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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穆綏妃 諡冊文

 

예는 압굴(壓屈)의 제한이 있지만, 오늘날 내 마음을 어떻게 가눌 수 있겠는가? 덕은 길러 준 은혜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하늘 같은 은혜 갚고자 해도 끝이 없도다. 이에 시호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마지막 길을 빛내는 규례를 높이도다. 이를 어찌 천양(闡揚)했다고 하겠는가? 오직 울먹이는 심정만 간절하구나. 삼가 생각건대 유빈 저하(綬嬪邸下)께서는 행실은 좋은 법도를 따르셨고 얼굴에는 온순하고 사려 깊은 인상이 어리었네. 아름다운 덕을 오래 쌓아 훌륭한 가문에서 좋은 경사를 모았고, 난초(蘭草) 같은 향기는 본받은 바 있어 좋은 소문이 규방에서 풍겨 나왔네. 태몽(胎夢)은 구슬을 바친 것에서 징험 되었으니 조짐은 잉태할 때보다 앞선 듯하고, 어린 나이에 호랑이를 보고도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기특함이 당웅(當熊) 보다 더하였도다. 책문을 반포하고 문명(問名)도 하셨으니 선왕의 거룩한 간택에 응하였고, 관작을 봉하고 칭호를 내렸으니 군자(君子) 복리(福履)의 편안함에 따랐다. 드디어 상서로운 길이 열리니 어진 자손이 계승하리로다.

그러나 매교(
)에 아들의 점지(點指)가 더디니 국세(國勢)는 거의 철류(綴旒)처럼 위태로웠는데, 요모문(堯母門) 이 경술년에 열렸으니 종맥(宗脈)은 실로 이를 힘입어 번성하게 되었도다. 삼전(三殿)에 기쁨과 사랑이 극진한 것은 오로지 공경과 온화를 간직하였기 때문이고 육궁(六宮)에서 앞다투어 찬미하니 모두가 빛난 덕을 우러러보고 훈도(薰陶)되었다.

아! 경신년의 비운은 딱하게 소자(小子)가 어린 나이에 어려움이 많았다. 배봉산(拜峯山)에 감도는 구름을 붙잡을 수 없으니 진유(眞遊)의 멀어짐이 가슴 아팠고, 훤초(萱草)의 빛이 유난히 따뜻하니 인자(仁慈)하신 은혜가 갈수록 융숭하였다. 항상 병이 날까 걱정하여 주셨으므로 보호를 믿었고, 간혹 재앙을 만나면 자세하게 깨우쳐 주셨다. 하루 세 차례 문안에 일곱 문채의 장복(章服)이 뒤따름을 보았으니 비록 손자를 희롱하는 염원은 풀으셨으나, 20년 동안 천승(千乘)의 봉양을 받으면서 오히려 조촐하고 풍성한 정성을 혐의롭게 여겼다. 요즈음 초췌(憔悴)한 증세가 깊어지니, 더욱 희구(喜懼)의 마음이 간절하게 되었다. 선군(先君)의 생각으로 힘쓰시어 비록 고달프고 병이 깊어도 쉴 새가 없었는데, 자식의 마음에 끝없는 것은 오직 늙으시도록 건강하시기만을 빌었다. 높은 나이 60세에 가까우시어 장차 80세를 바랐고, 병이 났으나 곧 쾌유의 기쁨이 있었으므로 강릉(岡陵)과 송백(松栢) 같은 수를 바랐다. 바야흐로 어머니가 장수한 노래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보무(寶
)의 광채가 흐려져서 놀랐도다.

제소(齊疏)는 3년이 끝나지 않았는데, 적고(狄皐)의 슬픈 일이 또 하룻밤 사이에 생겼다. 사모하는 마음 미치지 못함을 탄식했으니 동조(東朝)의 궁전(宮殿)이 텅 비어 있고, 감싸주던 분이 떠나셨으니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북당(北堂)이 쓸쓸하도다. 봄 가을에 사모하던 옛 묘역(墓域)에 자리잡았으니 신도(神道)도 매우 편안하실 것이며, 종천(終天)의 지극한 슬픔을 붙였으니 다행히 전알(展謁)할 길이 아주 가깝구나. 진실로 아름다운 행실을 빨리 기술하지 않으면 휘음(徽音)마저 길이 듣지 못할 것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상여(喪輿)와 상구(喪具) 두루 갖추니 친상(親喪)에는 의당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이고, 전례(典禮)와 책문(冊文) 모두 갖추니 옛 전장 따라서 유실이 없게 한 것이다. 독실한 행실이 빛났으니 
(顯) 자는 명행(名行)을 밝게 나타낸 것이고 단장(端莊) 제정(齊整)하셨으니 (穆) 자는 아름다운 덕을 겸전(兼全)한 것이도다. 삼가 사신을 보내어 존시(尊諡)를 현목(顯穆)으로 올렸으니, 바라건대 밝으신 영령께서는 작은 정성을 굽어살피소서. 아! 장례의 날짜는 빨리도 다가오고 있는데, 아름다운 규범은 어찌 현경(玄扃)에 묻힌단 말인가? 내세(來世)에 길이 전해져서 유방(流芳)이 여사(女史)에 더욱 빛날 것입니다.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