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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경원(徽慶園) 지문(誌文)

 

빈(嬪)의 성은 박씨(朴氏)로 가계(家系)가 반남(潘南)에서 나왔는데, 사로왕(斯盧王)의 후예이다. 박상충(朴尙衷)은 고려 공민왕 때에 도의(道義)로 드러나 학자들이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고 칭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박은(朴訔)이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의 벼슬을 하였고, 시호는 평도(平度)였다. 5대를 내려와 박소(朴紹)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는 야천(冶川)이고, 학문과 문장으로 당시의 명유(名儒)가 되었는데, 영상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로부터 번성하고 혁혁하여 대대로 저명한 벼슬아치가 나왔고 몇 가닥으로 분파되었으나 모두가 드러난 씨족이 되었다. 5세조 박세성(朴世城)은 숙종 때에 윤선도(尹善道)와 권시(權諰)를 배척하였으며 벼슬이 좌부승지에 이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고조 박태원(朴泰遠)은 벼슬이 목사에 이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박필이(朴弼履)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할아버지 박사석(朴師錫)은 현령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은 호가 금석(錦石)인데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증 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따님이다. 원경유는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의 5세손인데, 빈이 그 셋째 따님이다. 빈은 영조[英宗]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정조[正宗] 정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빈호(殯號)는 유(綬)이고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1822) 임오(壬午) 12월 26일에 창덕궁(昌德宮)의 보경당(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유사(有司)가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원호(園號)는휘경(徽慶)으로 올렸다. 이듬해 2월 27일에 양주(楊州) 배봉산(拜峯山) 좌묘원(坐卯原)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옛날 영우원(永祐園) 자리의 왼쪽이다. 1남을 두었는데 지금의 전하이고, 1녀를 두었는데 숙선 옹주(淑善翁主)로서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主)에게 시집갔다. 전하께서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바로 세자 저하이고 다음은 일찍 죽었다. 세 공주를 두었는데 맏이는 명온(明溫)으로 봉해졌고, 하나는 옹주이다.

당초 원 부인(元夫人)의 꿈에 노인이 무릎을 꿇고 큰 구슬 하나를 바쳤는데, 광채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이윽고 빈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특이한 바탕이 있었다. 아이 때에 두 언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호랑이가 갑자기 마당으로 뛰어들어왔다. 두 언니는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울었으나 빈은 서서히 걸어서 방으로 들어가 마치 아무 것도 안 본 것처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범하다는 것을 알았다.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선왕의 춘추도 많으셨는데, 효의 왕후(孝懿王后)와 화빈(和嬪) 및 여러 후궁들에게 모두 소생이 없었다. 성상께서 매우 걱정하여 다시 명원(名媛)을 간택(揀擇)하게 되었는데, 빈이 차점(次點)을 차지하였다가 삼간(三揀) 때에 드디어 명원으로 뽑혔다. 성상께서 고묘(告廟)·수빙(修聘)·선고(宣誥) 등을 마치고 개장(盖仗)을 갖추어 맞아들여 근례(巹禮)를 거행하였는데, 이처럼 성대한 예절은 옛날에도 없었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다른 빈어(嬪御)와 같이 보아서는 안되니, 특별히 대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경술년에 생남(生男)의 경사가 있자 성상께서 더욱 두터이 대우하셨으나 빈은 여전히 조심하고 어렵게 여기었다. 효의 왕후를 신중히 섬기고 같은 반열을 더욱 온화하게 대하니, 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자 지체(志體)의 봉양이 점차 갖추어졌다. 기사년에 세자가 탄생하자, 전하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를 생각하고 깊은 경사를 열어주신 근원을 미루어 신(臣)에게 명하여 대궐 뜰에서 하유하게 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차자를 올려 융숭하게 받들자고 청하였고, 예관은 의논하기를, ‘신하들은 저하(邸下)로 부르고 세시와 명절에 하례를 드릴 때 안팎에서 전문(箋文)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치되, 의주(儀註)와 같이 하소서.’ 하니, 빈께서 이르시기를, ‘이는 비록 성상의 효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마음에 매우 거북스럽다.’고 하셨다.

 

지난해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風痰)의 증세가 생겼는데, 전하께서 약원(藥院)에 명하여 직숙(直宿)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자 직숙을 거두고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빈께서 전하에게 극력 사양하여 취소하였다. 그러나 환후가 차츰차츰 더 심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심으로써 우리 전하께 극도의 슬픔을 안겨 드렸으니, 아! 슬프도다. 전하께서 고례(古禮)에 따라 시마복(緦麻服)을 입기로 하셨으나, 상사(喪事)의 의절은 대부분 살아계실 때를 모방해서 하였다.

