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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村鄕友會

 

2024년 11월 2일, 금년 가을도 저물어가고 있다. 계절로 보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때이기는 하지만,  아직 겨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온 누리에 가을의 빛깔이 그대로 남아 있다. 떠나가는 가을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 오늘은 나도 몇 년 만에 院村鄕友會의 뒤늦은 가을 나들이에 함께 하게 되었다. 5,6년 전이던가 향우회 단체고향방문 때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했던 옛 고향 친구들과 선 후배들을 오랜만에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날이어서 설레는 마음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꺼번에 실향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34 ~ 5년 전만 하더라도 평화로운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 집에 좀 색다른 먹거리가 생기거나 별식을 만들게 되면 습관처럼 담장 너머 이웃과 서로 나누는가 하면 농사일이 바쁠 때는 내일 네일 없이 서로 도우며 가난한 속에서도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가던 농촌마을의 이웃사촌들이었다. 그 시절, 나뿐만 아니라 더러는 학업이나 직장 때문에 잠시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살던 사람들이 있기는 했었지만, 그들도 언제나 삶의 중심은 고향 원촌마을이었고, 가고 싶을 때는 수시로 찾던 곳이 그곳 고향이었지만, 이제는 가고 싶어도 방문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고향 원촌마을은 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변해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지도상에서도 그 이름이 지워져 버린지 이미 35년이 되었다. 40여 호의 가구들이 오밀조밀 모여 살던 마을은 이미 현대식 군인들의 막사로 변했고, 우리가 땀 흘리며 일하던 논밭은 군인들의 훈련장이 되어 있다.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전투병과교육사령부(常武臺)가 하필이면 우리 고향으로 이전이 결정된 국가시책사업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국가에 내어주고 우리는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院村鄕友會는 그렇게 오래전에 함께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모여 빠르게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도 티 없이 순수했던 이웃사촌들이 옛정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한 차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도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청정지역인 강원도 쪽으로 떠나는 추억여행을 계획했던 것이다. 먼저 인제읍에 세워진 박인환문학관을 관람하며 짧았던 시인의 생애와 그가 남긴 명시들을 다시 음미해 보는 시간, 아름답게 물들었을 설악산 단풍, 속초시내 어시장의 횟집에서의 점심식사, 대포 외옹치해수욕장에서의 드넓은 동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몸과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해풍욕,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양 바닷가 아름다운 곳에 있는 천년 고찰 낙산사에 들러서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의 교훈을 깨달아 모두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4년 가을 院村鄕友會의 추억 만들기 여행계획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침 7시 30분 지하철 7호선 먹골역에 대기하고 있는 대절버스가  오늘 우리의 가을 나들이를 책임지게 되어 있었다. 아침식사는 준비한 주먹밥으로 버스에서 하게 되었다기에 집에서는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마시고 간편한 복장으로 시간에 늦지 않도록 집을 나서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침이지만 걱정스럽던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 그대로다.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제발 우리가 향해 가는 강원도 쪽의 날씨도 이렇게 쾌청하기를 바랐다. 

출발지점에 도착하여 반가운 얼굴들을 만난다. 멀리 고향 부근에 살고 있는 재수 선배가  불원천리 하고 참석해 주어서 반가움이 더했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참석하는 선배들의 얼굴도, 동년배 친구들의 얼굴도 그 수가 많이 줄었다. 모두가 건강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며 헤어질 때는 초등학생이었던 후배들도 이제 어엿한 장년들이 되었는가 하면 더러는 초로의 얼굴들이 되어 같이 늙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무상한 세월은 이렇게 말없이 세상을 바꾸어가고 있다. 출발하여 달리는 버스에서 오늘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참석하지 못한 몇몇 선배들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어쩔 수도 없는 아쉬움만 남긴다. 그러나 한편 우리의 이런 만남이야말로 지내온 좋은 시절의 회상을 함께 즐기면서 더 아름답게 더 즐겁고 더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 동안의 좋은 활력소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천천히 3시간을 넘게 달려 오전 10시 40분쯤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 시인 박인환의 생가 터에 세워진 박인환문학관과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앞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두 곳에 나뉘어 들어가 관람한다. 두 곳을 다 관람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각각 40분가량을 관람하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라 미시령터널을 통과하여 속초를 향하면서 설악의 단풍을 차내에서라도 감상하려 했지만 기대와 다르게 날씨가 흐리더니 가는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설악에는 안개구름이 가려 우리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2009년에 2층으로 세워진 박인환문학관에는 그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소개하고 있다. 시인은 1926년 인제읍 상동리 에서 태어났고, 1956년 만 30세를 채우지 못하고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그가 만년에 썼던 대표시 2편을 소개한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朴寅煥)

