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선헌 하현 달을 보며-
2006년12월12일
곰소에서 30번 국도는 내소사(來蘇寺) 앞을 지나 모항과 격포, 채석강 쪽으로 푸른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변산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간다. 이 길을 따라가다가 내소사 입구에 있는 내소사 주유소에서 500 미터쯤 더 가면 도로는 내소사를 안고 있는 능가산(稜伽山) 자락에서 작은 마을 관선리를 좌 우로 갈라 놓고 지나간다. 길 좌측 아랫마을 입구에 “觀仙軒”의 표지석이 서있고, “하얀 팬션”의 입간판도 보인다. 표지석 옆에는 큰 소나무와 대나무 숲 언덕이 있고, 마을과는 조금 떨어진 그 언덕 위에 아담한 이층 벽돌집 관선헌이 내륙으로 들어온 서해 바다 건너편 선운사가 있는 고창땅을 바라보고 서 있다.
堂 號가 관선헌 이니 여기서는 신선(神仙)을 볼 수 있겠다고 반 농담 반 부러움으로 주인에게 말 했더니 이 마을 이름이 관선리 이기 때문에 그런 堂 號가 붙여졌을 터이지만, 이 집에서 바라보는 落照의 아름다움 이야말로 가히 일품이라고 말 하는 주인의 표정에서 나는 그가 이 곳에서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집은 주인이 세 번 바뀌었다고 한다. 처음 이 집을 지었던 분은 퇴직한 대학교수 였는데, 설암(舌癌)을 앓고 있던 분이 이곳에서 사는 동안 병이 완치되어 노후에 자녀들과 같이 살기 위하여 두 번째 주인이 되었던 한 여류 화가에게 넘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관선헌 뜨락에는 지금도 각종 약초들과 과수(果樹)들,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두 번째 주인이었던 그 여류 화가는 이곳에서 많은 작품활동을 하면서 아래층에 예쁜 다실을 운영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작업실을 마련 하기 위하여 지금의 주인에게 이 집을 넘겨주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주인은 우리 부부와 내외간에 비슷한 연배(年輩)로 여행 중에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분들은 머리가 뛰어난 외동 딸의 교육을 위하여 일찍이 미국에 이민 가서 딸이 중학교 때부터 그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훌륭한 뒷바라지를 하여 지금은 그 딸이 미국의 명문 대학교를 나와 그 곳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훌륭한 사윗감까지 정해졌다고 한다.
그는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고국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자 영구 귀국을 위하여 이 집을 마련한 것이라 한다. 일년쯤 후 영구 귀국을 할 때까지는 친구들이면 누구나 필요할 때 마다 이 집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 11월에 일시 귀국하였다고 한 번 방문하여 달라는 연락을 받고 아내와 같이 내려간 것이 12월12일 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곰소항의 횟집에서 거나하게 취하여 돌아와 각각 위층과 아래층을 차지하고 잠을 청했으나 자정이 넘어 잠을 깨어보니 밖에 달빛이 푸르다. 남아 있는 술기운 탓인지 감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觀仙軒의 下弦 달 2006년12월12일
하현달 푸른빛이 대숲에 속삭이고
銀 구슬 쏟아지는 觀仙軒 뜨락에서
來蘇寺 스쳐온 檜香 홀로 맡는 나그네.
건너편 선운사에 졸고 있는 長明燈은
스무 사흗날 조(潮)금 밤에 깜박인다.
매창의 애절한 사연에 잠 이루지 못하네.
보름날 달 밝으면 月明庵 가자던 님
청풍에 하현 달빛도 이렇게나 좋은 것을
홀로이 꿈길에서 그리는 님들 생각는가
村隱과 蛟山 과도 詩를 읊던 梅窓이여
그대의 거문고 소리 아직도 들리는 듯 하여
월명암 달 밝을 때면 그대 그리울지라.
음력 스무 사흘 푸르스름한 하현 달이 관선헌 뜰의 대나무 숲 사이를 조심스레 서성이며 속삭이는 듯 하는 소리에 나는 잠이 깨었다. 언제 떠올랐을까? 커튼 사리로 뿌연 달빛이 유리창을 가만히 두드린다.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 보니, 달은 동쪽 대나무 숲 위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스스로 벗이 되어 주고자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뜰로 나갔다.
