안동 김씨를 지칭한다.
* 전동 – 지금의 종로구 견지동과 공평동 일대로 전의감(典醫監)이 있어서 전동이라고 불렀다.
장동 김씨가 있는 것만 알고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다.
장김의 선대(先代)인 선원(仙源) 김 상용(金尙容), 청음(淸陰) 김 상헌(金尙憲), 문곡(文谷) 김 수항(金壽恒), 몽와(夢窩) 김 창집(金昌集) 같은 분들은 모두 덕망과 공훈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높았다. 김조순도 글을 잘 짓고 일을 잘 처리하여 후덕하다고 칭찬을 들었지만, 그 자손들이 탐욕스럽고 완고하며 교만하고 사치하여 참으로 외척이 나라를 망치는 화의 시작이 되었다. 장김이 나라 권세를 잡은 지 오래되자 세인들은 장김만 알뿐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장김 이야말로 나라의 기둥이요 주춧돌이다.”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벼슬을 사양하던 김 흥근도 권력을 놓지 않다.
장김 중에서 김 흥근(金興根)만 일찍이 헌종 때 힘을 다하여 간하다가 귀양을 간 바 있었는데, 곧 풀려난 뒤 양화도 별장에서 머물렀다. 이조판서로 일곱 번이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아 그 이름이 일시에 높아졌다. 그러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다시는 벼슬을 사양하지 않았다. 여러 번 재상이 되었지만 훌륭한 정치를 하지는 못했다.
대원군이 김 흥근의 별장을 빼았다.
철종이 승하하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철종이 일찍부터 금상에게 뜻을 두었으므로 여러 김 씨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는 것을 도우려고 했다. 김 흥근이 말했다. “흥선군(興宣君)이 있으니 두 임금이 있는 것이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흥선군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 김 병학은 자기 딸을 왕후로 간택하자고 흥선군과 약속했다. 그렇게 하면 친척들이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즉위하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봉해지자 김병학과 한 약속을 어겼다. 대신 민 치록(閔致祿)의 외동딸과 국혼을 정하니, 그가 바로 명성황후(明成皇后)다. 김 병학의 딸은 그 뒤 조 신희(趙臣熙)에게 시집갔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초에 대원군이 차츰 정권을 잡으려고 하자 김 흥근이 조정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예부터 임금의 *사친(私親)은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제(私第)로 돌아가시어 평생 부귀를 보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팎의 대권이 모두 대원군에게 돌아갔다. 대원군은 이 말 때문에 여러 김씨 가운데 김 흥근을 가장 미워했고, 김 흥근의 농장 수십 경(頃)을 빼앗았다. 김 흥근이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청했지만 김 흥근이 듣지 않자 다시 청했다. “하루만이라도 노닐게 빌려 주시오.” 대개 별장이나 정자를 소유한 자에게 “노닐게 빌려달라”고 청하면 주인은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서울의 옛 습속이다. 김 흥근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대원군이 임금에게 권하여 행차하게 하고 자기도 따라갔다. 김 흥근은 임금이 머물던 곳을 신하가 다시 머물 수 없다고 하여 다시는 삼계동을 찾지 않았다. 이에 그것은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
* 사친 – 철종이 죽고 아들이 없자, 이 하응의 둘째 아들인 이 재황(李載晃 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정해 철종의 뒤를 잇게 했다. 따라서 고종은 사사롭게는 이 하응의 아들이지만 공적으로는 익종과 조대비(趙大妃)의 아들인 셈이다.
* 삼계동 – 인왕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지금의 종로구 부암동에 있다. 여기에는 대원군의 별장이던 석파정(石坡亭)이 있고 그 옆에 ‘삼계동’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네 이름을 붙여서 세도를 가리키다.
홍 국영(洪國榮)이 권세를 잡은 이래 무릇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은 자들을 세도(勢途)라고 일렀다. 세상에 이름난 재상들을 지명에 따라 불렀으니, 장사(長沙), 강릉(江陵), 분의(分宜), 귀계(貴溪)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김씨를 전동, 교동이라 불렀고, 조 씨를 *박동(礴洞)이라 불렀다. 대원군은 운현궁에 살았으므로 운현(雲峴)이라 불렀다. 세도를 부리던 외척만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근세에는 대신도 그렇게 불렀으니, 반드시 합(閤)자를 그 동네 이름에다 붙여서 ‘모합(某閤)이라고 불렀다. *회동(會洞)에 살면 회합이라 불렀고, 승동(升洞)에 살면 승합이라 불렀다.
