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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수리 공원에서 만난 토마스 페인

 

2008년 5월 18일

-벼룩시장을 찾아-

오늘은 파리에 있는 벼룩시장 중에서 한군데를 구경하려고 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보니 규모가 크고, 고가의 화려하고 값비싼 좋은 물건들이 있는 시장은 북쪽 외곽 포르트 드 클리냥쿠르(Porte de Clignancourt)驛 근처 로지에르 街(Rue des Rosiers)에 있고, 의류나 생활용품 등이 많이 판매되는 곳은 동쪽 외곽 포르트 드 몽테레이유(Porte de Montreuil)驛 근처에 있으며, 남쪽의 포르트 드 방브(Porte de Vanves)역 근처의 시장에서는 값이 제일 저렴한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다고 하여 먼저 그곳을 가 보기로 하고 오전 11시 조금 넘어서 집을 나섰다.

 

우리처럼 구경할 시간이 넉넉한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보다 왠만하면 걸어다니면서 보는 것이 하나를 보더라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늘도 걷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에 미리 지도를 보고 목적지까지 가면서 지나갈 곳을 점검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센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 퀘 드 라 가르(Quai De La Gare)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외곽 순환 도로를 만나면, 메세나 路(BD Massena), 켈레르만 路(BD Kellermann), 쥬르당 路(BD Jourdan), 를 거쳐서 브렌느 路(BD Brune)에서 포르트 드 방브(Porte de Vanves) 전철 역으로 가면 우리가 찾는 벼룩시장을 갈 수 있었다. 중간에 몽수리 공원이 있어서 거기 들려 집에서 준비한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할 참이였다.

 

처음 강변로를 따라 외곽도로까지 갈 때는 시내 중심가와  많이 다른 파리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외각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길도 넓고 거리도 깨끗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 어느 도시의 외곽 신흥 개발지역을 보는 듯 하다. 또 漢字로 표기되어 있는 여행사며 식당의 간판이 많은 것을 보니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인 모양이다. 한참을 걷는데, 서울의 잠실 운동장 규모의 종합경기장에서 운동경기가 진행중인지 함성이 울려퍼지기도 한다. 사진을 몇장 찍으면서 천천히 걸으니 오후 2시가 넘어 일차 목적지인 몽수리 공원이 나타난다.

몽수리 공원에 세워진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의 동상을 바라보며

길 가에 공원으로 들어가는 옆문이 있어 들어가니 가까운 곳에 황금색 도금을 한 동상이 서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토마스 페인의 동상이다.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영국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젊은 시절 영국에서 세무공무원으로 있을 때 공무원들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하여 건의서를 상부에 올렸다가 오히려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그가 운명적으로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제퍼슨을 만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혁명가로 변신, 당시 미국과 유럽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가 대부분 그의 주의 사상이 채택될 정도였으나 결국은 그의 영향력으로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존경의 표시로 동상을 세웠을 것이다.  그가 쓴 '상식(Common Sense)과 인권(Right of Man)이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을 독립전쟁과 혁명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케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는 상식의 서문에서 당시의 미국 사람들에게  "그릇된 것에 대하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오랜 습관으로 굳어지면, 그 그릇된 것은 표면상 '옳은 것' 처럼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처음에는 습관을 지키려는 무서운 아우성이 일어난다. 그러나 소동은 곧 가라앉기 마련이다. 시간은 이성보다 더 많은 개종자를 만들어낸다." 라고 그의 생각을 주지시켰던 사람이다. 

 

 -파리국제교류재단 뜻밖의 안내자-

아내가 그의 동상 아래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우리 또래의 부부가 말을 걸어온다.

나는 불어를 못하지만 영어로는 대화가 통할 수 있다고 했더니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 한다.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어설픈 이방인으로 보였던지 파리에 언제 왔으며 언제까지 머물 것이며, 어디에서 왔느냐는 등등...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들이 이 공원 건너에 있는 파리국제교류재단(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의 印度館에서 인도 문화소개의 일환으로 요가 홍보행사를 하는데, 자기들은 그 행사를 돕기위해 가고 있다면서 우리가 원하면 40개국의 건물들과, 그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 연구원들의 생활과 문화를 안내해 주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되었지만, 자기들은 건축 디자인 일을 하다 은퇴하였으며, 10년 이상 요가를 수련해오고 있고, 지금은 프랑스와 인도 문화교류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의 관광은 전혀 오늘 우리의 계획에 없었던 것이였지만, 나는 생각치도 않던 행운을 기꺼이 받아드리기로 하고 그들을 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끼리 돌아다니면서 불어를 몰라서 설명해놓은 것을 보고도 그게 그건가보다 하고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였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안내를 하는 자원봉사를 하겠다는데 고맙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자기들이 들고 가는 이 가방에는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인데 우리에게도 제공해 주고 싶다며 즐거워 한다.

 

파리국제교류재단(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의 안내를 자청한 장 폴씨 부부와 한 컷.

파리국제교류재단 (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 

1924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 40개국의 문화관을 갖고 있으며 각 나라의 문화관마다 그나라 출신 젊은 학생들이 기숙사로 사용하면서 서로 문화를 교류 하고 있다. 이곳에 아쉽게도 한국 문화관은 없었다.