뜰의 고요는 너무나 적막하다.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달도 나를 따른다. 밀려 나갔던 조수가 다시 돌아와 갯바위와 조용히 소곤거리고 있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바닷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빈 배만 마른 갯벌 위에 그대로 얹혀 있다.
멀리 바다 건너 선운사 부근의 불빛이 검은 바다 위에 희미한 빛을 반짝여 주고 있을 뿐. 뒷길 언덕 위에 소나무 잎 사이로 내소사를 스치고 지나온 밤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에 으스스 寒氣를 느끼면서도 문득 어제 느꼈던 전나무 숲의 기분 좋은 Phytoncide의 향내를 느끼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이른 새벽 총총 반짝이는 별들이 뜰에 가득 쏟아질 것만 같다.
보름달이 밝을 때 월명암의 정취를 같이 느껴 보자던 관선헌 주인 부부는 다 이 지방 명문가 출신들이다. 김 선생의 선친은 매창공원을 조성하고 그 곳에 매창 시비(詩碑)를 건립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셨다고 하며, 부인 신여사는 이곳 출신 신석정 시인의 집안 조카뻘이 되는 분이며 소녀시절에는 夕汀의 古宅 靑丘園이 있는 부안의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같은 마을에서 살며 나란히 남들이 부러워 하는 전주의 명문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히 연애결혼을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부모님들이 결정해 주신 연분이라고 한다. 현대인 답지 않게 부부의 연을 맺은 분들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부부인 것 같다. 그리고 두 분이 모두 예술적 감정이 풍부하고 지극히 낭만적인 초로의 멋쟁이들 이다.
그 옛날 大 詩人 이었던 村隱 유희경과, 蛟山 허균과 함께 직소폭포, 월명암, 개암사 등 명소를 찾아 다니며 詩를 말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존경과 흠모의 정을 나누었던 당대의 예인 매창을 이 집 주인이 좋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지금 그녀를 생각하며 그리워 한다.
새벽 한기에 방으로 들어와, 달빛 스며드는 창가에 누워 나는 梅窓과 村隱과 蛟山과의 아름답던 그러나 애절하기 까지 한 관계를 생각 한다.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시대의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히던 매창에 대한 片鱗들.
18세의 관기 신분인 그녀는 평소 그 명성을 흠모하던 48세의 대 시인 촌은 유희경을 만나 꿈 같은 10일간 사랑의 시간을 보낸다. 촌은 또한 평소 妓女를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창을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대 국난이 그들을 갈라놓고 말았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유희경이 매창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평소 그를 흠모해 오던 매창이 얼마나 황홀했을까?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그러나 만나자 10일 만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님은 떠나고 남겨진 매창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城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전란이 끝난 후에도 서울에 머물면서 마음으로만 사랑하던 유희경의 심경을 이런 시로 보내었을 뿐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매창은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니….
그 후 매창의 재능과 절개를 전해들은 허균이 그녀를 만나고 때로는 떨어져 있으면 편지를 주고 받으며 정신적인 사랑을 10년 동안 나누게 되었다. 신분의 차이를 떠나고, 남자와 여자로서가 아닌 타고난 재능을 갖은 한 인간 대 인간으로 그들은 깊이 신뢰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진정한 우정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는 매창을 唐나라 때의 유명했던 여류시인 설도의 환생으로 믿었을까?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 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허균 - 매창의 죽음에 –
매창은 유희경을 그리다 끝내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아끼던 거문고를 안고 갔다. 그녀를 사랑하던 고을 사람들은 그녀가 남긴 詩 58수를 “매창집”으로 남겼고, 그녀의 무덤은 매창 공원으로 지금까지 잘 가꾸어지고 있다.
村隱은 蛟山보다 24세가 많았고, 蛟山은 梅窓보다 4세가 많았으나 세상을 떠나기는 역순으로 매창이 蛟山 보다 10년 먼저 37세에, 교산은 촌은 보다 18년을 먼저 50세에 그리고 村隱은 90 세가 넘도록 장수를 하였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세 사람의 천재들은 각각 진실한 사랑을 위하여, 꿈꾸던 이상세계 실현을 위하여, 또는 신분 탈출을 위한 학문 탐구와 현실적응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가다가 죽었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서로를 존경하며, 흠모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천재가 천재를 알아준다는 말이 실감이 들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