 

환경전(歡慶殿)에 빈궁(嬪宮)을 모시고 손수 원관(園官)의 칭호를 고쳐 참봉(參奉)으로 썼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도총부(都摠府)를 개수한 다음 이곳에다 반우(返虞)해 놓고 상막(喪幕)에 거처하면서 전(奠)을 드리는 의리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정 신하들이 대부분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전하께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체로 성상의 생각은 ‘상복이란 예절의 큰 한계점이므로 존귀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명위(名位)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역대에서 경상적인 것을 어겨 후세의 비난을 사는 일은 모두 할 수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의문(儀文)과 절차(節次)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므로 비록 오늘날 처음으로 시행한다 해도 지나친 일은 아니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신이 생각해 보건대, 전(傳)에 이르기를, ‘왕자(王者)가 아니면 예를 논의하지 않고 문자를 고정(考定)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이신비(李宸妃)의 상사(喪事) 때 빈염(殯斂)에 황후의 예를 쓰도록 권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이 이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문자를 고정하고 예를 논의할 처지에 계시어 절충하고 짐작하되, 의리로 헤아려 만들어 인정에 합치되었으며, 경상을 지키고 권도(權道)에도 통달하여 높여 보답하는 도리를 스스로 다하였으며, 이 의리는 성현(聖賢)이 다시 나와도 필시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위대한 성인이 하신 일이 보통보다 몇만 갑절 더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전하께서는 현실(玄室)의 지문(誌文) 서술을 신에게 명하셨는데, 빈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부녀자가 무슨 지장(誌狀)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행록(行錄)을 짓지 말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상 생활 속에서 여사(女史)를 빛내고 사책(史策)에 빛나게 할 만한 일을 상세히 상고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덕이 높고 공이 커서 사람들의 귀와 눈에 젖어 엄폐할 수 없는 몇 가지를 기술하려고 한다. 빈의 성품은 총명하고 장중하여 평상시에 말씀이 적었으며 아랫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복식(服飾)과 기용(器用)은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혜빈(惠嬪)을 받들 때 효성과 순종을 다하고 선왕을 섬길 때 거스른 말이 없었으며 전하를 양육하실 때 의복을 항상 빨아서 입히고 가르칠 때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하셨다. 경신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성상을 보호하면서 삼가고 조심하여 항상 미치지 못하듯이 하였는데, 낮이면 식음도 잊어버리고 밤이면 편안히 잠잘 사이도 없이 하다가 피로가 쌓였지만 자신은 돌보지 않으셨다. 대체로 어느 누가 자애로운 정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오직 한 조각의 혈성(血誠)과 고심(苦心)은 신명(神明)을 감격시키고 금석(金石)을 뚫을 만하셨으니, 천고(千古)를 손꼽아 보아도 빈(嬪) 한 분뿐이라고 하겠다.

! 덕은 육궁(六宮)에서 으뜸가고 공은 만세의 터전을 닦아 놓았는데, 이는 붓을 든 사람의 사견(私見)이 아니고 곧 팔도의 백성들이 다같이 칭송한 바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겠는가? 신이 옛날에 사필(史筆)의 소임을 맡아 빈께서 궁중으로 들어오실 때의 성대한 거동을 보았는데, 아직도 우리 선왕께서 기뻐하던 모습과 칭찬하시던 음성을 기억하고 있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역력하다. 그런데 늙어 백수(白首)가 되도록 죽지 않았다가 다시 우리 전하께서 슬퍼하시는 날을 만나 참람하고 비루하다는 것을 잊은 채 외람되이 지석(誌石)의 글을 올리게 되니, 옛날을 우러러 추억하고 지금을 굽어볼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시었다.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註 1: 지석(誌石)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태어나고 죽은 날, 행적, 무덤의 위치와 좌향(坐向) 따위를 돌이나 석판에 적어(誌文)서 무덤 앞 즉, 사대석(병풍석)남쪽에서 석상(능은 혼유석)의 북쪽 사이에 깊이 5척을 파서 삼물(모래, 황토, 생석회)로써 사방과 윗면에 굳게 다져 쌓은 다음 흙으로 메워 묻어 후일 무덤 주인의 행적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註 2: 휘경원(徽慶園)은 조선조 23대 순조의 사친인 현목유비(顯穆綏妃) 반남 박씨의 원호(園號)이며, 지문(誌文)의 본문 중에 영종(英宗), 또는 정종(正宗)으로 표기 된 것은 21대 영조(英祖)나 22대 정조(正祖)의 묘호(廟號)가 뒤에 바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