1955년 10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박인환

1956년 3월 시인의 타계 1주일 전 마지막 작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 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밴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태어나 1956년 3월 20일 30세에 요절한 미남 시인 박인환의 모습

30세에 요절한  미남 시인 박인환

'세월이 가면'은 1950년대 문단의 모더니스트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이 죽기 일주일 전쯤 마지막으로 남긴 시다.  이 시에는 소설 같은 사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끝나고 3년쯤 지난 1956년 3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서울 거리 곳곳은 물론 목로주점 안에도 6․25전쟁의 상흔이 어지러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명동 뒷골목 자그마한 목로주점 경상도집에 시인 박인환과 작곡가 이진섭(李眞燮), 국제신보 주필이자 소설가 송지영(宋志英) 등 몇몇은 초저녁부터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가수 겸 영화배우 나애심(羅愛心, 본명 전봉선)도 있었다.

박인환과 벗들은 은성, 경상도집 외에도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집 유명옥, 해방 이후 명동 인근에 최초로 문을 연 고전음악 전문 봉선화다방, 한국전쟁 이후 명동에 최초로 문을 연 모나리자다방을 즐겨 찾았다. 차와 술, 간단한 안주를 팔던 동방싸롱,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포엠도 이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술이 거나해지자 이진섭은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하지만 나애심은 딴청만 부리고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나애심은 삶의 고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인환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박인환이 주모에게 종이 한 장을 갖다 달라고 했다. 주모에게서 받아든 누런 종이를 받아든 그는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눈으로 박인환이 끄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진섭은 갑자기 정신이라도 든 듯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마치 무엇에도 홀린 사람처럼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로 시작되는 시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박인환의 명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를 읽고 있던 이진섭의 머리에 불현듯 곡조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악보를 그려 박인환의 시를 가사로 붙였다. 그리고는 나애심에게 한 번 불러보기를 청했다. 나애심은 악보를 보며 건성으로 노래를 한번 부르고는 송지영과 함께 자리를 떴다. 불멸의 대표곡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만 셈이었다.

잠시 뒤 성악가로 배우가 된 임만섭(林萬燮)과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주점으로 들어섰다. 이봉구는 당시 '명동백작'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인환과 이진섭은 늦게 온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 벌칙으로 찌그러진 양은술잔에 연거푸 막걸리 대포 석 잔씩을 권했다. 이진섭이 술잔을 비운 임만섭에게 악보를 건네주었다. 몇 번이나 악보를 찬찬히 읽어보던 임만섭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슴을 울리는 그윽한 테너로 '세월이 가면'을 열창했다. 그 노래에 끌려 명동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경상도집’ 앞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앵콜을 연호하자 임만섭은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킨 다음 '세월이 가면'을 다시 한번 열창했다. 명곡 '세월이 가면'은 또 그렇게 탄생했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고 금새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세월이 가면'은 세상 사람들에게는'명동엘레지'로 알려졌다.

 

'경상도집’에서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첫사랑 여인의 기일을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를 다녀왔다. 가랑잎이 나뒹구는 옛 연인의 헐벗은 묘지를 바라보던 청년 박인환의 가슴 저 밑에서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구절이 저절로 솟구쳐 올라왔다.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그의 첫사랑에 얽힌 애절한 추억을 피를 토하듯 써내린 가슴 아픈 정한의 시였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남긴 박인환은 며칠 뒤인 1956년 3월 20일 밤 9시, 자택에서 잠들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박인환은 그렇게 먼저 간 연인 곁으로 하늘나라 여행을 떠났다. 한국 모더니즘의 큰별이 진 것이다.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놀란 친구, 동료 문인들은 21일 박인환의 세종로 집으로 황망하게 모여들었다. 송지영은 그의 치뜬 눈을 감겨 주었고, 다른 친구는 그의 주검에 생전에 좋아하던 조니워커를 부었다.

