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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이원익 대감

체찰사 이원익 공에게 드림

이순신

 

살피건대, 어떤 일을 함에 의리 때문에 중단할 수 없는 형세가 있는가 하면, 부득이한 인정 때문에 중단할 수 없는 간절한 형편도 있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정으로써 부득이한 경우를 만나면 때로는 의리를 앞세워 인정을 무시할 경우도 있겠고, 또 때로는 형세를 뒤로 미루고 사정에 치우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노모가 계시 온데 올해 여든한 살입니다. 임진년 초에 다행히 별 일 없이 살아 계시기는 하지만 바닷길로 남쪽으로 내려와서 순천 지방에 우선 거처를 정하고 살았습니다. 이때는 다만 저희 모자가 서로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누리는 것이라 여기며, 다른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음해 계사년에는 명나라 구원군이 진주하여 함께 왜적을 소탕하자 떠돌던 백성들이 모두 제 고장을 그리워하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적들은 속이는 일이 많고 온갖 꾀를 다 내니, 한 구석에 진치고 있는 것이 어찌 헛된 일이라 하겠나이까? 만약 저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사랑하는 친척을 굶주린 범의 입에 보내는 꼴이 되겠기로, 얼른 돌아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나이다.

 

저는 본래 용렬한 사람으로 무거운 소임을 욕되이 맡아, 일에 있어서는 허술히 해서는 안 될 책임이 있고, 몸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어 부질없이 어버이를 그리는 정만 더할 뿐입니다. 부모 된 심정을 헤아려 보건대 자식이 아침에 나갔어도 저녁이 되면 동구 밖에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 바로 부모의 심정이 아닙니까? 그러하거늘 하물며 못 본 지 3년이나 되었으니 우리 어머님의 심정이야 어떻겠습니까?

 

얼마 전 집에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셨는데, 어머님은 “늙은 몸의 병이 날로 더해 가니 앞날인들 얼마나 되겠느냐! 죽기 전에 네 얼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이 듣더라도 눈물이 날 말씀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자식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 기별을 듣고서는 가슴이 더욱 산란할 뿐, 다른 일에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난 계미년(1583)에 함경도 건원보 권관으로 있을 때 선친께서 돌아가시어 천 리를 달려와 분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약 한 첩 못 달여 드리고, 돌아가셨을 때는 영결조차 하지 못하여 항상 그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습니다.

 

이제 또 어머니께서 연세가 많아 돌아가실 날이 해가 서산에 닿은 듯 하온데, 만일 또 하루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시고 효행을 다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게 된다면, 제가 또 한 번 불효한 자식이 될 뿐 아니라, 어머님께서도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생각건대 왜적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고, 황제의 사신이 내려온 날도 벌써 한참인데, 아직도 적들은 바다를 건너갈 기미가 없으니, 앞으로 닥쳐올 화는 지난 때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겨울에 어머님을 돌아가 뵙지 못하면, 봄이 되어 방비에 또한 바쁘게 되어 도저히 진을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합하께서는 이 애틋한 정을 살피시어 며칠간의 여유를 주신다면, 뱃길로 어머님을 찾아 뵈어 늙으신 어머님 마음이 무릇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듯 합니다. 덧붙여 말씀 드리건대 만일 그 사이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 대감의 허락이 있다 하여 감히 중대한 일을 그르치는 잘못을 하겠습니까?

 

이 글에 대한 이원익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至情所發。彼我同然。此書之來。令人心動。第緣公義所係。未敢率爾定奪也

 

(지극한 정이 나옴이야 피차가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이 글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공적인 일에 연관된 일이니 감히 제가 그리 하시라 할 수가 없습니다.)

 

1596 8 5일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직속 상관이었던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담겨 있어서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줍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원익은 공식적인 답서로 공적인 일이니 허락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뒤로 사람을 보내 어머니를 뵙고 오라는 승낙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