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하여 좋은 학벌, 좋은 직업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인 부, 원만한 가족관계, 폭넓은 교우관계 등을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 많은 좋은 것들을 소유하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그 많은 것들을 누리는 삶에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을 누구나 다 노력하여 얻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 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며 인생이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다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모두가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 외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 즉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자기의 능력에 맞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비록 그 일에 타인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일일지라도 즐기면서 만족하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많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교회) 교회는 독특한 건축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883년에 착공하여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135년이 되도록 공사가 계속되는 이 건축물과 함께 우리는 그 건축물에 모든 것을 다 바치다시피 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852년 스페인의 남쪽 작은 도시에서 대대로 주물제조업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고, 다섯 살 때 관절염을 심하게 알아서 대학시절에도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불행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가 건축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그의 혁신적이고 독특한 과제물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졸업할 때 교장은 “우리가 건축사 자격증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미친놈에게 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외면했지만, 그는 남의 평가나 인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의 설계로 마침내 세계적인 대 건축가가 되었으며, 결국 엄청난 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부로 향락을 누리는 데서 행복을 찾지 않았고, 전 재산을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의 건축비로 헌납하고 평생 독신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 데서 행복을 찾았던 사람이다.
그는 사후에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인이 아니면 묻힐 수 없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 묘지에 묻혔고, 사람들은 그를 오랫동안 검소한 생활 속에서 건축에 관한 독특한 천재성을 발휘하며 행복을 누린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의 한 복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예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2017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가 각국의 생활환경과 삶의 질을 측정해 수치화한 ‘행복지수’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는 36개 회원국들 중에서 29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국민총생산(GDP)이 세계 11위이고, 수출 순위로 7위인 우리나라의 국민 행복지수가 이렇다면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국가가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필자는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과학문명이 발달한 경제대국들이 아니라 빈국에 속하는 나라들이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히말라야 동쪽의 작은 나라 부탄왕국이 세계에서 가장 국민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자족(自足)할 줄 알고, 지족 상락(知足 常樂)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기뻐하면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아마도 한 40여 년 전쯤 될 것이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주례 선생님이 한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복을 아주 공평하게 내려주시는데, 그 복을 받을 그릇이 큰 사람은 많은 복을 받을 것이며, 그 그릇이 작은 사람은 그의 그릇이 차면 넘쳐버리기 때문에 적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는데, 그때도, 지금도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의 기억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만일 필자가 그런 자리에 서게 될 일이 있게 된다면 그 주례 선생님이 했던 말씀에 한 말씀 더 첨언하고 싶다. 큰 그릇에 많은 복을 받고도 그릇이 더 컸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보다는 작은 그릇에 적은 복을 받고도 만족해하는 사람이 더 행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혼인 당사자들을 작은 그릇이라고 단정하는 것 같아 저어 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그릇들이 그 용도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그 모양도 다양하듯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밥상에 올리는 그릇들이 모두 밥그릇이나 국그릇처럼 큰 그릇에 간장도 담고, 고추장도 담아 올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따로따로 다 쓸모가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자기의 분수에 맞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을 빈국의 국민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야망을 갖지 말라는 이야기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을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으로도, 작고 예쁜 그릇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하고 남을 의식하면서 자기 능력보다 큰 욕망을 갖고 아등바등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너무 남을 의식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행복을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나는 내 행복을 담는 그릇이다. 내게 주어진 행복에 감사하며 만족하면 항상 행복할 것이다.
院村 李休宰
-월간 문학세계 2018년 7월호에 게재된 글-