* 박동 –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과 송현동 일대. 땅이 질어서 박석을 깔았으므로 박석고개, 박석골이라고도 했다.
* 회동 – 지금의 서울 회현동과 충무로 일대로 동래 정씨가 대대로 살았다. 황 현이 살던 당시에는 정 원용, 정 기세, 정 범조가 삼대에 걸쳐 잇달아 재상을 지냈다.
대원위 분부에 온 나라가 떨며 무서워하다.

대원군이 나랏일을 맡던 갑자년(1864, 고종 1년)에서 계유년(1873, 고종 10년)까지 십 년간 은 온 나라가 떨며 무서워했다. 백성들은 서로 혀끝을 경계하며 조정의 일을 감히 말하지 못했으나, 언제나 귀신이 문 앞에 와서 두드리는 것 같았다. 예전 제도에서는 교령(敎令)아래에 반드시 ‘왕약왈(王若曰)’ 이라는 글자로 첫머리를 삼았는데, 이 십년 간은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글자만으로 안팎으로 명이 시행되었다. 갑술년(1874, 고종 11년)에 임금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부터 비로소 예전의 제도가 회복되었다.
* 흥선대원군 – 1820(순조20년)~1898(고종35년)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 이 구(李球)의 넷째 아들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한직을 돌며 젊은 날을 불우하게 보냈다. 철종 때는 안동 김씨의 막강한 세도 아래에서 몸을 보전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하기도 했다. 뛰어난 정략가인 그는 왕궁 안의 최고 어른인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후사가 없는 철종의 왕위 계승자로 둘째 아들인 이 명복(李命福 고종의 아명)을 지목하게 했다.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이후 10년간 수렴청정 하며 안으로는 세도정치 분쇄와 서원 철폐 등을 추진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했고, 밖으로는 쇄국양이 정책을 고수했다. 남달리 정권에 집착한 탓에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명성황후와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생애 후반의 정치 노선도 변화무쌍했다.
남대문을 높이고 태산을 평지로 깎아 내리겠다.
대원군이 처음 집권할 무렵 어느 공회 석상에서 성난 목소리로 여러 재상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천리(千里)를 끌어 지척을 삼을 것이고,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로 만들 것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 싶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요?” 모두 대답할 말을 모르고 있었는데 김 병기가 머리를 떨치며 말했다. “천리도 지척이라면 지척이 되는 것이고, 남대문도 3층으로 만들면 3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감이 오늘날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김 병기가 나가자 운현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놈이 저 혼자 잘났군.” 대개 천리를 지척으로 삼겠다는 말은 종친을 높이겠다는 뜻이요.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는 말은 남인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는 뜻이며, 태산을 평지로 깎아 내린다는 말은 노론을 억누르겠다는 뜻이다.
김 병기를 욕보이려 이 세보를 여주목사로 임명하다.
경평군(慶平君) *이 세보(李世輔)는 철종과 종형제 사이로서, 철종 때 장동 김씨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죽을 지경에 처했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이후 이 인응(李寅應)으로 이름을 고치고 군(君)에 봉해진 것을 파한 뒤 과거에 급제했다. 운현은 김병기가 드센 것을 꺼려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일족이 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참았다. 때마침 김병기가 여주로 물러가 살자 이 인응을 여주목사로 임명해 갖가지로 어렵게 하고 욕보였다. 그러나 끝내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장동 김씨의 대단한 위세가 사람들을 몹시 두렵게 했음을 알 수 있다.
* 이 세보 – 조선 후기 왕족 문신으로, 안동 김 씨의 전횡을 비판하다 삼사의 탄핵을 받아 전라도 강진 신지도로 유배되어 삼 년간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고종 원년에 조 대비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 여주목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시조문학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데서 더욱 우뚝하다. 그는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에 대한 비판, 유배 생활, 기행, 농사 등 다양한 주제로 약 사백 오십 수의 시조를 남겼다. 시조집으로 [풍아(風雅)], [시가(詩歌)]가 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받아들이다.
