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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잠들어 있는 곳

빈센트 반 고흐가 잠들어 있는 곳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

2009년 5월 21일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의 작은 공원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름없는 한 여행객이 그의 손을 잡고 여기 왔다 간 흔적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70일간 모든 정열을 불태우며 수많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던 곳,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는 지베르니(Giverny)에서 파리쪽으로 30분쯤 되돌아 달려가다 갈라져 들어간다.

오후 5시가 넘어서 고흐의 자취를 찾아가기 위하여 모네의 정원과 그의 무덤이 있는 마을 지베르니(Giverny)를 출발하여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다시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異國의 5월 푸른 초원,  이 무슨 엉뚱한 생각일까? 마치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만 하고  찾아가지 못하던 유년시절의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참 이상하다. 나는 내 생의 4분의 3을 도시에서 살았고 농촌에서 살았던 기간은 그만큼 짧았지만,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그 짧았던 세월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지금도 바보처럼 현재보다는 과거를 안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10 여분을 달려가다 중간에 강과 숲이 아름답고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곳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어 잠시 를 멈추고 고향같은 그곳의 사진도 몇장 찍는다. 오베르에 도착하여 처음 들른 곳이 고흐 공원. 그의 사후1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곳이 고흐 공원으로 명명 되고, 동상까지 세워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 70일을 이 마을에 살면서 72점의 명화를 남겼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유작들을 한갖 이름없는 가난한 화가의 보잘것 없는 습작에 불과한 것들로 생각했을 것이다.                                                        

 

1890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고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충격에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형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동생 태오마져 병사하고 만다.                          

 

두 달사이에 시아주버니와 남편을 잃게된 태오의 아내는 그의 유품들을 소중하게 정리하여 고향 네델란드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가족들 마져도 쓸데없는 것들을 내다버리라 고 푸대접을 하지만, 그녀는 고흐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에 전시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로하여금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일찌기 형의 천재성을 믿고 어려움 속에서도 물질적, 정신적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동생 태오와, 태오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위대한 천재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묻혀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남편마져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게된 그녀는 형제간에 주고 받은 668통의 편지를 모아 책으로 발간하였고, 생전에 단 한점의 그림밖에 팔리지 않았던, 이름없이 살다가 간 시아주버니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노력한 그녀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지금 세계 미술경매시장에서 사상 최고가에 팔리고 있는 그의 그림들이 어떻게 보존 될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가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하숙집 담벼락에는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가난과 병마와 고독속에서 37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당시에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동생부부 말고도 그를 치료했던 가셰박사와 편지를 전해주던 우체부, 그리고 고갱과 같은 후기 인상파 화가들 몇명이 있었지만, 동생 부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뜻이 맞아 이곳까지 내려와 같이 그림을 그리며 서로를 격려하던 친구 고갱도 그의 괴팍했던 성격때문에 애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곁을 떠나버렸고, 그와의 결별이 병세를 더 악화시켜 자기의 귀를 자르게 되는 결과가 갖어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가까이 지내며 그를 치료해주던 가셰박사도 그의 딸과의 관계때문에 나중에는 경계하며 멀리하게 되었다. 그의 그림 '오베르의 교회'의 실제 모습은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동생 태오는 형의 생활비와 그림 그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하여 갖 태어난 아이의 우유값이 모자랄 정도였고, 조카가 영양실조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을 알게된 고흐는 이 모든 것들이 자기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루에 한 작품 이상씩 제작하는 바쁜 일정에서 시간이 얼마 없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던 것을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리고 남겨야할 유산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70일 동안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하숙집의 모습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인은 과연 누구였겠는가?

나는 책을 통해서 그의 이야기를 읽거나 그의 그림을 대할때마다 생각했었다. 피를 나눈 동생은 동생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지만, 그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을만도 한 동생 태오의 아내는 어떻게 그렇게 시아주버니의 뒷바라지를 불평없이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사후 존경과 사랑으로 끈끈하게 이어졌던 우애를 세상에 알리는 일까지 할 수 있었던 그녀가 한없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하숙집을 찾아보고 마을안에 있는 그가 그렸던 그림의 현장과 그가 거닐었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서 불운했던 한 위대한 예술가가 남긴 유산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동생과 함께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가려다 시간이 늦을듯하여 발길을 돌려 돌아왔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남긴 것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