먼저 들어간 인도 문화관에는 아래층 홀에 간디의 흉상이 유리 상자에 보호되어 중앙에 세워져 있고, 그 옆 조금 아래쪽에는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얀 도인같은 시인 타고르가 프랑스의 시인 로망 롤랑과 대화하는 모습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큰 홀에 1백명이 넘을 듯한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인 행사 진행자에게 우리를 소개하면서 불어를 모른다고 소개한 모양이다. 젊은 행사 진행자가 내게 영어로, 모든 행사가 불어로 진행 될터인데 끝까지 참석하겠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상관없이 그냥 참석하겠다고 말하고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안내하는 아주머니가 종이접시에 담아다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인체사진에 표시한 각 부위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1 시간정도 이어지고, 인도 음악을 들으면서 명상하는 시간, 인도 무희가 고유의 무용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무용이라기 보다 진솔한 신앙 기원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파리국제교류재단(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 인도관에 있는 간디의 흉상
파리국제교류재단(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의 인도관에 있는 타고르와 로망 롤랑의 대화하는 사진.
파리국제교류재단(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DE PARIS)의 印度館에서 인도 문화소개의 일환으로 요가 홍보행사에 서 보여주는 인체 각 부위에대한 설명도.
요가 홍보행사의 장면

요가 홍보행사에서 시범을 보이는 인도의 여성

인도관을 나오니 벌써 오후 4시가 지났다. 스웨덴, 멕시코, 러시아, 노르웨이,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기숙사는 밖에서만 대강 보고 사진만 몇장 찍고, 들어간 곳이 국제관이다.

이곳은 극장, 음악당, 식당, 회의실, 넓은 공연실 등이 모두 갖추어진 곳인데, 이곳은 여기 도미토리에 거주하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처음 공연실로 들어가니 동양의 젊은이들이 자기의 민속무용을 공연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지아 학생들인 것 같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이들처럼 우리의 고유 전통문화를 다른 나라에 알리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이 안타깝다.  아마도 당시 우리의 국력이나 외교가 지금 같지는 못했던 때문이리라.

-벼룩시장-

오후 5시가 넘어 밖으로 나오니 파리 특유의 날씨답게 갑자기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겠다고 했지만 굳이 자기들 차로 포르트 드 방브 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해서 또 신세를 졌다. 차 안에서 그분들이 한가지 중요한 정보를 주어서 우리의 오늘 계획이 하나 늘어났다.

오늘이 파리시내의 박물관의 밤 특별행사를 하기 때문에 시내에 있는 모든 박물관이 무료로 개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전부터 관람하고싶어 하던 오르세 박물관을 늦더라도 가기로 했다.

E-mail 주소와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화요일 이후에 자기집을 꼭 방문해 달라는 말을 하고 우리를 내려 주었다.

파리의 남쪽의 포르트 드 방브(Porte de Vanves)역 근처의 벼룩시장의 모습

포르트 드 방브 역에서 벼룩시장을 찾기가 막막하다. 몇 번을 물어서 500 미터쯤 떨어진 곳을 찾아 갔더니 아까 내린 비 때문인지 벌써 짐을 거둔 점포도 있다. 잡다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넓은 광장에 들어차 있는 것이 마치 성남의 모란시장과 흡사하다. 민속복장을 하고 민속춤을 추면서 관광객을 끌기도 하고, 전래 동화같은 극을 연출하는지 옛날 복장의 남녀가 칼, 활 또는 망치같은 소품을 들고 있기도 한다. 원래 무엇을 사기 위하여 간 것도 아니고 구경만 하기 위해서 갔기 때문에 사진만 몇 장 찍고, 오르세 박물관으로 가기 위하여 지하철을 타러 오는데, 다시 길을 잃었다.

 

처음 온 곳에서 모르는 길을 묻는 것이 수치가 아닌데도 될 수 있으면 길을 묻지 않고 추측하여 길을 찾다가 낭패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할 수 없이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니 반대방향으로 가라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만난 예쁜 소년과 아내가 사진을 남겼다.

 

-오르세 박물관 무료 관람-

오후 7시쯤 오르세 박물관 역에서 내리니 줄을 선 관람객이 박물관 앞 광장을 메우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 우리가 입장할 무렵 뒤를 돌아보니 역시 줄을 선 관람객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평소 입장료가 7.5유로(약 13,000원)인데 오늘 무료입장을 시키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1848년부터 1914년 시기의 모든 미술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곳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댕의 조각, 마네, 모네, 르노아르, 고호, 고갱, 밀레 등 수많은 작가들의 그림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작품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전시되고 있다. 

 

평소 관람시간은 매일 아침 9시 반부터 저녁 6시,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목요일은 저녁 9시 45분까지 이고 입장마감은 오후 5시와 목요일은 저녁 9시, 전시실 퇴실은 오후 5시 반과, 목요일은 저녁 9시 15분인데, 오늘만은 특별 예외로 올 나잇 개방한다고 한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로 5층으로 올라갔다가 2층으로 내려와 관람하는 동안 우리가 아는 화가들의 많이 보아왔던 그림들의 사진을 찍고 대충 돌아나왔는데도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저녁 11시가 넘어 박물관을 나와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 40분이다. 오전에 집을 나간지 12시간만에 피곤한 다리를 하고 돌아왔지만 다른 날 보다 소득이 많았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