경복궁은 조선 중엽에 여러 차례 불이 났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로는 버려져 수축하지 못하고 층계와 주춧돌만 남았을 뿐이었다. 금상 을축년(1865, 고종 2년)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몇 년 뒤에 공사를 끝내고 정묘년(1867, 고종 4년)에 이사했다. 역사(역사)를 시작할 때 재정이 메말라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팔도 부자 명단을 뽑아서 돈을 거둬들였다. 그리하여 파산자가 잇달았다. 이때 거둬들인 돈을 원납전이라 했는데, 백성들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납전(願納錢)이 아니라 원납전(*怨納錢)이다.”
* 원납전 – 앞의 것은 ‘스스로 내는 돈’을 뜻하고, 뒤의 것은 ‘원망하며 바친 돈’을 뜻한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갖가지 세금을 거둬들이다.
이때 돈을 거둬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도성에서는 *문세전(門稅錢)을 받아들였다. 지방에서는 *정구(丁口)를 헤아려 거둬들였는데, 백성들은 이 돈을 *신낭전(腎囊錢)이라 불렀다. 논밭의 넓이를 따져서 거두기도 했는데, 백성들은 이 돈을 *수용전(水用錢)이라 불렀다. 심지어 민간에서 부서진 솥과 보습, 가래 조각까지 거둬들이며 집집마다 상하로 그 분량을 정해 주었다.
* 문세전 – 도성 문을 들어올 때 바치는 돈.
* 정구 – 장정의 숫자.
* 신랑전 – 불알을 단 값으로 내는 돈.
* 수용전 – 물을 쓰는 값으로 내는 돈.
민폐를 없애기 위해 서원을 철폐하다.
*만동묘(萬東廟)는 청주 화양동에 있는데, 묘를 창건한 것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뜻이었다. 그래서 그 옆에 우암의 사당을 세웠는데, 세상에서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이라 부른다. 서원을 책임지는 자들은 대개 충청도에서 행패를 일삼던 양반집 자제들로서 *묵패(墨牌)로서 평민들을 잡아다 껍질을 벗기고 골수까지 빼내니, 남방의 좀이라 불렸다. 백 년이 지나도록 수령들은 그 무리가 두려워 죄를 따지지 못했다. 운현이 젊었을 때 이 서원에 들렀다가 유생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그리하여 정권을 잡은 뒤 그 유생을 죽이고 서원을 철폐하라고 명했다. 남겨 둔 곳은 마흔여덟 군데였는데, 모두 *승무명현(陞廡名賢)과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만동묘를 없애고 *황묘위판(皇廟位版)은 *북원(北苑) 대보단(大報壇)으로 옮겨 모시니, 화양동서원은 드디어 철폐되었다.
* 만동묘 -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받들기 위해 숙종 43년(1717)에 세운 사당.
* 묵패 – 서원에서는 관행적으로 도장을 찍은 문서를 각 고을에 보내 서원의 제수에 쓸 명목으로 돈을 바치게 했는데, 민폐가 가장 심한 화양동서원의 것을 ‘화양동묵패지’라 했다.
* 승무명현 – 학덕이 높아 문묘에 함께 모신 현인들. 조선 중기까지 신라의 최 치원, 설 총, 고려의 안 향, 정 몽주, 조선의 김 굉필, 정 여창, 조 광조, 이 언적, 이 황 아홉 사람을 모셨으며, 그 뒤로 이이, 성 혼, 김 장생, 송 시열, 송 준길, 박 세채, 김 인후 등을 모셨다.
* 황묘위판 –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신주.
* 북원대보단 –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하기 위해 고종 2년(1865)에 만든 단. 만동묘를 없애기 위해 대원군이 만들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 본래 선현을 배향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유교적 사회 질서 유지에 힘쓴 서원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혈연, 지연, 학벌, 당파 등과 연결되어 많은 병폐를 낳았다. 지방 양반들은 서원을 거점으로 토색질을 일삼았는데, 화양동서원의 작폐는 19세기 서원이 사회에 끼친 역기능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에 대원군은 양반 토호들의 발호를 막고 민폐를 줄이기 위해 사표가 될만한 서원 마흔여덟 곳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것을 명했다.
유생들 서원 철폐에 반대하다.
처음에 서원은 좋은 뜻에서 설치되었지만 오래되면서 점점 어지러워졌다.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읽으며 몸을 수양하던 사람도 변방에 변란이 생기면 자진해서 창을 메고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 자손들이 많은 곡식을 쌓으면서 마음이 교활해지기 시작했다. 단청이 화려한 집에 재물이 즐비했으니, 물질이 극에 이르면 변하는 것이 참다운 이치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만 그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때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서원에 소굴을 만들던 유생들은 마치 비상지변(非常之變)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처소를 잃었다. 미쳐 날뛰고 부르짖으며 잇달아 대궐 문밖에 엎드려서 상소했으니, 양식 있는 이들이 비웃었다.