박인환의 장례식은 시인장으로 치러졌다. 박인환과 함께 명동의 목로주점을 드나들던 5년 연상 친구 조병화(趙炳華) 시인은 발인 때  ‘……참으로 너는 정들다 만 애인처럼 소리 없이 가는구나' 하고 조시를 읊었다. '정들다 만 애인.....'이란 표현에서 진하고 애닯은 마음이 묻어난다. 동료 문인들은 미망인의 양해를 얻어 박인환을 망우리 공동묘지 옛 연인의 묘 옆에 나란히 묻었다.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도 함께 묻어주었다.

                                         

인제에서 박인환문학관을 나와  버스는 미시령터널을 향해 달리면서 안개에 가려진 설악산의 단풍을 볼 수가 없었지만, 속초에 도착할 무렵엔 언제였냐는 듯 비는 그치고 다시 햇빛이 우리의 마음까지 밝게 한다. 어시장을 찾아가 예약했던 식당에 준비된 회정식으로 포식을 한다.  식사 후 버스는 다시 달려 우리를 대포 외옹치 바닷가에 내려준다. 마음이 확 트이는 동해바다가 우리의 마음까지 활짝 열어주는가 하면 푸른 물결 위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은 우리 몸과 마음의 티를 씻어준다.  차는 다시 양양으로 달려 천년 고찰 낙산사 주차장에 우리를 내려준다. 

대포 외옹치해수욕장에서 드넓은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몸과 마음의 티를 씻어내게 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서기 671년)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모시기 위해 세운 고찰이다. 1300년의 세월 속에 전쟁과 화재로 수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가장 최근에는 2005년 4월 5일 큰 화재로 홍련암을 제외하고는 사찰 전체가 소실된 후 다시 복원되기도 하였다.

낙산사 주차장에서 절을 향해 올라가 처음 닿은 곳이 의상대사가 좌선수행을 했다는 의상대 (義湘臺)이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세워진 의상대는 낙산사의 상징처럼 생각되는 곳이다. 처음에는 이곳에 암자가 있었지만 폐허 되어 1925년 그 자리에 6 각형 정자를 지었고, 1974년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양양 8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의상대는 의상대사가 좌선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폐허로 변해버렸고 이후 1925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의상대라 이름붙였다. 1974년 9월 9일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그 덕인지 양양 8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다음에 들른 곳은 홍련암(紅蓮庵) 이다.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 의상대사가 세웠으며 1984년 6월 2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 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의상대사가 관음굴에서 7일 밤낮을 기도한 후 바다에서 붉은 연꽃이 나타나고 그 연꽃 위에 앉은 관음보살을 보았다 하여 관음굴 앞에 암자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곳 역시 낙산사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세워진 암자이다. 

낙산사에서도 꽤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로 절벽 위에 석축을 세워 조성했다. 의상대에서 10여분 정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 의상대사가 참배를 할 때 갑자기 푸른 새가 나타나자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어떤 석굴 속에서 자취를 감추자 그 앞에서 7일 밤낮을 기도하였고, 그러자 앞바다에 연꽃 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곳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워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다.  2005년 산불 당시 바로 앞까지 불길이 번졌으나 다행히 소실되는 걸 피했다.

홍련암에서 나와 다시 찾은 곳은 낙산사 경내 오봉산의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해수관음불상이다. 높이 15미터, 둘레 3미터, 너비 6미터의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해수관음불상은 홍련암, 의상대와 더불어 낙산사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1971년부터 조각을 해 1977년에 완성했으며 그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

낙산사에서의 시간은 느긋하지 못하여 수박 겉핥기식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원통보전인데 여기에는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는 낙산사 7  층 석탑(洛山寺 七層石塔)이 있다.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 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년)에 현재의 모습인 7 층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낙산사의 원통보전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잰걸음으로 다시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을 찾아 내려오니 모두들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다.  주차장 옆 가게에서  이지방 특산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고 차에 올라  돌아오는 길은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향우회에서는 오늘 참석한 모든 회원들에게 한 보따리씩 선물을 안기는가 하면, 막걸리 잔은 버스 안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빠르고도 흥겨운 음악은 역시 관광버스 안에서의 모습 그대로 몸을 흔들어대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푸는 춤사위를 촉발하기도 한다.  모두들 즐거운 추억 여행이 되었으리라. 앞으로도  향우회원 모두가 부디 건강을 유지하여 다시 만나는 날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