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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얼이 숨 쉬는 곳

-喜雨亭-

李休宰(孝寧大君 19代 孫)

 

  내 파조(派祖)이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얼이 지금도 숨 쉬고 있을 것 같은 희우정( 喜雨亭)을 탐방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나는 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대산의 상원사, 관악산의 연주암, 곡성의 태안사, 천안의 광덕사, 그리고 강진의 무위사와 백련사 등을 탐방하면서 효령대군의 유불조화론(儒佛調和論)을 통해 백성들의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국태민안(國太民安)을 이루고 또한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셨던 큰 뜻을 느껴보기도 했었다.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내리니 아침부터 흐리던 날씨가 드디어 가는 빗방울을 뿌리다 그쳤다 하기를 반복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강변북로까지 걸어가 통행인이 거의 없는 좁다란 인도의 노변에 설치된 방음벽을 따라 일산 방향으로 300 미터쯤 더 걸어가니 도로에 접해있는 망원정의 소슬 삼문이 나타난다. 잠겨 있는 대문, 날씨 탓인지 방문자는 보이지 않고 주위에 지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고리에 오랜 먼지가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문은 사용하지 않는 모양새다. 삼문 밖에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기 위해 담장 너머로 이리저리 안쪽을 살펴보아도 다른 출입문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출입하는 입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담장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작은 협문이 있고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협문 안쪽에 있는 관리소에서 관리인이 나와서 탐방객을 맞는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 놓고 층계를 올라가 누에 오르니 정자 안쪽에 부착된 세종대왕께서 직접 쓰셨다는 희우정 현판이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강변북로를 자동차로 지날 때 보이던 정자의 바깥에 부착된 망원정(望遠亭)의 현판은 안쪽에서 볼 수가 없다. 도로를 건설할 때 여유를 두지 않고 길이 정자의 남쪽을 바짝 붙어 지나가게 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행정구역상  주소가 마포구 합정동 457-1번지다. 그러나 마을 이름이 망원동( 望遠洞)이고, 주변의 길 이름 또한 희우정로(喜雨亭路)라고 붙여 놓은 것을 보니 그 명칭들이 모두 희우정이나 망원정에서 따온 이름이려니 생각하니 이 정자의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한 행정관청의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망원정은 현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 1424년 효령대군께서 지으셨고, 그 후 565년 동안 수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거치면서 유지되어 오다가 1925년 대홍수와 한강개발에 의하여 자취가 사라졌던 것을 서울특별시가 1987년에 정차 터를 발굴하고 1989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옛날의 정자(停子)는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의 고향이며, 자존심의 표출이기도 했었다. 지금도 전국 각처의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 시가(詩歌)를 읊는 낭만 속에서 멋을 부리며 흥겨우면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여가를 즐기던 곳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희우정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깊은 경세(經世)의 목적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종 6년(1424)에 효령대군께서 별서를 지을 당시 정자의 이름은 합강정(合江亭)이었다. 이곳에서 약간의 농사도 지으며 강상의 물결을 즐기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해인 세종 7년(1425)에 가뭄이 계속되자 임금께서 기우제를 지내시고, 농정을 살피기 위하여 서쪽 교외에 나왔다가 형님인 효령대군의 합강정에 올랐는데, 때마침 단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이는 어진 형님의 덕이라며 매우 기뻐하여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1425년 5월 13일 세종실록 28권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임금이 모화루(慕華樓)에 거동하여 서변(西邊)에 말을 머물러 격구(擊毬)하는 것을 구경하고, 인하여 서강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별서에 이르러 강 언덕 정자에 나 앉아 포(砲) 놓는 것과 군사들의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관람하고 술잔치를 차리고, 인하여 대군에게 안장 갖춘 말과 본궁 근처의 농토 40 여 섬지기 땅을 하사하였다. 중략- 이날 임금이 홍제원(洪濟院), 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加乙頭) 들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는 길에 밀, 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임금이 흔연히 기쁜 빛을 띠고 정자 위에 올라 막 잔치를 벌이는데, 마침 큰 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네 들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이에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세종대왕께서 형님인 효령대군의 별장에 이렇듯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지어주시고 사패문을 친필로 남기시어 이르기를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주(周) 나라의 두 어진 이다. 능히 천하를 양보하고 문신(文身)하여 형만(荊蠻)으로 나아가 살면서 그 어짐을 이루었으니 공자(孔子)가 일컬으신 것이다. 내가 그 수 천년 후에  그 이름을 듣고 그 의(義)로움을 우러렀으나 아득히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더니 이제 양녕, 효령 두 대군에게서 본다. 두 대군은 곧 나의 형이다". 이렇듯 태백과 우중의 고사를 회자하여 공자께서는 태백을 지덕(至德)이라 칭송하였고, 우중을 청권(淸權)이라 하였으니, 훗날 세종대왕께서도 형님이신 효령대군의 효제사상(孝悌思想)을 우중의 고사에 비유하여 "몸을 처신함이 깨끗함에 맞았고, 벼슬을 하지 않음이 권도에 맞았다"하여 효령대군을 청권(淸權)이라 비유하였다.

 

  효령대군은 왕이 행차한 것은 물론 정자의 이름까지 지어준 것에 감사하여 글씨로 이름을 날리던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문장을 잘 짓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이 글이 [동문선]에 [희우정 기문]으로 실려 있다고 한다. 변계량은 기문에서 "희우정의 제도는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북악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는데, 서남쪽의 여러 산들이 막막하고 아득하여 구름. 하늘. 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하다. 굽어보면 물이 맑아 물고기. 새우도 역력히 셀 수 있다. 바람 실은 배의 돛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고, 천 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가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마음이 여유스러워져서 바람 타고 신선세계에 노는 것만 같다. 눈이 아찔하고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고 칭송하였다. 세종은 그 후로도 수차 희우정에 들러 서교(西郊)에서 벌이는 군사들의 방포. 말타기. 활쏘기 등 훈련을 친히 사열하고, 시를 짓고 그림도 그리게 하였다. 이 당시 따라왔던 안평대군이 그린 도원몽중도첩(桃源夢中圖帖)이 지금 일본 덴리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성종 15년(1484)에 효령대군께서는 이 정자를 성종의 형님인 월산대군에게 물려주셨는데, 월산대군이 퇴락한 희우정을 고쳐 짓게 되자 성종이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여 희우정은 다시 망원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망원정은 정자에 오르면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 볼 수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 시절 지었음직한 월산대군의 시 한 수를 옮겨 본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뷘 배 저어오노라.

 

  연산군 12년(1506) 7월에 연산군이 망원정을 수려정(秀麗亭)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공사를 하던 중 그 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되어 옛 이름 그대로 오늘에 이르렀다. 희우정이 한 때나마 사치와 환락의 장소로 전락되지 않고 제모습을 유지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효령대군은 이 정자를 당신의 친 손자가 아닌 월산대군에게 물려주었다. 몸소 농사도 지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살펴, 임금이신 아우님의 통치에 도움을 드렸던 곳이며, 또 임금으로 하여금 직접 군사훈련을 사열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함으로 왕의 현장정치의 장으로 활용하게 하였던 정자였으니, 비슷한 처지에 있던 월산대군에게 물려주어 이 정자가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아우님인 임금을 위하는 형의 도리를 함께 물려줌으로 왕실의 평화와 백성들의 안녕을 함께 이루신 현명하신 조상님의 생각을 하면서 희우정을 물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