흥선군이 명당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다.
남연군(南延君)이구(李球)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흥선군이 그 막내다. 남연군이 죽을 때 흥선군은 겨우 18세였다. 흥선군이 지사(地師)를 따라다니다가 덕산 대덕사에 이르렀는데, 지사가 오래된 탑 하나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곳은 큰 길지이니 얼마나 귀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흥선군이 곧 돌아와 살림을 모두 팔아서 이만 냥을 만들었는데, 그 절반을 대덕사 주지승에게 주고 불을 지르게 했다. 그리하여 절이 타버렸다.
흥선군이 상여를 모시고 그곳에 이르러 재를 쓸어 내고 쉬었다. 한밤중에 형들이 모두 일어나 꿈 이야기를 하는데, 흰옷을 입은 늙은이가 성을 내며 이렇게 꾸짖었다고 했다. “나는 탑신(塔神)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사는 곳을 빼앗았느냐? 너희가 끝내 장례를 치른다면 삼우제를 마치기도 전에 네 형제가 폭사할 테니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세 사람이 같은 꿈을 꾸었다. 흥선군이 흥분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참으로 명당자리입니다. 명(命)이란 타고나는 것이니 귀신이 어찌 우리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종실이 나날이 기울어져 우리 형제들도 떠돌고 있으니, 날마다 장동 김 씨네 문 앞에서 옷자락을 끌며 얻어먹고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보다 차라리 한 번에 통쾌해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아들이 있고, 핏덩이 하나 없는 것은 저뿐입니다. 죽어도 두렵지 않으니 형님들은 더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른 아침에 탑을 깨뜨리니 그 자리가 모두 돌이었다. 도끼질을 해도 도끼가 튀기만 했다. 그리하여 도끼를 치켜들고 공중을 향해 크게 꾸짖었더니 그제야 도끼가 튀지 않았다. 장례를 치렀지만 다른 사람이 나중에 관을 옮기지나 낳을까 걱정되어 수만 근의 쇳덩이를 녹여 붓고 그 위에다 흙을 비벼서 다졌다. 스님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다가 수원 대포진(大浦津)을 건너는데, 스님이 배 안에서 큰소리를 지르더니 불을 꺼달라고 머리를 휘저으며 발광하고는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사람들은 남연군의 묘가 *복치형(伏雉形)이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십사 년 뒤 금상이 태어났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이후 나라의 재정으로 대덕사가 있던 음지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는데, 토목과 단청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곳에 논밭과 보화를 매우 많이 내렸다. 병인년(1866, 고종 3년) 겨울에 *양구(洋寇)가 강화도를 거쳐 들어왔다. *사교(邪敎)에 물든 우리 백성들이 그들을 인도했는데, 덕산에 이르러 남연군 묘를 파헤치려 했지만 딱딱하게 굳어서 파보지도 못하고 불만 지르고 달아났다. 대원군이 일찍이 이 건창(李建昌)에게 장례 치를 때의 일을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탑을 쓰러뜨리니 그 속에 백자(白磁) 두 개와 *단다(團茶) 두 병, 사리 세 알이 있었다. 사리는 작은 머리통 만한 구슬이었는데 매우 밝게 빛났다. 물속에 잠겼지만 푸른 기운이 물을 꿰뚫고 끊임없이 빛나는 것 같았다.”
* 복치형 – 꿩이 엎드려 있는 형국.
* 양구 – ‘서양 도적’이란 뜻으로,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을 가리킨다.
* 사교에 물든 우리 백성들 –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가리킨다.
* 단다 – 둥근 달 모양의 떡 차. 떡 차란 틀에 박아 내어 만든 덩어리 차를 일컫는다. 삼국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해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만들었다.
대원군의 석파란이 세상에 널리 퍼지다.

운현은 자기의 호를 석파(石坡)라고 했다. 젊었을 때 완당(阮堂) 김 정희(金正喜)를 따라 서화를 익히고, 난초 치는 법을 배웠다. 한때 석파란(石坡蘭)이 세상에 널리 퍼졌는데, 그가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인들도 많이 사갔다.
금상은 운현의 차남으로, (철종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통을 계승했다. 맏아들 이 재면(李載冕)은 자가 무경(武卿)으로, 철종 말에 급제하여 이미 벼슬이 대교(待敎)에 이르렀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조 경호(趙慶鎬)에게 시집갔고, 작은딸은 조 정구(趙鼎九)에게 시집갔다. 서자 이 재선(李載先)은 무과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에 있었는데, 신사년(1881, 고종 18년) 겨울 *안 기영(安驥泳)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딸은 이윤용(李允用)에게 시집갔다.
* 보정부 – 중국 북부에 있는 고을로, 임오군란 뒤에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납치해 간 곳이다.
* 안기영의 옥사 – 안기영 등이 이재선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개화파를 제거하려고 모의했다.
당백전을 만들자 물가가 뛰어오르다.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이 넉넉하지 않자 병인년(1866, 고종 3년) 봄에 당백전(당백전)을 주조했다. 그러자 물가가 갑자기 뛰어오르고 몰래 *사주(私鑄)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래서 엄히 다스렸지만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얼마 안 되어 파했다. 또 정묘년(1867, 고종 4년)에 청국 전(淸國錢)을 쓰기 시작했는데, 비록 사주하는 자는 없었지만 물가가 뛰어올랐으므로 4 , 5년 지나 갑술년(1874, 고종 11년) 정월부터는 통용하지 않게 되었다. 청국 전을 사용할 때도 영남이나 관북에서는 쓰지 않았다.
* 사주 – 개인이 돈을 만드는 것. 돈을 주조하는 권리는 나라에 있었으므로 사주는 곧 불법이었다.
천주교를 박해하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정조 때다. 그 후 여러 차례 뿌리를 뽑으려 했으나 몰래 믿는 자들이 있어 끝내 근절되지 않았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초에 전(전) 승지 남 종삼(南鍾三), 진사 홍 봉주(洪鳳周), 법국(法國-프랑스)사람 *장 경일(張慶一) 등이 모두 형을 받아 죽었다. 남종삼은 승지 남 상교(南尙敎)의 아들로, 북인 명문가 출신이다. 부자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종삼은 범죄 사실을 진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두세 번 서양에 가서 좋은 벼슬을 했는데, 품계가 우리나라 이조판서에 해당한다.” 홍 봉주는 장 경일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의 재산을 몰수할 때 서양 바늘이 여러 상자 나왔다고 한다. 남상교는 공주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그때부터 그 무리를 샅샅이 조사라여 뿌리까지 다 파헤쳤는데, 용서받지 못하고 죽은 자가 전후로 이만 명쯤 되었다고 한다.
* 장 경일 – 프랑스 선교사인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를 가리킨다. 만주 등지에서 약 십 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853년에 우리나라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입국하여 제4대 교구장이 되었다.
포도대장 이 경하가 사람을 잘 죽이다.
이 경하(李景夏)는 운현이 가장 부리기 좋은 사람으로 뽑혔다. 그는 대장에다 포도대장까지 아울러 맡았으므로 죄인을 처형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운현이 이렇게 말했다. “이 경하는 다른 장점이 없다. 오직 사람을 잘 죽이므로 쓸만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경하는 사람을 마구 죽이지 않았다. *사학(邪學)이나 사주(私鑄)처럼 죽을 죄를 저지른 사람만 죽였다.”
* 사학 – 주자학에 위배되는 학문을 이르던 말로, 조선 중기에는 양명학을, 후기에는 천주교나 동학을 가리켰다.
임금이 될 것을 예언한 만인에게 대장경을 간행케 해주다.
일찍이 만인(萬印)이라는 한 산인(山人)이 금상의 잠저를 찾아 뵙고 두 번 절하며 축하했다. “훗날 중흥지주(中興之主)가 되실 분입니다.” 갑자년(1864, 고종 1년) 초에 운현이 만인을 찾아 소원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산인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 있겠습니까? 한 가지 은혜를 받자면,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大藏經)] 천 부만 주시면 소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경 간행 사업을 크게 벌였는데, 만인도 스스로 참여했다. 일이 끝나자 그것을 바다에 띄웠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해인사 경판각(經板閣)은 예부터 새들이 똥을 싸지 않아서 영험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만인이 떠난 뒤로는 그러지 못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경판 속에 부적이 있었는데, 만인이 훔쳐 가서 그리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젊었을 때 술사(術士)에게 ‘앞날에 환난이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만인(萬人)을 죽이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 만 명을 죽이겠다고 기약했다.” 만인(萬印)이란 것이 만인(萬人)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운현이 결국 만인(萬印)으로 말미암아 화를 일으킨 일은 없었으니, 역시 항간에서 와전된 말일 것이다. 다만 그때 이러한 말이 떠들썩하게 전해졌다.
병인년 법국 군함의 침입을 양헌수가 물리치다.
병인년(1866, 고종 3년) 9월에 법국 군함이 강화도에 정박했는데, 놀기도 할 겸 훈련하러 온 것일 뿐 침략할 뜻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장 경일 등이 죽자 서양 선박을 더욱 엄하게 금했다. 그러므로 보복하기 이해 온 것이다.”
강화유수 이 인기(李寅夔)가 겁에 질려 달아나자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서양인들이 열흘 동안 그곳을 점령하며 모조리 약탈하고 돌아갔다. 나라에서는 강화도의 지형이 험준하다고 여겨 군량미와 무기와 진귀한 보물을 많이 저장해 두었는데, 이때 모두 없어졌다. 이 경하가 순무사(巡撫使)가 되고 이원희(李元熙)가 중군(中軍)이 되어 훈련도감의 오천 군사를 이끌고 문수산성으로 나아가 진을 쳤지만 강화도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감히 건너가지 못했다.
천총(千摠) 양 헌수(梁憲洙)가 쫓아가 싸우길 청했지만 이원희가 말했다. “군령을 어기는 자는 죽이겠다.” 양 헌수가 말했다. “죽으면 어찌 적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군사 한 무리라도 주십시오.” 이원희가 마지못해 포수 삼백 명을 내어 주었다. 양 헌수가 그날 밤 손돌목에서 바다를 건너가 정족산성에 진을 쳤다. 이튿날 서양인들이 강화부에서 나와 배를 타려고 했지만 밀물이 얕아 잠시 산성에서 쉬려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남문 밖에 이를 무렵,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자 적들은 엉겁결에 물러났다. 우리 군사가 뒤쫓아 포를 쏘며 약 삼십 명을 죽이고 개선했다. 양 헌수는 발탁되어 황해도병사(병사)가 되었고, 일 년 만에 대장이 되었다. 이 *난리 뒤에 조정에서는 사학을 금했으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운현은 자기의 호를 석파(石坡)라고 했다. 젊었을 때 완당(阮堂) 김 정희(金正喜)를 따라 서화를 익히고, 난초 치는 법을 배웠다. 한때 석파란(石坡蘭)이 세상에 널리 퍼졌는데, 그가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인들도 많이 사갔다.
금상은 운현의 차남으로, (철종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통을 계승했다. 맏아들 이 재면(李載冕)은 자가 무경(武卿)으로, 철종 말에 급제하여 이미 벼슬이 대교(待敎)에 이르렀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조 경호(趙慶鎬)에게 시집갔고, 작은딸은 조 정구(趙鼎九)에게 시집갔다. 서자 이 재선(李載先)은 무과에 급제하여 별군직(別軍職)에 있었는데, 신사년(1881, 고종 18년) 겨울 *안 기영(安驥泳)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딸은 이윤용(李允用)에게 시집갔다.
* 보정부 – 중국 북부에 있는 고을로, 임오군란 뒤에 청나라 군대가 대원군을 납치해 간 곳이다.
* 안기영의 옥사 – 안기영 등이 이재선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개화파를 제거하려고 모의했다.
당백전을 만들자 물가가 뛰어오르다.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이 넉넉하지 않자 병인년(1866, 고종 3년) 봄에 당백전(당백전)을 주조했다. 그러자 물가가 갑자기 뛰어오르고 몰래 *사주(私鑄)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래서 엄히 다스렸지만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얼마 안 되어 파했다. 또 정묘년(1867, 고종 4년)에 청국 전(淸國錢)을 쓰기 시작했는데, 비록 사주하는 자는 없었지만 물가가 뛰어올랐으므로 4 , 5년 지나 갑술년(1874, 고종 11년) 정월부터는 통용하지 않게 되었다. 청국 전을 사용할 때도 영남이나 관북에서는 쓰지 않았다.
* 사주 – 개인이 돈을 만드는 것. 돈을 주조하는 권리는 나라에 있었으므로 사주는 곧 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